매일신문

[종교칼럼] 함께 서 있다는 것

유재경 영남신학대 기독교 영성학 교수

유재경 영남신학대 기독교 영성학 교수
유재경 영남신학대 기독교 영성학 교수

지난 연말에 걸려온 막내의 전화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요즘 MZ세대가 다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들과 전화로 소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인내심을 갖고 수없이 통화를 시도해야 겨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그날은 본인이 직접 전화를 한 것이다. 그것도 기쁘고 들뜬 마음으로.

"아빠가 소개해준 류 박사님을 만났어요." 류 박사는 동료 교수의 아내로 강남 압구정에서 상담소를 운영하는 분이다. 그런데, 그분이 그냥 "ㅇㅇ이 왔어" 하는데,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눈물이 흘러내렸다는 것이다. 그 분과 나눈 몇 마디에, 그동안 켜켜이 쌓여 있던 마음의 짐이 봄눈처럼 녹아내렸다고 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나는 새삼 '위로'의 힘에 놀랐고, 그제서야 '인간은 위로를 갈구하는 존재'라고 했던 게오르그 짐멜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인간은 누구나 위로받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위로의 문화가 대세를 이룬다. 병원이든, 심리 상담소든, 문화산업이든 위로를 키워드로 내세우는 각종 서비스와 상품들이 쏟아지고 있다.

심지어 얼굴 성형이 아니라 마음 성형이라는 말까지 회자된다. 문학에도 위로 또는 치유 에세이가 새로운 장르로 등장했다. 김혜남의 대표작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가 그 중심에 있다. 그녀는 "당신 자신을 믿고 세상을 향한 발걸음을 힘차게 내디뎌라"고 한다.

최근 출간된 전승환의 '나에게 고맙다'가 교보문고 에세이 분야 베스트 1위에 올랐다. 그는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조금 늦어도 괜찮아. 수고했어, 오늘도. 이미 넌 충분해." 등의 언어로 우리를 위로하고 있다.

위로는 고통을 가진 사람에게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다. 그뿐 아니라 위로는 다른 동물들에서 찾을 수 없는 인간만이 가지는 특이한 경험이다. 위로는 위로하는 사람의 고통을 통해 일어난다. 위로는 아픔이나 불행 자체를 줄이거나 제거하는 데 있지 않다. 위로는 위로받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게 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위로받는 자와 위로 주는 자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위로는 위로를 주는 자도 위로받고, 위로를 받는 자도 위로받는다. 위로를 주는 자도 위로를 받는 자가 될 수 있고, 위로받는 자도 위로를 주는 자가 될 수 있다.

위로는 라틴어 'consolor'을 어원으로 '달래기', '평안하게 해 주기', '고통을 누그러뜨려 주기' 등의 의미를 품고 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위로는 헬라어인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가 사용됐는데, 이 단어는 '옆에 서다(stand nest to)' 또는 '함께 가다(come alongside of)'의 의미를 갖고 있다.

누군가 나를 지지할 때 용기를 얻을 수 있고, 누군가 함께 있을 때 큰 힘을 얻을 수 있고, 누군가 나를 위로할 때 새롭게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미국의 여성 시인 루이스 엘리자베스 글릭의 '눈풀꽃'은 이 힘을 느끼게 한다.

내가 어떠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가/ 절망이 무엇인지 안다면 당신은 분명 겨울의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나 자신이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었다/ 대지가 나를 내려 눌렀기에/ 내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축축한 흙 속에서 내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끼리라고는/ 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후/ 가장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 내면서(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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