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 첫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 그는 25세 때인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식을 올린 뒤 남편에게 파격적인 부탁을 한다. 요절한 옛 연인의 묘지에 가서 비석을 세우는 일로 신혼여행을 대신하자는, 상식을 넘어선 부탁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부탁을 김우영은 받아들인다.
1927년 아이들을 시댁에 맡기고 남편과 떠난 1년 8개월의 유럽 체류 기간에 새로운 연인 최린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귀국 이후 연애사건 이야기가 세간에 나돌게 되면서, 결국 나혜석과 김우영은 10년간의 결혼생활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 이혼의 귀책사유가 나혜석에게 있었던 만큼 네 아이의 양육권은 전 남편에게 있었다. 나혜석에겐 면접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불륜과 이혼으로 모든 것을 잃은 나혜석은 화가로서 재기를 시도한다. 그는 무너진 삶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선 파리로 가야 했고, 돈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그는 최악의 선택을 한다. 보상금을 받기 위해 최린을 혼인빙자간음죄로 고소한 것이었다. 결국 나혜석은 돈은 받아내지만,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나혜석과 유학생활을 함께 했고 오랜 친분이 있었던 소설가 염상섭은, 나혜석이 죽은 뒤 그를 회고하는 짧은 글을 남겼다. 이 글에서 그는 나혜석을 '타산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언급했다. 과연 적절한 표현이었을까.
문학 연구자이자 경북대 초빙교수인 지은이는 "나혜석은 타산이라거나 현실이라는 용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계산에 약했고, 바보스러울 정도로 정직했으며,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상황을 조율할 줄도 몰랐다. 그래서 많은 부분이 자기중심적으로 보였고, 결국 자신의 삶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한 요인이 됐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 같은 떠들썩한 연애사를 포함해 나혜석의 구체적 삶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낸다. 이를 통해 그를 강인한 생명력과 정신력의 소유자,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의 봄을 만들어내며" 생을 이어간 인물로 평한다. 하지만 어린 아들의 죽음이, 힘들게 버텨온 그의 정신과 몸을 무너뜨렸다는 게 지은이의 시각이다. 지은이의 모든 생각에 백퍼센트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알던 나혜석의 삶과 그가 지향했던 삶의 방향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나혜석은 정신이상과 마비증상으로 인해 양로원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다가 1948년 서울 시립 남부병원 무연고자 병실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52세였다. 172쪽,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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