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주 신라 천년 스토리텔링 문화공모전] 최우수상…천 년을 넘은 미소(상)

백승미 작
얼굴무늬 수막새 바라보다가 평안한 미소에 잠이 들었다

「누군가를 향한 믿음은 그를 일으키고 주변인들을 일으키고 더 나아가서는 나라를 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믿음은 모든 영웅, 지도자를 넘어서 그들 스스로를 지탱하도록 만든다.」

미소는 새 프로젝트를 위해 금요일부터 읽기 시작한 이알영 작가의 신작, 천년의 신라 마지막 단락을 읽으며 월요일 아침을 맞이했다. 시안까지 짜느라 쉬지도 못한 채 출근하는 게 억울하기도 했지만 왠지 잘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회사에 도착해서는 바로 회의실로 향했다.

"일찍 왔네?"

문을 열자 키보드 소리와 함께 덕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출근 시간 보다 30분이나 일찍 와서 회의를 준비하고자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덕명이 빨랐다. 미소는 정리할게 있다고 답했고 덕명은 시계를 확인하더니 다시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침묵이 익숙해질 때쯤 덕명의 핸드폰이 울리며 9시 정각을 알렸다. 미소는 곧바로 노트북을 프로젝터에 연결하여 발표를 시작했다.

"소설 제목에 맞춰 천년의 미소라고 불리는 얼굴무늬 수막새를 모티브 삼아 디자인했습니다. 그 특색에 맞게 원형으로 제작할 것이고 디자인에 맞춰 대표 색상은 회색으로 정했습니다. 구성은 먼슬리 12장과 모눈종이 속지 10장에 슬림한 디자인으로 휴대성을 강조하여 마케팅 할 예정입니다."

덕명은 발표 시작 전에 미소가 나눠준 유인물과 발표 화면을 번갈아 보며 경청했다.

"구성은 잘 짰다. 아직 다이어리 겉면 재질은 안정한 거 같은데 오늘 그거 정하고 나한테 보고한 다음에 퇴근해. 음. 그 전에 출장 신청서 작성하고 나한테 주고 가. 배경지가 경주인만큼 직접 가서 보고 보완해야지."

발표가 끝나자마자 방향을 제시하는 덕명 덕에 미소는 곧바로 메모장에 기록하기 바빴다. 그래서 알겠다는 응답도 할 수 없었다. 덕명도 굳이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기에 메모에 열중하고 있는 미소를 보며 슬쩍 웃었다. 저 메모장은 입사 초 사수였던 덕명에게 받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음성 녹음을 하는 동기를 따라 자신도 핸드폰으로 녹음을 하곤 했는데, 매번 녹음 타이밍을 놓쳤다. 그래서 메모장을 사야겠다 싶었을 때, 덕명이 귀신같이 알고 선물해준 것이었다.

"다 썼지? 그럼 오늘 회의 이렇게 마치자."

미소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출장 신청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바로 옆 자리에 앉아 있는 인턴, 태연이 도움이 필요한 듯 그를 바라봤으나 이어폰을 낀 미소는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태연은 사내 메신저로 이알영 작가에게 연락을 취해야하는데 혹시 연락처를 알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바로 메신저를 읽은 미소는 핸드폰을 켠 뒤, 문자로 태연에게 연락처를 전송해주었다. 그러면서 처음에 태연이 사내 메신저를 어떻게 보내는지도 몰랐던 것이 생각나 얕게 웃었다. 그간 미소는 태연에게 다른 사안에 관해 알려주며 느꼈다. 태연은 충분한 역량을 가진 사람이지만 아직은 익숙하지 않아 실수가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이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인턴시절을 비롯해 여전히 자신을 믿어주는 덕명을 생각하면서 자신도 큰 의미 없이, 대가없이 태연을 믿는다. 그렇게 순환하는 믿음을 내심 반기며 말이다. 덕명에게 출장 신청서를 제출한 미소는 태연의 자리에 오늘도 힘내라는 포스트잇과 함께 캔 커피를 두고 미팅 장소로 향했다. 담당자와 여러 번의 대화 끝에 수막새처럼 단단함이 돋보이는 하드커버를 선택했고 덕명에게 바로 보고 했다.

그 다음날 미소는 경주로 출장을 떠났다. 여행이 아닌 출장이라는 명목으로 떠나는 거지만 평소에 좋아하던 도시였기 때문에 들뜰 수밖에 없었다. 미소가 경주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아무도 통일을 이뤄낼 거라 예상하지 못한 신라가 끝내 삼국을 통일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 속에 담긴 성공과 반전은 모든 이들에게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기 충분했다. 경주에 도착한 미소는 맞은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신호가 바뀐 타이밍에 도착한 604번 버스를 타고 목적지인 국립경주박물관으로 향했다. 자신이 지내던 도시와는 다르게 여유로운 풍경과 버스 안의 사람들을 보며 평화를 느꼈다. 그 모습이 한가롭게 쌓인 냉장실을 닮았다. 식재료가 균형 있게 쌓여 요리하기 딱 좋은 온도의 냉장실 말이다. 바깥을 구경하며 가다보니 금세 하차할 시간이었다.

미소는 경주에 어울리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박물관 옆 카페로 향했다. 평일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고 더운 날이었지만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과 수막새 마들렌을 주문했다. 미소는 천년의 미소가 담긴 마들렌을 바라보며 잠시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을 곱씹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름 그대로 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할아버지는 자신이 이런 미소를 지으며 살길 바랐을 거라고 짐작했다. 부드러운 마들렌은 아메리카노와 잘 어울렸고 완전한 원형이 아닌 그 형태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미소는 노트북을 켜서 수막새 모양을 다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완벽하다고 생각했지만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 엉망진창 초안만이 남는다. 뒤늦게 부족한 부분이 보이는 이유를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다음 최종 시안을 덕명에게 전송했다. 그리고 시계를 확인하고 서둘러 박물관으로 향했다. 바로 입장하여 멋스럽게 진열된 전시품들을 보았다. 오랫동안 이름없이 묻혀있던 유물들이 출토되고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연구원들의 애정이 담겼다는 것을 알기에 이 공간이 좋았다. 또한 그들을 보러 온 관람객들의 다정함이 에어컨 바람 너머로 다가왔다.

전시 방향에 맞춰 둘러 보다 어느덧 천년의 미소라는 별칭을 가진 얼굴무늬 수막새 앞에 다다랐다. 해당 유물을 응시하며 미소는 이 수막새가 당시 신라인의 얼굴이었을 거라 추측했다. 이내 그 평안한 미소가 이끄는 기분 좋은 안정감에 몽롱해졌다. 어느 순간 잠들었는지 눈을 뜨니 한 사찰 안이었다. 분명 박물관 안에서 수막새를 보고 있었는데 여긴 생전 가본 적 없는 곳이었다. 자의적으로 몸을 움직여도 환영은 아닌지 몸이 따라 움직였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의뭉스러움을 감출 수 없어 사찰 이곳저곳을 바라보며 이곳이 어딘지, 어떻게 된 상황인지 머리만 굴렸다. 분명 박물관내에 관람객이 많았는데 혼자 여기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다들 어디에 간 건지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박물관에 입장한 시간이 4시 반이었는데 지금은 못해도 8시는 되어보였다.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몇 십 분이 넘도록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가상이라고 말하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여겨지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은 채로 발걸음을 뗐다. 여기에 있는 다고 달라지는 건 없는 듯했다.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걸으면서 자신을 따라 움직이는 이름 모를 별들을 보며 생각보다 섬세하게 구현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려가며 뒤 돌아보니 꽤 큰 절인듯했다. 멀리서 보니 웅장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규모를 비롯하여 각 전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말이다.

"길이 이리 복잡해서야 어디 맞게 찾아가겠나."

그때 제법 선명하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계가 없어 제대로 된 시간을 알지 못했지만 꽤 흐른 시간 속에서 들린 목소리가 반가웠다. 낮게 울리는 소리에 집중하여 신중하게 다가갔다.

천 년을 넘은 미소. 삽화 전숙경
천 년을 넘은 미소. 삽화 전숙경

"안녕하세요!"

미소는 마침내 낡은 옷을 입고 있는 한 사내의 앞에 도착했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눈이 마주친 것 같았으나 미소의 착각이었는지 사내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혼잣말만 했다.

"길영에게 길을 확실히 묻고 오길 그랬어. 나 원…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군."

"저기, 안녕하세요?"

미소는 사내의 앞에 서서 인사도 건네고 공손하게 불렀지만 그는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허공에 미소의 말이 흩어지는 기분이 들었고 상황이 반복되자 화가 났다. 대화가 아닌 서로의 독백만 메워지는 공기 속에서 미소는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톡톡 쳤다.

"저기요. 사람이 말을 하면… 으아악!"

분명히 사내에게 손을 뻗어 그에게 닿았다고 생각했는데 미소의 손이 그의 어깨를 관통했다. 그래서 고요한 숲 속이 미소의 비명소리로 가득 찼다. 물론 사내에게는 안 들리는 듯 했다. 꽤 큰 소리를 내었음에도 사내의 표정이 여전했고 아까와 똑같은 말만 했다. 미소는 어깨를 관통할 때 투명한 젤리처럼 변한 자신의 오른손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꾹꾹 눌러도 별 다른 변화없이 원래 알고 있던 그 손이었다. 이 상황이 실제인지 모르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상한 상황인 것은 분명했다. 사내는 계속 혼잣말을 하더니 미소가 걸어 온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미소는 고민하다가 아는 길도 아니기에 사내를 따라갔다. 그렇게 한 사람만 알고 있는 동행이 시작됐다. 사내는 더 이상 혼잣말을 하지 않았고 주변을 살피며 신중하게 나아갔다. 미소 또한 계속 그를 쫓아갔다. 사내의 발걸음이 꽤 빠르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에 뒤쳐지지 않는 자신을 신기해하며 말이다. 어둠 속에서 초가집 하나가 보이자 사내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당차게 다가갔다. 그 집은 사극에 등장할 것처럼 허름했고 미소는 이 세계가 자신의 세계 보다 훨씬 과거라고 짐작했다. 사내는 망설임없이 문을 두드렸다. 미소는 그런 사내의 곁에 서서 물끄러미 지켜봤다. 잠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그런데 문 너머 주인은 무언가를 칠한 듯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뉴스에서 특정인물을 모자이크하듯 말이다.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보이지 않았다. 주인도 미소가 보이지 않는지 사내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로써 미소는 자신이 이 세계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왜 자신이 보이지 않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자신 또한 주인이 보이지 않았기에 이유가 있을 거라고 순응했다. 경계어린 분위기 속에서 사내가 먼저 입을 뗐다.

"난 활리역에서 온 지귀라고 합니다. 밤이 늦어 빈방이 있다면 하루만 신세지고자 하는데 가능할까요?"

"활리역의 지귀라면 길영의 친우 맞으십니까?"

지귀는 맞다고 끄덕였고 주인은 길영에게 이야기 들었다며 문을 활짝 열었다. 이때다 싶어 미소도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은 구석에 있던 이불을 제 옆에 펼쳐 지귀의 자리를 마련해주고 잠시 문을 나섰다. 주인이 없는 방에 홀로 남겨진 지귀는 가방을 벗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귀가 주변을 정리하고 있을 때, 주인이 감자가 든 소쿠리를 가져왔다. 미소는 이전에 카페에서 먹었던 수막새 마들렌이 마지막 끼니였으나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흐른 듯 했으나 피곤함도, 허기도, 갈증을 비롯한 욕구가 없었다. 마치 이 세계에서 자신은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말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존재 같았다. 이렇게 산다면 평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방인이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외로움에 빠졌다. 그래서 미소는 간절하게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고 여전히 지귀와 주인을 지켜보는 관찰자로서 존재했다. 주인은 편히 먹으라고 말했고 지귀는 실례하겠다는 말과 동시에 감자를 쥐고 먹었다.

"고맙습니다. 올라오는 길에 구걸하러 다니는 아이들을 지나칠 수 없어서 내가 먹을 식량까지 다 줘버렸지 뭡니까."

"길영에게 듣던 대로 베푸는 걸 좋아하는군요."

지귀는 주인의 말에 길영이 쓸데없는 말을 했다며 허허 웃었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운 지귀는 나른해 보였고 주인은 긴 호흡을 뱉으며 등잔불을 껐다. 불빛이 사라지자 어둠만 존재했고 미소는 잠시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그 행위가 짧은 순간에 일어났다고 생각했지만 벌써 날이 밝았다. 이미 지귀는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문 앞에서 주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었다. 주인은 별 거 아니라고 말하며 옥수수 하나와 감자를 싼 헝겊을 건넸다. 지귀는 난감한 듯 주인의 손에 들린 음식을 바라보다 끝내 짐주머니에 그것을 넣고 장터로 떠났다. (다음 호에 계속)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