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민중의 분노가 터져 나온 '10월 항쟁'은 일주일을 가지 못했다. 대구경북의 시위는 1946년 10월 6일 전후로 대부분 진압됐다. 하지만 항쟁의 기억은 5년에 걸친 피눈물 나는 민간인 학살로 그 상흔을 남겼다. 곳곳에서 보복과 연좌가 자행됐다. 끌려가 사라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10월 항쟁이 국가 형성기의 '갈등'이었다면, 1948년 이후는 공권력에 의한 일방적 '척결'에 가까웠다. 대구 가창골과 경산 코발트광산, 청도 곰티재 등 학살이 이뤄진 장소만 수십 곳에 이른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들은 10월 항쟁의 직·간접적인 피해자였다.
◆끌려가더니 사라진 가족들
"경찰이 부른다며 가선 소식도 없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70년이 넘었는데…."
매일신문 취재진과 만난 24명의 민간인 희생 증언자들은 대부분 이런 말을 남겼다. 가족이 어느 날 경찰에 불려가거나 끌려갔고, 그 뒤로는 행적이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는 하소연이다.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끌려가서 죽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만 들었다.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한 이들도 많다.
1948년 단독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정권은 이념 대결 속에서 체제 강화에 나섰다. 가장 먼저 '토벌 대상'으로 지목된 건 10월 항쟁 관련자들이었다. 마을 대표나 지역 유지, 고학력 지식인들은 '요시찰 대상자'로 분류돼 감시를 받았다.
그러다 군경의 토벌 작전 기간이 되면 경찰서로 불려가 집단 학살을 당했다. 주로 '○○골'이라고 불리는 깊은 산속까지 꽁꽁 묶인 채 끌려가 희생됐다. 이는 '골로 가다'라는 표현의 유래가 됐다.
◆대구 가창골, 댐에 묻힌 진실
대구에선 가창골이 대표적인 학살 장소다. 현재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대구형무소 수감자를 비롯해 제주 4·3과 여수·순천 사건 관련자들까지 이곳에서만 수천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창댐 건설과 함께 학살지 상당수가 수몰되면서 희생자들의 백골조차 찾기 어렵게 됐다.
박손희(74) 씨의 아버지 박재천(1920년생) 씨는 경북도청 산림과에서 근무하며 대구에 신혼살림을 차렸다가 1949년 어느 날 출근길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실종됐다.
학자 집안 출신으로 독립운동에도 헌신했지만 '좌익'이라는 누명을 피하지 못했다. 기록된 그의 마지막 행적은 대구형무소였다. 스물다섯에 혼자 된 아내는 평생 그를 기다렸지만, 허사였고 1968년에야 사망신고를 했다.
그의 행적이 확인된 건 올해 초다. 가창댐 위령탑에서 가족들이 이름을 발견했다. 박손희 씨는 "'정체 모를 사람들이 지프차에 끌고 갔다'는 이야기까지만 알고 있었다. 당시는 조금이라도 똑똑하면 잡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말했다.
대구사범학교 졸업을 코앞에 뒀던 이행영(1930년생) 씨는 1949년 12월 대구 북구 침산동 집에서 학교로 가다가 경찰서로 연행됐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무 설명도 듣지 못했다. 김천소년형무소로 이감된 행영 씨는 한국전쟁 전후로 실종됐다.
가창골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시신은 물론 사망 날짜조차 알지 못해 가족들은 임의로 음력 9월 9일에 제사를 지낸다. 동생 이일영(73) 씨는 "수소문해보니 '새벽에 재소자들을 트럭 뒤 화물칸에 묶어 앉힌 뒤 가창골에서 학살했다'고 이야기하더라. 장남을 잃은 부모님의 심정이 오죽했겠느냐"고 울분을 토했다.
◆보도연맹과 '골로 간 사람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골로 간 사람들'은 더 늘어났다. 1949년 4월 만든 '국민보도연맹'이 빌미가 됐다. 정부는 애초 '좌익 전향자 조직'을 명목으로 보도연맹을 만들었지만, 각 시·군에 할당까지 내려 가입을 독려했다. '사상'과 아무 상관 없는 이들이 등록되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6·25 전쟁과 함께 정부의 초기 후퇴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이름만 등록된 많은 사람들이 좌익으로 내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특히 대구경북을 비롯한 경상도의 피해가 가장 컸다. 국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면서 공권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군경과 서북청년단, 이승만 정권의 친위대였던 육군특무대(CIC) 등이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으로 관련자들을 모아 학살했다. 대구 보도연맹원들은 전쟁 직후 대구형무소 재소자들과 함께 가창골과 달성 중석광산, 경산 코발트광산 등지로 끌려가 돌아오지 않았다.
친인척의 권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한 추상호(1922년생) 씨도 그렇게 실종됐다. "남대구경찰서에서 보도연맹 가입자를 대상으로 교육을 한다"는 말에 집을 나섰던 27세 청년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아들 추종만(80) 씨는 "삼덕동 남대구경찰서로 수없이 찾아갔지만 '그런 사람 없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당시 우리 말고도 경찰서 앞에 가족을 찾으러 온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고 말했다.
◆'이중 권력' 속 억울한 학살
경북 산지와 농촌에선 낮에 군경이 좌익 혐의자를 색출하고, 밤에는 빨치산들이 나타나 총부리를 겨누는 '이중 권력' 사이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이 많았다. 총을 든 빨치산들의 위협에 어쩔 수 없이 밥을 해줬다가 잡혀갔고, 때로는 빨치산으로 위장한 군경의 함정 수사에 속아 죽기도 했다.
김일수 경운대 교수는 "주민들 입장에선 생존을 위해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도 어렵지만, 또 편을 들지 않으면 안 되는 모순적인 상황의 연속이었을 것"이라며 "경북은 물론 대구 가창골에서도 호림부대가 1948년부터 주둔하며 비슷한 이유로 주민들을 살상한 증언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1950년 6월 청도 곰티재에서 아버지 장대현(1914~1916년생 추정) 씨를 잃은 장영순(87) 씨는 "빨치산들이 밥을 해달라고 괴롭혔고, 반대쪽에선 백골대가 와 빨갱이를 찾겠다며 못살게 했다"며 "아버지는 '빨갱이'를 안 하겠다고 도망 다녔는데, 전쟁이 나자 논을 매다가 경찰서로 불려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눈물지었다.
같은 시기 남영태(71) 씨의 아버지 남호진(생년 미상) 씨도 청도 곰티재에서 희생됐다. 남 씨는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수를 채우려던 동네 이장 탓에 살생부에 이름이 올랐다.
남영태 씨는 "1950년 6월 농사를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이장과 경찰에게 끌려갔고, 이후 곰티재 터널 근처에서 학살이 있었다는 소문을 들은 어머니가 직접 가서 시신을 찾았다"며 "곰티재 주변 계곡이 핏물로 뒤범벅이 될 만큼 시신이 가득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묶었던 밧줄을 치아로 끊어내고 간신히 시신을 수습했다"고 말했다.
◆"10월 항쟁, 제1공화국 민간인 학살 뿌리"
연구자들은 1946년부터 1950년까지 일어난 대구경북 민간인 학살들이 개별적인 사건으로 보이지만 실은 모두 10월 항쟁의 거대한 연장 선상 위에 있었다고 설명했다.
김상숙 성공회대 교수는 "항쟁 참여자 일부가 '유격대'가 돼 군경과 내전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비무장 민간인들이 재판 절차 없이 학살당했다. 특히 1949년에는 군경이 합동 토벌 작전을 벌이면서 유격대의 보급기지가 될 만한 지역 내 거주민을 학살했다"고 말했다.
제4대 국회가 기록한 보고서에 따르면 문경과 선산(구미), 청송, 봉화를 제외한 대구경북 19개 군에서 군경에 의해 피살된 민간인은 모두 5천82명으로 집계됐다. 이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피살된 사례가 1천664명으로 전체의 33%에 이른다. 연구자들은 실제 희생자가 이보다 두세 배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나정태 경산유족회 대표는 "보도연맹과 경산 코발트광산, 가창골 등 이승만 정부 시절 대구경북에서 일어난 군경의 민간인 학살 대부분이 대구 10월 항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나 대표는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 과정에서 사건들을 따로 분리하면서 아직도 유족들이 '10월 항쟁과 연관되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에 공식 활동을 외면한다. 1946년 10월이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의 시작이었고, 이를 역사적으로 재평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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