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덕일의 내가 보는 가야사] 가야사 논란의 뿌리

호남가야설, 임나일본부설의 또 다른 이름
명성황후 죽인 야쿠자 일당 아유카이…'잡고'로 명명한 역사 잡설서 첫 등장
"야마토왜가 가야 점령" 주장과 일치
"1∼6세기 경상도 국가" 상식과 달리 어느 순간 전라·충청도 진출설 등장
식민사학 가진 일부 역사학자도 동조

임나대가야국 성지(고령).임나대가야국성지, 대일항전기 때 일제는 경북 고령을 임나대가야성의 자리라고 크게 선전했다.
임나대가야국 성지(고령).임나대가야국성지, 대일항전기 때 일제는 경북 고령을 임나대가야성의 자리라고 크게 선전했다.

◆'호남가야'라는 용어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을 '상식'이라고 한다. '역사상식'은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역사 지식" 정도가 될 것이다. 이런 역사상식 중의 하나가 "가야는 1세기에서 6세기까지 경상도 지역에 존재했던 고대국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가야가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라도에도 있었다는 '호남가야'라는 말이 언론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기마인물형토기(김해 출토 국보).기마인물형 뿔잔 토기는 김해 대동면 덕산리 출토된 가야토기로서 국보다. 철갑으로 두른 말이 인상적이다.
기마인물형토기(김해 출토 국보).기마인물형 뿔잔 토기는 김해 대동면 덕산리 출토된 가야토기로서 국보다. 철갑으로 두른 말이 인상적이다.

대부분의 국민에게 "호남가야"는 아주 생소한 용어였다. 그러나 이 용어가 생소했던 것은 일반 국민뿐이었다. 이 나라의 역사학자들, 그것도 가야사를 전공했다는 역사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호남가야설"이 마치 역사상식인 것처럼 말해왔다.

이들은 '호남가야설'을 주장하는 많은 논문을 써왔지만, 이것이 일제 식민사학의 핵심인 "임나일본부설"이라는 비판을 받을까 봐 내부적으로만 공유하던 논리였다. 이 나라의 역사학과 고고학이 '식민사학', 또는 '식민고고학'이라는 비판을 받는 핵심 이유가 '호남가야설', 곧 '임나일본부설'에 있다.

'호남가야설'은 '임나일본부설'의 다른 용어이기 때문이다. 가야가 전라도의 영산강이나 섬진강까지 진출했었다는 둥, 전남 해남이나 전북 남원 또는 장수 등의 고고학 유적들이 '호남가야'의 증거라고 이 나라의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주장해왔고 이들과 카르텔을 맺은 여러 언론이 보도해왔다.

◆야쿠자가 처음 주장한 호남가야설

국민의 '역사상식'에 어긋나는 주장들을 이 나라의 역사학자들이 한다면 그 뿌리는 일본이라는 법칙은 '호남가야설'에도 어긋나지 않았다. 이른바 '호남가야설'을 처음 주창한 인물은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1864~1946}이었다.

아유카이 후사노신의 이력은 아주 다채롭다. 그의 이력에 대해 일본의 《위키백과》를 찾아보면 1904년 러일전쟁 때 훈장을 탄 것을 비롯한 일본의 언어학자, 역사학자, 가인(歌人)이라고 나온다.

사이토바루 고고박물관 갑옷들. 사이토바루 박물관 갑옷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 사이토바루 박물관의 가야계통 철갑들이다. 사이토바루는 일본에서도 일 왕가의 발상지라고 인정하는 곳이다.
사이토바루 고고박물관 갑옷들. 사이토바루 박물관 갑옷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 사이토바루 박물관의 가야계통 철갑들이다. 사이토바루는 일본에서도 일 왕가의 발상지라고 인정하는 곳이다.

가인이란 일본의 전통시가인 화가(和歌:와카)를 읊는 인물을 말하는데, 화가는 다른 말로 "야마토우타(やまとうた)", 곧 "야마토노래"라고 한다. 야마토는 일본의 고대 국가 "야마토왜(大和倭)"를 뜻한다.

야마토의 화(和)자는 왜(倭)자가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화가(和歌) 대신에 '왜가(倭歌)'라고도 쓴다. 어느덧 이 나라 식당들의 차림표에 '와규'라고 요리가 등장했는데 와규는 일본의 전통소인 화우(和牛)를 뜻한다. 어느덧 '호남가야설'처럼 한우(韓牛)의 자리를 와규(和牛)가 차지해 버린 것이었다.

필자는 "와규"라는 말이 언제 한국 식당의 차림표에 처음 등장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역시 우연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아유카이 후사노신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인데, 한국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이력은 1895년 한 손에는 니뽄도(日本刀)를, 다른 손에는 석유통을 들고 경복궁 담을 넘어들어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 시신을 불 질렀던 야쿠자의 일원이었다는 점이다. 이 야쿠자가 이후 조선역사공부를 한답시고 1930년대부터 여러 역사 잡설들을 썼는데 그 자신이 붙인 제목도 《잡고(雜攷)》였다.

일본에서 사용하는 임나지도. 고대 야마토왜의 식민지라는 임나가 경상도는 물론 전라도 전역및 충청도 대부분까지차지하고 있다. 일본 극우파 역사학자들의 '호남가야설'에 따른 지도다.
일본에서 사용하는 임나지도. 고대 야마토왜의 식민지라는 임나가 경상도는 물론 전라도 전역및 충청도 대부분까지차지하고 있다. 일본 극우파 역사학자들의 '호남가야설'에 따른 지도다.

그런 《잡고》 중의 하나가 《일본서기조선지명고(日本書紀朝鮮地名攷)》인데, 여기에서 "호남가야설"을 처음 주장했다. 아유카이가 말하는 가야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야가 아니라 고대 야마토왜가 가야를 점령하고 설치했다는 "임나일본부"의 '임나'를 뜻한다. 이것이 바로 고대 야마토왜의 식민지 '임나'가 '가야'라는 "임나=가야설"인데 이 '임나'가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라도 및 충청도까지 차지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른바 "호남가야설"의 요체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 가야사 복원

2017년 5월 9일 밤,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되자 여러 지인이 내게 전화를 걸어 축하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재인 후보와 일면식도 없는데 왜 내게 축하하느냐고 물었더니 '촛불혁명'으로 당선되었으니 적폐 중의 적폐인 식민사학 청산에 나서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문화재청 항의, 남원연대, 경남연대. 정부에서 가야사를 임나일본부사로 왜곡해 유네스코에 등재신청하려고 하자 시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문화재청 항의, 남원연대, 경남연대. 정부에서 가야사를 임나일본부사로 왜곡해 유네스코에 등재신청하려고 하자 시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정치를 안 했으면 역사학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자신의 희망사항을 상기시키는 것처럼 취임 직후인 2017년 6월 1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가야사복원"을 국정과제에 포함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우리 사회에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조선일보》는 6월 6일부터 〈논쟁: 가야사복원〉이라는 기획시리즈를 마련해 강단사학자들에게 지면을 할애했고, 이들은 일제히 문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을 비판하고 나섰다.

문화재청 항의, 남원연대, 경남연대. 정부에서 가야사를 임나일본부사로 왜곡해 유네스코에 등재신청하려고 하자 시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문화재청 항의, 남원연대, 경남연대. 정부에서 가야사를 임나일본부사로 왜곡해 유네스코에 등재신청하려고 하자 시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왜 국가권력이 역사문제에 나서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이들의 비판 목소리는 일제히 사그라졌다. 이들은 문재인 정권의 "가야사복원"이 일제 황국사관(皇國史觀)에 뿌리를 둔 식민사학 적폐를 청산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을 계승하는 '민족사정립'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비판의 목소리를 냈던 것인데 실제로 진행되는 "가야사복원"이 거꾸로 일제 황국사관, 곧 '임나일본부설'을 국가권력으로 고착시키는 방향으로 나가자 비판의 목소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일보》의 기획기사보다 이른 6월 3일 노무현 정권 때의 행자부 장관이자 역사문제에도 정통한 허성관 전 행자부장관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문 대통령님의 가야사 복원과 관련하여 걱정되는 점"이라는 글을 올렸다. "가야사 복원 작업을 교수들에게 맡기면 누가 맡든지 식민사학자일 가능성이 거의 100%입니다. 이들은 임나일본부설을 은연중에 확대 재생산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글이었다. 그런데 이 우려가 문 정권 5년간 현실이 되었다.

심지어 문화재청에서는 '임나일본부사'로 변질한 '가야사'를 유네스코에 국제문화유산으로 등재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다행히 "호남가야설"의 허구성과 일본 제국주의 역사관의 침략성을 뒤늦게 알게 된 호남시민들과 '식민사관 청산과 가야사 바로잡기 전국연대' 등의 시민사회단체들이 크게 반발하면서 일단 전선은 호남에서 정체된 것이 현 상황이다.

문 전 대통령의 "가야사복원" 지시가 "임나일본부 복원"을 뜻하는 지시였다고 믿고 싶지는 않지만, 부동산정책보다 더 한 난맥상이 집권 5년 내내 계속되었다. 그것은 곧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진영론을 떠나서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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