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100년 학교] 일제·전쟁 이겨낸 111년 명문…청송초교

‘성실하고 슬기롭고 정직한 어린이’ 청송 교육의 요람
일제에 의해 ‘청송’이란 지명이 빠지기도
일제가 청송훈련소 설치, 졸업생 전쟁터로 내몰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40년 학적부 등 소실
아픈 역사 속에서도 많은 졸업생들 후배위해 통 큰 기부

1963년 청송초등학교 가을운동회 모습. 청송초 제공
1963년 청송초등학교 가을운동회 모습. 청송초 제공
1939년 제27회 청송초등학교 졸업사진. 청송초 제공
1939년 제27회 청송초등학교 졸업사진. 청송초 제공

경북 청송군 청송읍 중앙로 229-10 청송초등학교.

1909년 4월 01일 사립 낙일(樂一)학교로 시작해 1912년 4월 1일 청송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뒤 올해 111주년을 맞는 전통의 청송 명문 초등학교다. 현재까지 1만여 명의 동문을 배출하고 있다.

청송초등학교(이하 청송초)는 청송에서도 이름난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뒤편으로는 방광산이 자리하고 있고 앞으로는 용전천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이다.

청송초는 지난해 기준 초등 12학급과 유치원 4학급으로 편성돼 있으며 '성실하고 슬기롭고 정직한 어린이'라는 교훈 아래 지덕체 육성에 힘쓰고 있다.

청송초의 전신인 낙일학교는 조선이 전통 교육기관인 서당에서 학교 교육으로 옮기는 시기였던 1909년 지금의 소헌공원 내 목조 초가 4칸에서 시작됐다.

낙일학교는 그해 4월 김진구와 윤달산, 윤기준에 의해 4년제 학교로 인가받아 개교하면서 청송초의 효시가 됐다.

1912년 4월 1일 4년제 '청송공립보통학교'가 낙일학교를 통합하면서 정식 학교가 개교됐고 이듬해 3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1938년 3월 일제에 의해 조선교육령이 개정 공포됨에 따라 그해 4월 1일부터 교명을 강제로 '청송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됐다.

1940년 일제가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군국주의 교육을 강화의 하나로 학교에 부설 청년훈련소가 설치됐다. 일제는 졸업생을 이곳에 입교시킨 후 6개월에서 1년간 군사훈련을 시킨 뒤 전쟁터로 내몰았다.

1941년 2월 제3차 개정교육령이 공포되고 그해 4월부터 '청송'이라는 지명이 아닌 '청보공립초등학교'로 교명이 개정되기도 했다.

광복 이후 1946년 4월 30일 주민과 졸업생 등의 염원으로 학교 이름에 지역명인 '청송'을 다시 쓰면서 '청송공립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쓰다가 1950년 6월 1일 '청송국민학교'가 됐다.

그런데 그해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8월 2일 북한군이 청송까지 점령하면서 이 학교가 약 한 달 동안 병참기지로 쓰였다. 당시 북한은 일제 아래에서도 지켜 학교의 학적부와 졸업대장 등 각종 자료 남김없이 소각하고 파손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개교 이래 40년의 역사가 송두리째 사라진 것이다.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받은 청송초지만 고향과 후배를 생각하는 졸업생들도 많이 배출한 곳이 바로 청송초다.

23회 졸업생인 이정행 씨는 1965년 8월 15일 청송초에 피아노 한대와 야구 장비를 후원하는 등 매년 후배들을 위해 장학금과 보조금을 지원했다. 이 씨는 일본에서 더 알려진 재일교포 사업가로 1967년 일본 국세청이 발표한 33인의 억만장자 중 한 사람이다.

대구경북 최초의 '패밀리 아너소사이어티'인 경동기업 정휘진 회장 역시 청송초 35회 졸업생이다. 정 회장은 자신은 물론 부인과 자녀 등 가족 5명이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하며 이웃사랑을 실천한 인물이다. 그는 학교 강당 철제의자 200개를 지원하는 등 후배들을 위해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66년 청송초등학교 전경. 청송초 제공
1966년 청송초등학교 전경. 청송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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