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덕일의 내가 보는 가야사] 김수로왕과 왕비 허황옥은 가짜?

식민사학 추종 역사학자들 주장
'서기 42년 3월에 김수로왕이 건국'
삼국유사·삼국사기 기록 믿지 않고…삼국지 '변신구이=가야' 최초 사료
비슷한 발음 유일한 근거로 뒷받침

김해 수로왕릉에 모셔진 김수로왕 영정(왼쪽), 김해 수로왕릉에 모셔진 허왕후 영정. 가락종친들은 성씨는 다르지만 모두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후손들이다.

◆가야가 언제 건국되었는지 모른다는 가야사 전공교수
2022년 6월 30일 경남 창원의 경남도의회 대회의실에서 '가야사 쟁점 학술토론회'가 열렸다. 문재인 정권에서 100대 정책과제의 하나로 추진했던 가야사 복원이 정작 임나일본부사 복원으로 드러나자 수많은 비판이 일었다. '식민사관으로 왜곡된 가야사바로잡기 전국연대·경남연대' 같은 역사운동단체에서 학술토론회를 요구해서 마련된 자리였다.

토론회 말미의 질의 응답시간에 가야문화진흥원 도명 수님(김해 여여정사 주지)이 부경대 이근우 교수에게 "가야가 언제 건국되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 교수는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모릅니다"라고 답했다. 경북대 박천수 교수는 "사람이 알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라고 덧붙였다. 평생 가야사를 연구했다는 두 교수가 가야건국시기를 모른다고 답변한 것에 대해 여러 사람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후술했다.

◆서기 42년에 가야가 건국했다는 삼국사기·삼국유사
가야건국 시기는 삼국사기'김유신 열전'과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명백하게 나와 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김유신의 선조 김수로왕의 가야 건국 사실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김수로왕이)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서기 42년) 임인(壬寅)에 구봉(龜峯)에 올라가 가락(駕洛) 9촌(村)을 바라보고, 마침내 그 땅에 이르러 나라를 열고 국호를 가야라고 했다가 금관국으로 고쳤다)"

후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연호인 건무(建武) 18년은 서기 42년인데, 이때 김수로왕이 가야를 건국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 3월 계욕일(禊洛日)"에 북쪽 구지봉에서 수로왕이 나타났다고 전하고 있다. 계욕이란 음력 삼월초 사흗날에 강가에서 몸을 깨끗이 닦아 상서롭지 못한 것을 제거하는 의식을 뜻한다.

삼국유사는 음력 3월 3일이라고 날짜까지 특정하고 있다. 한국 고대사의 두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모두 서기 42년 가야가 건국했다고 전하고 있다. 고고학 사료로 보더라도 서기 전 1세기부터 서기 1세기 때까지 창원 다호리 무덤이나 웅천 조개무지 유적 등에서 철제품이 다수 출토된다. 또한, 서기 1~2세기경 조성된 부산의 오륜대 고분 등은 가야의 고유묘제인 수혈식돌곽무덤으로 가야가 서기 1세기에 존재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삼국지의 '변진구야(弁辰狗邪)'가 '가야'라는 학자들
가야가 1세기에 국가로 존속하고 있었다는 사료는 속된 말로 차고 넘친다. 삼국사기는 신라 탈해 이사금 21년(서기 77) 가을 8월에 신라의 "아찬(阿飡) 길문(吉門)이 가야 병사들과 황산진 입구에서 싸워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길문은 이 공으로 제6관등인 아찬에서 제4관등인 파진찬(波珍飡)으로 승진했다.

파사 이사금 15년(서기 94)에도 가야는 신라와 격전을 치렀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이런 기록을 못 믿겠다, 아니 안 믿겠다고 우긴다. 이들이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가야건국 연대를 부인하는 논리를 보자. '미스터 가야사'라는 홍익대 김태식 명예교수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국고로 편찬한 '한국사 7-삼국의 정치와 사회Ⅲ-신라·가야'에서 가야 건국 시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락국의 존재는 3세기 중엽 이전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삼국지 위서 한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곳에 변진 12국의 하나로서 '구야국(狗邪國)', 즉 가야국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삼국지란 위·촉·오(魏蜀吳) 삼국시대의 일을 전하는 진수(陳壽)의 삼국지를 뜻한다. 이 책의 '동이열전'에 삼한에 대해 기술한 한(韓)조에 변한(弁韓)과 진한(辰韓)의 24개 소국 중의 하나로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이란 이름이 나온다. 이 '구야'가 바로 '가야'이며 이것이 가야에 관해 믿을만한 최초의 사료라는 주장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가야'라고 정확하게 전하는 내용은 믿을 수 없고, 3세기 무렵의 일을 기록한 삼국지에서 '구야'라고 쓴 것이 '가야'에 관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유일한 근거는 '구야(狗邪)'의 발음이 '가야(伽耶)'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삼국지는 구야국이 어떤 나라인지 일절 전하지 않고 이름만 전하지만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삼국사기·삼국유사는 모두 가짜고 삼국지의 '구야'가 진짜이고 3세기 이후에나 건국되었다고 우긴다. 김수로왕은 가짜라는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원문, 후한 세조 건무 18년(서기 42) 3월 계욕일에 김수로왕이 나타났다고 전하고 있다.

◆졸지에 시조부모(始祖父母)를 잃은 가락종친들
김수로왕을 부인하니 그 왕후 허황옥(許黃玉)도 부인할 수밖에 없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이 후한 건무 24년(서기 48) 무신 7월 27일 가야에 와서 국혼을 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조에는 "건무 24년 (허왕후가) 서역의 아유타국에서 (파사석탑을) 싣고 왔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강단사학계는 이 역시 믿지 못하겠다고 부인하고 있다. 600~700 만에 달하는 가락종친들은 졸지에 '아비 어미 없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김해김씨세보(金海金氏世譜)'나 '가락국선원계(駕洛國璿源系)' 등은 수로왕과 허왕후를 시조부모라고 전하고 있다. 부부는 모두 열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가락국 2대 거등왕으로 왕위를 이었고, 둘째, 셋째 아들은 어머니 성을 따라서 허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보옥선인(寶玉仙人:장유화상)과 함께 두류산(頭流山:지리산) 칠불암(七佛庵)에 들어가 선인(仙人)이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지리산 칠불사는 홈페이지 첫머리에 "2000년 전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동시에 성불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창건한 사찰입니다"라고 쓰고 있다.

'김해 수로왕릉의 쌍어문' 물고기 두 마리가 파사석탑을 바라보고 있다.

보옥선인을 장유화상이라고도 하는데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서기 42년 가야가 건국했다고 분명하게 쓰는 것도 믿지 않는 한국 사학계가 구전사료로 전해 내려오는 장유화상 이야기를 믿을 리는 더욱 없다.

족보는 배타적인 동성 집단의 기록이다.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성(姓)을 간다'고 말한다. 가락종친회는 김해 김씨와 허씨, 인천 이씨 등으로 구성된다. 허왕후의 23세손인 아찬(阿飡) 허기(許奇)가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다.

다른 나라 사신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허기는 당 현종을 서촉(西蜀)까지 호종한 공로로 당나라의 왕성인 이씨를 사성(賜姓) 받았다. 그 10세손 이허겸(李許謙)이 인천 이씨의 시조다. 고려 때 막강한 권신 이자연·이자겸 등이 모두 인천 이씨다. 이런 내용은 누가 조작하거나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내용이 아니지만, 한국 강단 사학은 '안 믿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모든 가야사는 임나일본부로 통한다?
반면 북한 사학계는 가야가 1세기에 건국했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 극우파들과 남한 강단사학계만 가야는 3세기 후반에 건국되었다고 우기고 있다. 몇 차례의 학술토론회에서 드러난 것처럼 구체적 사료적 근거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자신들이 영원한 스승으로 섬기는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그렇게 우겼기 때문이다.

이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원래 가야사를 지우고 임나일본부로 덮어씌웠다. 이들을 추종하는 남한 강단사학계에게 가야사 복원을 맡겼으니 임나일본부사가 나타난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여기에 1조 2천억이라는 막대한 국고를 쏟아 붓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역사광복? 아직도 멀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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