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세 아들이 뇌출혈로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간병하다가 물·음식·약 등을 주지 않고 방치했다. 아버지는 결국 숨을 거뒀고, 아들은 법정에 섰다. 경찰·검찰 조사에서 아들은 "혼자 아버지의 병간호를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았다. 채무 등의 경제적 이유로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고 진술했다. 2021년 5월 대구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들은 지난해 3월 징역 4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다.
이른바 '영케어러(Young Carer·가족돌봄청년) 간병살인'이 세상에 알려지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던 주요 정당 후보들도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국회의 질타가 이어지자 보건복지부 장관도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관심은 그 때뿐이었다.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달라진 것은 없다.
매일신문 취재진은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대구지역본부의 도움을 받아 지역에 거주하는 가족돌봄청년 2명의 사연을 접했다. 두 사람 모두 어린 시절부터 아픈 부모님을 돌보느라 대학 진학, 취업 같은 자신의 꿈은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미래를 꿈꿀 기회마저 빼앗긴 가족돌봄청년들을 위해 정부와 지자체의 제대로 된 실태조사와 특별법 제정 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고3 시절 어머니의 시한부 판정
김정민(20·가명) 씨는 근 2년 사이 살이 부쩍 빠졌다. 옆 건물 미용실 사장님이 종종 가져다주는 밑반찬이 냉장고 한 켠에 있기는 하지만 결국 그의 선택은 허기를 채우는 데 품이 별로 들지 않은 냉동식품이다. 그의 어머니가 시한부 판정을 받은 2021년, 그가 고3이 될 무렵부터 반복돼 온 김 씨의 식습관이다.
김 씨 어머니는 유방암 말기다. 몸 전체에 암이 전이돼 병원에서는 항암치료도 불가능하다는 소견을 냈다. 마약성 진통제에 의존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인지라 그는 2주마다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간다. 암으로 전신이 부어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의 병원행에, 선택지는 오로지 택시뿐이다. 의료보험 진단비 1천만원으로 생계를 유지해 온 그는 그래서 요즘 근심이 깊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지난해 6월 24일부터 7월 31일까지 재단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은 만 7세~만 24세 아동·청소년 1천49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86명(46%)이 가족돌봄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많은 저소득 가정에서 아동, 청소년들이 가족 돌봄에 내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통계로 확인한 셈이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따르면 가족돌봄아동·청소년 686명 중 절반 이상인 346명(50.5%)이 1년 이상 장기간 가족을 돌봤다. 5년 이상인 경우도 28.3%(194명)에 달했고 그중 60%(117명)가 중·고등학생이었다. 이들은 가족 구성원 중 유일하거나 가장 많은 돌봄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재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김 씨 역시 고등학생이던 시절부터 어머니의 간병과 집안일을 오로지 혼자서 떠맡고 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머니를 돌볼 사람이 김 씨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줄곧 중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해 오던 김 씨의 꿈은 패션디자이너였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그 꿈은 접어두고 다음 수능을 위해 시간을 쪼개 공부 중이라고 재단은 전했다.
◆ '한 명의 하루, 두 명의 삶'…19살 가장의 무게
아픈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견뎌내야하는 삶의 무게는 여전하다. 어린 나이에 혼자 생계를 감당해야하기 때문이다. 가족돌봄청년들을 위한 전담 부서를 만들고 관리 제도를 개발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다른 가족돌봄청년인 황승연(19·가명) 씨의 돌봄 역시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됐다. 지난해까지 간암 투병 중인 아버지를 돌봤던 황 씨에게는 함께 돌봐야 할 중학생 동생도 있었다. 황 씨는 학업을 이어나가 진로를 결정해야겠다는 생각은 애당초 접었다고 했다. 돌봄에 매몰돼 학교 수업을 따라갈 시간도, 진로를 설계할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열아홉에 가장이 된 황 씨는 아버지의 사망을 애도할 겨를도 없이 생계 유지의 부담을 떠안았다. 그에게 대학 진학 등 진로에 대한 설계란 허울 좋은 이야기일 뿐이다.
최근 황 씨는 조리사 자격증을 따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양한 직업군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고, 그런 정보를 주는 곳도 없었다. 아버지를 간병하며 집안일을 주도적으로 하다 보니 주방 일로 돈벌이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어쩌면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황 씨의 사례처럼 장기간 돌봄 노동에 노출된 가족돌봄청년들에게는 단순 경제적 지원을 넘어 사회화를 돕는 정서적 지원이 필요하다. 실제로 필요성을 인지하고 관련 제도를 도입한 지자체도 있다. 서울시의 경우 1인당 130만원 범위 내에서 돌봄 비용에 더해 '심리정서지원비', '문화지원비' 등을 보조한다. 재정적 도움뿐 아니라 영케어러 청년 간의 자조 모임 등 사후 관리에도 신경쓴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서영석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과 지난 5일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가족 돌봄 아동·청소년·청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재단은 '한 명의 하루, 두 명의 삶'이란 이름으로 가족돌봄아동청소년에 대한 정책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 운동을 등을 지난해 11월부터 벌이고 있는 초록우산재단은 "우리나라에는 영케어러에 대한 정의, 실태조사, 지원 방안을 규정하는 관련 법률이 없다"며 "최근에서야 정부의 지원대책 수립방안이 발표됐지만 실태조사 대상에서 초등학생 이하 아동은 제외됐다. 초등학생을 포함한 모든 연령의 영케어러에 대한 실태조사와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서울시 '첫 조례안' 마련…제대로 된 실태조사를
정부의 기존 실태조사 방식에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가족돌봄청년에 대한 실태조사는 URL과 QR코드을 통해 설문에 접속해 응답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설문조사는 1차의 경우 5분이 소요되는 비교적 간단한 조사였다. 1차 조사로 설문에 참여한 4만3832명의 전국 중·고등학생 및 만 13~34세 청(소)년 중 1천802명이 가족돌봄청년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려졌다.
2차 설문 조사는 비교적 심층적으로 이뤄져 설문지에 답하는 데 20~30분의 시간이 소요됐으나 참여율이 낮았다. 1차 조사에서 추려진 1천802명 중 개인정보제공에 동의한 810명에 대해서만 설문 링크가 전송됐기 때문이다.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국가별로 청소년 인구의 약 5~8%가 가족돌봄청년인 것으로 분석된다. 우리나라 청소년 인구에 대입하면 18만4천~29만5천명의 영케어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추정치가 나온다. 그러나 복지부의 조사로 파악된 가족돌봄청년은 추정치의 0.29~0.46%에 불과하다.
지자체 차원의 실태조사와 조례 제정도 절실하다. 지난해 10월 서울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가족돌봄청년 지원에 관한 조례안을 만들었다. 조례안에는 가족돌봄청년 발굴과 지원 정책이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조직·인력·예산 등을 확보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와 함께 가족돌봄청년에 대한 실태조사 의무도 명시했다. 서울시가 이달 19일 900명의 가족돌봄청년을 발굴·지원하겠다고 밝힌 배경에는 이 실태조사가 있었다.
김보영 영남대 휴먼서비스학과 교수는 "영 케어러는 장기적이고 관성적으로 그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에 힘들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없다. 또 드러내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도 팽배하다. 학생이라면 왕따의 이유가 되기도 하고, 직장인이라면 동료들의 불편한 시선을 감당해야 한다. 행정 편의적인 설문조사 방식으로는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실태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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