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명의 교차로 실크로드] 호수와 하늘 그 모호한 경계…키르키스스탄 이식쿨호

설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드넓고 파란 이식쿨호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산정호수이다. 그 옛날 키르키스스탄 인근의 실크로드를 오가는 상인들에게 좋은 휴식처가 된 곳이었다.
설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드넓고 파란 이식쿨호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산정호수이다. 그 옛날 키르키스스탄 인근의 실크로드를 오가는 상인들에게 좋은 휴식처가 된 곳이었다.

호수가 가까워지면서 버스차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만년설을 이마에 두른 높은 산들이 멀리 늘어서 있다. 그 아래로 파란 호수의 풍광이 펼쳐진다. 이식쿨 호수이다. 에메랄드빛 수면은 한낮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다행히 차창유리에는 얼룩이 없어 사진촬영이 가능했다. 나아갈수록 계속 새롭게 전개되는 호수의 절경. 카메라를 연속촬영 모드로 바꾸어 찍고 또 찍는다.

유람선을 타고 바라본 이식쿨 호수의 휴양지 촐폰아타 마을. 인근에 존재했던 옛 도시들은 호수 바닥에 잠들어 있다.
유람선을 타고 바라본 이식쿨 호수의 휴양지 촐폰아타 마을. 인근에 존재했던 옛 도시들은 호수 바닥에 잠들어 있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호수

키르키스스탄의 수도 비쉬켁에서 출발한 버스는 이식쿨 호수의 휴양지 촐폰아타 마을로 향하고 있다. 눈 쌓인 높은 산과 그 아래로 늘어선 키 큰 나무들, 사이사이로 보이는 작은 집들. 호수 위에 떠있는 구름과 파란 하늘. 이식쿨 호수의 첫 느낌은 설레임이었다. 호숫가 숙소에 여장을 풀고 저녁식사까지 남은 시간, 호숫가를 따라서 걸었다. 모래사장과 벤치가 군데군데 놓여 있다. 잔잔한 수면은 저녁 햇살에 불그스레 물들었고 그 위로 흰 새가 날아다니고 있다.

이식쿨 호수는 키르기즈어로 '뜨거운 호수'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호숫물이 뜨겁다는 건 아니고 겨울에 얼지 않아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설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드넓고 파란 산중호수. 남과 북을 둘러싼 천산산맥 속에서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오래전부터 이 호수 깊숙한 곳에 거대한 괴물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돈다. 호수 바닥에는 사라진 왕국의 흔적이 지금도 있다는 것은 문화재 수중탐사를 통해 사실로 밝혀졌다.

이식쿨 호수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이 하늘과 호수면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사진=김재도 사진가
이식쿨 호수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이 하늘과 호수면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사진=김재도 사진가

아침 일찍, 이식쿨의 일출사진을 찍으려 생각은 했다. 사진 고수가 되려면 새벽잠이 없어야 한다. 호수 수평선에 태양이 솟는 장면을 생각하고 물가로 달려나갔다. 아차, 해는 이미 올라가 있고 아침 햇살을 받은 수면에는 윤슬이 반짝이며 놀리는 듯하다. 이때 일행 중 한 원로사진가가 1시간 전부터 일출을 기다렸다며 신형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비록 호수의 수평선 위로 올라오는 태양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색상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 놓친 물고기가 더 크게 생각되는가, 그래도 먼 산을 바라보며 속을 풀어야지, 호수가 넓으니 하늘도 넓어진 느낌이다. 천산산맥의 눈 녹은 물이 파도를 따라 내 발밑까지 왔다가 사라진다. 마음이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해졌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산정호수

이식쿨 호수는 가로 182㎞, 세로 60㎞로, 해발 1,607m에 자리 잡고 있으며, 깊이가 약 700m나 된다. 남미 볼리비아의 티티카카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산정호수다. 100여 개가 넘는 강과 물줄기가 흘러들어오는데 이식쿨 호수는 천산의 눈 녹은 물과 수면 아래의 온천수로도 채워진다. 호숫물이 흘러나가는 곳이 없지만 어떤 학자들은 깊숙한 곳에서 추강으로 흘러간다고 보고 있다.

이식쿨호의 수면에 윤슬이 반짝인다. 현장스님은 대당서역기에 파도가 일어나 물보라를 일으키고 용과 물고기가 뒤섞여 살고 있을 것 같다고 기록했다.
이식쿨호의 수면에 윤슬이 반짝인다. 현장스님은 대당서역기에 파도가 일어나 물보라를 일으키고 용과 물고기가 뒤섞여 살고 있을 것 같다고 기록했다.

물새들과 자연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1975년에는 람사르 습지보호 지역으로 인정받았으며, 2000년 유네스코의 세계 생물권보전지역이 되었다. 이식쿨 호수 일대에는 기원전, 강력한 기마유목민으로 꼽히는 스키타이 계열의 사카족과 오손족(투르크계)이 그 주변에 살고 있었다. 그 후에도 서돌궐, 위구르, 거란으로 패자는 차례로 바뀌었다.

현재의 키르기스스탄인이 시베리아에서 남하하여 이 땅에 살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일찍이 대륙에서 쫓긴 서흉노가 재기의 발판으로 삼은 곳이며, 중국의 시인 이백이 태어나기도 했다. 칭기즈칸의 서방 원정 때에는 지친 병사들을 쉬게 한 땅이기도 하다.

천산산맥 옆으로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으므로 당시 실크로드를 오가는 상인들에게 좋은 휴식처가 되었을 것이다. 구소련 시절에는 공산당 간부들의 휴양소로 사용하던 곳이라 외국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당시에는 소련의 해군잠수함과 어뢰 성능 시험장소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식쿨호의 요트 계류장. 구소련 시절에는 여러 이유로 외국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세계적 휴양지가 됐다.
이식쿨호의 요트 계류장. 구소련 시절에는 여러 이유로 외국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세계적 휴양지가 됐다.

◆실크로드를 오가는 상인들에게 좋은 휴식처

역사적 인물로는 중국 현장스님과의 인연도 있다. 스님은 '대당서역기'나 '삼장법사전'을 통해 이식쿨 호수를 '대청지(大清池)' 혹은 '열해(熱海)'라는 이름으로 기록을 남겼다. 내용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 "산길을 지나가면 '두루 맑은 못'에 이른다. 둘레는 1000리가 넘고, 남북으로는 좁다. 물은 검푸르고 쓴맛과 짠맛을 함께 가지고 있다. 호탕하게 흐르는 물은 큰 파도가 사납게 일어나 물보라를 일으키며 흐른다. 용과 물고기가 뒤섞여 살고 있으며 신령스럽고 괴이한 일들이 이따금 일어난다. 그러므로 오가는 나그네들은 복을 빌며 기도하고, 물고기가 많지만 잡지 않는다".

현장스님은 629년에 장안을 떠났으니 일행이 천산산맥을 넘어 이식쿨호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은 매우 험난했다. 고개는 여름에도 얼어 길은 험하고 폭풍은 모래나 돌비를 뿌리듯 불어 혹한 속에서 다수의 동행자와 우마를 잃었다고 한다. 이런 고난의 천산을 빠져나와 고개를 넘어 이윽고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호수를 보았을 때 일행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호수의 북쪽 해안에는 지진과 수위 상승으로 호수 바닥에 가라앉은 고대 취락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8~15세기 유물이 많다고 한다. 지금도 여러 차례 문화재 탐사 잠수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이때 수거된 유물들 일부는 이식쿨호 인근 촐본아타 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호수 바닥의 유적은 한 곳이 아니라 여러 시대의 흔적이 점철되어 있다.

유람선 위에서 오찬을 할 수 있도록 상이 펼쳐졌다. 이식쿨호 가운데에서 식사하는 단체 방문객 일행들.
유람선 위에서 오찬을 할 수 있도록 상이 펼쳐졌다. 이식쿨호 가운데에서 식사하는 단체 방문객 일행들.

◆신이 키르기스스탄에 준 아름다운 선물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1907-1991)는 시인이자 소설가로서 중요 문학상은 거의 다 수상한 일본의 국민작가이다. 그는 '돈황', '누란'을 비롯 수많은 서역의 역사와 실크로드 관련 작품을 발표했었다. 호수 바닥에 옛 도읍지가 가라앉아 있다는 이식쿨의 전설에 끌린 그는 현지 방문을 간절히 원했다. 여러 번이나 시도했으나 당시 소련 외무성으로부터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식쿨호수 관련 설화를 모아 상상력으로 소설을 발표하고 생을 마쳤다. 호수 바닥으로 사라진 왕국의 이야기가 포함된 '성자'라는 작품이었다. 2007년 그의 탄생 1백 주년 기념전시장에는 키르키스스탄 대통령의 경제자문관이 가져와 기증한 돌 6개가 놓여 있어 눈길을 끌었다. 생전에 그토록 가보기를 염원했던 이식쿨 호숫가에 있던 예쁜 돌들이었다.

세계 생물권보전지역인 이식쿨호 일대는 수질보호와 문화재 탐사를 위한 잠수조사가 지금도 실시되고 있다.
세계 생물권보전지역인 이식쿨호 일대는 수질보호와 문화재 탐사를 위한 잠수조사가 지금도 실시되고 있다.

이식쿨을 떠나기 전,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촐본아타에 있는 승강장에서 호수 가운데로 나아간다. 건너편 설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맑아지는 듯 편안함이 밀려온다. 이식쿨은 신이 키르기스스탄에 준 아름다운 선물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물빛은 투명하고 맑다. 호수 바닥에 고대도시의 흔적이 보이는지 열심히 찾아보려 했는데, 배 위에 서는 순간 그런 건 대수롭지 않았다.

잔잔한 수면 위로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뺨을 어루만진다. 곧바로 유람선 위에서 오찬을 위한 상이 펼쳐졌다. 산해진미는 아니어도 일행들은 이색적인 식사경험을 한다. 유람선 위에서 바라보는 호수의 물빛은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기분이다. 세상의 모든 풍경은 그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과 신비를 가지고 있다. 호수와 하늘의 경계선은 과연 어디일까. 너무나 아름다운 호수, 그 빛과 바람을 품에 안는다. 안녕~ 이식쿨.

박순국 언론인
박순국 언론인

글·사진 박순국 (언론인) sije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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