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칼럼] 투표하지 않을 용기

이상헌 편집국 부국장
이상헌 편집국 부국장

누군가의 묻혀 있던 실력이 활짝 꽃피는 것을 보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다. 아이돌, 트로트, 크로스오버, 록밴드, 스트리트댄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TV 오디션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이유다. 이 땅에 재능 있는 음악인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이 늘 놀랍기만 하다.

그런데 내겐 팬덤(fandom)이 될 자질은 애초 없는 듯하다. 1라운드 이후에는 관심이 줄기 시작해 종영할 때쯤이면 호기심이 영 사라진다. 그 과정에서 각자의 인생 스토리, 음악에 대한 열정과 실력은 충분히 알게 되기에 우승 여부는 흥밋거리가 되지 않는다.

경연 프로그램의 덕목은 기회 제공이라 생각한다. 불공평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세상에는 능력이 있어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사람이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많다. 그들에게 타고난 재능과 노력을 널리 알릴 시간을 줌으로써 우리 사회는 더 발전할 수 있다.

물론 중국 전국시대 사람 모수(毛遂)처럼 자신이 '주머니 속의 송곳'임을 알릴 기회를 모든 사람이 갖는 것은 아니다. 혹 주머니 속에 있다 하더라도 마부 백락(伯樂)의 안목이 없다면 천리마로 거듭나기 어렵다. 혼자 힘만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총선이라는 큰 판이 펼쳐지면서 낭중지추(囊中之錐)를 자처하는 각 정당 영입 후보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눈길을 확 사로잡을 만한 인재는 딱히 눈에 띄지 않아 아쉽다. TV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면 초반부터 흥행에 참패한 꼴이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을 것이다. 정치 피로도가 쌓이면서 뛰어난 신예들이 여의도의 러브콜을 외면했거나 인재풀이 고갈됐을 수 있다. 그간 각 정당의 나팔수 역할에 그친 '새 얼굴'들에 대한 실망감이 국민들에게 기시감으로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21대 국회를 두고선 역대 최악이란 평가가 많다. '내로남불'과 권력 투쟁에만 몰두한 야당, 존재감이라곤 없이 줄서기에만 급급한 여당을 바라보는 민심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국회의원은 더 큰 부와 명예를 위한 스펙 쌓기용이란 의구심이 지워지지 않는다.

기존 정당의 혁신에 대한 낮은 기대감 탓에 관심은 제3지대에 모이는 듯하다. 구체적인 비전도, 참신한 새 인물도 아직 내놓지 못했지만 감동 없는 권력형 물갈이보다는 신당들의 합종연횡이 더 호기심을 자극한다. 지리멸렬할 공산도 당연히 있다.

일단 굵직한 분파만 '개혁신당' '새로운미래' '미래대연합' '한국의희망' '새로운선택' 등 5개에 이른다. 최대공약수 찾기조차 쉽지 않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지난 20일 중앙당 창당대회를 마친 뒤 '빅 텐트' 구상에 대해 "골든타임은 이미 지났다"고도 했다.

우리 정치사에서 명멸을 거듭했던 제3지대가 이번에는 어디를 본진(本陣)으로 할지도 궁금하다. 앞서 김종필의 자민련은 영남, 안철수의 국민의당은 호남에서 다수의 의석을 차지한 바 있다. 이번에는 수도권 표심이 달라질 수 있다는 관측이 적지 않다.

성공의 관건은 제3지대가 가치 지향성을 보여 주느냐이다. 적어도 각자의 정치생명 연장을 위한 이합집산이 아니라는 점에 유권자들이 동의할 정도는 돼야 한다. '이삭 줍기'를 통한 도토리들의 몸집 키우기로만 비친다면 투표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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