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늙음의 담론’이 필요하다

김교영 논설위원
김교영 논설위원

지난달 대구의 한 레지던스에서 가족 모임을 했다. 온 가족이 한 짐씩 들고 레지던스 건물 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문이 열리는 순간, 엘리베이터 안쪽에 있는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족히 앉을 만한 크기다. "누가 두고 내렸나?" 모두 궁금해했다. 누군가의 글을 통해서 '엘리베이터 속 의자'의 정체를 알고 있던 나로서는 반가웠다. 그 의자는 노인이나 몸이 불편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2005년에 초고령사회가 된 일본의 노인인구 비율(29.5%)은 세계 1위다. 일본은 다양한 노인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65세까지 단계적으로 고용을 연장할 의무를 기업에 부과했다. 정부는 그런 기업에 보조금을 준다. 또 노인의 건강을 위한 복지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노인 돌봄 시스템을 강화하고 있다. 고령 시대에 고용·돌봄·소득 지원 같은 국가 정책은 긴요하다. 그러나 노인들 삶에는 존중과 배려도 절실하다. 고령사회를 살아가는 일본인들의 태도에는 배울 점이 숱하다. 일본에는 엘리베이터에 '배려 의자'를 두는 곳들이 많다. 공공시설의 경로석은 따로 몰려 있지 않고 일반석과 섞여 있다. 분리보다 어울림을 지향하는 것이다. 뒤 창에 '실버 스티커'가 붙은 자동차도 흔하다. 어르신이 운전하고 있으니, 차가 천천히 가더라도 이해하라는 뜻이다. '아기가 타고 있어요' 스티커만 지천으로 널린 우리의 도로 풍경과 사뭇 다르다.

일본은 정보화 속도가 늦기로 소문난 국가다. IT(정보통신) 강국, 대한민국 기준에서는 답답할 정도다. 혹자는 느려 터진 일본을 얕잡아 보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을 알면, 민망하다. 기술력이 부족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노인들을 위해 정보화 속도를 인위적으로 늦추는 것이다. 프랑스 등 일부 선진국들도 그렇다. 이들 나라에서는 수기(手記) 처리 선호 등으로 행정 서류 발급에 시간이 걸린다. 아직 종이 신문을 가까이하고 있고, 현금을 받는 가게들이 많다. '디지털 도어 록' 대신 열쇠 꾸러미를 쓴다. '첨단'보다 '배려'가 우선이다. 디지털 모드에 뒤처지는 사람을 위한 공동체의 합의다.

우리는 어떤가? 모바일 뱅킹을 못 하는 노인들은 은행 점포를 찾고 있다. 이들은 ATM(현금자동입출금기) 이용도 어려워 직원의 '친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정기예금을 들려고 갔다가 직원 권유로 도통 모를 ELS(주가연계증권)에 가입하기도 한다. 그런 은행 점포들이 점점 사라진다. 5대 시중은행의 영업점 수는 2019년 4천600여 개에서 지난해 3분기 3천900여 개로 줄었다. 밥 한 끼 사 먹는 일도 노인들에겐 고역이다. 식당 테이블에 놓인 태블릿으로 주문해야 한다. 직원을 부르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자존감 상실을 감내해야 한다. 식당 고객인데, 시혜 대상자가 된 기분이다.

우리나라는 내년에 초고령사회가 된다. 고령사회(14%)에서 초고령사회(20%)로 이행하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2070년에는 노인이 전체 인구의 절반(46%)을 차지한다. 고령사회는 공동체의 변화를 요구한다. 지금 한국의 노인들은 존엄을 유지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다. 노년은 길어지나, 그 삶은 갈수록 궁색하다. 경제적 빈곤, 열악한 복지,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공간, 노인을 짐으로 여기는 인식 등이 그렇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늙음의 담론'이 필요하다. 이는 돌봄 사회, 진정한 선진국으로 가는 과정이다. 최소한의 인간 품위를 유지할 수 없는 사회라면, 늙음은 초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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