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문환의 세계사] 로마의 선거, 2천년 전 폼페이 선거 벽보

그리스 '아고라' 같은 만남 장소·연설단·투표소 유적
후보자는 점잖게 가만히, 지지자들이 직접 구호 적어

폼페이 포럼은 시민들이 모여 거래하고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공공의 만남 장소다.
폼페이 포럼은 시민들이 모여 거래하고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공공의 만남 장소다.

베수비오 화산과 폼페이
베수비오 화산과 폼페이

22대 총선이 눈앞이다. 대한민국 거리마다 현수막이 나부낀다. 건물벽이나 게시판에는 벽보가 붙었다. 벽보 속 후보 이미지는 한결같다. 환하게 웃으며 두 손 내밀며 외친다. 자신을 뽑아달라고. 살아온 이력에 더해 공약을 내세운다. 유권자들은 내용을 꼼꼼히 훑어보고 어느 후보에 마음자리를 둘지 정하고 투표장으로 간다.

17세기 이후 서구 사회에서 부활된 현대 민주주의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어느 나라를 가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민주정치에서는 후보자가 자신을 어떻게 알렸을까? 유권자들은 어떻게 출마자의 정보를 얻고 찍었을까? 이와 관련한 내용을 소상하게 알려주는 유적이 오롯하다. 바로 폼페이다. 폼페이를 찾아 2천년전 로마인들의 선거문화를 들여다 본다.

◆폼페이 발굴과 [그랑 뚜르(Grand Tour)]

나폴리역. 새벽부터 30분간격으로 출발하는 베수비오 순환열차를 타면 파바로티의 멋진 음성으로 듣던 「돌아오라 소렌토로」의 소렌토에 이른다. 1시간 20분여 거리다. 소렌토에 이르기 전 중간에 '폼페이 스카비' 역에 내린다. '스카비'는 '유적지'다. 역에서 내려 길을 건너자마자 고색창연한 잿빛 폼페이 유적이 눈앞에 펼쳐진다. 왜 잿빛일까? 79년 베수비오 화산폭발로 화산재에 깊이 10m 이상 묻혔다.

이 최후의 순간을 폼페이에 가본 적도 없던 영국의 정치인이자 소설가 에드워드 블워 리턴이 1834년 『폼페이 최후의 날(Τhe Days of Pompeii)』로 남겼다. 밀라노에 외교 사절로 갔다 러시아 화가 칼 브리울로프가 그린 「폼페이 최후의 날」 그림을 보고 쓴 거다. 34살 청년 정치인이 이런 업적을 남기는데... 이전 22대 총선의 30대 청년 정치인의 모습과 비교하며 유적지 안으로 들어가 보자.

관공서 건물. 폼페이 포럼 남쪽
관공서 건물. 폼페이 포럼 남쪽

유적은 나폴리 왕국을 지배하던 스페인 부르봉 왕실이 1748년 발굴의 첫 삽을 뜨며 드러났다. 폼페이에서 쏟아진 유물과 유적으로 고고학은 물론 문학, 미술, 건축 등에 그리스로마 복고 붐이 일었다. 서유럽 사회 부유층은 프랑스 남부를 거쳐 밀라노, 피렌체, 로마, 폼페이를 마차로 여행하는 '그랑 투르(Grand Tour)'에 열광했다.

1787년 독일의 문호 괴테, 1817년 프랑스의 문호 스땅달, 1875년 미국의 문호 마크 트웨인이 그렇게 폼페이를 찾았다. 영국의 대부호 에드워드 기번도 27살이던 1763년 그랑 투르에 나섰다.

명저 『로마제국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1776년 출간)』는 그랑투르 마차 안에서 태어났다. 기번이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준비한 돈을 돌려 쓴 덕에 처칠과 인도의 네루가 읽고 또 읽었다는 명저가 나왔다. 이번 총선 출마자들도 타산지석으로 살펴볼 일이다.

수게스툼. 연설단. 폼페이 포럼
수게스툼. 연설단. 폼페이 포럼

◆폼페이 포럼(집회장소), 수게스툼(연설단), 코미티움(연설단)

바닷가 문이라는 뜻의 포르타 마리나를 지나 비탈길을 올라가면 100여m 거리에 폼페이 포럼(Forum)이 나온다. 멀리 북쪽으로 베수비오 화산이 눈에 들어온다. 분화로 봉우리가 허리까지 잘린 베수비오. 79년 대분화가 얼마나 거대하고 끔찍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포럼은 로마 공화정의 핵심이다. 그리스로 치면 아고라다.

시민들이 모여 거래하고,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공공의 만남 장소다. 지금은 '포럼'이라는 단어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공공장소라는 개념은 빠지고 토론이나 대화의 장이라는 의미만 남았다. 베수비오 화산과 주피터 신전을 바라보고, 광장에 서면 그 왼쪽 중간지점에 연단이 보인다. 정치 연설단 수게스툼(Sugestum)이다.

투표소 코미티움. 폼페이
투표소 코미티움. 폼페이

공직 후보자나 투표권을 가진 로마 남자 '옵티모 주레(Optimi Jure)'가 자유롭게 발언하던 곳이다. 공직 후보자들을 찍을 투표소도 포럼 근처에 있어야 합리적이다. 포럼 남쪽 끝에서 동쪽으로 향해 난 아본단자(Abondanza)길 오른쪽 첫 건물터가 로마시대 투표소 코미티움(Comitium)이다. 지금은 터만 남아 썰렁한 분위기지만, 2천 년 전 우리네 총선 못지않은 정치열기를 뿜어냈을 것이다.

아본단자 도로 선거 벽보. 폼페이
아본단자 도로 선거 벽보. 폼페이

◆폼페이 아본단자 거리 2천년전 선거 벽보

코미티움에서 선출된 공직자들이 일하던 사무실은 코미티움에서 서쪽 골목 건너, 포럼 남쪽에 자리한다. 이제 아본단자길을 따라 걸어보자. 아본단자 길은 서울로 치면 종로라고 할까. 주요 관청이 자리한 세종로와 연결된 상업 중심도로 종로. 아본단자길 역시 주요 관청이 자리한 포럼과 연결됐고, 상가, 목욕탕, 유흥업소, 대형주택들이 즐비하던 폼페이 중심도로다.

끝까지 가면 로마인의 최대 오락문화, 검투경기가 펼쳐지던 원형경기장에 닿는다. 아본단자길을 걸으면서 로마문화를 잠시 되새겨 본다. 로마인은 간결한 문구 만들기에 능하다. 카이사르의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EDI VECI)", 공화주의자 키케로의 "역사는 삶의 스승(HISTORIA VITAE MAGISTRA)", 서정시인 호라티우스의 "오늘에 충실하라(CARPE DIEM)"...

폼페이 선거벽보
폼페이 선거벽보

아본단자길 선술집 앞에 도착해 맞은편 인술라(Insula, 서민 아파트)를 바라본다. 벽면에 쓰인 붉은 글씨들이 눈에 들어온다. 선거 벽보다. 여기만이 아니다, 시내 곳곳 주택 외벽에 여기보다는 작지만, 붉은 글씨의 선거벽보가 보인다. 요즘처럼 사진 붙은 화보형 선거 벽보는 아니다.

벽에 직접 쓴 후보자 지지구호다. 칼리굴라, 네로 같은 폭군 황제들만 기억되는 로마에서 공직자 투표 선출과 당시 선거 벽보가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지지자가 자신의 집 담벼락에 직접 써 붙이는 선거벽보

대영박물관이 2013년 여름 특별전에서 공개한 폼페이 유물 가운데 선거 벽보를 보자. 첫 줄에 아멜리우스(AMELIUS), 가운데 줄에 아에딜레스(AEDILES), 셋째 줄에 루키우스 알부키우스(L. ALBUCIUS)가 적혀 있다. 첫 줄과 셋째 줄 아멜리우스와 루키우스 알부키우스는 사람 이름이다.

그렇다면 가운데 줄은? '아에딜레스'는 우리말 조영관(造營官)으로 번역된다. 건축이나 토목, 축제를 담당하는 공직이다. 아멜리우스와 알부키우스 2명을 조영관으로 뽑아달라는 지지 호소 문구다. 로마시대 선거운동은 요즘과 다르다. 후보자는 점잖게 가만히 있고, 지지자들이 구호를 벽에 적었다. 물론 집주인의 허락을 얻어야 가능했다.

조영관 선출 선거 벽보. 폼페이 출토. 2013년 대영박물관 특별전.
조영관 선출 선거 벽보. 폼페이 출토. 2013년 대영박물관 특별전.

로마의 공직 임기는 1년이다. 따라서 공화정 시대 로마는 매년 한 차례씩 공직자 선출 선거를 치렀다. B.C 80년 로마에 정복된 폼페이는 자치를 인정받았다. B.C 27년 로마가 황제정으로 전환한 뒤에도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화산재 아래로 묻히던 시점까지 자치도시 폼페이에서는 공직자 선거가 이어졌다.

◆술집여인이 써붙이면 "떼 달라" 부탁도

폼페이에서 매년 7월은 선거철이다. 도시 전체가 선거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열성 지지자들이 선거 벽보를 붙였다. 그런데, 사회적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지지할 경우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이 점이 명사들을 괴롭혔다. 요즘도 유명 스포츠 선수나 배우가 특정 후보를 지지하면 다른 유권자들에게 울림이 크다. 하지만, 지지자들이 스캔들에 연루되거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오히려 후보에 역효과다.

폼페이에서 카이우스, 율리우스, 폴리비우스는 유명인사였다. 돈이 많아 술집에도 나름 열심히 다닌 모양이다. 번화가 아본단자길 선술집에서 일하는 창녀들이 폴리비우스 지지를 선언하고, 벽보를 썼다. 폴리비우스는 기뻐했을까? 당장 지우라며 역정을 냈다.

신분, 직업 차별 같아 입맛이 개운치 않지만, 창녀들도 당당히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던 풍토가 새롭다. 국가의 운명이 좌우될 22대 총선이 극단적 행태의 맹신 지지층에 의존한 후진 정치로 가는 것은 아닌지 폼페이에서 되짚어본다.

역사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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