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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칼럼-김교영] 우리가 기다리는 대통령

김교영 논설위원
김교영 논설위원

"수많은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라이트를 번쩍이며 리무진으로 대로를 질주하는 대신, 혼자서 조용히 자전거를 타고 한적한 골목길을 즐겨 오르내리는 〈중략〉 더러는 호텔이나 별장에 들었다가도 아무도 몰래 어느 소년 가장의 골방을 찾아 하룻밤 묵어가기도 하는 〈중략〉 어떠한 중대 담화나 긴급 유시(諭示)가 없어도 지혜롭게 된 백성들이 정직과 근면으로 당신을 따르는/ 다스리지 않음으로 다스리는, 자연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그리고 동강 난 이 땅의 비원을 사랑으로 성취할 그러한 우리들의 대통령 당신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가."

15대 대통령 선거를 5개월 앞둔 1997년 7월. 동아일보 독자투고란에 실린 '우리가 기다리는 대통령'이란 제목의 글(시)이다. 글 쓴 사람은 임보(본명 강홍기·충북대 교수)로 소개됐다. 프랑스 시인 랭보에 빠져 '임보'란 필명을 쓰는 그는 시인이다. 시인은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사람이다. 그가 바라는 대통령은 이상(理想)이다. 현실의 대통령은 경호 매뉴얼을 무시하고, 소년 가장의 집을 불쑥 방문할 수 없다. 달콤한 유혹 없이 국민 마음을 사는 것은 어렵다. 정직한 리더십만으론 국민 지지를 얻기 힘들다. 조삼모사(朝三暮四), 조변석개(朝變夕改)의 유혹을 떨칠 수 없다. 그래도 시인은 무지개를 좇는다. 희망이 있어야 진보한다. 멋진 대통령을 기대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멀쩡한 대통령이 없었다. 하야(下野)하거나 암살됐다. 탄핵되거나 수감됐다. 가족의 비리로 뒷모습이 아름답지 않았다. 퇴임 후 고향에서 자전거 타고 이웃과 막걸리 마시던 전직 대통령은 수사를 받다가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정권이 바뀌면 전임 대통령을 겨냥한 정치 보복이 자행(恣行)됐다. 누구도 '악의 고리'를 끊으려 하지 않는다.

21대 대선(6월 3일)이 20여 일 남았다. 이번 선거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비롯된 것이다. 누구나 '정말 대통령을 잘 뽑아야 한다'고 다짐한다. 국민들은 대통령과 거대 야당의 끝없는 충돌, 서로를 적대시(敵對視)하는 정치에 넌더리를 낸다. 극단의 진영 대립과 내로남불에 국민들은 진저리를 친다. 나라 경제는 숨넘어간다. 미국은 관세 폭탄을 터뜨렸다. 수출은 불안하고, 내수(內需)는 침체됐다. 재계, 노동계, 의료계는 그들의 권리만 주장한다. 정치가 엉망이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턱이 있나? 그나마 이 정도 유지되는 것은 일상을 지키는 '보통의 시민들' 덕분이다.

대선 후보들의 면면(面面)을 보면 불안하다. 정책 경쟁은 '반(反)이재명'과 '내란 세력 척결'에 묻혔다. 중도층은 "찍을 후보가 없다"고 한숨을 쉰다. 지지율 1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대법원의 유죄 취지 파기환송으로 중대 사법 리스크를 안고 대통령이 되려 한다. 민주당은 '대법원장 3차 내란' '사법 쿠데타'라며 법치주의를 뒤흔든다.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거리의 강성 우파' 정서에 가깝다. 비상계엄과 탄핵에 대한 평가, 윤 전 대통령과의 관계 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김 후보와 단일화(單一化) 논의 대상인 한덕수 전 국무총리는 정치인으로서 검증받지 못한 인물이다.

이번에도 '우리가 기다리는 대통령'은 오지 않을 것이다.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6·3 대선에서 '최선'이 아닌 '차선'이 어렵다면, '최악'을 피해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지지리도 대통령 복이 없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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