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혁신도시 정책은 수도권 집중 해소와 지역 균형발전을 목표로 추진돼 왔다. 그러나 1차 공공기관 이전 이후 상당수 혁신도시가 정주 기반 부족과 산업 연계의 부재라는 현실적 한계에 직면해 있다.
2025년 대선을 불과 2주 앞둔 시점이지만, 공공기관 2차 이전은 여전히 정치권의 주요 의제에서 배제돼 있다. 김천혁신도시를 중심으로, 지방이 처한 현실과 정치권의 무관심, 그리고 정부의 책임을 짚어본다.
◆혁신도시 시즌2는 표류 중
문재인 정부 후반기에 공식화되고 윤석열 정부 인수위에서도 국정과제로 포함됐던 '공공기관 2차 이전'은 이후 2년 넘게 추진 로드맵도, 대상 기관도, 예산 계획도 발표되지 않은 채 표류 중이다.
기획재정부와 국토교통부는 서로 책임을 미루는 모양새이고, 지방균형발전위원회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정치권의 무관심은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대통령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주요 대선 후보들은 공공기관 2차 이전 관련 정책을 제대로 공론화하지 않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 등의 치열한 경쟁이 정치권의 이슈를 장악하면서, 공공기관 이전과 같은 구조개혁형 정책은 사실상 실종됐다. 여야 주요 후보들 모두 공공기관 이전에 대해 적극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기존 혁신도시들의 절박함은 더 커지고 있다. 경북 김천시 역시 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하며 발 빠르게 대응에 나섰다.
배낙호 김천시장은 지난 14일 국회에서 열린 공공기관 2차 이전 공약 반영을 위한 공동결의대회에 직접 참석했다. 이 결의대회에는 전국혁신도시협의회 관계자 200여 명이 모여 "2차 이전은 반드시 혁신도시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대선 시기야말로 공공기관 이전 같은 중장기 국정 과제를 논의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정책보다는 인물 구도와 이슈 대결에만 초점이 맞춰지면서, 균형발전은 사실상 실종된 의제가 됐다.
혁신도시 한 관계자는 "정치권이 여전히 균형발전 문제에 침묵하는 현실은, 지방을 여전히 '표밭' 정도로만 바라보고 있다는 방증 아니겠느냐"고 씁쓸함을 드러냈다.
◆김천혁신도시, 인구는 늘었지만 '삶의 기반'은 여전히 부족
김천혁신도시는 2014~2015년 공공기관 12곳이 이전을 완료하면서 조성됐다. 한국도로공사, 한국교통안전공단, 한국전력기술 등 핵심 기관들이 입주하면서 기대를 모았다. 이후에도 원자로설계개발본부 등 추가 유치가 이어지며 도시 외형은 꾸준히 확장되고 있다.
율곡동은 현재 김천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한 지역이다. 지난 4월 말 기준 2만3천401명이 거주하며, 김천 전체 인구(13만5천209명)의 17.3%를 차지한다. 이는 김천혁신도시가 여전히 성장 가능성이 있는 도시임을 보여주는 지표다.
하지만 외형적 성장과 달리 김천혁신도시의 '삶의 질'은 여전히 취약하다. 의료 인프라가 극도로 열악한 상태다. 김천혁신도시 일대에는 1차 의원 외에는 마땅한 병원이 없고, 24시간 응급의료기관이나 분만 가능한 병원이 전무하다.
실제로 상당수 주민들은 단순 감기 진료조차 구미까지 이동해야 하고, 심야 응급 상황이나 소아질환 발생 시에는 대구 경북대병원까지 1시간 이상을 이동해야 하는 실정이다.
지역민 A씨는 "혁신도시에 아동병원이 없어 새벽에 구미까지 가서 줄을 선다"며 "이런 일이 반복되니 불안해서 정착을 망설이게 된다"고 말했다. 의료 공백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 거주 포기와 인구 이탈의 원인으로 이어지고 있다.
교육 문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다. 학원 수, 입시컨설팅, 특목고·자사고 대비 등 사교육 환경이 부족해 자녀가 성장할수록 교육적 이유로 수도권이나 대구 등 대도시로 이주하는 가정이 적지 않다.
결국 공공기관 직원이 김천에 정착했다 하더라도, 자녀 교육을 이유로 다시 가족이 도시를 떠나는 '역이주 현상'이 반복되고 있는 실정이다.
공공기관 직원 B씨는 "아이 학원이 부족해 결국 가족은 대구에 두고 혼자 김천으로 출퇴근하고 있다"며 "주말부부가 점점 늘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에 주소만 옮기고 실질적으로는 외지에서 생활하는 '반쪽 정주' 현상이 구조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병원과 교육 문제는 단순한 생활 불편이 아닌, 도시 정주율을 가르는 핵심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도시로 사람을 불러들일 수는 있어도 머물게 하지는 못하는 구조적 취약성이 여전히 김천혁신도시의 현실이다.
김천시 관계자는 "교육과 병원 문제는 공공기관 이전기관 간담회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단골메뉴'로, 매년 빠지지 않고 반복되는 현안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 1차 이전의 한계 분명…2차는 '시너지 중심'으로 설계해야
김천혁신도시는 1차 공공기관 이전 당시부터 구조적 제약을 안고 출발했다. 이전된 12개 기관 가운데 절반 이상이 중앙부처 산하기관이었으며, 이 중 일부는 정원이 10명도 채 되지 않는 초소형 조직이다.
이러한 한계는 지역 산업과의 연계 부족으로 이어졌고, 클러스터 활성화에도 실패했다. 클러스터 용지 분양률은 60%에 불과하고, 기업 유치 및 고용 창출 효과도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단순히 기관을 이전했다고 해서 지역이 활성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1차 이전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 셈이다.
특히 2024년 4분기 기준 김천혁신도시의 집합상가 공실률은 42.1%로, 전국 신도시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이는 지역 내 소비 기반 부족과 정주 인프라 미비, 공공기관 중심 산업생태계 부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김천시는 이 같은 1차 이전의 한계를 교훈 삼아, 2차 이전에서는 '기능 연계성'과 '산업 시너지' 중심의 전략을 수립 중이다.
특히 KTX 김천구미역과 산업단지, 기존 입주기관 간 거리가 짧아, 이전 기관 간 협력과 기능 집적이 용이하다는 점을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김천시 관계자는 "입지적 조건만 놓고 보면 김천은 전국 어느 혁신도시보다 기능 통합과 산업 연계에 최적화된 구조"라고 설명했다.
◆지방은 준비됐다…결단은 정치의 몫
올해 1월 기준, 수도권 인구 비중은 50.8%로 전체의 절반을 넘어섰다. 지역균형발전 없이 국가의 미래는 없다. 그러나 지금 대선 정국에서 이 문제는 사라진 의제가 되고 있다. 공공기관 2차 이전은 사회적 갈등이나 정치적 부담을 우려해 '회피하는 이슈'로 취급되고 있다.
지난달 한 언론사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1천명)의 47.2%가 '차기 대통령이 가장 역점을 둬야 할 사회 분야 정책'으로 '지방소멸 대응 및 국토균형발전'을 선택했다.
특히 서울(38.6%)과 경기·인천(43.8%) 등 수도권 주민들도 같은 의견을 보였다. 이는 공공기관 2차 이전에 대한 사회적 합의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방증이다.
김천혁신도시 관계자는 "기반은 충분히 갖췄고, 전략도 준비하고 있다"며 "정부와 정치권이 이제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책임 있는 결단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공공기관을 단지 이전만 하지 말고, 그곳에서 가족이 머물며 살아갈 수 있는 여건까지 만들어 달라는 게 우리의 요구"라며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방탄 유리막' 안에서 유세…대선 후보 최초
'TK 지지율' 김문수·이준석 연일 상승세…이재명은?
1차 토론 후 이재명 46.0% 김문수 41.6% '오차범위 내'
'이재명 대세론' 역전 카드…국힘 "사전 투표 전 이준석과 단일화"
[르포] '추진력' 이재명이냐 '청렴' 김문수냐…경기도 격전지 민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