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닫이를 닦는 여인은 곱다. 그 모습은 눈을 감아도 선연하다. 이럴 때 곱다는 말은 아름답다는 말보다 웅숭깊다. 창호지문을 열고 보는 달을 아름다움으로, 창호지에 어린 달빛을 고움으로 여기는 소치이다.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자리가 소롯이 들뜨고 소슬해지다가 마침내는 애틋해져 심장을 잦추던 뜨거운 피가 선득해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 집 반닫이는 내가 중학교 들어갈 무렵 없어졌다. 초등학교만 네 군데를 다닐 정도로 이사가 잦았던 터라 그 반닫이는 애초에 우리 집과 인연이 닿을 물품이 아니었을 터이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틈만 나면 반닫이를 닦으셨다. 애옥살이 와중에도 애면글면 반닫이를 건사하는 마음을 다른 사물에 빗대라면 하얀 수련을 들겠다. 사람마다 감식안이 다를지언정 내게 수련은 애련(哀憐)과 긍휼(矜恤)을 떠올리게 하는 꽃이다. 그처럼 허심하고 조촐한 일이 내 가슴속 요처에 걸린 걸 보면 최고의 미술 선생은 '세월'인 줄 이제야 알겠다.
그 시절 친구 집에 놀러가면 으레 눈길을 끄는 건 반닫이였다. 주지하다시피 반닫이는 전면에 문판(門板)이 달린 물품 보관용 궤(櫃)이다. 앞판을 여닫는 '앞닫이', 위판을 여닫는 '윗닫이'로 나누기도 한다.
반닫이의 투박한 골격을 보완하는 게 장석이다. 무쇠나 놋쇠 백동 따위로 만든 경첩은 문 개폐의 기능적 측면만 있는 게 아니다. 호리병이나 제비초리 같은 모양으로 곡선을 살리고 앞바탕엔 만(卍)자나 수(壽)자 등 다양한 무늬를 투각했다. 손잡이인 들쇠, 모서리를 잡아주는 감잡이는 물론 꽃무늬의 받침쇠에 박아 넣은 광두정(廣頭釘)조차 태깔과 얼개에 맞춰 맵시를 더했다.
반닫이는 의류와 책자는 기본이고 제기(祭器)를 위시한 이런저런 주방용품과 먹 벼루 화선지 같은 문방용구의 수납공간으로도 요긴하게 쓰였다. 이부자리나 공예품을 얹는 데도 제격이고 심지어 고양이의 전망대가 되기도 하는 이것은 대개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요즘엔 실용성보다는 전시품으로의 가치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오래된 반닫이 중 품격과 아취(雅趣)를 갖춘 것은 고가로 거래된다. 한 찻집에서 본 것도 마찬가지였다. "옛날에 저런 거, 우리 집 대청마루에 놓여 있었어. 갖고 있었으면 돈 됐을 텐데." "우리 집에도 할아버지 사랑방에 있었지, 아마. 근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헐값에 팔았어."
대화 속에 불쑥 끼어들고 싶었다. '어떤 이는 저것을 닦으며 마음 또한 하염없이 닦았더랬지요. 다함없는 슬픔을, 보람과 소망을, 그리움과 인욕(忍辱)을, 기다림을, 덧없음을…마음 닿는 건 빛내고, 그럴 수 없는 건 속절없이 지우는 수고를, 허구한 날 그려 내던 그런 풍경이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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