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곽수종의 이슈진단] '이더리움이 가져 올 변화'라는 것

곽수종 리엔경제연구소, 경제학 박사
곽수종 리엔경제연구소, 경제학 박사

헤르만 헤세이 소설 '데미안'에는 싱클레어라는 주인공이 '알'에서 깨어날 때까지의 번민과 고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두려움 등에 대한 내면의 세계를 잘 묘사하고 있다. 불가에서 자주 쓰는 말로도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날 때, 안에서 병아리가 껍질을 쪼는 것(줄, 啐)과 밖에서 어미 닭이 껍질을 쪼는 것(탁, 啄)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안과 밖에서의 노력이나 호응이 동시에 맞아떨어져야 일이 성사된다는 비유로 쓰이기도 한다.
즉, 안에서 스스로 준비하고 노력하는 것과 밖에서의 적절한 지원·도움이 같은 타이밍에 맞춰져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도전이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로 쓰여진다.

도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본능적으로 새가 알에서 스스로를 깨고 나올려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 성장의 서사(敍事)다. 청소년기 질풍노도의 반항기라할 수도 있지만, 단순한 감정적 일처리가 아니라, 보다 영적이면서 정신적 성숙을 위한 시그널인 셈이다.

인류는 기존의 가치를 주어진 제약식으로 가정한다. 상당히 강력한 가정이다. 만일 누군가 이러한 기존 가치와 질서체계에서 벗어나려는 행동을 하면 온갖 규제, 규칙 및 법 등을 통해 다시 그를/그녀를 가두거나 구속하려 든다.

이를 깨닫는 순간, 알에서 깨어나려는 '자'는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안의 세계를 떨쳐 나오려는 시도와 본능적 욕구는 단호한 과거와의 결별을 프로그래밍 해 둔 상태나 마찬가지다. 인간의 눈에는 알 속 세상의 이중성을 고민하던 '싱클레어'도 '결단'을 한다.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놓고 비교 갈등하다가 어느 순간에 방황고 혼돈의 세상 저편에 커다란 무지개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그 '찰라'는 고대 그리스의 그노시스주의(Gnosticism)에서 주어진 '아브락사스(Abraxas)'와 닮아 있다.

하지만, 인간과 그 밖의 모든 세상에 존재하는 양면의 세상, 절대 악과 절대 선, 빛과 어두움 등을 포괄하는 개념인 '아브락사스'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선과 악의 상반된 가치의 고정적 개념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다. 양 극단은 서로 통한다는 통합의 전체성을 상징한다.

이는 불교 선종(禪宗)에서는 "쌍차쌍조(雙遮雙照)"로 쓰인다. 쌍차(雙遮)는 '둘 다 막는다'는 뜻으로, 모든 집착이나 분별심을 끊어버려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쌍조(雙照)는 '둘 다 비춘다'는 뜻이다. 공(空)과 유(有), 진리와 현상 등 서로 다른 두 측면을 모두 꿰뚫어보고 드러내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2016년 갑자기 구글의 '딥 마인드(Deep Mind)'라는 자회사가 '알파고'라는 바둑 프로그램을 들고 세계 정상급의 바둑 기사인 '이창호' 9단과 대국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리고 우리에겐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조만간 펼쳐질 것임을 예고한 바 있다. 요즘 우리 주변 대부분의 문명의 이기들은 '인공지능'이라는 마케팅 용어를 쓰지 않으면 '아날로그(analog)'로 취급받는다. 아날로그의 의미는 '선형'이고 디지털의 의미는 '비선형'이다. 즉, 그림으로 비유한다면, 전자를 손으로 그려낸 한 장 한장의 그림이라 한다면, 후자는 대량 생산을 위해 인쇄기로 프린트해 낸 복사가 무한 반복이 가능한 그림인 셈이다. 인간의 눈이 정교하지 못한 이유로 전자와 후자를 구분할 수 없을 지는 모르나, 그림을 전시하는 갤러리를 가보면 담박에 차이가 난다. 전자는 거칠고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곳곳에 있지만, 후자는 사람의 생각을 탔을 뿐 거친 표면을 찾아 볼 수 없다. 인공지능은 수 많은 파생상품들을 이미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들도 '시작의 시작'일 뿐이다.

메타와 같은 기업들은 AI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2억 5천만 달러를 연봉으로 제시하고, 심지어 Scale AI 과 같은 벤처기업에는 지난 6월에 무려 14.3조원을 투자하는 등, 21세기 본격적인 AI 시대를 앞두고 전략적 투자와 인재 영입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변화'의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의 시작은 신의 계시나 묵시록에 의한 거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두뇌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뉴론들의 '거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거친 생각'은 질서를 찾아 나섰고, 그러한 변화의 질서는 '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에서 창조되지 않았다. 허름한 차고나, 뜻있는 몇 사람의 친구들 간에 오가던 메신저 속에서 그 싹을 티운 것이다. 이더리움의 창시자 비탈릭 부테린(Vitalik Buterin)도 그랬다. 19세의 나이에 이더리움 백서를 만들고, 탈중앙화 플랫폼을 구상했다.

요즘 세상에 회자되는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하기위해서는 이더리움의 네트워크가 대표적인 플랫폼이다. 이 정도 설명했을 때 우리는 왜 요즘 많은 투자자들이 이더리움에 집중하는 지를 이해할 수 있다. 탈중앙화 (DeFi), NFT, DApp 등 다양한 디지털 생태계를 펼치는 시공의 빅뱅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더리움의 스마트 계약 기술 덕분에 스테이블 코인은 자동은 투명한 방식으로 발행에서부터, 소각 및 거래가 가능해지고, 신뢰성과 확장성을 갖출 수 있다. '플랫폼'이란 일종의 '허브(Hub)'와 동의어인 셈이다. 여기까지도 어려우면, 인천 국제공항을 생각하면 된다. 수많은 비행기들이 종착점으로, 혹은 다른 곳으로 가지 위한 기착점으로 사용한다. 그 사용 빈도와 항공객 수가 크면 클 수록 세계 주요 공항으로써, 여객과 화물의 항공 비즈니스에 중요한 위상을 갖는다. 이더리움이 그렇다.

비탈릭이 깬 '알'은 우리가 너무나 많이 들어 온 '비트 코인'이라는 블록체인 시스템이 만들어 놓았던 껍질이었다. 비탈릭의 생각은 단순했다. "블록체인 위에서 모든 종류의 프로그램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은행도, 게임도, 계약서도 다 함께 올려 놓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중앙통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은가?)" 2013년 말, 그는 비트코인 커뮤니티에 '범용 스크립팅 기능'을 제안했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너무 복잡하고, 불필요해" 였다고 한다. 거절당한 그는 "그렇다면 내가 직접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비탈릭은 밤낮으로 글을 썼다. '이더리움(Ethereum)'이라는 이름의 백서였다. 여러 인물들이 합류했다. 미하이 알리시에는 커뮤니티와 운영을, 개빈 우드는 솔리디티(Solidity) 언어 설계를, 앤서니 디이오리오는 자금 지원을, 그리고 찰스 호스킨슨와 조셉 루빈은 각각 비즈니스 전략과 인프라 지원을 담당했다. 그리고 2014년에 스위스에서 이더리움 재단을 설립한 후, 1년만인 2015년 7월, 첫 버전 '프런티어(Frontier)'가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의 결심은 본능적인 것이었다. 마치 새가 알에서 스스로를 깨고 나올려는 시도처럼, 성장의 시작이었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