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국가적 재난이 잇따르고 있지만 관련 법령은 기준이 불명확해 현장에서 혼란이 반복되고 있다. 재난 피해자들은 실질적인 복구보다 수습에 그친 지원을 받으면서, '재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긴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재난이 남긴 상처는 트라우마로 굳어져 일상을 잠식하는 반면, 심리 상담은 단편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안전을 책임지는 공무원은 부족한 데다 잦은 인사이동으로 재난 대응의 전문성과 연속성마저 떨어뜨리고 있다.
◆모호한 기준 커지는 혼란
'재난 안전관리 기본법'(재난안전법)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대형 사고나 자연재해로 큰 피해를 입은 지역에 특별재난지역을 선포할 수 있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를 시작으로 2023년까지 총 57건의 특별재난지역이 지정됐다.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면 공공시설 복구비와 재해구호비 등 일부를 국고가 추가로 부담하면서 지자체는 재정 부담을 덜 수 있다. 복구에 필요한 행정·의료 지원도 이뤄진다. 이처럼 특별재난지역 선포 여부는 피해 지역의 복구 속도와 회복 수준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
문제는 특별재난 선포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같은 법 시행령에 따르면 사회재난은 '지자체 재량으로 수습이 곤란해 국가 지원이 필요한 재난'과 같이 행정적 판단에 의존하고 있다. '국고 지원 대상 피해 기준금액의 2.5배를 초과하는 재난' 등 정량적 기준이 마련된 자연재난과 큰 차이를 보인다.
이 같은 한계는 국립재난안전연구원도 지적한 바 있다. 지난 2023년 '특별재난지역 선포제도 개선을 통한 사회재난 복구지원체계 개편' 연구를 수행한 연구원은 "사회재난은 특별재난지역 선포를 위한 정량적 기준이 없어, 적절성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반복되고 불필요한 행정력 소모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와 별개로 재난사태 선포 기준 또한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다. 지난해 재난안전법 개정으로 시·도지사는 관할 구역에 재난이 발생하거나 그러한 우려가 있을 때, 시도위원회 심의를 거쳐 재난사태를 선포할 수 있게 됐다. 재난이 초기 대응이 중요한 만큼 지자체장의 권한을 강화한 것.
그러나 선포 기준은 불명확하다. 법령에는 '극심한 인명 또는 재산 피해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재난'으로 명시돼 있어 해석 여지가 크다. 대구에선 지난 4월 발생한 북구 함지산 산불을 포함해 1년간 단 한 건의 재난사태 선포가 이뤄지지 않았다.
◆수습에 그친 지원
3년 전 울진 산불로 손금옥(72) 씨는 막대한 재산 피해를 봤다. 손 씨는 "산불이 나면서 집 전체가 불이 탔는데 안채 앞에 있던 황토방은 보상도 받지 못했다. 지원된 금액은 당시 시공금액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재난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주택 복구와 수리비에 집중되고 있다. 행정안전부의 '2024년도 재난피해 회복수준 실태조사'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재난을 겪은 1천469명 중 54.4%가 경제적 부담 원인으로 '복구 및 수리비 상승'을 꼽았다.
우리나라 정부는 재난으로 복구가 필요한 주택에 대해 지원하고 있다. 문제는 피해 금액에 비해 보상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자연재난과 사회재난은 각각 주택복구비와 주거비 명목으로 전파(114㎡ 이상) 기준 최대 3천600만원에 그친다.
의연금과 기부금 등 국민성금 역시 실질적인 피해 회복에는 못 미치고 있다. 자연재난 시 지급되는 의연금은 지난해 9월 기준 500만원(전파 기준)에서 1천만원으로 상향됐지만, 여전히 현실적인 복구와는 거리가 멀다. 사회재난의 기부금은 규모에 따라 지원액이 달라지고 있다.

보상 대상에서 제외되는 사각지대도 존재한다. 국내 대표 송이 주산지였던 울진은 산불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송이 등 임산물은 재난안전법 및 하위 법령상 복구지원 품목에 포함되지 않아 초기에 보상을 받지 못했다.
송이 농가를 운영한 홍진철(64) 씨는 "보상 임산물에 송이가 포함되지 않아 농가의 상심이 컸다"며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울진군과 지속적으로 노력한 끝에, 어렵게나마 6개월 만에 일부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3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송이 등 일부 품목들은 보상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상태다. 이에 경상북도는 올해 초 영남권 산불을 계기로 지난 4월 복구지원 대상에 임산물 범위 확대를 산림청에 건의했다.
경북도 관계자는 "송이나 능이 등 채취 임산물이 복구 대상에 들어가지 않다 보니 피해를 입은 분들을 구제하기 위해 의견을 냈다"며 "아직 피해 보상이 안 되는 작물들이 있긴 하지만 대체 작물 조성 사업 등으로 예산을 지원받았다"고 설명했다.
◆단편적인 심리 상담

재난 피해자들은 물리적 피해뿐만 아니라 트라우마로 고통을 겪고 있다. 권석만 전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에 따르면 재난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 최대 21%가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정신적 후유증에 대한 치료가 시급하지만 심리지원 체계는 일시적이고 단편적이다. 울진 산불 이재민 김옥수(60) 씨도 "대피소에서 심리상담을 한 번 받은 게 전부"라며 "안정제 처방이나 병원 안내 같은 실질적인 조치는 없었고 그저 상태만 확인하는 수준이었다"고 털어놨다.
반면 미국은 장기적 관점에서 재난 트라우마를 다루고 있다. 2001년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 이후, 피해자 코호트(동일집단)를 구성해 매년 건강검진을 실시하고, 관련 질환에 대한 치료와 보상도 함께 제공하고 있다. 지난 2023년 9월 기준 현장 응급구조대원과 자원봉사자 등 8만6천481명과 생존자 4만945명이 등록돼 있다.
우리나라도 제도 개선의 필요성이 제기된 바 있다. 지난해 1월 신현영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재난 피해자의 지속적인 치료 체계와 재난 트라우마 주치의 제도 도입을 골자로 한 재난안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해당 법안은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 담당 인력 부족에 전문성 약화

재난이 갈수록 복잡·대형화되고 있지만, 이를 감당할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공무원의 순환보직 체계는 재난 대응의 전문성과 연속성마저 위협하고 있다.
대구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재난안전 분야 교육을 받은 공무원은 786명에 그친다. 이는 시청, 구·군, 산하 공단·공사를 포함한 전체 공무원 수 1만6천797명의 4.7% 수준이다. 각종 재난 대응 매뉴얼과 현장 대응법 등을 숙지한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셈이다.
교육을 이수하더라도 공무원 인사 특성상 2~3년 안에 해당 부서에서 나와야 한다. 대구시의 인사 기본계획상 동일 부서에서 근무 기간은 2년으로 제한하고 있고, 실·국 간 부서 이동도 5년 주기로 이뤄진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한 부서에서 경험을 쌓고 재난 업무에 익숙해질 때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 구조인 셈이다.
최은기 한국재난안전기술원 책임연구원은 "재난을 몇 번 경험한 공무원들은 선제적으로 조치해서 피해를 줄일 수 있지만, 처음 겪는 경우 훈련하고 교육을 거치더라도 대응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공무원들이 순환 보직제로 이뤄지다 보니 지자체의 재난 대응 역량 자체가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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