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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반쪽짜리 사랑으로 지켜낸 당신들의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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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당신의 파라다이스
임재희 지음 / 민음사 펴냄

[책] 당신의 파라다이스
[책] 당신의 파라다이스

"반으로 자른 다음 씨를 빼내고 먹어야 해. 고향에서 먹던 감하고 색이 비슷하지? 햇볕에 꾸둑꾸둑 말려 먹으면, 곶감 먹는 기분이 든대요."

사랑이 뭘까, 조국이란 어떤 존재일까, 개인의 행복보다 국가가 더 소중할까. 권력자와 기득권으로부터 사람대접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민초들에게도 마찬가지일까. 한숨과 분노와 탄식과 안도의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다.

2013년 세계문학상 수상작 임재희의 '당신의 파라다이스'는 험난하고 지난한 하와이 이민사 한 귀퉁이를 채운 네 사람의 남녀가 선택한 사랑과 운명의 파노라마이다. 임재희는 역사적 사건과 작가의 상상력을 결합해 이름 없는 민초를 호명하고 그들의 삶을 역사 위에 노정하며 문학적으로 재현한다. 곧 작가의 추모와 애도 방식이다.

상학과 강희와 창석과 나영. 작가는 네 사람의 삶을 씨줄로 하고 사탕수수농장에서 고된 노동을 이어가는 한인 이민자를 날줄로 하는 이민자 집단 서사를 직조하면서 그 속에 독립운동사를 끼워 넣는다.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조국을 떠난 이민자들이 새로운 땅에서조차 조국이라는 심리적 무게를 떨쳐내지 못하는 건 안타깝다.

"상학에게 한자와 한글을 배우던 날들은 더없이 행복했었다. 그가 상해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을 태호의 편지로 알게 되었다. 상해로 독립자금을 직접 전달해 달라는, 가서 다시 돌아오지 말라는 창석의 의도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이를테면 창석이 강희에 대한 마음을 포기하지 못해 남편 상학을 멀리 보낼 삿된 마음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던 건 독립운동이라는 대의와 명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나는 믿는다.). 양반과 일제에 연이은 수탈과 핍박에 이골이 난 민초들이 고된 노동의 몫을 스스로 내놓으며 독립운동에 일조하는 장면은 감동적이면서 한편으로 분하다.

다른 삶을 찾아 새로운 세상에 도착한 인물들 마음속에 작가가 심어놓은 지옥. 낙원이라 여긴 땅에서 벌어지는 잔혹 서사는 승자도 패자도 없으니, 당신의 파라다이스는 허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고향도 등지고 나라도 잃은 사람들이 잘살아보겠다고 찾아온 이국땅에서 반목하고 원수가 되는 일이 다반사지만, 작가의 눈은 끝내 삶을 긍정한다. 그리하여 작중 인물은 모르고 우리가 아는 것. 즉 마침내, 광복을 맞게 될 거란 엄연한 사실과, 눈물과 땀방울 아래 낙원을 꿈꾸며 발버둥 친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작가의 간곡한 요청. 요컨대 그들이 꿈꾼 조국으로 초대함으로써 낙원을 완성하기. 당신이 꿈꾼 파라다이스가 지금, 여기 있다고 말이다.

"내가 당신에게 준 것은 언제나 반쪽이라는 생각을 했소. 그것이 파파야이든 행복이든. 아니, 그 어떤 것이라도. 나는 그것이 미안하오."

영화평론가 백정우
영화평론가 백정우

누군가 죽고서야, 누군가에게 배신당하고서야 현실로 돌아오는 클리셰조차 대미를 장식하는 수미상관 앞에선 무력하다. 그러니까 사지에서 돌아와 반쪽 옆에 앉은 남자의 회한어린 반성으로 소설이 화룡점정을 찍을 때 무장해제 될 수밖에 없다. 에게해를 떠돌다 페넬로페의 침대로 오르며 긴 여정에 종지부를 찍는 오디세우스처럼, 다시 만난 상학과 강희가 온전히 행복하길 바란다. 그래야 맞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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