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제36회 수성구민상 교육문화 부문 수상자로 정정림(54, 주식회사 랠리 대표) 계명대 사회체육과 겸임교수가 이름을 올렸다. 취약계층을 위한 테니스 강좌를 개설해 재능기부를 실천하고 장애인 인식개선 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하며 공동체 의식을 높이는 데 기여한 공로다.
사실 그는 휠체어 테니스 감독으로 유명하다. 처음엔 10여 년 간 테니스 선수로 뛰었고 국가대표 상비군 감독을 지낼 정도로 지도자로도 인정받았다. 이후 휠체어 테니스와 인연을 맺은 뒤 2006년 국내 첫 휠체어 테니스 실업팀인 대구 달성군 휠체어 테니스단 창단을 주도했고 초대 감독을 지냈다.
이 같은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있다. 휠체어 테니스 국가대표를 지낸 홍영숙(57) 씨다. 이들 두 사람은 2004년 사제의 연을 맺었다. 이후 4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홍 씨는 우리나라 휠체어 테니스 역사상 가장 높은 세계 7위에 올랐다. 2006년엔 국제테니스연맹(ITF)의 휠체어 테니스 부문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기도 했다. ITF는 매년 뛰어난 실력과 스포츠맨십, 국제적인 마인드십을 가진 선수들 가운데 남녀 한 명씩을 '올해의 선수'로 선정한다.
홍 씨가 2008년 베이징 장애인올림픽을 끝으로 은퇴를 하면서 더 이상 선수와 지도자로 활동할 순 없었지만, 두 사람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매일 만날 정도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휠체어 테니스에서, 나눔 활동과 장애인 인식개선이라는 종목만 바뀌었을 뿐이다.
지난 22일 대구 수성구 주식회사 랠리 사무실에서 정정림·홍영숙 씨를 만나 이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홍영숙 씨는 휠체어 테니스를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됐나.
▶3살 때 소아마비에 걸렸다. 초등학교 때는 휠체어 육상을 시작했다. 1년에 한 차례 정도 전국대회에 나가서 입상을 하면 교장 선생님이 전교생 앞에서 표창해 주는 게 너무 좋았다. 막연히 운동선수가 돼야지 하는 꿈을 꿨다.
대학에 입학하던 해였다. 88년 서울 장애인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쓴맛을 봤다. 중고등학교 때 상대가 되지 않았던 선수들의 실력이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발전해 있었다. 결국 선발전에서 탈락했고 휠체어 육상을 그만뒀다.
1995년 한 선배로부터 휠체어 테니스를 소개받았다. 당시는 국내에 휠체어 테니스가 도입 된 지 얼마 안 되던 때라 장비가 부족했다. 연습할 수 있는 코트도 부족했고 테니스 전용 휠체어도 없었다. 여성이 하기엔 어렵다는 편견도 컸다. 이거다 싶었다. 내가 지금 이 운동을 시작한다면 향후 많은 장애 여성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코트가 훼손된다며 테니스장 앞에서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였다. 휠체어 테니스를 제대로 알고 있는 지도자도 없어 선수들끼리 훈련을 했다. 그 결과 1998년 방콕 장애인아시안게임에 출전해 복식에서 동메달을 획득했고 2000년 시드니 장애인올림픽에서는 한국 휠체어 테니스 사상 최초로 올림픽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4년 뒤인 2004년 아테네 장애인올림픽에 출전한 이후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올림픽에 출전할 실력은 됐지만 그 이상을 넘기엔 역부족이었다. 절망에 빠진 제게 운명처럼 다가온 사람이 바로 정정림 감독이었다.
-정정림 씨가 휠체어 테니스에 뛰어들게 된 동기가 궁금하다.
▶2004년 10월의 일이다. 스포츠용품 매장을 운영하고 있어서 납품 때문에 대구 두류테니스장을 찾았다가 연습을 하던 휠체어 테니스 선수들을 봤다. 도와줄 게 없을까 해서 홍 선수에게 말을 건 게 계기가 됐다.
홍 선수의 도와달라는 요청에 2주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사실 공을 쳐다보는 홍 선수의 눈빛을 보며 이미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절실함과 끈기를 보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홍 선수는 이 기간 동안 제가 수업을 하던 중학교를 매일 찾아왔다. 그렇게 인연이 시작됐다.
-정정림 씨의 열정 또한 대단했다고 들었다.
▶(홍영숙) 처음에는 오후에만 연습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독님이 '제대로 해보자'며 자신이 운영하던 스포츠용품 매장을 직원에게 맡겨둔 채 아침부터 저녁까지 훈련에 매달렸다. 집에서 자동차로 1시간 넘게 걸리는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매일 훈련장을 찾았고 이듬해엔 새로 산 승용차까지 팔아 경비를 마련해 각종 국제대회를 참관하며 선수들을 분석하는 등 열정을 쏟았다. 이런 감독님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저 또한 자신을 더욱 채찍질하며 세계랭킹을 끌어 올릴 수 있었다.

-2006년엔 두 사람이 꿈꾸던 휠체어 테니스 실업팀인 달성군 휠체어 테니스단이 꾸려졌다.
▶(정정림) 창단 과정은 쉽지 않았다. 달성군 관계자들을 설득하기 위해선 성적이 필요했다. 각종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군청 관계자들을 찾아 호소했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그래도 둘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군수와 군의원들을 를 찾아가 설득했다. 끈질긴 설득 끝에 창단이 결정됐지만 군 의원이 모두 바뀌면서 팀 창단도 백지화됐다.
또 다시 군 의회에 찾아가 의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이런 절실한 마음이 의원들을 움직였는지 창단이 마침내 결정됐다. 홍 선수를 비롯한 선수들이 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2008년 정정림 씨기 달성군 휠체어 테니스단 감독을 사직하고 홍영숙 씨가 은퇴를 했다. 이후 두 사람은 빈대떡 가게를 열며 나눔을 실천해왔다.
▶(홍영숙) 빈대떡은 내게 의미 있고 소중한 음식이다. 어머니가 빈대떡을 팔아 해외 대회 비용을 뒷바라지해 주셨다. 선수시절 때부터 빈대떡 가게를 계승해 어머니의 사랑을 가업으로 이어야겠다는 생각을 정 감독님과 했다. 2009년부터 어머니의 이름을 딴 빈대떡 가게 분점을 낸 뒤 코로나 이전까지 4곳을 운영했다.
빈대떡 가게를 열면서 장애인이 마음 놓고 편하게 방문할 수 있는 식당을 만들고자 했는데, 그것 말고도 우리에겐 '나눔'이라는 또 다른 꿈이 있었다. 가게를 처음 열었을 때부터 매달 한 차례씩 무료급식 행사를 열고, 가게 수익금 일부를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재가노인복지협회 등에 꾸준히 기부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홍영숙 씨는 지난해까지 2년간 대구시 장애인체육회 사무처장을 지냈고, 정정림 씨는 주식회사 랠리를 통해 장애인 인식 개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테니스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두 사람 모두 장애인들이 스포츠를 통해 꿈을 키우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와 함께 은퇴 직후 꾸린 '한국두바퀴사랑나눔'이라는 비영리단체를 통해 지금도 꾸준히 나눔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런 공로로 상도 많이 받았다. 두 사람의 목표가 궁금하다.
▶(홍영숙) '두 바퀴'는 휠체어를 타는 저이기도 하고, 너와 나,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의미한다. 제가 처음 테니스를 한 이유도 장애인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였다. 장애인들은 자존감이 떨어지는데 운동을 하면 이를 극복할 수 있다. 장애인·일반인이 모여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장애인 인식 개선 강사 활동을 하는 것도, 결국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감독님과 제가 살아가는 모습이 사회가 조금씩 변화할 수 있는 작은 불씨가 됐으면 좋겠다.
(정정림) 은퇴 직후 단순히 먹고 살 생각이었다면 가게를 안 했을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늘 '나눔'이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나누는 지금의 삶이 무척 행복하다. 돌이켜보면 홍 선수와 제가 각자가 아닌 '우리'였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앞으로도 이 길을 함께 꾸준히 걸어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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