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번 태어났다
"3살 되던 해 나는 지독한 고열에 시달렸다. 잘 걷던 아이가 걷지를 못했다. 결국 경북 포항 청하면 한 수녀원 가까운 냇가 부근에 부모로부터 버려졌다. 갓난아이처럼 포대기에 싸인 채 서럽게 우는 나를 지나가던 외국인 신부가 발견해 수녀원으로 데리고 갔다. 모르는 사람들과 새로운 가족이 됐다. 2번째 출생신고를 했다. 4살에 다시 태어나는 아이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자서전 '이젠 울어도 괜찮아'를 펴낸 소아마비 장애 시계 명인 장태호(66) 전 대구시숙련기술협회 수석부회장이 겨우 세 살배기 때 고아가 돼 버린 이야기의 시작이다.
▶엄마 대신 수녀님과 보모 누나를 만나다
"어린 마음에 수녀님의 아들이 되고 싶었다. 가까운 거리는 업혀 다녔다. 기어다니는 데는 선수가 됐다. 시간이 지나면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친구들처럼 걸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다시 주저앉는 연습만 되풀이했다. 8살이 된 소년은 수녀님이 마련해 준 잠바를 입고 작은 가방을 어깨에 둘러멘 채 목발을 짚었다. 포항 성모자애원을 떠나 대구 성보원에 도착했다."
"서너살 위 덩치 큰 형들이 한쪽 다리가 불편한 아이와 양쪽 목발을 짚은 나에게 권투 장갑을 끼워주며 시합을 붙였다. 일방적으로 달려드는 아이에게 얻어맞았다. 그러곤 권투 시합에서 졌다고 또 얻어맞았다. 다섯 밤만 자면 데리러 온다던 수녀님은 새로운 계절이 오고 가도 오지 않았다. 거짓말쟁이 수녀님."
"나 같은 병신 하나 죽는다고 누가 눈이나 깜빡할까. 몇 사람이 죽었다는 바위에 올라섰다. 솔바람이 쏴 지나갔다. 파도 소리 같았다. 그 소리를 뚫고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눈을 떴다. 보육원 보모 누나였다. 함께 산길을 내려왔다. 시계 학원을 열심히 다니던 때였다. 보모 누나는 3개월치 학원비를 내줬다."
▶나를 처음 받아준 시계방 사장님처럼
"학원비를 벌기 위해 열쇠공장에 다녔다. 돈이 없을 땐 학원을 쉬고, 일을 해서 돈을 모으면 다시 다녔다. 동네 서점에서 시계 관련 책을 읽고 아예 외워버리거나 메모를 해왔다. 16세 되던 해 대구 교동시장 시계방 골목을 기웃거렸다. 시계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수십 번 사정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러다 한 사장님이 나를 받아주셨다. 사장님은 국수를 사 먹으라고 매일 250원을 주셨다. 20원 짜리 오뎅(어묵) 2개만 사 먹고 공짜 국물로 배를 채우곤 남은 돈 3개월치를 모아 사장님께 다시 드렸다. 놀란 사장님이 그제서야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보육원 아이들은 손버릇이 나쁘다'는 편견 탓에 말하지 않은 얘기였다. 사장님은 곧장 나를 데리고 보육원으로 가 원장님에게 그동안 내가 시계를 배우러 다닌 일을 설명했다. 시계 수리를 인생의 길로 확정한 순간이었다. 나중에 처지가 어려운 청년 200명 가까이를 제자로 받아 시계수리공으로 세상에 배출하게 된 것은 그래서였다."
▶보육원을 나와 시계 명인의 세상을 개척하다…그리고 다시 만난 수녀님과 보모 누나
"대구 중구 대신동 작은 시계방에 취업했다. 이어 서울 청계천 상가 시계포에서 일했다. 봉급으로 2만원을 받았다. 통닭이 먹고 싶었지만 마른침을 삼켰다. 스위스를 떠올렸다. 시계 기술을 배우러 가 보고 싶었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대신 기존 부품을 나만의 방식으로 응용했다. 소문이 났다. 최고 대우로 경남 거창 시계방에 취직했다. 15만원 봉급을 받았다. 그래도 여전히 가게에서 잠을 자며 되는 대로 저축을 했다. 내 가게를 차리고 싶어서였다. 그래도 돈을 꼭 쓰는 데가 있었다. 꿈에서도 진절머리를 쳤던 보육원이었다. 보육원 몇 곳에 빵과 우유를 정기적으로 보냈다. 그러면서 거창과 대구를 오가며 시계 공부를 했다."
이어 책에서는 경북 안동에서 친모를 다시 만난 이야기, 지금껏 모은 돈으로 안동에 첫 시계수리점 '태성당'(현재 가게 위치는 대구 동구 신천동)을 낸 이야기, 1985년 전국기능올림픽 시계수리 부문 금메달을 수상한 이야기,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빚 보증을 잘못 서 극단적 시도를 했다 살아나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 이야기, 시계방과 금은방을 함께 하던 터라 007가방에 반지를 잔뜩 넣어 가 아내에게 프로포즈를 한 이야기, 훈련을 하다보면 크고 작은 고장이 잦은 장병들의 시계를 고쳐준 걸 계기로 사회 각지에서 시계 수리 봉사를 하게 된 이야기 등이 계속된다.
그리고 세 살 적 버려진 자신을 키워준 로렌조 수녀님, 죽음에서 구해준 보모 누나와 수십년 만에 재회한 이야기도 있다. 이 이야기를 전하고서야 책은 비로소 제목이기도 한 '이젠 울어도 괜찮아'라는 서사의 마침표를 찍는다.
시계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책에서는 그토록 가고 싶었던 스위스는 물론, 세계 30여 국가를 다니며 시계 수리 기술을 보고 듣고 배우는 등 시계에 푹 빠진 열정도 함께 드러낸다. 그는 "장태호라는 상표를 내 건 시계를 직접 제작하고 싶다"며 여전히 남은 꿈을 밝혔다. 이미 2001년 대한민국 시계수리 신지식인 1호로 선정되는 등 시계 명인으로 공인 받았지만, "앞으로도 시계의 집에서 시계바늘처럼 뚜벅뚜벅 걸어가겠다"고 단언했다.
한편, 장태호는 10월 25일 오후 4시 자신의 '고향집'인 셈인 모교 대구성보학교 4층 강당에서 '이젠 울어도 괜찮아'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북콘서트를 통해 책을 펴낸 계기와 그 바탕이 된 인생 이야기를 함께 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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