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덕군 영해의 옛 이름은 예주다. 예주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경주, 명주(강릉)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큰 고을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처음 순시했을 때, 예(禮)의 고을을 일컫는 '예주(禮州)'라 칭했다. 주민들의 예의가 바르고 겸손하게 서로를 배려하는 풍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초 권근(權近)은 '양촌집( 陽村集)'에서 집마다 거문고가 있었으며 연주를 잘했다고 했다. 오늘날 영해에 예주문화예술회관이 있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예주가 영해로 바뀐 것은 1310년. 많은 인물이 배출됐다. 적지 않은 유학자들이 활동했다. 고려말의 경우 영해는 '영해삼시중공(寧海三侍中公)', 즉 3대에 걸쳐 문하시중을 배출한 영해박씨의 박세통(朴世通), 박홍무(朴洪茂), 박감(朴瑊)의 고향이었다. 유학자로서 명성을 날렸던 윤신걸(尹莘傑)은 영해부사, 우탁(禹倬)은 영해사록으로서 영해에서 근무했다. 이색의 부친 이곡(李穀)과 함께 문과에 급제한 백문보(白文寶)도 말년을 외가가 있는 영해에서 보냈다. 한마디로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이색과 김종직(金宗直)이 상대산 관어대에 올라 동해안 일대의 절경을 보고 지은 시를 봐도 알 수 있다.
이색은 '관어대소부(觀魚臺小賦)'에서 "使夫子而乘桴(사부자이승부) 공자께 뗏목을 타고 오시라면, 亦必有樂于此(역필유락우차) 반드시 이곳에서 즐기시리라."고 읊었다. 김종직도 '관어대부(觀魚臺賦)'에서 '예주'라 지칭하며, "從二客以指點兮(종이객이지점혜) 두 손님 따라 이곳 향해 오니, 恍不知身之憑灝氣而躡玆地也(황부지신지빙호기이섭자지야) 황홀히 나도 모르게 호연지기 타고 높은 곳에 올라온 듯."이라고 노래했다. 공자가 즐길 수 있는 지역이며, 맹자의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는 명소라고 여겼다.
또한 영해에는 이색의 절의 정신을 이어받은 인물들이 많았다. 우선 임진왜란 때 의병장 신규년(申虯年)의 활약이 돋보인다. 신규년은 왜적이 영해에 침입하자 300여명의 의병을 일으켜 축산만호 권전(權詮)을 도왔다. 이어 위정산 아래에서 적을 맞아 분전하다 순국했다.
아울러 영해는 최근 '동학혁명 발상지'로 재조명되고 있다. 1871년 이른바 '이필제의 난'으로 알려진 동학 최제우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났다. 도올 김용옥 은 2024년 4월 29일 '1871영해동학혁명 제153주년 기념 추모제.기념비 제막식'에서 "1871년 영해에서 일어난 수운 최제우 교조신원운동은 동학혁명의 시원"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이필제의 난'이냐, '동학 교조신원운동'이냐에 대한 논란은 있다.
그러나 당시 주동자 이필제가 동학에 입교해 2대 교주 최시형을 영해에서 만나 거사에 대해 승인을 받았으며,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의 기치를 내걸었던 점 등이 1894년 동학혁명과 연결된다고 보고, '영해는 동학혁명 발상지'라는 평가를 내린 것으로 분석된다.
결국 1896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영해부는 영해군이 됐으며, 영덕현은 영덕군이 됐다. 개편 전에는 영해부에 종3품의 도호부사가 임명됐었고, 영덕현에는 종5품의 현령이 부임했었다. 영덕은 영해부의 속현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1895년 을미사변을 계기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1896년 2월 11일 영해 유림이 주축이 되어 의병부대 영해의진(寧海義陣)을 결성했다. 대장은 이수악(李壽岳)이 맡았다. 두드러진 인물은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申乭石) 장군. 신돌석은 1878년 경북 영해군 남면 북평리(현재 축산면 부곡리)에서 태어났다. 동학 교조신원운동의 중심지였다. 혁명의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신돌석은 1896년 19세 때 동지들을 규합해 의병을 일으켰다. 타고난 용기와 담력을 지닌 그는 일본군과 대적할 때마다 큰 전공을 세웠고, 영해의진의 중군장이 됐다. 이후 신돌석은 1905년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에도 울진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덕, 울진, 평해, 청송 등에서 일본군과 전투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그 결과 영해는 동해안 일대에서 일본이 가장 지우고 싶은 땅이 됐다. 일제는 1914년 3월 영해군과 영덕군을 합병해 영덕군으로 하고 영해를 면으로 격하시켰다. 그럼에도 영해 항일독립운동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1919년 3월 18일 영해 장날에 축산, 창수, 병곡 지역의 민중들은 조국의 독립을 부르짖었다. 동해안 최대 독립운동, '영해3·18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영해는 영남만 기억해야 할 땅이 아니다. 온 국민이 가슴에 새겨야 할 고장이다. 영해는 '제2의 안동'으로는 부족하다. 새롭게 조명돼야 한다. 예(禮)와 의(義)의 본향(本鄕)으로.
조한규 미국 캐롤라인 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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