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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들려주는 마케팅 이야기-하태길] 진정성이 전략을 이긴다. 안동 독립 운동길에서 배운 마케팅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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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불리는 안동은 유교의 본향이다.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가장 한국적인 문화를 경험하기 위해 하회마을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주목한 것은 전통의 도시가 아닌 브랜드로서의 안동이었다. 안동은 전국에서 독립 유공자가 가장 많고, 순국자 역시 가장 많은 도시라는 진정성 있는 콘텐츠를 가지고 있다. 화려한 간판 대신 고택의 처마와 선비 정신이, 광고 문구 대신 조상의 땀과 희생이 도시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관광지가 아니라, 시간이 만든 브랜드, 안동의 진짜 이야기를 만나고 싶었다. 올해 유난히 긴 추석 연휴를 보내며 고향 안동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임청각, 독립운동의 서막이 오른 곳

버려진 철길에서 들려오는 기차 소리를 타고 임청각(臨淸閣)이 모습을 보인다. '푸른 숲을 마주한 누각'이라는 뜻을 가진 임청각은 오래된 시간의 기둥마다 가을 햇살을 끼워 넣고 있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주로 떠난 이상룡(李相龍) 선생의 푸른 숲은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임청각은 그 상처를 동여매고 한 세기의 기억을 전해주기 위해 오늘도 당당히 서 있었다.

독립운동의 서막이 오른 임청각(臨淸閣)
독립운동의 서막이 오른 임청각(臨淸閣)

임청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고택이다. 한국의 민간 가옥으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그러나 일제는 독립의 기운을 끊기 위해 고택을 가로질러 철도를 놓았다. 그들은 공간을 훼손했지만 정신은 꺾지 못했다. 60여 채로 축소된 지금도 임청각의 처마와 기둥은 스치는 한 줌 바람에도 우아한 결기가 느껴졌다.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에 뛰어든 이상룡 선생의 집안 사람들 중 11명이 독립 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

대문 앞에는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임청각 사람들의 의지로 태극기가 휘날렸다. 우국충정의 기운을 안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 한 켠에는 임청각을 지키는 모과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기차길이 마당을 가르고 바람이 역사의 상처를 헤집어도 모과나무는 쓰러지지 않았다. 뿌리를 버리지 않고 해마다 열매를 맺는 용기는 유교 정신에서 시작되어 독립을 향한 품격 있는 모과 향기로 진하게 머물러 있었다.

2025년은 이상룡 선생이 1925년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취임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목표는 매서운 만주 망명 생활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이어갔으며 험난한 여정 뒤에는 그들의 투쟁을 지탱해 주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역할 또한 적지 않았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단단한 의지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세운 초석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완전히 아물지 못한 아픔이 남아있는 법흥사지 칠층 전탑
완전히 아물지 못한 아픔이 남아있는 법흥사지 칠층 전탑

임청각 옆에는 법흥사지 칠층 전탑이 서 있었다. 8세기 통일신라 시대의 유산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이다. 가까이 다가가니 기단 일부가 일제강점기에 시멘트로 훼손된 흔적이 남아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완전히 아물지 못한 채 묵묵히 시대의 아픔과 회복을 임청각과 함께 증언하고 있었다. 분노와 경외가 동시에 밀려왔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그 정신을 이어가는 방법일 것이다.

신념이 브랜드의 힘이 된 안동교회 석조 예배당
신념이 브랜드의 힘이 된 안동교회 석조 예배당

◆안동 시내, 신앙과 의지의 흔적

임청각을 기억하며 안동교회로 향했다.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붉은 벽돌의 석조 예배당에는 한국 근대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독립을 염원하던 정신이 붉은 선혈처럼 스민 벽돌은 가을 담쟁이덩굴에 감싸여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곳은 안동 최초의 교회로, 3·1운동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모이기 위한 장소였다. 예배당의 묵직한 침묵 속에서, '신념이 곧 브랜드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신앙이 곧 행동이던 시대, 차가운 돌벽 사이로 스며든 믿음의 불빛은 결국 만세의 함성으로 이어졌다.

예배당을 나서 조금만 걸으면 지금의 구시장 자리에 옛 안동장터가 나온다. 1919년 3월 이곳에서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구시장을 지나며 들려오는 상인들의 목소리 속에서 나는 묘한 일관성을 느꼈다. 지금은 시골 냄새가 가득한 정겨운 시장이지만 안동 사람들의 정직한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꾸준함과 진정성 있는 신념, 그것은 희생의 또 다른 이름으로 안동을 독립운동의 성지로 남게 했다.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협동학교, 가산서당(可山書堂)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협동학교, 가산서당(可山書堂)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 기억해야 할 믿음의 공간

임청각에서 시작한 발걸음은 안동교회와 구시장을 지나 어느덧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으로 이어졌다. 먼저 독립운동기념관 옆 내앞마을(川前里)로 향했다. 내앞마을에는 독립운동가이자 계몽 운동가인 김대락(金大洛) 선생이 살던 옛집 백하구려(白下舊廬)가 있었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는 백하구려의 사랑채는 가산서당(可山書堂)의 전신 역할을 했다. 협동학교로 출발한 가산서당은 보수성이 강한 안동 지역에 혁신의 바람을 불러일으켜 애국계몽운동을 확산시켰다. 1919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될 때까지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현재 가산서당은 독립운동기념관 뒤쪽 언덕으로 올라가 있었다. 그곳에서 독립운동기념관을 바라보며 교육의 힘을 믿고 몸소 보여주신 백하 선생의 철학을 생각했다. 작은 시골 사랑채에서 주저 없이 실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성의 언어'로 교육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안동의 독립운동가 1000인을 기리기 위한 조형물
안동의 독립운동가 1000인을 기리기 위한 조형물

내앞마을 옆 고즈넉한 곳에 자리한 기념관은 2017년에 개관하였으며 나라를 위해 헌신한 경상북도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을 소중히 담고 있었다. 마당에 놓인 둥근 석조 조형물은 태양처럼 혹은 달처럼 보였다. '안동의 독립운동가 1000인'을 기리기 위한 조형물이다. 단단히 뭉쳐진 의지는 절대 깨지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버텼던 사람들의 숨결이 돌에 스며 있는 듯했다. 낮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얼이 붉은 태양과 함께 빛나고 밤에는 후손들이 지켜준 기억을 잊지 않고 있음을 달빛으로 비추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순환하며 하나의 원 안에 꿰어놓는다. 100년 전의 외침과 오늘의 바람이 겹쳐지며 기념관 내부로 이동했다. 수많은 이름과 기록의 시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기념은 후손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그들의 정신일 것이다. 돌로 만든 원이 완결의 상징이라면 그 안에 흐르는 정신은 아직 끝나지 않은 문장처럼 남아있다. 우리는 그 문장을 이어 더 나은 문장을 작성해야 한다. 그렇게 기억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된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

독립운동기념관 안쪽의 남자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일제강점기 여성들이 겪었던 고단한 삶을 떠올렸다. '독립군의 어머니'라 불린 남자현(南慈賢) 선생은 서로군정서에서 여성 계몽과 군자금 모금에 힘썼으며, 일본 고관을 처단하려는 의거까지 감행했다. 영화 '암살'의 주인공 안옥윤(전지현 분)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도 알려진 남자현 선생은 하얼빈 감옥에서 순국하며 꺼지지 않는 독립의 불꽃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허은(許銀) 선생은 이상룡의 손부(孫婦)로, 서로군정서의 살림을 도맡아 군복을 만들며 독립군을 도왔다. 선생의 이야기는 안동시에서 '독립운동 콘텐츠 활용 발간 사업'을 통해 동화책으로도 제작되어 2025년 8월 어린이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또한 김락(金洛) 선생은 김대락(金大洛)의 여동생으로 3대 독립운동가 집안의 종부(宗婦)이자 스스로 투사가 된 여성이다. 잔혹한 고문 끝에 두 눈을 잃고 순국했으나 선생의 이름은 지금도 잊히지 않고 있다.

고즈넉한 은거지에서 로맨틱한 성지로 리포지셔닝(Repositioning)된 만휴정(晩休亭)
고즈넉한 은거지에서 로맨틱한 성지로 리포지셔닝(Repositioning)된 만휴정(晩休亭)

◆전략이 만든 브랜드는 잊히지만, 진정성이 만든 기억은 남는다.

마지막 여정은 만휴정으로 정했다. 만휴정(晩休亭)의 시작은 쌍천헌(雙川軒)이었다. '두 개의 냇물이 합쳐지는 곳에 세운 집'이란 뜻으로 15세기 후반, 김계행(金係行)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자연 속에 은거하며 처음 지은 이름이었다. 만약 이 정자가 1910년, 한일병합의 어둠 속에서도 '쌍천헌'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었다면, '두 물이 하나로 합쳐진다'는 뜻을 일본 제국주의가 교묘히 왜곡해 식민사관의 도구로 삼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2025년 안동 대형 산불은 만휴정까지 검붉게 다가왔다. 만휴정을 지키기 위해 문화재 관계자, 소방대원, 산림청, 그리고 안동 주민들의 치열한 노력이 있었다. 비닐 호스를 엮어 만든 수막(水幕) 장치가 설치되었고 고압 호스를 통해 정자 주위로 물안개를 분사시켜 열기를 막았다. 불의에 굴하지 않는 안동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역사의 불길을 지켜냈던 것이다. '세상일을 마치고 쉬는 곳' 김계행 선생이 말년에 붙인 이름 '만휴정'은 안식의 상징이 아니라 정신의 독립선언이었다.

그리고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통해 만휴정은 '고즈넉한 은거지'에서 '로맨틱한 성지'로 리포지셔닝(Repositioning)되었다. 이후 방문객이 급증하면서 '역사적 정자' 이미지가 감성적 콘텐츠로 재해석되어 새로운 타겟층인 젊은 관광객을 유입시키고 있다. 그들의 물결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지점에서 '진정성과 전략이 만나는 지점'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독립운동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정 내내 소비자를 설득하기 위해 쏟아내는 마케팅 전략들은 그들의 신념 앞에서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멀어질 뿐이었다. 오직 우국충정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었던 독립운동가들. 100여 년 전 그들이 지켜낸 정신은 이제 여행이라는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다. 결국 마케팅의 본질은 소비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을 얻는 일이다. 그 시작과 끝에는 언제나 진정성이 있었다. 마케팅에서 '진정성이 전략을 이긴다'는 말, 바로 이것이 그 증거가 아닐까?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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