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얼룩진 주방 바닥, 부러진 골프채, 바닥에 흩어진 머리카락 뭉치.
전직 정치인 A씨 부부 사이에 벌어진 다툼은 순식간에 폭력으로 번졌다. 주먹과 발, 골프채를 휘두르자 아내는 처참한 상태로 쓰러져 결국 숨을 거뒀다. 현장에 남겨진 깨진 골프채와 피투성이 바닥은 그날 벌어진 비극의 생생한 흔적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골프채는 살인 혐의를 벗게 한 핵심 단서가 됐다. 재판부는 "정말 살해할 의도가 있었다면 더 치명적인 흉기를 선택했을 것"이라며 골프채 외에는 어떤 흉기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아내의 죽음은 분명하지만 그 죽음이 '살해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골프채로 마구 폭행…쓰러진 아내 그대로 방치
A씨는 1989년 B씨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2번의 외도와 용서, 갈등과 침묵이 있었다. 2019년 4월 9일 새벽, A씨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발신자는 B씨의 내연남이었다.
분노한 A씨는 아내의 외도를 입증하려 집에 있던 소형 녹음기를 찾아내 같은해 5월 14일, 그 녹음기를 B씨 차량의 머리받침 안에 몰래 숨겼다. 그리고 다음날 녹음기를 꺼내 녹음파일을 확했다.
그리고 그날 정오 무렵, 서울 자택에서 부부는 주방 식탁에 마주 앉았다. 짧은 술잔, 긴 침묵. A씨가 외도를 추궁하자 B씨는 "왜 또 그래, 요즘 안 만난다고 했잖아"라며 불쾌감을 드러냈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 순간 격분한 A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B씨를 밀쳐 싱크대에 부딪히게 하고 허벅지를 차 넘어뜨렸다.
바닥에 쓰러진 B씨를 A씨는 발로 밟고 주먹으로 얼굴과 머리를 때렸다. 그리고는 골프채를 들었다. 피칭 웨지, 4번 아이언. 골프채는 더 이상 운동기구가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한 움큼씩 뜯겼고, 두 번째 골프채가 부러질 때까지 폭행은 멈추지 않았다.
폭행 당하던 B씨는 겨우 기어가듯 안방으로 들어갔지만 A씨의 범행은 계속됐다. 이후 A씨는 B씨를 병원에 데려가지도 않고, 현장에 흩뿌려진 피와 부러진 골프채를 정리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오후 4시 55분, B씨가 움직이지 않자 A씨는 119에 전화를 걸었다. 이미 호흡이 멎은 뒤였다.
응급실로 옮겨진 B씨는 오후 6시경 사망 판정을 받았다. 사인은 외상에 의한 속발성 쇼크와 심장눌림증. 국과수 법의관은 "피부 아래와 근육 내에서 발견된 수많은 출혈과 골절, 심장 파열 등은 강한 외력으로 인한 것"이라고 부검 소견을 밝혔다.
현장에 있던 골프채 5개 중 2개는 헤드가 부러졌고, 하나는 손잡이까지 손상됐다.
A씨는 끝까지 살인의 고의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아내가 자해하려고 해서 말리다가 팔, 다리를 몇 번 때린 것뿐이다. 살해할 생각은 없었다"고 말했다.
◇"미리 흉기 준비하지 않아"…살인 아닌 상해치사
1심은 아내를 장시간 폭행해 숨지게 한 남편 A씨에게 살인의 미필적 고의를 인정해 A씨에게 징역 15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살인이 아닌 상해치사죄가 적용해 징역 7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 사건의 비극적 결말과 별개로 피고인이 "죽게 할 의도까지 갖고 있었다"고 단정하기에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항소심 재판부는 "상해의 고의를 넘어 살해할 의도가 있었다는 점이 합리적인 의심이 없을 정도로 증명되지 않았다"며 상해치사를 적용했다.
가장 먼저 다뤄진 것은 A씨의 평소 성향이었다. A씨의 두 딸은 법정에서 "아버지는 폭언이나 폭력을 행사한 적이 없었다"고 진술했다. 가족 간 불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부부가 서로 언성을 높이며 다투거나 몸싸움을 벌인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문제의 녹음파일을 들은 뒤 피고인이 보인 행동 역시 '살해 고의'와 거리가 있다고 항소심은 판단했다. 피고인은 녹음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아내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전화연락을 하고 적어도 4시간이 지난 후 피해자를 만났다. 만나자는 장소도 집이었다.
폭행이 가해진 방식도 상세히 검토됐다. 피고인은 미리 흉기를 준비한 바 없었고, 주방에 있던 골프채 두 개는 평소 집안에 세워두던 것이었다. 실제 폭행에서도 피고인은 손과 발을 주로 사용했고, 골프채는 회초리처럼 휘둘렀다는 진술이 증거와 부합했다. 피해자 신체에 골프채 헤드의 가격으로 생겼다고 볼 상해가 없었다.
골프채 두 개가 부러진 사실도 살해 의도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보기 어렵다고 재판부는 보았다. 싱크대를 세게 내리쳐 부러졌다는 피고인의 진술, 오래된 골프채의 상태 등이 이 판단의 근거였다.
재판부는 "비록 피고인에게 살인의 범의는 인정하기 어렵지만 소중하고 존엄한 피해자의 생명을 앗아간 피고인의 이 사건 상해치사 범행은 어떠한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면서도 "피고인에게 동종 전력이나 벌금형을 초과하는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점, 자녀들은 피고인의 선처를 탄원하고 있는 점은 유리한 정상"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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