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4일 국가보훈부에 고(故) 박진경 대령에 대한 국가유공자 지정 취소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로써 살아 있는 이재명 대통령과 죽은 박진경 대령의 역사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박진경 대령은 1948년 제주 4·3 사건 당시 제9연대장으로 부임하여 진압 작전을 수행하던 중, 남로당 세포였던 문상길 중위 등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승만 정부는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12월 30일, "공산주의 전선에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헌신하여 뛰어난 군공"을 세운 공적을 기려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반면에 좌파 진영과 제주 4·3사건 유족 측은 박진경 대령이 제주 주민을 대상으로 강경진압과 주민학살을 주장했다면서 그의 국가유공자 지정을 취소하라고 반발하고 나섰다. 박진경 대령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을 추적해 본다.
제주 4·3 사건은 남로당이 대한민국 건국과 5·10 제헌의회 총선을 방해하기 위해 제주도에서 일으킨 폭동 반란이다. 경찰이 토벌 과정에서 입수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 의하면 남로당 제주지부는 1948년 3월 15일경 북제주군 조천면 신촌리에서 당 상임위원회를 열어 제주에서 무장 반란 여부를 장시간 논의했다. 결론이 나지 않자 그들은 투표를 하여 13 대 7로 무장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가 4·3 폭동이다.
미군정은 초기에는 경찰력으로 소요에 대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3월에 경찰에 연행된 청년 3명이 고문으로 사망하여 제주 민심이 동요하고 미군정과 경찰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5·10 총선 날짜가 다가오자 빨치산들은 선거 방해를 위해 극렬한 활동을 벌였고, 주민들이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강제로 입산을 시켰다.
◆빨치산들의 경찰·우익인사 학살
이 과정에서 빨치산들은 경찰과 주민, 우익 인사들을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그들은 순경의 목에 1만원, 경사 2만원, 경위 이상은 3만원, 경찰 지휘관은 10만원의 현상금을 걸고 살해를 부추겼다. 조병옥 당시 경무부장은 제주 폭동 진상을 발표했는데, 대동신문(1948년 6월 9일)은 제주 빨치산들이 다음과 같은 학살 만행을 저질렀다고 보도했다.
▷4월 18일 북제주군 조천읍에서 빨치산들이 육순이 넘은 경찰관 부모를 목 졸라 죽인 후 사지 절단, 임신 6개월인 대동청년단 지부장 형수 타살 ▷4월 20일, 임신한 경찰관 부인의 배를 갈라 살해 ▷4월 22일 모슬포에서 경찰관 부친 총살 후 수족 절단, 임신 7개월 경찰관의 누이 산 채 생매장 ▷5월 19일, 제주읍 도두리 마을 부녀자 11명을 납치, 눈오름 삼림지대에서 빨치산 50여 명이 윤간 후 총검·죽창·일본도로 젖가슴, 배, 볼기 등을 찔러 숨이 끊어지기 전 생매장….
경찰력만으로 사태 진압에 한계를 느낀 미군정은 4월 16일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의 제주도 투입을 결정했다.
박 대령은 제주 4·3사건 발생 한 달여 후인 1948년 5월 6일 제주도에 부임했다. 그가 9연대장으로 발탁된 것은 일본군 재직 시절 한라산 일대에서 진지 구축 작업을 하며 현지 지형과 민심을 잘 아는 지휘관이었기 때문이다. 부임 전에 딘 장군은 박 대령에게 제주도의 민심 안정을 위해 최소한의 무력을 사용할 것과 다음과 같은 단계별 작전 지침을 내렸다.
"귀관은 제주도의 폭도들을 진압하고 법과 질서 회복에 군부대를 이용하라. 대규모 공격에 임하기 전 소요 집단의 지도자와 접촉, 그들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는 데 모든 노력을 다하라. 경비대 작전에 의해 붙잡힌 포로들은 경찰에게 인계하지 말라. 그들은 경비대에 의해 준비되고 보호된 막사에 두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본토로 후송 조치하라."
◆미군정 통제 하에 단계별 작전 진행
이어 5월 20일경 브라운 대령을 제주도로 보내 대유격작전의 총지휘를 맡겼다. 제주도 최고 지휘관 브라운 대령은 11연대 미 고문관 두르스 대위를 통해 박진경 대령의 작전을 확인·감독했다. 박 대령은 미군정의 통제하에 작전을 실시했다는 뜻이다.
딘 장군의 지침에 따라 박 대령은 김달삼의 귀순 공작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자 대유격작전으로 전환했다. 제1단계 작전은 각 마을별로 마을 주위에 돌담과 방벽을 구축하고 자위대를 조직하여 자체 경비를 강화한 전략촌을 건설했다. 이어 11연대 병력을 보충 받아 4개 대대(15개 중대 3,800명)를 동원, 5월 30일부터 한라산 일대에서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1차 작전은 5월 30일부터 6월 2일, 2차 작전은 6월 14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되었다. 부대 내 남로당 프락치에 의해 작전 정보가 누설되어 빨치산 주력은 도주하고 650여 명의 입산 주민들을 포로로 잡았다.
미군정 당국은 3월에 발생한 제주 경찰에 의한 고문치사 사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엄격한 포로 관리 지침을 내렸다. 그 결과 9·11연대 병력이 작전 중 체포한 포로는 합동심문센터로 인계되어 합동심문조가 심문했다.
6월 16일 미군정 기록에 의하면 합동심문센터는 포로 심문 결과 대부분은 빨치산의 강압에 의한 단순 입산으로 밝혀져 훈방했고, 575명을 심문 중인 것으로 되어 있다. 좌파 진영에선 박진경 연대장이 6천여 명의 주민을 체포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남파된 간첩 성시백이 운영했던 조선중앙일보의 1948년 6월 12일자 기사를 근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는 경비대(국군)·경찰에 체포된 폭도가 6천여 명, 서울에서 판·검사들이 파견되어 재판을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기사 내용을 자세히 보면 폭도 6천 명이란 수치는 4·3사건 초기부터 6월 12일까지 경찰·경비대에 체포된 폭도들의 총 숫자다. 박 대령의 제주 부임 시기는 5월 6일이었다. 마치 박 대령 재임 기간에 체포된 포로 숫자가 6천 명인 것처럼 부풀린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완전 무시한 것이 2021년 4월 2일 제주 KBS가 4·3 특집방송으로 내보낸 '암살 1948'이란 다큐멘터리다. '암살 1948'은 박 대령이 9연대장으로 부임 직후부터 무차별적 토벌을 지시했으며, 그 결과 주민들이 무조건 연행되었고, 살아 돌아오면 다행이었으며, 심지어 어린 학생까지 군홧발에 짓밟혔다는 요지의 내용을 방영했다.
제민일보 4·3 취재반이 발간한 단행본 『4·3은 말한다』는 좌파적 시각에서 쓴 책이다. 이 책 제3권 419~429쪽에 박 대령이 제9·11연대장 재임 기간 중 경비대의 남로당 유격대(빨치산) 사살 전과는 '작전 중 사살 2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비대의 정당한 토벌작전에 의해 사살당한 희생자가 25명이었다는 뜻이다. 어디서 어떻게 무차별 학살을 벌였다는 것일까?
당시 제주 파견 11연대 중대장으로 작전 현장에 있었던 채명신 장군은 "박진경 대령은 양민을 학살한 게 아니라 죽음에서 구출하려 노력했다. 4·3 초기에 경찰이 처리를 잘못해 많은 주민이 입산했는데, 박 대령은 폭도 토벌보다는 입산 주민의 하산에 작전의 중점을 두었다. 그는 선무공작으로 주민을 입산한 인민유격대로부터 분리하는 데 주력했다"라고 증언했다. (정부 4·3사건 진상보사보고서, 218쪽)
좌파 진영이나 제주 4·3 유족 측은 이러한 증언을 무시하고 근거 없이 일방적인 주장을 내놓았고, 이재명 대통령은 그런 주장을 여과 없이 수용했다.
◆간첩 성시백이 운영한 좌파 언론이 가짜 뉴스 뿌려
더욱 기괴한 것은 5월 20일 9연대 산하의 최 모 상사 이하 43명이 99식 총 1정씩과 탄환 1만4천 발을 트럭에 싣고 무장 탈영한 사건이다. KBS 다큐멘터리와 좌파 언론들은 이 사건은 9연대 병력 일부가 박진경 연대장의 가혹한 토벌에 항의, 제주 주민들을 살리기 위해 탈영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9연대 남로당 책임자 문상길 중위의 지시로 탈영했다. 그런데 경찰이 노획한 남로당 문건에 의하면 문상길은 4월 20일경 빨치산 대장 김달삼과 만나 적당한 시기에 9연대 병력을 무장 탈영시키기로 합의한 사실이 명기되어 있다. 또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는 5월 10일 남로당이 제주도 모처에서 중앙 정치지도원 회의를 열었다. 참석자는 남로당 정치지도원(투쟁보고서에는 '올그'라고 표기), 남로당 제주도당 군책 김달삼, 제주 주둔 9연대 소령 오일균(남로당 군 간부) 등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남로당 정치지도원은 9연대 남로당 세포 오일균 소령에게 신임 연대장 박진경 암살, 그리고 9연대 병력의 집단 무장 탈영을 지시한 사실이 밝혀졌다. 게다가 9연대 무장 탈영 사건은 박진경 대령의 본격적인 토벌작전이 개시되기 열흘 전에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무슨 가혹한 토벌에 반발하여 탈영했다는 것일까?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문상길 중위는 손선호 하사 등 일당 8명에게 박 대령 암살을 지시했다. 손선호는 6월 18일 새벽 3시 15분경 취침 중인 박 대령의 머리에 M1 소총을 발사하여 암살했다. 사건 7일 만에 모 하사관의 투서로 범인 일당이 수사기관에 체포되었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문상길은 "박진경 대령이 부임 후 경찰과 협력하여 소요 부대(빨치산)에 무조건 공격 명령을 내렸으며 도민도 탄압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암살범들의 주장을 근거로 KBS 다큐멘터리는 문상길은 제주도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자기 목숨 내놓고 상관을 암살한 것이라며 "이것은 단순한 상관 암살범이 아니라 제주도민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 사람으로 역사의 법정에서 재평가 되어야 한다"라는 주장을 방영했다. 문상길과 손선호는 사형 선고를 받고 9월 23일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박진경 대령의 9연대장 재임일은 43일에 불과했다. 너무 일찍 암살당하는 바람에 4·3 진압에 큰 공을 세울 시간 자체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학살 주역으로 낙인찍으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박 대령은 촉망받는 군 지휘관 중의 한 명이었고, 영어에도 능통하여 미군정과의 관계가 긴밀했다. 이런 엘리트 군인을 4·3 학살 명령자로 만들면 국군의 정체성과 정당성을 허물 수 있는 훌륭한 소재가 된다. 또 박 대령을 양민 학살자로 낙인찍음으로써 제주 빨치산들이 저지른 학살극을 국군 쪽으로 전가하기 위한 목적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주 4·3사건을 민중 항쟁으로 미화하는 작업은 '역사 무기화 전략'의 표본에 해당한다. 이처럼 사악한 '역사 무기화 전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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