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에서 이른바 '한사군' 문제는 오랫동안 논쟁의 중심에 놓여 왔다. 그중에서도 '낙랑'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학술 용어를 넘어, 한국 고대사를 바라보는 인식 틀 자체를 규정해온 핵심 개념이었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결과로 평양과 대동강 유역은 수 백년 동안 '한사군의 공간'으로 설정되었다. 발견된 유물과 유적은 한 제국의 직접적 지배흔적으로 해석되고 인식되는 경향을 만들었다. 일본 식민사학이 시작한 이러한 접근은 고대 역사를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구성한다는 점에서 사실의 검증 여부와 함께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한사군'이라는 말은 언제, 왜 만들어졌는가
'한사군'이라는 명칭이 해당 시대의 역사적인 실재를 정확히 반영하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검토가 부족했다. 지금까지 논쟁들의 상당한 부분은 이 용어가 만들어낸 인식의 틀에서 비롯된 면이 강하다. '한사군'이라는 말이 전제되는 순간, 낙랑은 한나라의 식민 통치단위로 규정되고, 이후의 모든 자료 해석은 이 전제에 종속되기 쉽다.
'평양 낙랑군설'은 일본 제국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역사적 근거로 적극 활용되었다. 때문에 독립 이후에는 반작용으로 낙랑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한반도 내 위치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시각들이 학계와 재야에서 등장했다. 그런데 이 두 입장은 모든 면에서 대립하지만, 공통된 한계를 지닌다. 모두 '낙랑군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평양 지역인가 아닌가?'라는 단순한 질문에 매달려 낙랑이 존재했던 역사적인 구조와 장기적인 맥락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은 한사군을 설치한 주체인 한(漢)나라의 대외정책과 그 시대의 국제환경, 그리고 위만조선의 역할과 관계 속에서 파악할 필요성이다. 한나라는 무제대에 이르서 60여 년에 걸친 흉노에 복속된 상황을 벗어나 팽창하면서 주변 지역에 몇 개의 군을 설치했다. 남쪽으로는 광동성 일대인 남월 지역에 9군을 설치했고, 서쪽으로는 감숙성을 넘어 타림분지인 오아시스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군현과 관할 단위를 두었으며, 북서방 초원 지역에서도 유사한 행정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이들 사례들을 종합하면 군의 설치가 곧바로 장기적인 식민통치를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군현은 한 제국이 주변부 세계에 접근할 때 사용하는 하나의 관리 방식이었으며, 그 성격은 군사·외교·무역·정보수집 등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한나라의 행정력은 수도에서 멀어질수록 급격히 약화됐고, 주변부 지역에 대규모 인력과 재정을 장기간 투입할 능력과 의지는 언제나 제한적이었다. 때문에 한나라의 쇠약과 더불어 군현들은 얼마 못 간 채로 유명무실해지거나 철폐됐다.
◆평양 지역은 한나라의 수백 년 식민거점이었을까?
이러한 점에서 대동강과 하구 유역의 조건은 더욱 중요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이 지역은 한나라의 수도에서 지리적으로 매우 먼 곳이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인 가치 또한 제국의 핵심 관심권과는 거리가 있었다. 남월 지역처럼 해양 실크로드를 이용해서 조세와 상업 이익이 기대되는 곳도 아니었고, 오아시스 실크로드처럼 무역과 군마공급 등 제국 운영과 직결되는 전략 지역도 아니었다. 더구나 정치·군사적으로도 한나라의 핵심 방어선과는 멀어 간접통치조차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에 불리한 조건이었다. 실제로 수도권인 섬서 지역이나 산서 지역에서 천연장벽이 있는 요서와 요동을 넘어 압록강 하구를 도하해서 첩첩의 자연 방어선이 완벽한 대동강 하구까지 이르는 육로 교통망은 아주 악조건이다. 따라서 평양 일대가 한무제가 파견한 육군 5만이 공격력을 집중시킨 왕험성이 있다고 판단하기는 매우 곤란하다. 그 이후의 역사들이 증명하듯이 대규모의 군사가 신속하게 작전을 펼칠수 없으며, 상시적으로 한나라 중심부와 교류하기에 매우 악조건이다,
해양의 길은 산동반도의 동안(成山)을 출항해서 서해중부를 횡단하여 대동강 하구에 상륙하는 방식이거나 발해만을 경유한후 황해북부와 서한만을 경유하여 대동강 하구까지 연근해항로를 이용하는 방식이 있다. 당시의 조선술과 항해술을 고려할 때 평양 지역은 『사기』의 기록처럼 한나라의 산동수군이 상륙해서 빈번한 공방전을 펼칠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설사 이러한 조건 속에서 한나라가 승리했다 해도 막대한 인력과 행정력을 투입해 수백 년 동안 직접 지배했다고 상정하는 것은 제국 운영의 현실과 세계사적인 예와 비교하면 부합하지 않는다.(『고조선 문명권과 해륙활동』) 소위 '한사군'이라 불리는 군들의 존속 양상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사료를 종합하면 3군이 먼저 설치되고, 1년 후에 현도군이 설치됐다. 하지만 낙랑군을 제외하고, 현도군은 이전을 거듭하다 고구려에 멸망당했고, 임둔군과 진번군은 이른 시기에 폐지됐다. 그렇다면 독립된 행정 단위라기보다 속현이나 거점, 중계지에 가까웠을 가능성도 크다. 낙랑조차도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한사군의 실체
또 하나는 '한사군'이라는 명칭의 실체이다. 이 용어는 동 시대의 공식적인 행정 명칭도, 그 시대 사람들의 자칭도 아니라는 점이다. 한나라는 이를 하나의 고정된 체제로 묶어 '한사군'이라 부르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한(漢)'이라는 명칭이 만들어내는 시간적 착시 역시 간과할 수 없다. 해당시대의 기록인 『사기』는 조선의 멸망 후 '군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할 뿐, '사군 체제'를 제도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1세기에 편찬된 『한서』에 이르러서야 조선지역의 군현이 묶여 서술되지만, 이 역시 4군을 하나의 고정된 체제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사군'이라는 표현은 행정 현실의 정확한 반영이라기보다, 후대에 사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여러 군현을 집합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편의적 용어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후대적인 개념이 마치 고대제도의 실체였고, 4군이 마치 수 백 년 동안 존속된 것처럼 인식을 왜곡시켰다. 전한은 서기 8년에 붕괴했고, 왕망에 세운 신(新) 왕조가 들어섰고, 다시 후한이 25년에 성립했고, 220년에 멸망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다른 정치적인 시기들을 한 단위로 묶어 '한사군'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해 왔다. 이것은 논의의 방향을 특정한 결론으로 수렴되고 만들고, 다른 가능성들을 무시하거나 주변화시켰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한사군이 설치된 직후부터 고조선을 계승한 소국들이 역사에 등장했다. 고구려는 건국한 후부터 한나라와 군사적인 충돌을 거듭했으며, 낙랑지역을 여러번 공격했다. 낙랑군이 고구려에 의해 최종적으로 소멸된 313년은 한나라와는 연관없는 시기이다. 따라서 낙랑군을 한사군이라는 명칭으로 한나라의 장기적 식민 통치 기관으로 인식시키게하는 태도와 연구방식들은 문제가 있다.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하면, 보다 현실에 가까운 해석이 가능해진다. 설사 '낙랑군' '낙랑'이라는 행정 명칭은 한나라의 실질적·지속적인 지배가 미친 통치공간이라기보다, 전환기적·형식적인 관리체제의 명칭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 집단이 지역 사회를 일괄적으로 지배하는 방식이 아니라 장기간 활동해 온 토착민 사회의 구조 위에 외래 질서가 단기간 겹쳐진 후에 상호작용을 통해서 지속된 체제라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특히 한나라가 실질적으로 힘을 상실한 후에는 다만 그 명칭과 문화, 일부 주체들이 한나라 문화와의 연관성을 유지했을 뿐이다.
◆토착 고조선 문명과 외래 한(漢)문화의 만남
이 지역에서 발견된 고고학 자료들은 이러한 해석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대동강 유역과 하구 지역에는 약 4천 년 전부터 대규모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장기간 축조되어 왔다. 고인돌은 단순한 매장 시설이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과 권위, 의례와 정치 질서의 중심을 상징하는 거대한 구조물이다. 이 사실은 평양과 대동강 일대가 특정한 세력의 일시적인 거점이 아니라 지속적인 문명의 중심 문화권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해륙 네트워크라는 관점에서 보면, 평양과 대동강 유역은 변방이 아니라 교류와 순환이 집중되는 중심부였다. 신석기· 청동기 이래 조선적 세계 내부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1세기부터 3세기까지 한나라 문화의 요소가 반영된 유적과 유물이 대량으로 확인된다. 낙랑토성으로 불려온 평지 토성은 치소로 비정되었고, 여기서 관청지·주거지·병영지 등 성내시설 흔적(관청터·집터·병영터)과 우물(벽돌우물) 등이 확인됐다. 하지만 아직도 문제점들은 있다. 최근에 북한은 낙랑시대 이전에 쌓은 고조선 성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또한 봉니와 목간 또한 행정의 증거로 거론되지만, 출토 맥락이 불분명하거나 자료 공개가 충분하지 않은 사례가 있다. 정백동 고분군에서 귀틀,벽돌무덤 등 복합적인 묘제들이 발견됐고, 석암리 고분군에서 발굴된 화려한 부장품과 위세품들이 발견됐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 지역이 동아시아 한문화권과 깊이 접촉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문화의 유입이 곧 정치적 지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화는 이동하고 선택적으로 수용될 수 있지만, 지배는 제도와 시설, 그리고 반복되는 행정의 흔적을 남긴다. 그런데 낙랑지역에서는 풍부한 문화적 흔적에 비해,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행정지배를 입증할 물리적 구조가 상대적으로 희박하다. 때문에 중앙관료의 존재를 단정하기보다는, 토착 엘리트가 외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재구성한 결과로 해석하는 편이 설득력 있다. 결국 이 문제의 핵심은 명칭과 실재를 구분하는 데 있다. 그런데 북한은 해방 이후에 낙랑구역에서 3,000여 기의 고분을 발굴했고, 금은 장신구, 마구류 등 1만 6,000여 점의 유물을 수습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유물들이 한나라의 문화가 아니라 고조선의 전통을 계승한 독자적 문화라고 주장한다. 그 밖에 봉니문제도 거론했다. 아직 확증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상황들은 기존의 주장에 신중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
'한사군' '낙랑군'이라는 용어가 강요한 통념과 달리 대동강 유역은 문화와 역사적 성격이 복합적이고 유동적이었다. 이 지역은 한 제국의 안정된 동쪽 식민 거점이라기보다, 기존의 토착 세계 위에 외래 질서가 일정 기간 겹쳐지고, 그 속에서 협상과 충돌, 재편이 반복된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동아시아 고대사를 분석하면 항상 제국의 영향은 언제나 일방적이고 단선적으로 작동한 것이 아니다. 외래세력들과 토착세력들 사이에는 지배와 교류, 강제와 선택, 이주와 토착화가 늘 함께 움직였다. 평양지역 역시 그러한 중층적 구조 속에 놓여 있었던 공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곳은 한 제국이나 잔여 세력들의 명령이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장소라기보다는 여러 세력들이 만나 협상하고, 충돌하며, 재구성된 역사적 장이었다.
◆동아시아 질서와 연동된 우리 역사와 문화
이제 한사군, 특히 낙랑군 문제는 '한반도에 있었다/없었다' '한나라의 식민기관이다/ 아니다'라는 장기간 지속된 비생산적인 논쟁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명칭과 지배세력이 아니라, 어떤 역사적인 현실이 작동했는가다. 낙랑 문제는 문명과 역사를 평가하는 기준을 바꿔야 한다. 고조선의 역사발전, 문화의 성격과 연동시켜 해석하고, 그시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한나라의 군현정책의 실태 등과 연동시켜 판단해야 한다. 그렇다면 소위 '한사군'과 '낙랑문제'는 식민 지배라는 불유쾌한 상징을 넘어 동아시아 고대사가 지닌 복합성과 전환을 보여주고, 우리문화와 역사의 고유성을 이해하는 핵심 사례로 활용할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댓글 많은 뉴스
"하늘 아래 두 태양 없다더니" 손 내민 한동훈, 선 그은 장동혁[금주의 정치舌전]
李 '기본소득' 때렸던 이혜훈, 첫 출근길서 "전략적 사고 필요"
'이혜훈 장관' 발탁에 야권 경계심 고조
李대통령, 여객기 참사에 "깊은 사죄"…유족 "진상 규명부터"
국민 신뢰 갉아먹는 與, 민주주의 역행 논란에 도덕성마저 추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