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사람들의 삶터
사람들이 집을 드나든다. 고향을 찾듯 사람들은 저마다의 집으로 발걸음을 내디딘다. 삶이란 어쩌면 본향을 찾아가는 여정인지도 모른다. 집이 없다면 삶도 없을 것이다. 집과 삶을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집 속에 삶이 있고 삶 속에는 집이 깃들어 있기에 그렇다.
문득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몸이 머물 마지막 집은 어디일까? 그곳에서 삶과 어떻게 작별하게 될까? 부디 그 집이 냉랭한 시설이 아니기를 바란다. 나아가, 길 위의 나그네를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환대해 주는 집이기를 소망한다.
설을 보내고 나니,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넉넉하게 품을 내어주는 집다운 집을 생각하게 된다. 몸을 일으켜 그 집을 찾아 나선다. 모든 이의 집이었으나 기억 속에서 조금 멀어진 집이 있다. 지금은 달성공원이라 불리지만 처음부터 공원이었던 것은 아니다. 더구나 동물원은 더욱 아니었다. 이곳은 달구벌 사람들의 삶터이자 구릉 위에 자리한 큰 집이다.
그 큰 집의 바탕에 달성토성이 놓였다. 흙으로 쌓은 성곽은 달구벌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굽어보며 자리를 지켰다. 방어를 위해 쌓은 성이라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삶의 터전이다. 달구벌을 보듬은 울타리였고, 대구라는 도시를 싹트게 한 밑자리였다.
놀랍게도 큰 집 주변에는 일요일마다 장이 선다. 그저 침묵하는 옛터가 아니다. 사람을 불러들이는 살아 있는 집이다. 먹거리와 입을거리가 노점에서 흥정되고 오래된 물건이 새 주인을 기다린다. 이른 시간부터 취기 섞인 목소리가 거리를 채운다. 집은 박제된 과거에 갇혀 있지 않았다. 기척과 웃음, 실랑이와 손짓을 반기는 집이다.
공원 안으로 들어서기 전, 장터를 한 바퀴 돈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풍경들에 시선을 뺏긴다. 오래된 집마다 거쳐 간 이들의 기억이 배어 있듯, 달성의 기억 또한 북적이는 길목에서 다시 깨어나고 있다.
◆달성이 품은 기억들
달서천 구릉의 유려한 흐름을 따라 달성이 터를 잡았다. 그 너른 터 안에서 삼한시대 달구벌 사람들이 삶의 기틀을 일궜다. 성벽 밑자리에서 발견된 조개더미와 토기 조각은 이곳이 먼 옛날부터 정주지였음을 증언한다. 달구벌의 숨결이 시작된 곳, 그곳이 바로 오늘날의 달성공원이다.
신라 첨해이사금 15년(261년), 이곳에 비로소 성이 솟아올랐다. 자연 구릉의 경계를 빌려 흙을 견고하게 다져 올린 토성이다. 이후 달성은 전략적 요충지로 거듭나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굽이치는 세월 속에서 모진 소용돌이를 겪었으나, 요행히 본래의 모습만큼은 잃지 않은 채 우리 곁에 남았다.
어느새 공원 정문 앞에 닿았다. 설레는 표정으로, 안으로 향하는 가족들과 관람을 마치고 느릿하게 나오는 이들이 뒤섞인다. 정문을 지나 오른쪽 언덕을 오르니 사슴사가 먼저 반긴다. 이어 공작사와 맹금사, 침팬지사와 늑대사들이 차례를 드러낸다. 신이 난 아이들은 뛰어다니고 어른들은 뒤를 쫓으며 연신 셔터를 누른다.
이 생명들이 제 발로 이곳을 택한 것은 아닐 테다. 근대 공원의 탄생이 그렇듯, 공원이라는 문명의 공간이 들어서며 식물원과 동물원이 그 뒤를 따랐다. 한때는 이것을 문명의 상징이라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이야기가 들려온다. 갇힌 생명들도 누려야 할 최소한의 복지가 있다는 뒤늦은 자각이다.
지척에 수운 최제우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용담정의 동상이 늠름한 위엄을 뽐낸다면, 이동상에는 어딘지 모를 쓸쓸한 기운이 감돈다. 대구 장대에서 참형을 당했던 수운의 비극이 그림자처럼 겹쳐 보이기 때문일까. 그가 순교한 지 백 주년이 되던 해, 비로소 이 자리에 그의 넋을 기리는 형상이 세워졌다.
동상 너머로는 관풍루(觀風樓)가 시야에 들어온다. 고풍스러운 자태의 이 누각은 본래 이곳에 있지 않았다. 경상감영의 정문인 포정문(布政門) 위에서 백성의 민생을 살피던 문루였다. 그러나 대구읍성을 사라지게 한 역사의 소용돌이가 관풍루를 가만두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의 격변은 사람의 삶만 뒤흔든 것이 아니다. 건물 또한 제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관풍루는 그렇게 고향 같은 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성곽길 언덕에 덩그러니 놓였다. 백성들의 안녕을 살피던 위용은 사라지고 이제는 공원의 풍경을 완성하는 경관으로 남겨졌다.
관풍루에서 시작되는 성곽길은 마치 큰 집 달성의 너른 마루 같다. 그 마루 위를 천천히 거닌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긴 시간의 결이 발끝으로 잔잔하게 스며든다. 옛사람들이 걸었던 길 위를 걷는 기분은 그저 산책과는 다르다. 이 길 위를 또 다른 누군가가 계속해서 걸어갈 것이다. 이처럼 길은 누군가 걸어줌으로써 생명을 얻는다. 길 위로 겨울이 내려앉았지만, 머지않아 만물을 깨우는 봄기운이 피어오를 것이다.
걷다 보니 돌계단이 촘촘히 박힌 언덕에 다다른다. 계단 끝은 하늘과 맞닿은 듯 높직하게 걸려있다. 수만 개의 발자국이 겹겹이 쌓이며 다져진 길목이다. 군데군데 이가 빠지고 모서리가 둥글게 마모된 돌덩이들은 그 자체로 달성의 묵직한 무게 같다.
타임머신에 오르듯 계단을 한 칸씩 짚어 오른다. 숨이 기분 좋게 가빠질 즈음 시야가 확 트이며 도심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낮게 엎드린 지붕들과 매끄럽게 솟은 빌딩들이 성벽 너머로 빼곡하게 어우러져 펼쳐진다. 토성의 고풍과 도심의 현대적 모습이 겹치는 순간이다.
언덕을 내려와 공원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뜻밖에도 시선을 붙드는 것은 이상화 시인을 기리는 문학비다. 비에는 이상화의 시 「나의 침실로」의 일부 구절이 오롯하게 새겨져 있다. 서슬 퍼런 식민지 시대, 자유를 노래한 시인의 뜨거운 언어가 당장이라도 비석을 뚫고 춤을 출 기세다.
◆기억의 성지(聖地), 달성
비단 문학비뿐만이 아니다. 이곳에는 허위(許蔿, 1855~1908) 선생과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의 기념비가 든든한 형제처럼 서로 마주 보고 섰다. 잃어버린 나라를 찾으려 삶을 바친 선조의 이름이 달성에 불멸로 남았다. 달성은 단순히 오래된 성곽이나 산책로에 그치지 않는다. 달성은 토성이 쌓인 그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달구벌의 영광과 오욕을 품어 안은 기억의 성지다. 이곳을 딛는 걸음이 절로 경건해지는 이유다.
지금은 이 비들이 선 풍경이 자연스럽지만, 이곳은 한때 달성 서씨 문중의 세거지였다. 조선 세종조, 나라에서 요충지인 이 땅을 헌납하기를 요구한다. 땅을 내놓은 대가로 그 어떤 보상도 마다하고, 백성들이 갚아야 할 곡식 이자를 줄여달라고 청한 분이 바로 서침(徐沈)이다. 세거지를 나라 땅으로 내어주되, 백성의 살림살이가 편하기를 바란 어른의 마음은 서침나무가 되어 오늘도 달성의 파수꾼처럼 서 있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보금자리가 있듯, 우리 모두에게도 대물림되는 집이 있다. 달성이 바로 달구벌 공동체의 큰 집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집의 풍경도 쉼 없이 변해 왔다. 동물원이 들어서고 기념비와 문학비가 세워졌으며, 한때는 치욕스러운 대구 신사가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단 하나 변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이 집의 너른 마당에는 달구벌 사람들의 기척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장을 보러 오고, 누군가는 성곽길을 산책하며, 누군가는 아픈 역사의 흔적을 조심스레 뒤적인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어르신들의 느긋한 발걸음, 나그네의 여정이 달성 구릉 위에 깊게 어우러진다. 집은 한 사람의 기억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수많은 이의 삶이 겹치고 쌓일 때, 집은 비로소 무너지지 않는 내력을 얻는다.
언젠가 달성공원이라는 명칭이 달성이라는 본래의 이름으로 온전히 불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설령 그런 날이 더디 오더라도 상관없다. 이름이 무엇이라 불리든, 이곳이 달구벌 사람들이 삶을 이은 거대한 집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달구벌의 집, 달성. 그 이름이 우리의 기억 속에 또렷이 새겨지기를 바란다. 이곳에 발걸음을 들이는 사람마다 달구벌의 내력을 조용히 복기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이 집이 앞으로도 오래도록 우리들의 사랑을 받기를 기대한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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