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수출 114억 달러, 올해 1~2월에만 19억 4300만 달러. 사상 최대 실적에 취해 있던 K뷰티가 한 달 만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중동 전쟁이 석 달째로 접어들면서 화장품을 담을 플라스틱 용기를 구하지 못하는, 업계에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내용물은 완성됐는데 담을 통이 없다. 수출 배에 실을 수가 없다.
그 사이, 러시아산 싼 기름을 콸콸 쓰는 중국이 글로벌 화장품 시장을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지난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전격 공습한 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틀어막았다. 세계 원유 수송의 대동맥이 끊기자 국제 유가가 치솟았고, 한국 산업 전반에 충격파가 퍼졌다. 쓰레기 종량제 봉투 품귀, 페인트값 55% 인상, 배달 포장재 대란. 그런데 정작 업계 안에서 가장 당혹스러워하는 곳은 따로 있었다. 역대급 호황을 맞이한 화장품 산업이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나프타 가격은 올해 1월 초 배럴당 56.38달러에서 3월 중순 127.95달러까지 뛰었다. 두 달 반 만에 127% 폭등이다. 나프타는 플라스틱의 어머니다. 이 물질을 고온에서 분해하면 에틸렌과 프로필렌이 나오고, 이것이 화장품 용기의 원재료가 된다. 한국은 나프타 수요의 45%를 수입에 의존하는데, 그 가운데 77%가 중동에서 온다. 전쟁이 이 구조의 급소를 정확히 찔렀다.
현장의 비명은 구체적이다. 중소 화장품 용기 제조업체들은 석유화학업체로부터 직전 3개월 평균 구매량 기준으로 원료를 배정받는다. 그런데 전체 물량이 달리자 대형사에 밀려 배분 순위에서 아예 빠졌다. 일부 소규모 업체들은 이미 생산 라인을 세웠다. 제약 및 화장품 용기 전문 제조업체 럭스팩은 고객사들에게 원료 변경, 납기 지연, 단가 인상을 긴급 통보했다. 대형사라고 사정이 낫지 않다. 한국콜마 자회사 연우는 당장은 기존 물량만큼 공급받고 있지만, 석유화학 기업 전체의 공급 여력이 바닥나면 대형사도 버틸 수 없다는 게 내부 판단이다.
용기만 문제가 아니다. 화장품을 만드는 원료 자체가 흔들린다. 대한화장품산업협회는 화장품 산업이 원유에 직접 의존하는 구조는 아니지만, 포장재와 일부 화학 기반 원료의 조달 경로를 고려하면 유가 급등이 제조원가 전반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달러 강세까지 겹쳤다. 원료 수입 단가, 수출 대금 정산, 해외 법인 운영비. 고환율과 고유가가 동시에 덮치면서 화장품 업체들의 원가 압박이 급격히 가중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중국의 존재감이 부각된다.
중국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산 원유와 나프타 수입을 대폭 늘려왔다.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원유는 하루 200만 배럴을 넘어섰고, 나프타 수입량도 2025년 상반기 기준 180만 톤에 달한다. 핵심은 가격이다. 러시아 원유는 한국이 주로 쓰는 중동 원유보다 배럴당 10~20달러 싸다. 호르무즈 해협이 막혀 한국 공장이 멈추는 동안, 중국은 러시아라는 우회 파이프라인을 통해 기름을 안정적으로 빨아들이고 있다. 같은 나프타를 쓰면서 한쪽은 127% 오른 값을 치르고, 다른 쪽은 예전 가격 그대로 공급받는 구도다.
이 원가 격차가 화장품 판에서 어떤 의미인지는 자명하다.
C뷰티는 이미 K뷰티를 맹추격하고 있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25년 1~9월 중국의 화장품 수출액은 약 54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9.1% 늘었다. 한국의 85억 2000만 달러에는 못 미치지만, 연평균 성장률은 중국 18%, 한국 6%다. 가속도가 다르다. 국내 시장에서도 변화는 감지된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화장품의 한국 수입액은 1억 4638만 달러, 한화 약 2100억 원으로 전년 대비 29% 뛰며 처음으로 2000억 원 선을 넘었다. 플라워노즈가 서울 성수동에서 연 팝업 스토어에 2주 만에 2만 7000명이 몰렸고, 무신사 입점 직후 관련 검색량이 650% 폭증했다. C뷰티를 '싸구려'로 치부하던 시절은 끝났다.
더 불편한 진실이 있다. C뷰티 브랜드 상당수가 한국 기술로 만들어지고 있다. 플라워노즈, 주디돌 등 주요 중국 브랜드들이 한국콜마, 코스맥스 같은 국내 ODM 업체에 생산을 맡기고 있고, 한국 연구 인력까지 영입해 스킨케어 영역으로 품질을 끌어올리고 있다. 한국 기술 기반의 중국 브랜드. 해외 소비자 입장에서 이것은 K뷰티 품질에 중국 가격을 얹은 매력적인 대안이 된다.
현재 C뷰티의 주력은 화려한 색감과 패키지를 앞세운 색조 화장품이고, K뷰티의 아성인 스킨케어와 직접 부딪치는 영역은 아직 제한적이다. 하지만 동남아시아와 중동 등 가격에 민감한 신흥 시장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라운드랩의 홍진석 최고마케팅책임자는 "가성비가 중요한 동남아 시장에서는 C뷰티의 경쟁력이 앞으로 더 높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부 품목에서는 이미 역전이 시작됐다는 현장의 목소리도 들린다.
위기감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곽기성 허니스트 대표는 "용기와 원재료를 구할 수가 없으니 중국에서 부자재를 수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이어 "한국 업체가 중국산 부자재에 의존하는 순간, 원가 구조에서 C뷰티를 이길 방법이 사라진다"며 "이러다 글로벌 시장에서 K뷰티 자리를 통째로 뺏기는 건 아닌지, 밤잠을 설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도 움직이고 있다. 경제부총리는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나프타를 경제안보품목으로 한시 지정한다고 밝혔다. 나프타 수출 제한, 국내 공급 우선 배분, 러시아산 원유 수입 절차 개시, 총 1조 5000억 원 규모의 특별 금융 지원까지 대책을 쏟아냈다. 하지만 업계의 반응은 냉정하다. 정부가 방출하기로 한 비축유 2246만 배럴은 국내 하루 소비량 기준 7~8일치에 불과하다. 원유에서 나프타를 뽑아낼 수 있는 수율이 평균 20%인 점까지 감안하면, 하루 약 56만 배럴의 나프타를 일주일 남짓 추가 생산할 수 있을 뿐이다. 단기 처방으로는 구조적 위기를 막기 어렵다.
K뷰티의 기초 체력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수년간 쌓아올린 글로벌 브랜드 파워, 스킨케어 분야의 독보적 기술력, 미국과 일본 시장에서의 오프라인 채널 확장. 이 자산들은 여전히 강력하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외생 변수가 원가 구조와 공급망이라는 산업의 허리를 흔들고 있고, 그 빈자리를 중국이 채우고 있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한 산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진짜 위기는 용기 한두 달 못 구하는 게 아닙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원료와 부자재의 중국 의존도가 구조적으로 높아지는 겁니다. 원가 경쟁력의 기울기가 한 번 바뀌면, 글로벌 시장에서의 판세 뒤집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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