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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이거, 요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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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책방으로 가다
전지영(소다캣) 지음/ 소다캣(요가와책) 펴냄

영화평론가 백정우

표지는 핑크였다. 모름지기 남자는 핑크 아닌가. 오피스텔로 보이는 창가에 고양이 한 마리가 앉은 사진이 박혀있었다. 책은 작고 아담하고 가벼웠다. 목차를 휘릭 넘기며 살피는데 왠지 예감이 좋았다.

글 솜씨가 남달랐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널렸지만 맛깔나게 귀에 착 감기도록 쓰려면 일정 기간 훈련과 반복 학습이 필요한 법. 그의 글에선 일정한 교육을 받은 이에게서 풍기는, 그런 냄새가 났다. 홍대와 서촌이 섞인 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합정동 오피스텔에 사는 출판사 편집디자이너 출신이었다. 현재는 독립출판사 운영자이면서 글을 쓰는 작가로 살아가는 커리어우먼. 일러스트레이터 혹은 요가선생님, 전지영의 『책방으로 가다』는 일상 이야기 위에 자신이 선정한 10권의 책에 관한 단상을 얹어 버무려낸 달큼한 에세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책방으로 가다』는 "잠깐이나마 온전하게 그 안에 있었던 어떤 인상에 대한 기록이다. 타인을 위해 기억될 필요 없는, 그래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게 두었어도 괜찮았을 그런 것들"이다.

책은 152쪽에 불과한 분량인데도 속속들이 파고든 예리한 시선과 번뜩이는 문장으로 빛을 발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런 유의 에세이는 도처에 널렸고 반짝반짝 빛나는 재능은 부지기수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작가는 키치와 거리가 먼 듯해보였다. 잰 체 난 체 하는 글쟁이들의 자기연민 가득한 푸념과는 결이 달랐다. 뇌가 빚어낸 문장이라기보다는 실생활에서 겪은 진짜 삶에 관한 이야기가 문학사의 명작과 만나 서로를 빛내고 있었다.

파리바게뜨에서 만난 노년의 남자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을 엮고,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스케이트 스타와 가혹한 운명에 저항하는 고대 그리스인의 서사를 대조하며, 거주지 환경과 일상에서 주어진 삶에 대해 자성하고 카프카의 그레고르 잠자를 떠올린다. 가난한 청년이 부잣집 여성과 결혼할 수 없던 사회에 대한 고발과 상류층을 부러워하면서 동시에 적의를 품었고, 너무 빨리 소진된 재능에 술로 만년을 보냈을지언정 젊은 날의 피츠제럴드는 얼마나 매력적이었나.

운 좋게도 여러 권의 책을 내면서 출판사 편집자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얻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당연히 글 솜씨가 출중하거니와 남다른 통찰이 빛났다. 시인이거나 소설가이거나 문학평론가인 이들이 출판사를 만들고 직접 책을 펴내는 건 숙명인지도 몰랐다. 전지영의 글 역시 평범하지만 흔하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나는 카페에서 책을 읽으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느긋하게 보고 있었고, 그것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당연한 듯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변신』의 그레고르가 회사에 늦을까봐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는 장면에서, "분명 월요일이었을 것이다. 출근하기 싫은 것은 모든 날이 다 똑같지만, 차라리 벌레로 변하고 싶은 심정이라면 역시 월요일 아침"이라고 단언하는 짓궂은 패기가 마뜩하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여행을 멈춘 건 떠나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떠나고 싶었던 진짜 이유, 즉 다른 세상과 만나고 싶다는 갈망이 충족되지 않아서, 라면서 "이제는 이와 같은 글은 다시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작가의 말이 아쉽고 또 아쉽다. 아직은 그의 다른 책을 선뜻 쥘 자신이 없다. 요즘말로, 이거 요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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