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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작가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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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강우 시인·소설가

심강우 시인·소설가
심강우 시인·소설가

그림을 그리는 Y를 오랜만에 만났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최근 노도(櫓島)에 갔다 왔다며 그가 폰에 저장된 사진들을 보여줬다. 오래 전 그곳을 다녀왔을 뿐만 아니라 글 쓰는 자세에 관한 한 서포 선생을 귀감으로 삼아온 터라 반갑게 사진들을 넘겼다. 펜션과 모노레일, 문학관, 창작실 등 내가 갔을 때는 공사중이었거나 아예 없었던 시설들이 보였다. 그렇긴 해도 주변 경관이나 가옥들은 예전 그대로였다.

사진을 거의 다 봤는데도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 번 더 사진을 넘기다 그제야 허묘(墟墓)가 없다는 걸 알았다. 허묘는 선생의 유해를 임시로 묻었던 무덤터이다. "찍을 게 있어야지." 이유를 묻자 Y의 대답은 명쾌했다. 쓱 보곤 금방 내려왔다는 말 끝에 허묘의 허자가 허탈하다 할 때의 그 글자인 줄 알았다는 조크를 던졌다.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허묘를 단장한 거라곤 작은 푯돌 하나와 허묘를 두른 크기가 제각각인 막돌들이 전부이다. 내가 그곳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다는 걸 알면 Y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서인에 속했던 김만중은 장희빈 일가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가 선천으로 유배를 갔다. 이내 풀려났지만 기사환국 때 서인세력의 몰락과 함께 다시 노도로 유배됐다. 증조부가 김장생이고 형이 숙종의 장인이었으니 그는 명실공히 명문가의 후손이라 할 만했다. 그런 그가, 패관잡설로 천시되던 한글소설을 쓴 건 효심(孝心)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작가로서의 의지일 터이다. 허(墟)자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허무한 흔적'이란 뜻도 된다. 처음 내가 가졌던 생각이 그러했다. 한참동안 허묘 주변을 서성이다가 걸음을 멈췄다. 국문학 발전에 큰 역할을 한 분인데 이건 좀 심하지 않나. 그런 생각에 쩍 금이 갔다. 삼백여 년이 흐른 지금도 살아 있는 건 그의 육신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것. 뻔한 이치를 그제야 깨달은 건 보이는 걸 우선시해 왔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허묘가 달리 보였다. 이제 내가 보는 건 허우룩하고 애연(哀然)한 자취가 아니라 견결한 정신의 힘이었다.

1922년 선교사 제임스 게일에 의해 최초로 서양에 알려진 이래 '구운몽'은 지금까지 일본어·중국어·프랑스어·독일어·베트남어 등 모두 8개 국어로 출판됐다고 한다. 2012년 스페인 한국문학 포럼에서는 세계문학에 견줘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선생은 가고 없다. 하지만 작품은 남았다. 아니, 엄밀히 말해 거기에 깃든 정신이 남았다. 이른바 작가 정신. 내 영육의 아궁이에 날마다 지피고 싶은 게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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