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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정성태] 검은색은 비어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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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태 꾸꿈아트센터 대표

정성태 꾸꿈아트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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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밤길을 걷곤 했다. 개울가를 지나 달빛 내린 소로를 걷다 보면 아버지는 가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야백은 수다." 밤에 보이는 흰색은 물이니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캄캄한 들판과 산자락은 하나의 어둠으로 잠겨 있었지만, 달빛을 받은 물길만은 유난히 희게 떠올랐다.

지금도 밤길을 걷다 보면 가끔 그 말씀이 떠오른다. 사진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빛에 마음이 갔다. 좋은 빛을 만나면 셔터 누르기 바빴다. 그땐 세상이 달리 보였다.

사람들은 대개 밝은 곳에 시선을 둔다. 빛은 사물을 드러내고 흰색은 형태를 선명하게 만든다. 백(白)은 비움과 여백의 미학으로 이야기된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게 하는 감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흑(黑)은 무엇일까. 흔히 검은색은 어둠과 부재의 색으로 여겨진다. 빛이 닿지 못한 자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사진을 하며 만난 흑은 조금 달랐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태어난 그 색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 아니다.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고,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림자를 오래 바라보곤 했다. 길 위에 드리운 그림자, 벽에 비친 그림자, 창가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 시선은 밝은 곳보다 어두운 곳에 더 오래 머물렀다.

내가 사진을 하며 만난 검은색은 비어 있지 않았다. 어두운 부분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이 머문다. 기억이 스며 있고,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밝은 면이 사물의 형태를 드러낸다면, 어두운 곳은 사물의 깊이와 밀도를 품는다.

그림자 역시 그렇다. 그림자는 빛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생긴다. 그림자는 빛이 남긴 흔적이며 존재의 또 다른 얼굴이다.

진광불휘(眞光不輝), 진정한 빛은 스스로 빛나려 하지 않는다. 좋은 빛은 눈을 현혹하지 않는다. 조용히 사물을 드러낼 뿐이다. 좋은 사진도 마찬가지다. 과장하지 않고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오래 바라보게 만든다.

생각해 보면 사람도 그렇다. 누구나 밝은 면을 드러내며 살아가지만, 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쉽게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다. 지나온 시간과 상처, 기억과 침묵 같은 것들 말이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밤에는 물이 맨 먼저 눈에 띈다. 그러나 그 물을 보이게 하는 것은 달빛만이 아니다. 물을 둘러싼 깊은 어둠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그 흰빛도 드러난다.

빛은 세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림자는 그 세상을 이해하게 만든다. 검은색은 비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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