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懲毖).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뒷날의 환란을 대비한다는 뜻이다. 서애 류성룡이 피눈물로 쓴 '징비록'은 단지 400년 전 임진왜란의 참상에 대한 기록만이 아니다. 준비하지 않은 자가 맞이해야 했던 패배의 기록이자, 무능한 조정과 백성들이 치른 대가에 대한 참혹한 보고서이다. 오늘날 서애의 고향인 대구경북(TK)에서 침묵과 소외의 '징비록'이 다시 쓰이고 있다.
400년 전 조선 조정은 왜군이 침략하기 직전까지 보고 싶은 것만 보았다. '일본은 침략하지 않는다'는 통신사 김성일의 보고를 믿고 싶어 했다. 그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TK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 안일함의 결과는 황량하다. 약속됐던 국책 사업은 슬그머니 뒤로 밀려났고, 정부의 예산 주머니는 비켜 가기 시작했다. 특히 지방선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온 정부의 800조원 규모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공식 발표는 TK 시·도민들에게 깊은 좌절감을 안겼다.
객관적 지표를 보면 참담함은 분노로 변한다. 대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반도체 전 주기 밸류체인을 갖춘 대경권은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전문 기업 수(대경권 1천742개 대 호남권 329개), R&D 투자액, 관련 학과 정원 등 산업 생태계 경쟁력에서 호남을 압도한다.
그럼에도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메가 프로젝트에서 TK는 철저히 패싱당했다. 외신인 블룸버그마저 "정부가 대기업이라는 '돈나무'를 흔들어 정치가 경제를 통제하려 한다"고 꼬집고, 정권의 정치적 셈법이라는 비판이 쏟아져도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플랜 B'마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TK신공항 건설과 공공기관 이전은 지지부진하고, 마지막 히든카드로 여겨졌던 '전기요금 지역차등제(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마저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애초 지역차등제에 적극적인 듯했으나,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가 발표되자 기류가 묘해졌다. 대규모 전력이 필요한 반도체 공장을 호남에 짓기로 했는데, 정작 원전이 밀집한 동해안(TK)에서 전기를 끌어다 쓰면서 요금 차등제를 적용하면 호남 반도체 단지의 요금 부담이 커져 입지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가 자신들의 '정치적 자가당착'을 덮기 위해, 전기요금 지역차등제 도입 속도를 조절하거나 호남에 우회적 특혜를 주려 한다는 우려가 나온다. 실제로 '구간별 산업용 전기요금을 호남에만 싸게 책정한다' '충청권까지 혜택을 넓힌다'는 시나리오가 여의도 안팎에서 공공연히 흘러나오고 있다. 전력은 위험을 감수하며 대구경북이 생산하고, 혜택은 앉아서 호남과 수도권이 누리며, 정작 TK는 비싼 송전 비용과 눈물만 감내하라는 말인가.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임금과 조정의 무능을 통렬히 비판했듯, 이제 우리는 TK 정치권의 무능과 나태함을 매섭게 '징비'해야 한다. 국가균형발전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뒤에 지역의 백년대계를 빼앗기는데도 도대체 TK 국회의원들과 지방정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전기요금 차등제마저 무산된다면, TK를 가로질러 수도권과 호남으로 향하는 초고압 송전탑 건설을 몸을 던져서라도 저지해야 마땅하다. 전력 생산지로서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송전 중단'까지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배수의 진을 쳐야 한다. TK가 오늘날 다시 써 내려갈 진짜 '징비록'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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