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일이다. 동네 골목길에 차를 주차하고 헬스장에 갔다. 전화가 왔다. 내 차를 긁었으니 나와 보라는 전화였다. 차에 가보니 범퍼가 긁힌 정도가 아니라 깨져 있었다. 난 차에 있지도 않았으니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보험사에서 연락이 왔다. 길게 설명했지만, 결론은 90대 10이라는 말. 주차구역이 아닌 골목길에 주차했기 때문에 나도 과실이 있었다. 보험사 직원은 "사고가 나면 100% 과실은 거의 없다"며 이해해달라고 했다. 이상하게도 그 말이 꽤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한참 후에야 알게 됐다. 왜 그 말이 마음에 남았는지. 소설을 쓰다 보면 이야기를 진전시키기 위해 갈등을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인물들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만 나눠 부딪치게 하니 당최 재미가 없었다. 저마다 제 역할을 다해도 뭔가 부족했다. 뭐가 빠진 걸까. 내 소설을 누군가에게 보여주자, 그가 말했다. 옳고 그른 쪽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어서 판결문을 읽는 것 같다고. 다시 읽어보니 정말 그랬다. 나는 그들의 갈등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지 못한 것이다.
갈등은 혼자 만들 수 없다. 상대의 말투가 문제였다면, 그 말투에 발끈한 내 반응도 한몫했을지 모른다. 접촉 사고처럼 과실 비율을 따진다면 누가 더 잘못한 것인지는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갈등이라는 합작품을 만드는 동안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까? 물론 모든 갈등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명백한 폭력이나 착취 앞에서 피해자에게 "너도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잔인한 왜곡이다. 여기서 말하려는 건 우리가 매일 겪는 보통의 다툼들이다. 회의에서의 언쟁, 가족과의 냉전, 오래된 친구와의 어긋남 같은 것들 말이다.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에서 애티커스 핀치는 어린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살갗 속으로 들어가 걸어봐야 한다"고. 딸에게는 늘 무섭게만 여겨온 이웃이 한 명 있었다. 얼굴도 잘 안 비치는 그를, 딸은 오래도록 이상한 사람이라 여겨왔다. 그런데 어떤 일을 계기로 그와 가까이 마주하게 되고, 그가 실은 줄곧 자신을 지켜봐 주던 따뜻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그를 바라보는 딸의 눈이었다.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뭘까. 상대의 문제는 내가 어쩌지 못한다. 그러나 내 몫의 문제는 지금이라도 고칠 수 있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라는 질문을 "내가 무엇을 놓쳤을까"로 바꾸는 순간, 새로운 길이 열린다. 갈등이 생겼을 때, 잠시 멈추고 시선을 옮겨보는 건 어떨까. 갈등에 100%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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