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구 북성로. 기계·공구상이 줄지어 늘어선 오래된 골목길을 걷다보면 경우기계상사 간판이 보인다. 간판이 걸린 작은 점포 오른쪽으로 난 좁은 골목을 따라 스무 걸음 정도 더 들어가면 오랜 세월을 품은 작업장을 만나게 된다. 경우기계상사 작업장이다.
지난 23일 이 작업장에서 김욱동(84) 경우기계상사 대표를 만났다. 그는 60여년 경력의 북성로 1세대 기술자이자, 현역으로는 북성로에서 최고령이다. 주요 기술은 소형 건설기계 제작. 그는 1961년 북성로에 처음 들어와 지금껏 기계제작자의 삶을 살며 묵묵히 북성로를 지키고 있다.
백발이 성성한 그에게 사람들은 "이젠 쉬실 때가 되지 않았냐"고 이야기하지만 그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며 손사래를 친다. 이날 만난 그는 "무언가를 구상하고 손으로 만들어내는 기계제작 일은, 하고 있다는 것 자체로 즐거움이고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60여년 경력의 북성로 1세대 기술자로 불린다. 17세 때 이곳에 들어와 기술을 배웠다.
▶먹고 사는 게 힘들 때였다.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3월 10일 학교를 떠났다. 친구들에게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었는데 그 약속을 못 지켰다.
맨 처음 일을 한 곳은 중구 남일동 인쇄소였다. 1년 동안 월급 한 푼 받지 못했다. 사장이 온갖 핑계를 대며 주기로 한 월급을 주지 않은 거다. 이런 이유로 인쇄소를 그만두고 찾아간 곳이 이곳 북성로였고, 그렇게 기술을 배우게 됐다. 1961년, 17세 때의 일이다.
-기계를 다루는 게 적성에 맞았나.
▶그랬다.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뜯어보고 만지작거리는 걸 좋아했다. 인쇄소에 있을 때도 인쇄하는 걸 배워야 되는데 인쇄 기계에 더 관심이 갔다. 기계가 돌아가며 찍히는 게 궁금해 들여다보다 옷이 잉크로 범벅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기계를 만져보면서 '아! 이게 내가 할 일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북성로에서 일을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곳에 와서 처음 발을 디딘 가게가 소형 엔진을 간단히 수리해서 파는 곳이었다. 당시 북성로 쪽엔 소형 엔진을 취급하는 가게가 일곱 곳 정도 있었는데 엔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작동 원리가 궁금해 자꾸 뜯어보고 망가뜨려서 야단도 많이 맞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기술이 늘어있었다. 적성에 맞다 보니 취미를 붙이고 자꾸 연구하게 된 것 같다.
-언제 독립했나.
▶그곳에서 20년 8개월을 일하고 1982년 경우기계상사를 열었다.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이었지만, 월세로 가게를 얻고 전화기 한 대를 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거의 무일푼으로 시작했는데 다행히도 10년 만에 기틀을 잡았다. 독립하기 전 워낙 사람을 많이 사귀었던 터라 그분들이 많이 도와주셨다.
독립해서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기계 제작 일을 했다. 남의 집에 있을 때부터 만들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내 공장이 아니고 내 자본이 아니었기에 할 수 없었다. 언젠가 독립하면 꼭 하리라는 생각을 품고 살았다.
가게를 열고선 주로 소형 건설 기계를 제작했다. 도로를 자르는 콘크리트 커팅기, 도로 보수를 위한 소형 로울러, 바닥을 평탄하게 만드는 도로 미장기 등이 대표적이다.
-도로 커팅기를 처음으로 국산화한 인물로 유명하다.
▶예전엔 상수도 공사를 할 때면 굴착기로 두드려 아스팔트에 구멍을 낸 뒤 바닥을 파내고 관을 묻었다. 이렇게 하면 도로 파손 면적이 넓어질 수밖에 없다. 반면 도로 커팅기를 사용하면 절단면이 깔끔하고 도로 파손이 거의 안 돼 많은 양의 아스콘이 절감된다.
그 시절 저도 일본제 도로 커팅기를 팔고 있었는데 가격이 무척 비쌌다. 살펴보니 별 것 없었다. 비싸게 사서 쓸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도 국산 소형 엔진이 있으니 제가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거다.
처음엔 일본 제품을 참고해 제 방식대로 만들었다. 나중엔 일본제 보다 기능이 나아졌고 전국으로 팔려나갔다. 그렇게 도로 커팅기를 처음으로 국산화한 사람이라고 입소문이 나게 됐다.
당시 이 기계가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 전국의 도로 공사장 어디에서나 제가 만든 기계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감개무량했다. 제작 초기, 전군가도(전주에서 군산으로 이어진 옛 도로, 지금의 번영로)를 지나며 저희 기계를 본 기억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기계를 만들며 꾸준히 지켜온 철칙 같은 게 있나.
▶내가 사용한다고 생각하고 만든다. 그래야 기계가 제대로 만들어진다. 항상 최고의 기계를 만들어야겠다, 어떻게 하면 더 편리할까 생각해야 한다. 주어진 대로만 하면 발전이 없다. 자꾸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제작한 기계에 'MAX(맥스)'라는 브랜드명이 붙어 나온다. 어떤 의미인가.
▶사실 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이니다. 초창기 때만 해도 자체 브랜드가 없었다. 직접 기계를 만들고 파는 게 좋았지 브랜드에 관심도 두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 서울에서 국산 기계를 전시하는 행사에 저희 기계를 선보일 기회가 있었다. 당시 전 브랜드 같은 건 생각하지도 못 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만들어 가져다 놓기만 했다. 그런데 브랜드명이 필요했고 생각나는 게 전혀 없었다. 그때 옆에 있던 무역업을 하던 지인이 '막…막…'이라고 중얼거리더니 'MAX(맥스)'라고 쓰자고 하더라. 마구잡이로 잘 되라고. 그때 그 기계에 '맥스'라고 써서 붙인 게 지금가지 오게 됐다.
-여전히 현역이다.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
▶오전 8시까지 출근해서 일을 하고 오후 6시에 퇴근하는 식이다. 아침엔 6시쯤 일어나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한 뒤 강아지·고양이와 시간을 조금 보내고 출근한다. 집이 청라언덕 쪽이어서 걸어서 출근하는데 한 번씩 지하철을 이용하기도 한다. 10년 전쯤엔 자차고 출근한 적도 있는데 어느 순간 '50년을 걸어서 다닌 길인데, 언제부터 호강스럽게 자가용을 타고 출근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걸어서 다니게 됐다.
돌이켜보면 가게를 열고 5년 정도 동안은 거의 집에 가지 않고 공장에서 생활했던 것 같다. 지금도 아들이 "그 시절 아버지는 옷 갈아입고 가사는 것밖에 못 봤다"고 할 정도로 기계에 푹 빠져 살았다.
-80대 중반인 만큼 은퇴를 권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 "이제 그만 은퇴하시지 언제까지 하시려고 그러느냐"는 애기를 많이 듣는다. 그럴 때면 "여기서 죽을 거다", "죽으면 안 하겠지"하고 웃으며 넘긴다.
이 일이 예전만은 못하지만 기계를 만지는 게 저에겐 가장 재미있는 일이자 놀이다. 이 나이에 아침에 일어나서 갈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이게 바로 이 일이 제게 준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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