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세어 보았다. 올해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9월 현재, 정확히 여든다섯 권을 읽었더라. 당연히 지금도 서너 권은 읽는 중이고. 그러니까 일주일에 신문 칼럼 한 편을 쓰려면 기본 한 권은 읽어야 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책도 읽다 보니 이런 숫자가 남겨진 것. 주로 처음 읽는 책들이지만, 어떤 건 오래전에 읽었으나 글을 쓰기 위해서 다시 읽기도 했다. 고백하자면, 서점에서도 분량 적은 책에 눈길이 머무는 나쁜 습관도 생겼다.
영화평론가가 되기 전까지의 나는 영화를 좋아했고 사랑했으며 영화를 보면 세상 행복한 사람이었다. (어느 후배는 언젠가 씨네큐브 계단을 헐레벌떡 뛰어 내려오던 내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관람한 영화는 반드시 기록으로 남기면서 언젠가 공식적으로 선보일 기회가 오길 빌고 또 빌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 영화들의 대다수는 이 시기, 그러니까 영화를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했던 시절에 본 것들이다. 그러나 영화평론가라는 타이틀이 붙으면서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눈은 언제나 찌푸린 상태였다. 팔짱 낀 채 거만한 태도로 영화를 재단하면서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낀 풋내기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대상 자체를 즐기던 애호가에서 따지기나 하는 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덕업일치'라는 말이 있다. 덕후(광적인 하위문화 폐인을 뜻하는 일본어 '오타쿠'에서 나온 말)의 능력이 일로 연결된다는 뜻이다. 무수한 덕후 중에서도 압권은 '치킨 덕후'다. 대한민국의 웬만한 치킨 마니아는 명함도 못 내미는 사람, 그는 다 먹고 난 치킨 뼈로 닭 한 마리 모습을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공룡 모형처럼 똑같이 뼈를 맞춰낸다고.
이런 능력자를 치킨 업체가 가만 놔둘 리 없다. 내 주위에도 이런 덕후가 있다. 물리학자인데 취미로 시작한 가야금 제작이 상당한 경지에 이른 이가 있고, 클래식 마니아이면서 그림 애호가인 정신과 전문의는 대학원에서 작곡을 전공하더니 학위를 받았다.
혹자는 말한다. 덕력이 스펙인 세상이라고. 모 영화의 카피를 빌리자면 어쩌면 '우리는 모두 한때 덕후였다'. 내가 영화평론가가 된 것도 영화 덕후여서 가능한 일이었고, 북 칼럼 쓰는 것 역시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터. 그러고 보니 나도 덕업일치의 유사 모델이다.
내 취향을 고수하면서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는 일. 독자를 가르치거나 섣불리 권하기보다는 내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데 집중하면서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한 권의 책이라도 더 읽게 만드는 것, 내가 칼럼을 쓰는 목적이자 이유였다. 다행스러운 건, 칼럼 시작할 때 다짐한 내용을 철저하게 지켰다는 점이다. 첫째, 자기개발서와 서점 베스트셀러는 배제할 것. 둘째, 가능하면 출간된 지 1년 미만의 책은 신중하게 선택할 것. 끝으로, 반드시 완독한 책만 다룰 것.
천천히 오랫동안 곱씹으면서 읽고 싶은 책이 널렸는데도, 책이 눈앞에 빤히 보이는데도, 시작은커녕 애써 외면하며 게으름 피웠다는 점은 아쉽다. 책은 사방에 가득했으나 내겐 일로 보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젠 시간 여유가 생길 듯하다. 가을이 가기 전에 미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이번 겨울에는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다시 읽을 작정이다.
오늘이 마지막 칼럼이다. 과문한 사람이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그동안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를 읽어준 독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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