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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날씨] 7월 8일(수)

    [날씨] 7월 8일(수) "곳에 따라 소나기"

    2026-07-07 18:41:45

  • [기고-김인현] 참치, 이제는 산업화할 때다

    [기고-김인현] 참치, 이제는 산업화할 때다

    오징어와 대게의 고장으로 알려진 경북 동해안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바로 참치의 대량 출현이다. 경북 동해안 참치 어획량은 2022년 74톤, 2025년 110톤에 이어 올해는 520톤에 달했다. 수온 상승으로 인한 참치의 북상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영덕보다 울진에서 더 많이 잡혔고 강원도에서도 어획량이 크게 늘었다. 이는 참치의 북상 흐름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음을 말한다. 부산 이남 해역의 선망어업에서 주로 어획되던 참치가 이제는 북상하여 동해안에서도 본격적으로 잡히고 있다. 이런 변화는 정부의 국내 쿼터 배정 정책은 물론이고, 우리가 참치 쿼터 확대를 국제기구에 요구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올해는 국내 쿼터 배정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 과거에는 유보 물량을 정부가 가지고 있음에도 잡은 참치를 버려야 하는 사례도 있었다. 각 지역의 배정 물량이 소진되기 전 유보 물량이 신속하게 추가 배정되었다. 이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수협 그리고 어민들의 노력의 결과이다. 가장 큰 문제는 상품화다. 참치는 잡는 순간부터 상품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선상에서 즉시 피를 제거하고 영하 40℃ 이하로 급속 냉동한 뒤 냉동창고로 옮겨야 최고급 횟감으로 활용될 수 있고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동해안에서는 대부분의 참치가 적절한 사전 처리 없이 어판장으로 직행하고 있어 낮은 가격에 팔린다. 현재 경매된 참치 가운데 상당수는 해외로 재수출되거나 사료용, 햄버거용 원료로 사용되고 있다. 어장 관리선에 급랭 설비를 탑재하거나 이동식 급속 냉동 시스템을 도입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참치 보관을 위한 냉동 인프라 구축이 시급하다. 활용 가능한 유휴 인프라를 최대한 재가동해야 함은 물론이다. 이렇게 급랭을 통한 상품화 과정을 거쳐야 참치는 제값을 받을 수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일시 대량생산으로 가격이 폭락하는 점이다. 동해안 참치는 대체로 1주일 남짓한 기간 동안 수백 톤이 한꺼번에 잡히고 이후에는 거의 어획되지 않는다. 공급이 특정 시기에 집중되면 가격은 급격히 하락한다. 실제로 가격이 평소의 1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지는 현상도 발생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농산물 수급 조절과 유사한 접근이 필요하다. 수협이나 정부가 공동 수매를 실시, 냉동창고에 보관한 뒤 시장 상황에 맞추어 순차적으로 공급하여 안정적인 가격 관리가 되어야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처리 능력이 부족해 기업과 전량 인도 계약을 체결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지역에서 냉동저장을 넘어서 가공과 유통까지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 참치 해체·가공 시설을 구축하고, 참치 전문 브랜드를 육성하며, 참치 거리를 조성하여 관광산업과 연계하면 부가가치가 극대화된다. 참치를 활용한 음식문화와 축제, 관광상품이 개발된다면 어업뿐 아니라 지역경제 전반에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제 동해안은 참치를 잡는 시대를 넘어 참치를 산업화하는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

    2026-07-07 15:15:07

  • 매일신문 창간 80주년 이재명 대통령 축하 메시지

    매일신문 창간 80주년 이재명 대통령 축하 메시지

    매일신문 창간 8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균형잡힌 시각과 깊이 있는 통찰로 각계각층의 소통과 화합을 이끌어 온 '매일신문' 임직원과 기자분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매일신문은 산업화와 민주화 등 우리 사회의 역사적 순간을 기록하고 시대 정신을 전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지난 80년간의 발자취에 이어 앞으로도 지역과 국가를 잇는 정론지로서 역할을 다해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창간 8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매일신문 임직원 여러분과 독자 여러분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2026년 7월 7일 대통령 이재명

    2026-07-07 06:30:00

  •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시·시조 수상작-일과/ 장예은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시·시조 수상작-일과/ 장예은

    봄이 물러간 자리에 취업 공고 몇 개가 스마트폰 화면을 떠다닌다. 손가락으로 위를 밀어 올릴수록 나는 아래로 가라앉는다 공원 벤치에 앉아 꽃 이름을 한 번씩 불러본다. 꽃밭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서로의 그림자를 먹고 있는 곳 옮겨 심은 국화는 어느 사이에 큰 지도를 펼치고 잎들은 흙의 모양을 바꾼다. 그 아래 채송화 몇 송이가 고개를 밀어 올리고 있다 햇빛은 오지 않는데 기다리는 자세만 점점 높아진다 백리향은 비가 지나가는 방식으로 몸을 낮춘 채 빈 곳을 하나씩 감싼다. 마치 빈칸을 발견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는 참나리 등을 본다. 누군가 기대어 울었을 것 같은 곡선. 그 위로 나팔꽃이 올라타고 방향을 비튼다 사과도 변명도 없이 식물들은 곁 지나가는 법을 다투지 않는다 밀어내고, 휘감고, 감싸고, 올라타고, 기어오르며 손이 없는 데도 너무 많은 손짓을 한다. 꽃밭 가장자리에서 민들레 하나가 씨앗을 턴다.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은 것들이 가장 멀리 가는 이유가 된다. 하얀 입김 같은 것들이 공중에 잠시 걸려 있다. 나는 달달 떨고 있는 맨발을 슬리퍼에 끼워 넣는다 국화 곁가지에, 채송화 눌린 잎에, 휘어진 참나리 씨앗에 아직 닿지 않은 밤이 오고 있다.

    2026-07-07 06:30:00

  •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시·시조 수상작-엉거주춤을 생각하며/ 강기영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시·시조 수상작-엉거주춤을 생각하며/ 강기영

    버려진 의자를 보면 꼭 망가진 골반 같다는 생각을 한다 배밀이 끝에 겨우 앉았던 그때부터 예의와 안락을 추구했던 자세지만 의자에 앉은 모습에서 의자를 빼내면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는 것이다 달팽이관이 달아난 난감을 앉혀둔 모습, 의자는 골반과 한통속이라서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일과 습관처럼 튀어 나오는 엄살이 있다 우리는 그 골반을 열고 세상으로 나와 다시 골반으로 서류 뭉치 속 매일의 업무를 견디고 시험을 치르곤 했다 쓴 오이를 먹고 허리를 곧게 펴고 걸으며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쏟아지는 소나기도 사정을 알고 보면 힘에 부친 애매한 자세에서 벗어나는 일 이고 열매를 놓친 꼭지도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다 헐거워지기 시작한 몸처럼 나사못이 느슨해지면서 세상 모든 엄마의 골반이 버 려진 의자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의 불편한 자세는 의자에 길들여지고 오래된 의자는 늙어간다 익숙한 자세란 오래 불편이 머물렀다는 흔적이다

    2026-07-07 06:30:00

  •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시·시조 수상작-어름사니처럼 나비처럼/ 방윤후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시·시조 수상작-어름사니처럼 나비처럼/ 방윤후

    하얀 천 한 조각이 뜰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그게 왜 외줄타기로 보였을까. 쥘부채 펼쳐 사뿐사뿐 걷는 저 어름사니― 나비 되어 하늘하늘, 바람을 가르는 오른손엔 합죽선 하나. 접었다 폈다, 팔락거리는 날갯짓. 너른 신작로도, 잡풀 무성한 오솔길도 아닌 천 리가 지척이요, 지척이 천 리인 한낮. 사랑과 이별, 해와 달의 선(線) 위에서 검푸른 바다를 내달려온 날들, 흰 파도거품 날리며 여기까지 온 줄광대. "신명은 내 손안에 있노라!" 한바탕 신명나게 놀아볼까. 201호 노인이 링거대를 밀고 나와 요양원 벤치에 앉아 있다. 코나 입, 옆구리에 줄을 매단 사람보단 낫다며 햇볕을 맛있게 쬔다. 가쁜 맥박이 재촉하는 줄 위의 한살이, 그의 죽음도 어쩌면 한 판 줄광대 놀음이었을까. 한 발, 또 한 발― 가느다란 명줄 위를 걷는다. 나비처럼 팔랑이며 민들레 갓털처럼 가벼이. 바람 타듯 하얀 빨래들이 천천히 흔들린다. 혼자라서 가벼울까. 어름사니처럼, 나비처럼― 삶이 외줄 위에서 춤춘다.

    2026-07-07 06:30:00

  •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시·시조 수상작-물수제비의 자세/ 강명숙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시·시조 수상작-물수제비의 자세/ 강명숙

    날지 못한 것들의 방식을 다시 배운다 손바닥 위에서 식어 있던 수제비 같은 돌 하나 던져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새의 이름을 얻는다 물은 날개처럼 열리고 짧게, 또는 스타카토로 몸을 떠받친다 수면 위에 남는 빛 더 멀리 가기 위해 몇 번이고 낮아지는 몸짓 세 번째에서야 새는 날개를 쫙 편다 헛디딘 손목에서 놓쳐버린 궤적들 물 위에 잠시 번졌다가 곧 사라진다 읽히지 못한 흔적들 몇 번에야 나는 닿을 수 있을까 손을 떠나는 순간마다 나는 알게 된다 던지는 방식에 대하여 뜨겁게 닿았다가 곧 식어버리는 파문 위에서 돌이 새가 되듯 내 몸도 물 위를 스치며 날아간다 물속으로 사라지면서 가장 멀리 날아가는 저, 새 한 마리

    2026-07-07 06:30:00

  •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시·시조 수상작-도마의 노래/ 최수일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시·시조 수상작-도마의 노래/ 최수일

    믹서의 날카로운 파열음이 새벽의 고요를 갈아엎는다 귀를 틀어막다가 나는 모자란 잠을 둘둘 말아 끌어당기다가 문득 먼 곳에서부터 내 잠을 깨우던 어머니의 도마 소리에 부스스 잠을 털고 일어난다 이른 새벽 어머니가 마늘 다지는 그 소리는 낙숫물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들리다가 어느 순간 내 귀의 귀걸이처럼 걸려 찰랑거렸다 어머니의 쪽파 써는 소리는 낡은 창문을 사락사락 문지르는 고양이 발자국 소리 같았고 북어 몸통 두드리는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는 투두둑 투두둑, 배고픈 복서의 거친 주먹질 같았다 객지에 나간 아버지의 안부가 뜸해질 때면 그때 부엌에서 들려오던 어머니의 도마 소리는 없는 아버지를 세워두고 흠씬 패대기치는 여장부 같았고 할머니께 잔뜩 핀잔을 들은 날의 도마질 소리는 마른장마 잔뜩 낀 하늘처럼 무겁고 둔탁했다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가 나의 모닝콜이던 시절 그 소리를 들으며 내 키가 자라고 내 시야가 자랐다 그때 어머니의 그 도마질 소리는 어머니의 감정을 쏟아내는 배출구였고, 무기였고, 음악이었고, 칼춤이었고 난타였다 이제 주인 잃은 그 도마와 칼이 어머니의 맵찬 손맛을 그리워하고 있다

    2026-07-07 06:30:00

  •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시 부문 심사평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시 부문 심사평

    작품은 전반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수준을 보여줬으나, 자신의 감정에 침몰한 허약한 언어들, 인식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독자를 설득하지 못한 작품은 배제됐다. 수상작은 삶이 묻어나는 소박한 진정성, 자신만의 표현력, 문학성을 갖춘 작품들로 선정됐다. 대상은 시 부문 김제이의 '수학 문제와 종아리가 붉은 여자애' 가 차지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꿈으로 첫 행을 시작한다. 물질이 우상인 이 시대는 신분 상승을 꿈꾸며 아버지를 필아서라도 북극에 아파트를 사야 한다. 과학적인 수학보다는 책임지지 않는 거짓말의 위력이 더 큰 세상이 돼간다. 불가능을 믿고 살아야 하는 아이들에게 이 사회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묻는 수작이다. 강기영의 '엉거주춤을 생각하며'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돋보인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자세를 노년의 몸과 삶에 겹쳐 놓으며, 피할 수 없는 노후의 건강 문제를 성찰한다. 방소영의 '어름사니처럼 나비처럼'은 외줄을 타는 어름사니를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형상화했다. 노년에 마주하는 질병과 죽음을 줄타기에 비유하면서도, 살아 있음의 소중함을 놓치지 않는다. 장예은의 '일과'는 휘감고 기어오르는 식물의 생명력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삶에 대한 애착과 의지를 덩굴손의 움직임에 빗대어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 최수일의 '도마의 노래'는 어머니의 도마 소리에서 따뜻한 유년의 기억과 고단한 삶의 흔적을 함께 길어 올린다. 아이의 시선과 어른의 현실이 교차하며 깊은 울림을 남긴다. 강명숙의 '물수제비의 자세'는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를 물수제비에 빗대어 보여준다. 더 멀리 가기 위해 몸을 낮추는 자세를 통해 삶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힘을 담아냈다.

    2026-07-07 06:30:00

  •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수상작-평미레/ 김종국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수상작-평미레/ 김종국

    잡곡을 조금 살까 해서 쌀집 안으로 들어선다. 은빛으로 여문 쌀알 속에서 긴 계절의 향기가 난다. 감자즙 내음 같고 시골 부엌의 공기 맛도 느껴진다. 됫박으로 쌀을 휘저을 때 쌀알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작은 마찰음까지, 얼마만 인가, 공감각적인 기억이 나를 어린 시절로 데려간다. 정미소 옆 나지막한 쌀집이 있었다. 낮은 처마 밑으로 드러난 낡은 서까래가 빗살처럼 줄지어, 오랜 세월의 무게를 떠받쳐 왔다. 지난 시간의 막이 겹겹이 쌓인 양철 간판은 한때 진했을 글씨가 희미하게 바랬다. 가게 한가운데 뒤주와 됫박, 저울이 자리를 지키고 쌀자루는 무거운 순서대로 벽을 따라 층층이 기대어 있었다. 뒤주에는 쌀이 작은 동산처럼 쌓여 있었다. 되를 쌀 속으로 찔러 넣으면 알곡이 작은 파도처럼 갈라지며 자리를 바꾸었다. 공기가 빠져나간 틈을 쌀알이 다시 채우고, 됫박 가장자리에 걸린 알갱이는 흔들어 평평하게 골랐다. 살살 다루어도 쌀이 수십 알 튀어나왔다. 바닥에 떨어진 쌀알은 톡톡 마침표를 찍으며 럭비공처럼 이리저리 굴렀다. 됫박이 가득 찼을 때, 주인아저씨가 양손으로 쌀을 끌어올려 고봉을 세웠다. 그대로 자루에 담아주면 좋겠는데, 아저씨는 옆에 둔 둥근 막대기를 들고 됫박 앞쪽 가장자리를 따라 수평으로 쓱~ 밀었다. 순간 쌀 봉우리가 허물어졌다. 넘친 쌀을 깎아내리니 야박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데 평미레가 됫박 끝까지 가지 않고 멈추었다. 정량을 맞추는 자리까지 깎아내리지 않았다. 됫박 위의 쌀을 밀 때, 주인아저씨의 손끝은 사람의 사정과 정을 함께 헤아리는 마음의 눈금처럼 보였다. 단골인지, 먼 길을 온 사람인지, 아이 심부름인지에 따라 달라졌다. 손님을 바라보는 각도 차이가 평미레가 멈춘 덤이었다. 평미레는 단순히 쌀을 고르는 막대가 아니었다. 가난한 시절을 함께 살았던 인심의 높이를 가늠하는 도구였다. 평미레가 멈춘 자리에 남은 쌀 한 줌은 덤이 된다. 그 안에는 우리가 단순히 사고파는 관계가 아님을 말해주는 무언의 언어가 담긴다. 저울은 무게를 재지만, 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이를 잰다. 덤은 계산서 위에 적히지 않는 마음이며, 서로의 체온이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는 높이였다. 평미레는 수평으로 민다. 누구에게나 같은 양이 돌아가도록 공평하게 잰다. 하지만 누군가를 한 번 더 바라보고 조금 더 얹어 준다. 이 차가운 불공평이 오히려 관계를 더 따뜻하게 데운다. 인심은 조금 기울어진 자리에서, 조금 넘친 쌀알 위에서 봉긋하게 도드라진다. 평미레의 셈법은 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형이상의 언어다. 젊은 시절 나는 막걸리를 자주 마셨다. 그런데 막걸리를 담은 주전자 밑부분이 안쪽으로 찌그러져 있었다. 이윤을 얻으려는 오목한 굴곡은 얄팍한 욕망의 표상처럼 보였다. 안으로 찌그러진 주전자는 이윤을 향해 접힌 마음의 형상이고, 멈춰있는 평미레는 인심을 향해 남겨둔 여백의 형상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평미레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쪽이었다. 부족해 보이는 것을 견디지 못해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았고, 사람을 대할 때도 옳다고 여긴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야박하게 인간관계의 가장자리까지 깎아내지는 않았는지. 평미레를 미는 주인아저씨 그 멈춤의 함수를 다시 계량해 본다. 사람의 마음은 평미레로 잴 수 없다. 고마움의 온도, 미안함의 깊이, 기다림의 길이, 관계의 따뜻함, 용서의 크기와 그리움의 무게 같은 것들은 됫박에 담거나 저울에 올리지 못한다. 어떤 순간은 같은 시간이라도 마음에 따라 길이가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사람의 마음에는 늘 더하기 빼기로 계량되지 않는 영역이 실재한다. 요즘 세상을 재는 도구는 정확하다. 먼지 하나의 부피도 나노 단위로 재고 저울도 원자까지 잰다. 마트에 가도 모든 것이 더도 덜도 없이 포장되어 있다. 사고파는 데 정 情이라고는 없다. 단지 거래하는 관계일 뿐. 이 아쉬운 회상 너머로 판단보다 헤아림을 먼저 두는 마음의 평미레를 가진 사람이 문득 그리워진다. 공평을 유지하되 야박하지 않고, 여분을 남기되 흐트러지지 않는 균형을 지닌 막대기처럼 숫자보다 정을 나눌 수 없을까. 평미레를 하나 깎아 책상 위에 얹어둘까, 이제 나는 박하게 깎아대는 삶에서 벗어났다. 누구에게나 한 줌의 여유를 남겨주는 영역을 지나고 있으므로.

    2026-07-07 06:30:00

  •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수상작-삶의 셈판/ 김구섭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수상작-삶의 셈판/ 김구섭

    여름이 땅을 삼킬 듯 달아오른다. 지열은 아지랑이가 되어 발목을 휘감고, 나무들은 가지마다 지난 시간의 무게를 눅눅하게 매달고 있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먼지와 지글거리는 기름 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끝을 스친다. 그 질박한 냄새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소란스러운 반야월 장터 한복판으로 끌려 들어간다. 사람의 체온과 흙먼지가 뒤섞인 이곳은 거대한 삶의 셈판이다. 난전 한편에서 토란 줄기와 콩잎을 파는 아지매는 검게 그을린 얼굴로 외친다. "보이소 마!" "이거 억수로 헐타 아이가! 한 개 천 원, 두 개 가가도 천 원 이라카이. 단디 보소, 요래 싱싱한 거 어디 가가 사겠노?" 흥정의 덤을 얹어주는 그 투박한 사투리는 자로 잰 상술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 흐르는 넉넉한 보태기다. 삼십여 년간 경영컨설팅과 세무 현장을 오가며, 소수점 아래 숫자 하나에 기업의 운명을 걸었던 경영지도사로서 사는 삶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1원 한 장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사무실의 서늘한 형광등 아래서 보면, 이곳의 계산법은 논리가 무너진 균열처럼 보인다. 그 균열 사이에서 평생 신봉해온 '정확함'이 얼마나 빈약한 것이었는지 문득 깨닫는다. 타인의 기업에는 냉철한 메스를 들이대며 생의 숫자를 기입해 왔건만, 정작 '나'라는 이름의 기업에 대해서는 늘 진단 불능이었다. 난전의 낡은 저울추가 허용하는 따뜻한 오차야말로, 우리가 놓치고 살아온 삶의 핵심 자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국밥집의 찌그러진 양은 냄비와 묵은 주전자는 고단한 세월의 흔적을 훈장처럼 품고 있다. 푸근한 국물 속 고기 한 점과 막걸리 몇 잔에 가슴은 금세 달큰해진다. 유년의 고향 장날이면 괜스레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아 마음이 설레곤 했다.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와 약장수의 걸쭉한 입담이 공중을 떠돌던 그 길목에서, 나는 세상을 향한 첫 재무상태표를 작성하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 눈길을 끈 곳은 장터 깊숙이 마련된 가축시장이다. 비릿한 냄새 속에 웅크리고 앉아 새 주인을 기다리는 짐승들을 보면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진다. 우리 집안의 재산 1호이자 아버지의 유일한 벗이었던 조랑말을 내다 팔던 날, 마구간의 빈 마차에 엎드려 하염없이 울었다. 아버지가 끌고 간 그 말의 뒷모습은 내 유년의 장부에 기록된 첫 번째 결손이었다. 아무것도 적을 수 없는 빈 페이지가 남았다.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생명이 지폐 몇 장의 값으로 매겨지던 그 순간, 어쩌면 그날의 장터는 내 유년이 처음 손익을 계상하던 자리였는지도 모른다. 이익이 곧 상실되고 손실이 도리어 그리움이라는 자산으로 치환되는 인생의 복식부기를 나는 그렇게 장터의 먼지 속에서 처음 배웠다. 고개를 들어 장터 뒤편으로 묵직하게 솟은 초례봉을 올려다본다. 공산전투에서 대패하여 쫓기던 고려 왕건이 하늘에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일어설 힘을 가늠하던 자리가 아니던가. 천하를 꿈꾸던 영웅에게도 군사를 다 잃고 홀로 남은 그 절벽 끝은, 존재의 밑천마저 바닥난 거대한 생의 자본잠식 상태였으리라. 나 역시 인생 장부에 붉은색 '적자'가 선명했던 고비마다 그 봉우리를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왕건에게 초례봉은 패배를 기록하는 마침표가 아니라, 다음 기로 넘어가는 '희망의 이월 항목'이었다. 낡은 대구선 기차의 쇳내 섞인 숨결이 멈춘 자리엔 차가운 아파트 숲이 들어찼다. 익숙했던 둑길의 곡선 대신 수직으로 솟구친 고층 건물들 사이에서, 나는 문득 이방인처럼 서성인다. 그 건조한 도시의 끝자락, 이름마저 역설적인 '안심요양병원'에 어머니의 구순(九旬)을 부려놓았다. 유리창 너머의 뒷모습은 이제 더 이상 연근을 캘 수 없는 밭이랑의 끝처럼 적막하다. 반야월의 검은 흙 속을 헤집던 어머니의 옹이진 손마디는 자식들의 인생을 평탄하게 다져준 고귀한 노무였다. 진흙투성이인 그 옷자락을 보며 자란 나는 성공이란 말끔한 정장과 반짝이는 명함 속에서만 얻어지는 줄로 알았다. 하지만 수많은 기업의 바닥을 훑고 나서야 깨달았다. 어머니의 생은 자식이라는 열매를 키워내기 위해 당신의 연골을 밑천으로 내어준 삶이었다. 이제 더 이상 감가상각할 것조차 남지 않은 마른 등이야말로, 평생 분석해 온 어떤 장부보다 더 정직한 생의 최종 결산서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은 여러 겹으로 접힌 비밀 장부와 같다. 사람들은 더하기와 곱하기로 주머니를 채우길 원했고, 빼기 앞에서는 허전해했으며, 나누기 앞에서는 제 살을 떼어내는 일처럼 망설였다.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 저울추를 옮기듯 타인의 성공과 실패를 계산하며 살아왔다. 끝내 남은 결론은 하나였다. 인생의 가장 큰 균열은 언제나 장부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때 시작된다는 점이다. 채울 것 없는 완벽함은 더 이상 나아갈 동력이 없는 경영의 종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제 안심의 땅을 뒤로하며, 나는 비로소 삶의 진정한 수익이 주머니의 무게가 아님을 깨닫는다. 꽉 찬 보름달보다 채울 여지가 있는 반야월(半夜月)의 반달처럼, 우리네 삶은 그 부족한 여백이 있을 때 더욱 역동적이다.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들, 초례봉처럼 단단한 믿음과 타인을 향한 진심만이 삶의 셈판 위에서 마지막까지 값진 무형자산으로 남으리라 믿는다. 오늘도 나는 장터 한복판에서 낡은 저울 위에 마음 한 조각을 슬며시 올려본다. 수치는 엉망이고 무게는 한없이 가볍지만, 이 삐딱한 저울이야말로 내가 삼십여 년의 세월을 돌아 도달한 가장 정직한 결산이리라. 어머니를 모셔둔 안심이라는 이름의 땅은, 끝내 자식인 내게도 한 생의 안심을 내어주었다. 장마당의 소란 속에서 나는 비로소 고요한 안심(安心) 하나를 장부 끝에 적어 넣는다. 인생이라는 긴 경영의 장부에, 오늘 다 소진하지 못한 희망은 내일의 장부로 이월하리라.

    2026-07-07 06:30:00

  •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수상작-몽매/ 길영숙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수상작-몽매/ 길영숙

    살벌하다. 눈알을 희번덕이며 날 춤을 춘다. 허공에서 휘두른 쟁기가 적의 심장에 꽂힌다. 생사의 경계선도 뛰어넘는 질긴 놈이다. 마당과 집 둘레에 잡(雜)스럽게 무성한 초록이 눈엣가시다. 특별한 능력을 알기 전까진 무지하여 전쟁을 선포하고 만다. 하찮게 생각한 적들이 짧게 깎인 잔디 사이사이에 숨어든다. 주인인 양 초록 융단 속에서 세를 불린다. 낯익은 토끼풀, 민들레, 제비꽃이 주를 이루지만 이름 모를 풀도 많다. 한여름 태양 빛이 키워낸 침입자를 매서운 겨울이 잠재워주기만 기다린다. 스스로 후퇴하는 계절이 되어서야 숨통이 트였다. 흙냄새만 나면 뒤덮는 무법자들은 시골 어디에서든 골칫덩이다. 로망이었던 전원생활이 현실의 무게로 짓눌러온다. 고달픔을 벗어나기 위해 화생방전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다. 제초제 "바스타"가 살포되어 누렇게 뜬 마당은 내 목이 타는 듯하다. 참패를 거듭하다 도시로 되돌아가기를 고려하던 차에 마지막이라 명명한 일격을 꾀한다. '적벽대전'이라도 치를 기세로 하늘의 기운을 읽는다. 바람은 거세지 않아야 하고 비가 오지 않는 날로 점지 된다. 선전포고도 없이 시골 마당에 디딤돌과 시멘트 포대가 쌓인다. 제갈공명도 울고 갈 전쟁을 시작할 참이다. 꽃밭 경계석 틈새와 잡초 반인 잔디는 반쯤 없애기로 한다. 화산석을 깔고 그 틈새엔 시멘트 가루를 비벼 부어버릴 작정이다. 눈이 덜 가는 뒤쪽 담장 둘레론 두껍게 붓기로 한다. 기습당한 그들은 암모나이트처럼 화석이 되리라. 괭이질하던 손을 멈춘다. 눈에 들어온 잔디 뿌리가 이상하다. 모양새가 다른 뿌리가 보인다. 땅 밑으로 이어진 뿌리의 모습은 경악스럽다. 수년 묽은 도라지 같기도 한 것이 예리한 커트 칼날에도 끄떡없다. 신화 속 갑옷이라도 두른 듯하다. 호기심 반 의구심 반, 전지가위로 잘게 잘라 캐낸다. 그들의 질긴 삶이 길게 딸려 나온다. 잎이 잔디와 흡사하여 잔디 대접을 받아왔다. 유독 키가 크고 튼튼했던 이전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들의 충성심을 철석같이 믿었다. 스파이 같은 위장술이 뿌리를 드러내며 허를 찌른다. 우매했던 눈빛이 흔들린다. 정체가 궁금해 이리저리 수소문해봤다. 갯잔디일 가능성이 컸다. 초록은 동색일 거로 생각한 무지가 들통나며 패배의 쓴맛을 본다. 적(敵)을 알아야 하듯 들풀을 알아간다. 인터넷을 뒤져 잡초라 불리는 그들의 정체를 수소문한다. 마당의 것들과 맞추어, 낯선 이름을 추적하는 눈과 손이 바쁘다. 꽃 다지, 뽀리뱅이, 괭이밥이, 명아주, 개여뀌, 달개비, 별꽃, 깨풀 등등, 미워하기엔 이름들이 왠지 정겹고 낯익다. 강원도 산기슭, 동네 아이들이 갖고 놀던 흔한 풀들이다. 풀피리가 되기도 하고 화관을 만들어 머리에 쓰곤 했다. 한 소쿠리 뜯어 싸라기 쑥떡이나 반찬에 보태기도 하지 않았든가. 어릴 적 소꿉친구처럼 다가온다. 빈곤한 봄날을 같이 보냈던 새싹이 떠오른다. 쑥, 냉이, 고들빼기, 고마리는 집 앞 도랑 따라 지천으로 널렸다. 농사일로 바쁜 어른들이 방목하는 심심한 아이들에겐 자연 놀잇감이다. 그들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전쟁을 멈춘다. 손엔 농촌진흥청이 발간한 "잡초 관리 길잡이", "전략가, 잡초"란 책이 들려있다. 맹목적인 싸움을 하며 연전연패를 한 이유를 깨닫는다. 그들은 잡초성과 휴면 성질을 바탕으로 놀라울 정도로 진화한 식물이다. 꽃의 색에도 다 의미가 있다. 봄철의 노란 꽃들은 "꽃등에"를 불러 꽃가루를 옮기게 한다. 광대나물꽃의 보라색은 밀 표로 "꿀벌"을 부른다. 생존을 위한 과학적 진화이다. 잡초 생태학이 이렇게 흥미를 끌 줄 몰랐다. 시골살이의 묘미가 되어 하루하루가 새롭다. "잡"이란 의미를 되뇌어본다. 조잡, 번잡, 잡일, 잡음, 잡동사니, 우리가 흔하게 쓰는 말들이다. 자질구레하면서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잡초는 중요하지는 않지만, 많이 있는 풀이라는 뜻이다. 나쁜 풀이란 의미는 내포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아직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식물이라 한다.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그들의 노고는 다양하다. 가치를 아는 이는 시(詩)를 짓기도 한다. 인정받지 못한, 거칠고 험난한 삶을 위로해주듯이. 이전엔 잡초였다는 잔디는 보드라운 살 속에 찾아드는 무엇이든 품어준다. 꽃이든 잡초이든 가리지 않는다. 자신의 영역을 조여오는 침입자 일지라도 받아들인다. 혹여 자신이 사라지는 꼴이 되리란 것을 잔디가 모를 리 없다. 마당의 식물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도 닮았다. 누구는 환삼덩굴처럼 까칠하게 기어올라 싫고, 누구는 땅 빈대처럼 들러붙어 멀리하고, 누구는 강아지풀처럼 간들거리는 간사함이 싫다며 이유를 잡다하게 붙인다. 어울리지 못하는 편협함이 자주 고립을 만들곤 한다. 내면 깊게 얽힌 뿌리가 갯잔디처럼 태양 빛에 드러난다. 녹색은 항상 이로움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편견과 독선이 설득력을 잃고 만다. 사람의 다양한 색깔에서 느껴왔던 불편한 심기들을 마당잔디처럼 풀어버린다. **악장제거무비초(惡將除去無非草), 호취간래총시화(好取看來總是花)

    2026-07-07 06:30:00

  •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수상작-덧칠/ 심재숙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수상작-덧칠/ 심재숙

    매일 오가던 길목, 유난히 허름해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상가 건물 하나가 어느 날 거대한 가림막 뒤로 자신을 숨겼다. 몇 달간 이따금씩 들려오던 둔탁한 파열음과 망치 소리는 건물이 오랜 세월 견뎌온 낡은 흔적을 허물고 뼈대를 세우는 과정이다. 한때는 그 거리에서 가장 빛나는 얼굴이었을 테지만 속절없이 흐르는 시절의 무게를 비워내고 시대에 맞추어 거듭나기 위해 혹독한 진통을 겪는 중이다. 가림막이 걷힌 자리에는 전과 너무나 다른 생경하고도 멋진 건물이 서 있다. 비바람에 깎여나갔던 거친 시멘트 외벽은 매끄러운 대리석으로 마감되고 아귀가 맞지 않던 낡은 창틀 대신 맑은 통유리가 눈 부신 햇살을 머금고 있다. 허물어짐의 위기를 견디고 새 생명을 얻은 그 눈부신 광경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며 자연스레 내 삶의 궤적을 그 위에 가만히 포개어 보았다. 사람의 일생 또한 아무것도 없는 빈터에 자신만의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는 숭고한 건축의 과정이 아닐까. 내게는 '교직'이라는 이름의 터가 그러했다. 그곳에 단단한 주춧돌을 놓고 아이들과 함께 지어 올린 긴 시간은 한 편의 동화 같았다. 교실 안을 꽉 채우던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세상에서 가장 다채롭고 예쁜 색깔로 꿈을 칠하던 선생이었다. 하얀 분필 가루가 햇살에 부서지던 그 시절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은 아마도 가장 화려하게 채색된 아름다운 색깔이었으리라. 그때는 그 순수한 색채와 견고함이 영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다. 뜻하지 않게 맞은 명예 퇴임으로 정든 교정을 떠나며 비로소 화려했던 내 인생의 건물이 낡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아이들과의 동화 같던 시간을 등지고 낯선 세상 앞에 섰을 때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고 손볼 곳만 무성해진 오래된 건물처럼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지난 시절의 빛바랜 영광만을 반추하며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설주가 삐걱거리고 외벽의 칠이 벗겨질 때 삶은 우리에게 '리모델링'의 청사진을 펼칠 것을 요구한다. 내 삶에도 기꺼이 가림막을 치고 허물을 벗어내는 덧칠의 시간을 갖기로 마음먹었다. 깨진 도자기의 틈새를 옻칠로 메우고 그 위에 금가루를 뿌려 상처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킨츠기'라는 일본의 전통 수리 기법이 있다. 흠집을 감추어 버리는 대신 오히려 황금빛 선으로 강조하여 이전보다 더 고유하고 단단한 작품으로 빚어내는 것이다. 나의 리모델링 역시 과거를 허물어 완전히 지우는 것이 아니다. 교단에서 아이들을 품어내며 길렀던 인내와 다정함이라는 오래된 골조 위에 '스마트폰 활용지도사'라는 새로운 시대의 쓸모를 금가루처럼 덧입히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시작된 노인 일자리 사업은 내 인생 건물의 가장 눈부신 이정표가 되고 있다. 거대한 칠판 앞에 서서 분필을 쥐던 내가 이제는 작은 액정 화면 앞에 서서 시니어들의 서툰 손길을 이끈다. 기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그들의 두려움을 녹여내는 것은 다름 아닌 수십 년 교직에서 다져진 따뜻한 경험들이다. 아이들에게 세상을 읽는 법을 가르치던 언어는 이제 어르신들을 디지털 세상으로 안내하는 친절한 접속 코드로 변했다. 낡았다고 생각한 나의 외벽이 시니어들과의 교감을 통해 황금빛 킨츠기처럼 아름답게 변하는 중이다. 스마트폰을 강의하는 일은 시니어들의 인생 건물에 '소통'이라는 이름의 커다란 통유리창을 내어주는 멋진 작업이라 생각한다. 쓸쓸하던 어르신들 거실에 와이파이라는 보이지 않는 길이 열리고 디지털의 빛이 환하게 쏟아지게 만든다. 화면을 보며 터뜨리는 그들의 환한 미소가 나의 외벽을 반짝이게 한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반듯하게 지어진 새것만이 좋은 줄 알았다. 하지만 황혼의 나이 앞에서 비로소 알게 되는 게 있다. 비바람에 깎이고 수없이 고쳐 칠하면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향기와 결을 지켜낸 낡은 건물이 훨씬 깊고 아늑하다는 것을.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을 부정하지 않고 그 위에 시대의 새로운 배움을 겸손하게 얹어낼 때 인생은 비로소 완성의 미학을 얻는 게 아닐까. 삶의 리모델링은 한 번으로 끝나는 마침표가 아니다. 어제의 명예라는 낡고 무거운 벽지를 과감히 뜯어내고 오늘이라는 현장에서 '봉사와 나눔'이라는 투명한 코팅제를 쉼 없이 바르는 진행형의 과정이다. 이제 낡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다. 육신의 벽면에 때가 타면 연륜이라는 지혜로 닦아내면 되고, 열정의 색이 바래면 시니어들과 나누는 다정한 온기로 다시 덧칠하면 될 터이다. 중요한 것은 건물의 화려한 겉모습이 아니라 여전히 멈추지 않고 뜨겁게 박동하는 삶의 열망이리라. 리모델링을 마친 멋진 건물이 많은 이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내 2막 인생도 누군가에게 희망의 이정표가 되면 좋겠다. 동화 같던 교직에서의 뼈대 위에 시니어들과의 의미 있는 시간이 만나 새로운 인생을 덧칠하고 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인생 건물을 짓는 중이다.

    2026-07-07 06:30:00

  •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수상작-내 밥부터 먼저 푸세요/ 김치영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수상작-내 밥부터 먼저 푸세요/ 김치영

    구수한 밥 냄새가 하얀 김 속에 피어올라 잠든 나를 깨운다. 평생 아침을 마련해 온 아내의 수고가 식탁 위로 고요히 내려앉는 시간이다. 꿈결 같은 운명은 예고 없이 당도한다고 했던가. 스물세 살, 생의 가장 찬란한 한 대목을 마주했던 봄날의 기억이 갓 지은 밥 냄새처럼 구수하고, 또 아련하게 피어오른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골목 어귀의 풍경이 빛바랜 인화지처럼 선명하다.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 치마 교복을 입고 사뿐히 걸어오던 그녀. 순간 동네의 번잡한 소음은 정적 속으로 잦아들고, 세상의 모든 빛은 오직 그녀만을 비추는 외줄기 조명이 되었다. 그 찰나, 내 남은 생은 저 빛의 궤적을 따라 흐르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청춘이 맛본 천국의 기쁨은 필연적으로 지독한 갈망을 동반하는 법이었다. 담벼락을 사이에 둔 앞집 막내딸, 모태신앙인 그녀를 향한 상사병은 날로 깊어졌다. 아침 햇살에 출렁이는 그녀의 머릿결을 한 번이라도 더 눈에 담으려 동네 놀이터를 서성이는 고행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병증을 진작에 눈치채셨다. 무심했던 반상회에도 주일 미사에 가듯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참석하셨고, 그녀의 어머니가 빗질하는 골목길을 함께 쓸며 소리 없는 조력자가 되어주셨다. 나는 밤마다 성모께 빌 듯 간절한 문장들을 적어 내렸다. 내가 짊어진 삶의 십자가를 기꺼이 함께 지자는, 참으로 무모한 청혼서였다. 편지의 끝머리엔 늘 '내 탓이요, 내 큰 탓이요, 내 크나큰 탓이로소이다'라는 기도를 뻔뻔하게 덧붙였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선량함을 가장한, 사랑이라는 이름의 강요였을지도 모른다. 그 간청이 닿았는지 이듬해 가을, 기적처럼 두 번의 혼례를 치렀다. 전날의 정결한 혼배성사와 이튿날의 떠들썩한 예식,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 벅차던 '앞집 처자'는 그렇게 나의 반려가 되었다. 그 후로 마흔일곱 해, 아내는 갯벌의 소금처럼 제 몸을 녹여 집안의 간을 맞추어 왔다. 아이들의 해진 양말 코를 꿰매고, 남편의 고단한 어깨 위로 쏟아지는 세상의 궂은비를 함께 맞으며 집안에 온기를 채워나갔다. 소금이 미역에 닿아 생기를 불어넣고 배추에 닿아 숨을 죽이듯, 아내는 상황에 따라 자신을 낮추며 가족을 보듬었다. 남편의 박봉을 쪼개어 가계부를 채우고, 시부모의 병시중을 묵묵히 감당해 내는 사이, 아내의 손마디는 어느새 투박해져 있었다. 밥을 풀 때면 아내는 늘 내 공기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윗부분을 꾹꾹 눌러 담고, 본인은 솥 바닥에 눌어붙은 밥을 긁어 담곤 했다. 주걱이 솥 바닥을 긁어내며 내던 그 마찰음은, 아내의 지극한 사랑을 담아내는 변주곡이었다. 젊은 날의 사랑이 타오르는 불꽃이었다면, 이제 우리의 시간은 은은한 달빛 아래 고요한 정원과 같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웃으며, 나란히 늙어갈 수 있는 존재가 곁에 있다는 것. 그것이 생의 막바지에 누리는 가장 절실한 축복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며칠 전, 아내에게 문득 물었다. "여보, 요즘도 전기밥솥에서 내 밥부터 먼저 푸오?" 아내는 대답 대신 예전의 질문을 장난스레 되물어왔다.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할 거야?" 나는 잠든 아내의 머리맡에서 나직이 대답을 대신한다. '밥 푸는 순서대로 먼저 세상을 떠난다'는 그 해묵은 속설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어보는 것이다. "그래, 제발 내 밥부터 먼저 푸세요." 그리고 마음속으로 덧붙인다. 내가 먼저 죽고, 혹여 다시 태어난대도 당신과 결혼은 하지 않겠노라고. 그저 당신의 먼발치에서 바람으로 머물며 당신의 고단한 이마를 닦아주고 싶다고. 나라는 짐을 지고 묵묵히 거친 여울을 건너와야 했던 당신의 고단한 세월을 차마 다시 보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이기적인 사내를 만나 꽃 같던 청춘을 다 바친 당신에게, 내세만큼은 오로지 당신 자신만을 위한 화려한 생을 살라고 말해주고 싶다. 잠든 아내가 꿈을 꾸는지 콧등을 찡긋한다. 젊은 날, 편지 끝에 치기 어린 마음으로 적어 내려갔던 '내 탓이요'라는 고백은 반백 년이 흐른 지금에야 가슴 저미는 회한으로 돌아온다. 내일 아침도 어김없이 하얀 김 속에 피어오른 밥 냄새가 나를 깨울 것이다. 그 온기 속에서 아내가 꾹꾹 눌러 담은 평생의 헌신을 기억하며, 나는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나직이 읊조려 본다. "그러니 부디, 내 밥부터 먼저 푸세요. 당신은 조금 더 천천히, 이 세상 맘껏 누리다 오세요." 그리하여 아내가 눈물로 비워낸 내 삶의 빈 공기 위로, 따스한 밥 냄새가 그리움처럼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아침일 것이다.

    2026-07-07 06:30:00

  •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부문 심사평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부문 심사평

    시니어들의 글쓰기 열풍이 대단하다. 무려 700여 편에 가까운 수필 작품이 응모했다니 놀랍다. 많은 시니어들이 삶의 성찰과 의미 발견이라는 광맥을 찾기 위해 열심히 글을 쓰고 퇴고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응모 작품은 대체로 노년기와 시대의 풍경을 담고 있었다. 부모나 배우자의 병고와 이별, 새롭게 시작한 취미나 일터, 가족에 관한 서사가 주를 이뤘다. 시니어들이 응모한 글이라 하더라도 소재가 다양하지 못한 점은 아쉬웠다. 수상작 선정 기준은 시니어 문학의 특성을 잘 살렸는가, 인생의 경험과 기억을 참신한 언어로 표현했는가, 삶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얻은 지혜와 해답을 잘 도출했는가, 작품의 수준이 고른가 등에 주안점을 뒀다. 또한 단순한 체험의 나열에 머무르지 않고, 개인의 경험을 독자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이야기로 확장했는지도 중요하게 살폈다. 일기처럼 쓴 작품, 가족 서사를 반복한 작품, 공모전에 맞춘 정형화한 작품 등은 선정에서 제외했다. 최종심에 오른 다섯 편은 위의 네 가지 기준에 부합한 작품이었다. 심재숙의 '덧칠', 길영숙의 '몽매', 김구섭의 '삶의 셈판', 김종국의 '평미레', 김치영의 '내 밥부터 먼저 푸세요' 등은 수필 쓰기의 기본인 문장과 단락 구분, 구성 등을 잘 갖췄다. 동시에 문학성도 빼어난 작품이었다. 수필의 문학성은 형상화나 수사학에 머물지 않는다. 글의 내용이 독자의 가슴을 두드리고 따스한 여운을 남기는지도 눈여겨보았다. 영광스러운 수상자들에게는 축하를 보낸다. 수상의 기회를 놓친 응모자들도 재도전의 용기를 가지길 바란다.

    2026-07-07 06:30:00

  •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작-수학 문제와 종아리가 붉은 여자애/ 김제이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대상작-수학 문제와 종아리가 붉은 여자애/ 김제이

    〈수학 문제와 종아리가 붉은 여자애〉 북극에서 뱀이 발견되었다는구나 뱀은 혀끝으로 꽃을 찾아간대요, 꽃들은 개구리를 불러 모으고요, 우리도 뱀을 따라 북극으로 이사 가요 그런데 수학 점수가 이게 뭐냐? 이 점수로는 북극은 고사하고 북한에도 못 간다, 네 아버지를 봐라 수학을 못 해 평생 젖은 발로 사는 거 너도 네 아버지처럼 살고 싶니? 엄마, 그건 언어폭력이에요 아버지가 알면 당장 변호사를 찾아갈 거예요, 엄마도 아시잖아요 내가 엄마를 닮아 수학 못 한다는 거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 식구가 지금까지 밥 굶지 않고 사는 게 다 누구 덕인데 수학하면 이 엄마다, 네 이모들이 산 증인이다 삼촌 고모들도 다 알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그 여자애는 누구냐? 학원 앞에서 껴안고 키스하던 그 종아리 붉은 여자애 말이다 키 작고 가슴 큰 애요? 며칠 전 집 나온 애예요, 집에 가면 온통 수학 문제뿐이래요 거실에도 식탁 위에도 화장실에도 심지어 냉장고 안까지 그래서 부끄럽대요 부끄러워지면 종아리가 붉어지고요 이해가 안 되는구나 수학 문제하고 종아리가 붉어지는 것이 어떤 함수 관계인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엄마가 한번 해를 구해보세요 지난밤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한강에서 수영하고 있는데 커다란 뱀이 엄마를 입에 물고 헤엄쳐왔어요 그게 수학적으로 가능한 일이에요? 가능하다, 꿈에서는 엄마가 뱀을 물고 요리하는 것도 가능하고 길몽이다 우리도 북극 아파트에 청약을 넣어보자 혹시 아니 우리가 당첨될지 우리도 북극 바람이 나오는 신축 아파트에 살아보자 이 동네에서는 열 받아 더는 못 살겠다 네 아버지를 팔아서라도 집 앞에는 꽃이 우글거리고 꽃이 우글거리면 개구리들이 몰려올 거고 베란다 밖 하늘에서는 색색의 뱀의 혀가 어른거리겠지 좋아요 엄마 종아리 붉은 그 여자애네는 벌써 북극에 아파트를 사놓았대요, 곧 북극 아파트 가격이 폭등할 거라고 그 애 아빠가 정치인이거든요 뭐? 정치인? 얘야 그 애 잘 사귀어 놓아라, 그 애야말로 양심적인 애 같구나 이제 알겠다, 부끄럼을 타면 왜 종아리가 붉어지는지 아마 그 애 아버지도 양심적인 분이실 거다 언제까지 우리가 이 좁은 동네에서 가재 붕어 게랑 함께 살 수는 없잖니? 이번 기회에 탈출하자 그럼요 엄마 그 애가 얼마나 빨강빨강한 애인데요 종아리도 가슴도 그러니 용돈 좀 올려주세요, 카페도 가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하고 모텔비도 내야 하고 그런데 그 애 아빠가 날 보고 수학을 못 한다고 뭐라 하면 어쩌죠? 걱정 마라 언어를 이기는 수학은 없다 동서남북 높고 빛나는 말들을 골라 쓰거라, 이를테면 민주, 평화, 인권, 환경, 여성, 노동… 보이지 않는 말일수록 좋다 그래도 할 말이 없거든 뱀을 세거라, 뱀 한 마리 뱀 두 마리 백열 마리 뱀 천 마리 그 애 아빠는 잘 이해할 거다 절대 목구멍 보이지 말고

    2026-07-07 06:30:00

  •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당선작·당선인

    ◆대상 시 ▷'수학 문제와 종아리가 붉은 여자애' 김제이(69·경기도 광명시 오리로) ◆논픽션 부문(5명) ▷'천사들의 점빵' 변재영(74·대구 수성구 동원로) ▷'전시를 안내하는 시간' 이재용(67·포항시 북구 우창동로) ▷'먼 길의 연대기 年代記' 김창남(74·대구 남구 효서길) ▷'해산령 밤길을 걸으며' 장춘문(77·대전 동구 이사로) ▷'천상으로의 비행' 박희곤(68·경남 양산시 원동면) ◆수필 부문(5명) ▷'평미레' 김종국(67·울산 북구 이화길) ▷'덧칠' 심재숙(76·대구 수성구 달구벌대로) ▷'몽매' 길영숙(65·경북 청도군 이서면) ▷'삶의 셈판' 김구섭(71·대구 수성구 수성로) ▷'내 밥부터 먼저 푸세요' 김치영(71·대구 서구 달구벌대로) ◆시·시조 부문(5명) ▷'엉거주춤을 생각하며' 강기영(65·서울 성동구 매봉길) ▷'어름사니처럼 나비처럼' 방윤후(78·경기도 김포시 전원로) ▷'일과' 장예은(65·창원시 진해구 소사로) ▷'도마의 노래' 최수일(78·서울시 성동구 금호로) ▷'물수제비의 자세' 강명숙(66·광주 광산구 평동로)

    2026-07-07 06:30:00

  •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수상작-해산령 밤길을 걸으며/ 장준문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수상작-해산령 밤길을 걸으며/ 장준문

    '금강산 가는 길' 건물 앞 길가에 세워놓은 커다란 형광빛 입간판에 이렇게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창밖으로 풍기는 찌개 냄새에 이끌려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애초의 일정은 얼마간 더 걸어 방산면 소재지까지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어둠이 깊어진 데다 온몸에 젖어 든 피로와 시장기로 더 이상 발걸음이 내디뎌 지지가 않았다. 창가 식탁에는 중년의 두 남자가 벌겋게 빠글거리는 찌개 냄비를 사이에 두고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생각을 다듬을 겨를도 없이 시큰거리는 엉덩이를 등받이 의자에 털썩 내려뜨렸다. 남자들의 시선을 받으며 여주인에게 여기가 어디인지 물었다. 여주인은 의아한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방산이라고 했다. 한쪽 벽에는 '찌개백반'이라고 적힌 종이쪽지가 입춘방처럼 삐딱하게 붙어있었다. 식사로는 그것뿐이라 달리 고를 것도 없었다. 얼마간 지나 여주인은 펄펄 끓는 찌개 뚝배기를 중심으로 깍두기와 고추 무침 따위 밑반찬 몇 가지를 식탁에 놓아 주었다. 장시간 도보에다 점심 먹은 지 일곱 시간가량이나 지났으니 천천히 맛을 음미할 계제는 아니었다. "낭만적이십니다." 벙거지 모자에 배낭을 메고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사나이가 궁금했든지 창가의 좀 투박해 보이는 사람이 북쪽 느낌의 억양으로 말을 걸어왔다. 나는 점심 무렵 해안 펀치볼을 출발해 지금 막 도고령을 넘어왔노라고 말했다. 며칠 전 고성 통일전망대에 들렀다가 간성에서 1박한 후 동해안 대대리를 출발하여 '휴전선 따라 걷기 국토횡단' 3일째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들은 뜻밖이라는 듯 얘기에 관심을 보였다. 좀 훤하게 생긴 또 다른 사람은 본가가 간성이라며 내 얘기에 상기되는 듯했다. "한잔 하시겠습니까?" 그 투박해 보이는 김 씨라는 사람이 비운 소주잔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사양했다. 자고 나면 다시 이어질 도보에 지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잠자리에 누워서는 심하지만 않게 마시며 그들로부터 휴전선 접경지역의 일상에 관한 얘기나 좀 들어볼 걸 하는 때늦은 후회를 했다. 그들은 민통선 안쪽에서 철책선 보수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옛 금강산 가는 길을 따라 물 맑고 풍광이 수려한 두타연을 거쳐 전방 철책선을 오르내린다는 것이었다. 아무나 볼 수 없는 좋은 경치를 보며 하는 일에 만족해했고 분단의 최전선에서 나라를 위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대단했다. 그 순간 도고령을 넘으며 아쉬움을 곱씹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휴전선 따라 걷기'는 당연히 분단의 최전선을 걷는 것이다. 그런데도 해안 펀치볼로부터 돌산령 터널을 빠져나와 만난 월운리 갈림길에서 두타연 방향을 택하지 않은 것이 내내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실은 갈림길에 그쪽 길의 통행에 관한 구체적인 안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 무작정 들어섰다가 중도에 되돌아 나올지도 모른다는 염려에서였다. 실제 그로부터 며칠 후 그런 일이 있었다. 아침에 철원 김화에서 출발해 남대천을 따라 걷다가 청양리에서 문혜리와 도창리 방향의 T자형 갈림길을 만났다. 거기에도 어떤 안내도 되어 있지 않아 당연히 최전방인 도창리 쪽을 택했다. 그러나 한 시간가량을 걷던 중 경계병들의 제지에 가로막혔다. 하소연하듯 사정을 말해 보았지만 최전방의 막중한 경계 상황에 그런 사정이 통할 리 없었다. 옛말에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했듯 피로도 풀 겸 야전 막사 옆 둔덕에 앉아 가방에 넣어 둔 김밥 하나로 점심을 때우며 되돌아갈 버스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 민통선 안쪽 도창리에서 나오는 버스로 되돌아 나왔는데 그럭저럭 두 시간 반가량을 엉뚱한 곳에서 허비하고 말았다. 그러나 매사는 생각 나름으로 다소 피로가 가중되고 시간이 걸렸지만 그 구간을 걸어 본 것도 아주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좀 투박해 보이는 김 씨는 철책선 작업 중 가끔 북한 순찰병들을 본다거나 고라니를 떼로 보았다는 등 자기들만이 아는 얘기에 신이 났다. 그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주었다. 전쟁 당시 남북 어느 쪽인가를 겨냥했을 파랗게 녹슨 소총 탄환이었다. 비록 조그만 것이었지만 분단의 상징물로서 국토횡단을 반추할 물건이라 '휴전선 따라 걷기'를 마친 후 작업실 책상머리에 놓아두었다. 간성의 강 씨는 철책선 작업을 얘기하던 중 갑자기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는 함경남도 원산 부근 안변이라는 곳이 원 고향이라고 했다. 겨우 다섯 살이던 어느 날 전쟁이 터지면서 아버지의 목선을 타고 잠시 피신 차 내려왔다가 그만 올라가지 못하고 눌러앉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집에 남은 어머니와 두 돌이 갓 지난 여동생과는 그 길로 생이별이 되고 말았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멀리 가지 못하시고 간성에다 터를 잡으셨어요." 그는 젊은 시절엔 속초에서 작은 회사에 다니다가 철책선 일로 바꾸었다고 했다. "산 위에서라도 어머니가 계시는 북쪽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에 철책선 일을 시작했지요." 어린 자식을 떠나보낸 어머니의 비통한 마음을 어렸던 그가 알기나 했을까만 지금 휴전선 능선에서 북녘땅을 바라보는 그의 심정은 어떨까. 잊은 듯 살면서도 가슴에 아픈 덩어리 하나를 품고 사는 그의 한은 또 오죽할까? "나이를 먹으니까 자꾸 어머니 생각이 나서…. 허허!" 얘기를 이어가던 강 씨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게 민망했던지 갑자기 멋쩍은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전날 가칠봉 을지전망대에 들렀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가칠봉은 해안 펀치볼을 포란형으로 둘러싼 봉우리로 남북 간 중요한 경계선이다. 전망대에는 도보로는 갈 수 없기에 양구통일관 관장의 도움으로, 현역 때 근무했던 을지전망대 관리부대를 찾아왔다는, 왜관에서 온 젊은 사람들의 차에 동승해서 올라갈 수 있었다. 을지전망대에서는 금강산이 손에 잡힐 듯 보였는데 대체로 해금강 쪽이 보이는 고성 통일전망대에서의 경관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나 북쪽을 바라보며 잠시 젖었던 감상은 이미 내 머릿속에서 조각조각 부서져 사그라지고 있었다. 쉽지 않게 바라본 북녘 산하의 느낌 한 자락이나마 챙겨 두려고 은밀히 카메라에 담은 휴전선 저쪽 풍경 몇 컷은 나오던 중 관리 장교로부터 모두 삭제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눈길 닿는 곳뿐일지라도 휴전선 능선에서 항상 북녘땅을 바라볼 수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아니,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북녘땅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강 씨에게는 부럽다는 말조차 오히려 예가 아닐 듯했다. 허기를 해결하고 나니 잠잘 곳이 문제였다. 식사를 한 후 방산리로 가야겠거니 하며 여주인에게 물어보니 방산리에는 여관이 없고, 마침 노동자들이 쓰던 식당 방 하나가 비어 있다고 했다. 알고 보니 '금강산 가는 길'은 철책선 노동자들이 숙식을 하는 곳이었다. 애초의 일정계획은 방산리까지 걷는 것이었으나 너무나 지친 상태라 좀 불편하더라도 식당 방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이른 아침 기상하니 강 씨와 김 씨가 보이지 않았다. 여주인은 그들은 이미 철책선으로 출근했다고 말했다. 아직 일곱 시도 되지 않았는데, 이럴 수가! 잠시 스친 인연이지만 작별 인사라도 했어야 하는 건데…. "잘 자고 갑니다." 여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이른 아침 식당을 나섰다. 화천 풍산리까지는 온종일 걸릴 거리라 잠시라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식당 문을 나서자마자 또다시 사타구니 서혜부가 심하게 뻐근하고 무릎과 발목도 어김없이 시큰거렸다. 아침 출발 때면 늘 있는 현상이나 한 시간가량 걷다 보면 조금씩 풀리긴 한다. 큰길로 올라와 얼마간 걸어 삼거리를 만났다. 거기서 북쪽으로 가면 철책선 노동자들이 오르내린다는 두타연 쪽으로, 분단 전 서울을 떠난 남쪽 사람들이 금강산을 오가던 길이다. 그래서 삼거리 가까이 있는 식당 '금강산 가는 길'은 그런 연유로 붙여진 이름이겠다. 아침 산새 소리가 부산스러운 가을 길엔 맑은 하늘로부터 금빛 햇살이 눈부시게 내려앉았다. 왼쪽 길가에 '화천 58km'라고 적힌 나지막한 이정표가 보였다. 상의 안주머니에 접어 넣어 둔 지도를 꺼내보았다. 지도상 고방산에서 화천읍에 조금 못 미친 풍산리까지는 어림잡아, 첫날 동해안 간성읍에서 출발해 진부령을 넘어 인제 원통까지 걸었던 52킬로미터 정도에 버금가는 거리일 듯하다. 중간쯤에서 평화의 댐을 만나는데 댐을 지나서부터 풍산리까지는 주변에 마을 하나 없는, 온통 꼬불꼬불한 고갯길로 이어져 있다. 아마 전국 어디에도 있을 것 같지 않은 난코스 중 난코스라 단단히 각오를 다져야 한다. 금강산 가는 길 삼거리를 지나자 옆으로 자그마한 내가 흐르고 있었다. 두타연에서 흘러내리는 수입천이라는 북한강 지류로 파로호로 흘러드는 물길이다. 이른 아침 물소리를 들으며 내를 따라 걸으니 사타구니와 무릎 통증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발걸음은 다소 가벼웠다. 송현리, 장평리 등을 스쳐 지나 방산면 소재지에 이르렀다. 지난밤 예정대로 방산리까지 걷지 못한 걸 후회했으나 햇빛 밝은 아침 걸음에도 만만한 거리가 아니니 부질없는 후회를 한 셈이었다. 방산면 사무소에서는 일찍 출근한 부지런한 직원들이 옆 뜰에서 낙엽을 쓸고 있었다. 이런 접경지역 공무원들은 후방의 그들과 정신 자세에서 어떻게 다를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면사무소 앞을 지나 다시 한참을 걸어 오미리 주변에서 작은 갈림길을 만났다. 고방산에서 오미리까지는 이 지역에선 흔히 볼 수 없는 평지로 이어지더니 평화의 댐 방향으로 접어드는 오미리 갈림길에서부터는 다시 완만한 고갯길이 시작됐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길을 쉼 없이 걸어, 강원도 터널치고는 그리 길다고는 할 수 없는 1,300미터가량의 오천터널을 통과했다. 뱃속에서는 또다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릴 만큼 허기가 시작됐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 미련스럽다. 가게가 있는 방산면 소재지를 지나고서도 꼭 닥치고 나서야 김밥 한 덩어리라도 넣어 올 걸 하며 후회하는 버릇이다. 휘며 꺾어 내리는 천미계곡을 지나던 중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미리 고갯길 초입에서 검은 승용차 한 대가 평화의 댐 가는 길을 묻고 지나간 이후, 아침나절인데도 지나는 사람이나 차량을 본 적이 있었나 할 만큼 인적이 없었다. 양구읍 쪽에서 평화의 댐으로 가는 주도로인데도…. 끝없이 이어지는 밋밋한 길에 지칠 즈음 짧은 터널 하나가 나타났다. 양구와 화천 간 경계 지점임을 알 수 있는 양화터널. 그리고 또 하나의 짧은 터널이 숨 가쁘게 이어졌다. 터널 이름만으로도 평화의 댐에 다다랐음을 직감할 수 있는 평화터널이었다. 진입 전 이미 뻥 뚫린 터널 저쪽, 커다란 아치형 종루가 눈에 확 들어왔다. 짧은 터널을 벗어나자 거대한 댐 제방과 검푸른 물빛이 어우러진 시원한 경관이 눈앞에 펼쳐있었다. 한 시가 조금 넘은 시각, 중간 기착지인 평화의 댐에 도착했다. 그런데 무언가 뜻밖이었다. 관광객들로 붐빌 것으로 예상한 한낮의 공원은 중년 여성들 서넛이 서성일 뿐 산중처럼 고요했다. '평화의 댐' 표지석과 부조 장식물 따위 눈에 들어오는 대로 건성건성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 한 눈으로는 식당을 찾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식당일 만한 건물은 보이지 않고, 하나뿐인 자그마한 매점마저 문에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평화의 댐에 도착하면 찌개 냄새 풍기는 식당가에 사람들이 북적이리라는 생각으로 주린 배를 참으며 걸었는데 이럴 수가! '세계 평화의 종' 종루 뒤쪽 가장자리에 오뚝 서 있는 관광안내소로 향했다. 작은 유리창을 열며 주부로 보이는 안내원이 얼굴을 내밀었다. 안내원에게 어디 식사할 곳이 없느냐고 물으니 식당은 원래 없고 월요일이라 매점도 열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강원도, 아니 대한민국 대표 안보 관광지 중 하나인 평화의 댐에서 식사를 할 수 없다니. 그러고 보니 관광안내소를 제외하고 주변의 DMZ아카데미나 물문화관 등 모든 시설들이 문이 닫혀 있었다. 당일이 월요일이라는 것조차 안내원으로부터 듣고서야 알았다. 사전에 대략적 상황 파악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준비를 건성으로 한 걸 또 자책했다. 고방산 숙소에서 아침 일곱시 경 식사를 했으니 이미 시장 끼는 견디기 어려운 지경인데, 주변에 인가 하나 없는 길고 긴 해산령을 넘자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안내원이 자신의 플라스틱 의자를 권했다. 간단한 의례와 함께 지친 몸을 플라스틱 의자에 풀썩 걸터앉았다. 그녀는 또 고맙게도 서랍에서 사발면 하나를 꺼내 이거라도 괜찮으냐고 물었다. 평소라면 웬만하면 사양하겠지만 감지덕지, 체면 차릴 상황이 아니었다. 전기포트로 끓여 준 물을 부어 면이 대충 익자 허겁지겁 국물까지 비웠다.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빈속 아랫부분만이라도 채우고 나니 조금은 기운이 나고 눈에 생기도 도는 것 같았다. 관광 안내원은 화천군 문화해설사로 주당 4일은 감성마을 이외수문학관에서, 이틀은 평화의 댐에서 봉사한다고 했다. 그녀는 문화해설사답게 청정한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화천의 자랑거리들을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뚜우웅~~~' 안내소를 나서려는 순간 한낮의 적조를 깨트리는 큰 소리가 댐 공간에 울렸다. 돌아보니 세계평화의 종 종루에서 거대한 범종이 느린 몸짓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댐 주위를 서성이던 여성들이 새해맞이 재야의 종에서 본 것처럼 줄에 매달린 커다란 당목 둥치를 부여잡고 타종을 하고 있었다. '뚜우우웅~~~' 범종이 다시 울렸다. 종소리는 긴 맥놀이를 이끌며 호반 산록의 단풍 숲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맥놀이 여운을 들으며 범종을 둘러보던 중 아래에 양각으로 새겨진 설명문이 눈에 들어왔다. 세계평화의 종은 세계의 분쟁 종식과 평화와 생명을 기원하는 의미로 분쟁을 겪었거나 분쟁 중인 나라들에서 수집한 탄피 1만관(37.5톤)으로 높이 5미터, 폭 3미터 규모의 범종을 만들었다. 거기에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고자 1만관 중 9,999관으로 종을 주조하고 남북통일의 날 나머지 1관을 추가하여 세계평화의 종을 완성한다는 것이었다. 범종 위 용뉴 부분에는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네 마리를 사방으로 배치했는데 그중 한 마리는 한쪽 날개가 잘려진 상태였다. 이 잘린 날개가 통일의 그날 완성될 1관의 내용이라는 것이었다. 안내원과 평화의 댐이나 접경지역에 위치한 화천의 인문과 자연 등을 소재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흐른다는 걸 잊고 말았다. 안내원에게 화천읍 방향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아흔아홉 구비 해산령을 넘어야 해요." 해산령은 이만저만 난코스가 아니라는 건 지도를 보아 대강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안내원의 말에 새삼 부담이 느껴졌다. 안내원도 남 일 같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비목공원은 아래쪽에 있다기에 내려가 한 바퀴 둘러본 후 거기서 바로 출발할 요량으로 안내원에게 인사를 하고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내리막 중턱엔 비목공원 상징 조형물이 서 있었다. 화강석으로 씌워진 대칭형 주 탑을 중심으로 앞쪽 좌우 좌대엔 아기를 안은 여인과, 소총을 든 반라의 젊은 용사의 청동상이 각각 서 있는 구성이었다. 아마 '비목'의 노랫말처럼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묻힌 무명용사의 충용정신과, 그를 잉태하고 품어 온 조국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다. 주 탑의 화강석 표면에는 비둘기 몇 마리가 선조로 새겨져 있고, 조형물 양쪽 둘레에는 어릴 적 운동회 날 휘날리던 만국기처럼 좌우에 각각 태극기와 유엔기를 필두로 6.25 참전 16개국 국기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니 비목공원은 댐 가장자리 길가에 있었다. 마치 흰바우산白巖山 계곡 양지 녘에 쓸쓸히 선 그 노랫말 속의 비목처럼 공원이라 하기엔 좀 허허로운 느낌이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비목' 시비를 비롯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조형물들을 둘러보며 흥얼거려 보았다. 슬픈 노랫말에서는 포화가 빗발치는 전선 계곡에서 먼 고향 가족과 초동 친구를 그리며 고통 속에 숨져 갔을 병사의 비애와 한이 새삼 느껴졌다. 그 무명용사의 한에의 공명인 듯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 아래로부터 차오르는 것 같았다. 전쟁의 상흔이 아직 아물기 전인 1960년대 중반 어느 날, 한명희라는 2기 ROTC 출신 청년 장교가 흰바우산 계곡에서 녹슨 철모와 돌무더기를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어쩌면 하나의 에피소드로 지나쳐버릴 수도 있을 일일 텐데 그 순정純正하고 분별력 있는 청년 장교로 인해 이 주옥같은 가곡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 청년 장교는 전역 후 TBC 동양방송 PD로 일하던 중 장일남 작곡가로부터 이 곡에 쓸 노랫말을 의뢰받고 백암산 비목의 기억을 떠올려 지은 것이라고 한다. 공원을 거닐면서 이처럼 감동적인 '비목'의 현장을 전해 준 그분과, 거기에 잘 맞는 옷을 입혀준 장일남 작곡가님께 내심으로나마 감사와 존경의 뜻을 표했다. 비목 시비를 뒤로하고 도로를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 '검문 중'이라는 팻말이 보이고 철모 군장에 완장을 찬 병사들이 막아섰다. 북쪽 방향의 민통선 검문소였다. 지친 몸으로 평화의 댐 곳곳을 두어 바퀴 돌다 보니 머릿속의 방향 계기가 제멋대로 작동해 버린 듯했다. 평화의 댐이 휴전선 가까이에 있다는 건 짐작은 했지만 댐 바로 옆에 민간인 통제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평화의 댐 북쪽 길을 막아선 민통선 검문소. 분단의 현장은 실재적이었다. 평화의 댐은 남북을 잇는 북한강 물길의 남쪽 통제선이다. 북쪽 어느 골짜기에서 발원해 흘러내린 물은 이곳 평화의 댐 거대한 제방에 의해 통제되어 버렸다. 순간 머릿속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던 기억 하나가 일었다. 20여 년 전 북의 금강산댐 물 공격을 막겠다고 온 국민이 벽돌 한 장, 모래 한 줌 어치의 돈을 모아 만든 것이 이 평화의 댐이었지. 당시 북한이 짓기 시작한 임남댐 물이 채워져 어느 날 폭파하면 서울의 63빌딩 절반이 물에 잠긴다고 신군부 정권에서 허풍을 떨던 바로 그것이 아니던가. 그렇다. 여기 댐을 채운 물은 하늘에서 내리고 땅에서 솟아 강토를 적시는 자연의 물이기보다는 지구상 어디에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이데올로기의 물인 것이다. 이곳 평화의 댐에서 잠시 멈추어 호흡을 가다듬은 북쪽의 물은 조금씩 흘러 파로호로 흘러들고, 다시 느린 걸음으로 이어내려 서울의 동쪽 양수리에서, 태백산 황지에서 발원한 남한강 물과 한 몸이 되어 거대한 한강을 이룬다. 그렇게 한강은 남과 북의 물길이 하나로 이어져 이 조국산하를 생동케 하는 국토의 대동맥이 되는 것이다. 순간 머릿속에선 작은 상상의 조각들이 부나비처럼 일었다. 이 계곡 잔 물고기들은 산란하고 부화하며 물길 따라 자유로이 남과 북을 오르내릴 텐데. 북쪽 물고기들은 이 물길의 통제선을 넘어 양수리에서 남한강의 동족들과도 반가이 해후할 텐데…. 아참! 떠나야 한다. 뒤섞이는 생각 중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띠이잉~' 하고 울렸다. 깜박 생각에 골몰한 사이 휴대전화기 속 시계는 벌써 오후 세 시 반에 가까워 있었다. 갑자기 급해지는 마음에 허겁지겁 오르막을 되올랐다. 관광안내소 쪽문으로 안내원에게 재차 인사를 하고 평화의 댐을 출발했다. 세시 25분이었다. 한 시 15분 경 댐에 도착했으니 두 시간을 넘게 평화의 댐에서 어떻게 흘러버렸는지도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내버린 것이다.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풍산리까지는 가야 하는데 아흔아홉 구비 해산령을 넘자면 너무 늦어버린 시각이었다. 이미 낭패지만 더 낭패스러운 해산령 고갯길이 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걷는 수밖에…. 서둘러 화천 방향의 길목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한쪽 어깨에 헐겁게 걸쳤던 배낭을 양쪽 어깨에 단단히 추스르고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평화의 댐' 표지석을 뒤로하고 댐 제방 위 도로로 접어들었다. 여전히 고방산에서부터 걸어 온 460번 지방도 평화로였다. 제방 중간쯤에서 잠시 멈추어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름처럼 평화로운 댐 수면에는 고요히 잔물결이 반짝이고 강을 따라 멀리 상류를 바라보니 자하紫霞 빛 능선들이 첩첩이 아름답게 펼쳐있었다. 그러나 아름답게 보이는 북쪽의 능선들도 실은 이미 묵어 빠진 이데올로기라는 바이러스로 감염된 멍든 강토일 뿐이라는 생각에 가슴 속에선 분기만 일었다. 댐 제방을 벗어나 해산령 고갯길로 접어들었다. 국토횡단 첫날 길고 긴 진부령을 넘고 해안 펀치볼에서 2,995미터의 돌산령 터널을 지나고 해 저문 도고령을 넘었는데, 지금 시작되는 해산령은 긴 터널과 굴곡 심한 고갯길로 이루어 진 그 종합 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걷지 않아 대붕터널에 연이어 재안터널을 지났다. 재안터널은 오른쪽에 주봉이 보이는 재안산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겠다. 지도상 왼쪽에는 1,190미터의 '일산'이 표시되어 있는데 '해가 뜨는 산'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러고 보면 해산령은 '일산의 고갯마루'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는 '일산령'이라 할 것을 옛날 이두처럼 일日을 순우리말 '해'로 표현한 것이다. 참 독특하고 아름다운 작명이다. 기왕이면 주봉인 '일산'도 '해산'이라 할 것을…. 좌로 우로 휘고 꺾고 오르고 내리고를 거듭하며 걷는 해산령 고갯길. 아주 드물게 차량 한두 대 스쳐 지날 뿐 인적조차 없는 적막한 고갯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쉼 없이 고개를 오르자니 경사가 가파른 모퉁이길 가장자리에 자그만 건물 하나가 서 있었다. 평화의 댐을 떠난 후 처음 보는 건물이라 그마저 반가웠다. 네 개의 기둥에 지붕을 얹은, 요즘 아파트 단지 같은 데서 흔히 보이는 원두막처럼 생긴 건물로 이마에는 '해산전망대'라는 편액이 붙어있었다. 인적이 없으니 그 스스로 고적해 보이는 전망대 벤치에 걸터앉았다. 다섯 시 25분. 평화의 댐을 떠나 꼭 두 시간이 흐른 시각이었다. 늦가을이라 벌써 전망대 주위의 산그늘엔 어둠이 내리고 멀리 바라보이는 능선 위 노을도 검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지친 걸음에 시장기도 극에 달해 배낭 속에 아껴둔 자유시간 하나와 작은 감자칩 한 봉지로 허기를 달랬다. 이제부터는 아무리 허기가 져도 풍산리까지는 달리 방법이 없으니 부지런히 걷는 수밖에. 5분가량을 쉬었다가 다시 힘겹게 일어났다. 며칠간의 도보로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이런 상황에서는 몇 개의 동전마저도 무게로 느껴진다. 사전에 모든 휴대품을 최소화 했지만 그마저도 부담이 됐다. 필수품인 배낭도 멜빵 어깨 부분에만 살짝 패딩이 있을 뿐 몸체는 홑 천으로 고작 150그램가량인 걸로 준비했다. 내용물도 최소한의 세면도구와 간단한 필기 용구, 그리고 무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보급형 카메라 하나가 전부였다. 지도도 해당 지역 페이지만을 컬러 복사해 이어 붙여 만들었다. 어느 외국 도보 여행자의 경험담에 지도의 종이 무게마저 부담스러워 여행 중 필요하지 않은 부분은 도려내 버렸다고 했는데, 나는 아예 출발 전 그렇게 준비했다. 터덜터덜 걸어 오르던 중 오른편 길가 언덕 위에서 축대 공사를 하는 서너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평화의 댐을 떠난 후 처음 보인 사람들이라 내심 반가웠지만 말을 걸자니 왠지 실없다는 생각에 곁눈질만으로 스쳐 지났다. 끝없이 휘어 오르는 해산령에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했다. 목에 건 카메라도 어둠 속에서는 무용지물이라 아예 배낭에 넣어 버렸다. 평화의 댐 출발 후 풍산리까지는 아직 절반을 걷지 못한 지점에서 벌써 어둠이라니…. 평화의 댐에서 꾸물거린 게 두고두고 후회스러웠다. 후회를 곱씹으며 그저 힘닿는 대로 걷는데 마침내 저만치에 흐릿하게 터널 입구가 나타났다. 해산터널이었다. 조금 더 올라 터널이 가까워지면서 오른쪽 숲속에 반가운 불빛 하나가 보였다. 여섯 시가 조금 넘어서 터널 입구에 도착했다. 11월 중순의 여섯 시는 이미 밤이다. 거리를 가늠해 보니 아침에 고방산 출발로부터는 대략 4분의 3정도는 걸어 온 것 같았다. 국토횡단 노선 중 어느 곳과도 비교를 허하지 않는 해산령인데 그중에서도 어스름 속에 마주한 해산터널은 공포감마저 느껴졌다. 통과 전 일단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도로 옆 풀섶에 푹 무질러 앉았다. 반쯤 누운 채 올려다본 하늘에는 초아흐레쯤으로 보이는 마늘쪽 같은 반달이 새침하게 떠 있었다. 오른쪽 숲속에 보이던 빛은 '해산령 쉼터'라고 세로로 쓰인 광고판의 불빛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민가는 보이는 것만으로도 반가웠다. 방산면 소재지를 지나 고갯길 초입 부근의 오미리 마을 이후로는 민가를 본 적이 없는 듯한데 적어도 평화의 댐 출발 이후로는 처음 보는 집이었다. 이 높은 해산령 꼭대기 어두운 숲속에 웅크리고 앉은 외딴집은 마치 중학교 때인가 읽었던 허 아무개 작가의 소설 '임꺽정' 속에 나오는 고갯길 외딴 주막을 연상케 했다. 요즘 시대에 이런 첩첩산중에 외딴 쉼터가 있다는 게 놀랍고 쉼터를 운영하는 사람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쉼터를 바라보고 있자니 머릿속에서는 배고픔의 생리적 욕구와 시간 관계로 참아야 한다는 자제심이 마구 엇갈렸다. 아침 일곱 시경 식사를 한 후 밥 구경을 못 했으니 풍산리까지 가자면 속을 좀 채워야 한다. 아니, 풍산리까지는 두 시간가량은 걸릴 텐데 도착시간을 생각하면 힘들지만 참고 가는 게 낫겠다. 그래도 긴 긴 고갯길을 걷자면 최소한의 에너지는 필요할 것 아닌가. 그러나 식사를 한다 해도 준비시간 포함해 적어도 30분가량은 걸릴 것이니 시간이 너무 지체된다. 아니, 휴게소에 식사가 되기나 하는지. 들어가서 알아보자니 왕복 백 미터나 될 거리가 지친 몸에 너무 부담스럽다. 더구나 힘들게 들어갔다가 만일 식사가 되지 않는다면 헛걸음에 대한 후회는 또 오죽할까. 평화의 댐에 식당이 없다는 것만 미리 알았어도 먹는 문제는 어떻게든 대비를 했을 텐데…. 배낭에 과자부스러기라도 좀 넣어 올 걸. 머릿속에서는 갖가지 생각들이 들쑥날쑥 번잡하게 떠올랐다. 그 옛날 햄릿의 갈등이 이런 것이었을까? 그때 휴게소로부터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빠져나와 터널로 진입해 사라져 갔다. 아차! 식사가 되는지 물어보기나 할 걸…. 승용차 꽁무니를 바라보며 또 때늦은 후회를 했다. 노곤한 상태로 앉아 있자니 차를 세울 힘이 없었고, 실은 그보다 지친 머리의 순발력이 따라주지 않은 게 먼저였다. 그런데 승용차의 주인은 식사 손님일까. 아니면 퇴근하는 휴게소 사장이나 직원일까? 아니, 내가 왜 이러나. 이미 지나 가버린 사람인데 그가 사장이든 손님이든 무슨 상관이라는 건가? 생각은 앞뒤 분간도 없이 뒤섞였다. 얼핏 반전하여 그 운전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오가는 발길도 끊어진 어스름 녘에 이 높은 고갯마루 터널 앞에 홀로 앉아 있는 내가 예사로 보이지는 않겠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체로 북쪽과 관계된 어떤 불순한 신분을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나마 작고 아담한 체격에다 크게 악해 보이지 않는 인상 덕을 본 건지는 알수 없지만…. 가야지! 평화의 댐에서 밀려진 시간 탓으로 내심 다급해서 5분간 이런저런 갈등과 부질없는 생각만 하다가 힘겹게 일어나서 괴물의 아가리처럼 열린 터널로 들어섰다. 차량이라곤 검은색 승용차가 마지막으로 터널 안은 세상이 멎은 듯 고요했다. 아무리 긴 터널이라도 반대쪽 입구에 소형차 한 대만 진입해도 심장이 울릴 만큼 굉음이 심하다는 건 며칠간의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니 차량 통행이 없다는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해산터널은 1,986미터로 비교적 긴 터널이다. 터널 안은 그나마 붉게 등이 켜져 있고, 일직선 터널이지만 낮이라면 작은 빛점으로라도 보일 터널 끝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해안 펀치볼에서 동면 방향으로 나온 돌산령 터널은 2,995미터로 해산터널보다 1킬로미터가량 더 길지만 밝은 오전이어서 바늘구멍만한 끝이 보였었다. 하지만 빈번한 차량 진입으로 소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돌산령 터널과 해산터널은 국토횡단으로 통과한 터널 중 가장 긴 터널들이다. 최근 개통된 서울양양간고속도로의 인제터널은 무려 11킬로미터나 된다지만 일반도로에서는 해산터널도 흔치 않은 길이다. 흔히들 '아무 데 가서 힘 자랑하지 마라.' 또는 '…양반 자랑하지 마라.' 따위의 속담이 있듯 이쯤 되면 '강원도에 가서 터널 자랑하지 마라'라는 속담이 나올 법도 하다. 터널에 진입하여 오른쪽 보행로를 따라 걸었다. 그것도 몸에 밴 일종의 타성이었다. 잠시 후 차량 통행도 없는데 내가 왜 이러나 하며 도로 가운데로 내려섰다. 어두운 밤. 세상 모든 것과 단절된 채 정확히 좌우로 균제된 터널 가운데로 걷자니 심상으로서의 내가 보이는 것 같았다. 절대 정적 속에 평소에는 거의 생각지도 않던, 좀 어려운 말로 '실존'이라는 것이 떠 올랐다. 원시인류의 생활상이나 인간이 홀로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현재로서는 별 의미도 없는 생각들. 또는 가족이나 나를 둘러싼 존재들과의 관계나 인연 따위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얼마 전 티브이에서 '터널'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출장길에 승용차로 터널을 지나던 주인공 남자가 터널 중간쯤에서 앞과 뒤가 연이어 무너져 내려 암흑 속에 갇히면서 겪는 내용이었다. 물론 나의 현재보다는 훨씬 더 처절했겠지만 영화의 주인공도 그 상황에서 나와 조금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해산터널이 환영처럼 오버 랩 되었다. 만약 그 영화를 국토횡단 이전에 보았다면 터널 통과에 얼마간 심리적 압박을 느끼지 않았을까. 30분 남짓 걸려 마침내 긴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어두운 밤에 통과한 1,986미터 터널은 실제보다 더 긴 듯 느껴졌다. 어두운 밤이라도 주변이 흐리게나마 보이는 바깥과는 느껴지는 심리적 상태가 다른 것 같았다. 지금껏 4일간 걸어 온 모든 구간 중에서 해산터널 통과는 단연 압권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상황을 예단할 수는 없겠지만 국토횡단을 마무리한 후 돌이켜 보아도 역시 해산터널은 아마 가장 특별한 기억으로 남지 않을까 싶다. 구름 사이로 떠가는 반달은 터널 전보다 조금은 더 선명해 보였다. 어려운 과정이 끝났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지친 몸으로도 기분은 나름 상쾌했다. 그러나 터널 통과 중 긴장감으로 잊고 있던 시장기가 다시 견디기 어려운 공격을 가해왔다. 하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니 참고 부지런히 걷는 수밖에…. 지도상으로는 고갯길 주위에 어떤 인위적인 시설도 없는데 오른쪽으로 아득히 먼 곳에서 가물가물한 불빛 두어 점이 보였다. 민가일 가능성보다 군부대 야전 막사쯤으로 짐작되는데 어떻든 해산령 쉼터 이후 유일하게 보이는 인간의 흔적이었다. 구불구불 휘어진 길은 터널 전보다 굴곡이 더 심한 것 같았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휘어 휘어 내리며 또 하나의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느닷없이 '휘익~' '휘익~' 하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귓바퀴에 부딪힐 듯 스치며 바람을 일으키는 새의 날개짓이었다. '푸득' '푸드득' 하는 소리가 두어 번 반복되고 한 마리가 '끼악 끼악' 하더니 여러 마리가 동시에 불쾌한 소리로 왁자지껄 울어댔다. 이어서 검은 새들 무리가 머리 위 허공으로 '휘익 휘익' 집단 비행을 했다. 그래도 야생의 새들조차 어떤 선을 지키려는 걸까? 실제 상해를 일으킬 정도의 공격은 가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새들의 공격적인 행동은 물론 어둠 속에 난데없이 나타난 나를 자기들의 평화를 헤치는 적으로 보았기 때문이겠다. 검은 새 떼의 출현은 문득 학창 시절 보았던 알프레드 히치콕의 명작 '새'라는 영화를 떠올렸다. 너무 오래되어 스토리는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아주 불길한 느낌의 초현실주의적인 영화였다. 불쾌한 소리로 울부짖는 수많은 무리의 새 떼가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공격하거나 어느 집 방안으로 몰려들고, 새들의 공격으로 양쪽 안구가 파인 남자 따위의 끔찍한 장면들이 어슴푸레 떠오르는 정도다. 영화를 떠올리며 드는 생각은 현재의 연출 기술과는 아주 거리가 먼 시대인데 어떻게 학교로 집 안으로 수많은 새 떼를 몰아갈 수 있었는지. 한가한 시간이라 별것들이 다 궁금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듯 지금까지는 어둠 속에서도 지체된 시간에의 조바심과 피로와 갈증, 배고픔 같은 원초적인 문제가 생각을 지배했었다. 그런데 느닷없는 검은 새 떼의 출현으로 내가 홀로 낯선 해산령 밤길을 걷고 있다는 상황이 현실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인적 없이 고요한 밤의 해산령. 홀로 걷는 적막강산에 투덕거리는 내 발자국 소리 만이 적조를 깨트렸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해산터널에서처럼 인적이 없다는 건 천만다행이었다. 이 밤중에 만약 어떤 차량이 지난다면? 그건 적지 않게 곤란한 상황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밤중에 고갯길을 걷고 있는 나를 본 그 운전자도 무척 놀랄 것이다. 홀로 밤길을 걷는 사정을 묻거나 동승을 권하기 보다는 경계를 하며 급히 달려버리지 않을까. 그리고 경찰에 신고를 할 수도 있겠다. 그가 만약 선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몸을 털리는 정도가 아니라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는 해산령이 접경지역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으므로,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처럼 무장공비를 상정할 수도 있지 않은가? 또는 숲속에서 느닷없이 어떤 산짐승이 뛰쳐나온다면?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정말 두려운 건 검은 새 떼나 산짐승 따위가 아니라 역시 선악 불문하고 동종인 인간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걱정이 엄습했다. 내가 이 밤중에 해산령을 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가족에게도 괜한 걱정을 끼치지 않겠다고 구체적인 행로는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고라도 난다면? 생각해 보니 이만저만 문제가 아니었다. 안 되겠다 싶어 가까운 후배에게 전화를 했다. 간단히 내 사정을 들은 그는 깜짝 놀라, 바쁜 입시미술학원 수업 중임에도 컴퓨터의 인터넷 지도를 열고 현재 내가 걷고 있는 대략적 위치를 확인했다. 그러고선 112 신고를 권하다가 아니면 자기가 신고를 하겠다고 했다. 신고를 하면 경찰에서 차를 보내올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앞으로 한 시간가량이면 풍산리에 도착할 것 같아 그의 의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건 지금까지 밤길을 걸어온 것에 대한 최소한의 지조였던 것 같다. 후배로부터 두어 차례 확인 전화를 위안 삼아 발걸음을 이어갔다. 좌로 우로 끝없이 굽이진 밤길을 걸으며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후회스런 일들을 곱씹었다. 만약 모든 것이 순조로워서 애초의 예정대로 아침에 방산면 소재지에서 출발했다면? 아니면 평화의 댐에서 너무 꾸물거리지만 않았다면? 어쩌면 등에 황혼빛을 받으며 해산령 내리막길을 여유롭게 걸었을 텐데….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은 건 뻔히 알면서도 어둠 속 걸음걸음에 시시각각 되살아나는 아쉬움은 쉽게 제어되지 않았다. 그때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해산령 밤길을 사진 한 컷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주섬주섬 카메라를 꺼내 오르막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나 전원을 켜다가 말고 '아차!' 하며 카메라를 배낭에 되 집어넣었다. 야간 촬영에 터트릴 수밖에 없는 플래시 빛에 경찰이 출동하는 등 어떤 돌발 상황이 초래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막연한 불안감과 지체된 시간에의 조바심으로 걷는 밤길에도 슬며시 떠오르는 상념들. 조각구름 사이로 고갯길을 비춰주는 맑은 달빛은 피로에 지친 나그네에게 오랜 옛 시절의 감상을 소환했다. 굽이굽이 끝없이 이어지는 해산령 고갯길은 어릴 적 누님 또래들이 많이도 부르던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떠올려 주었다.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삿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애절한 곡조가 어릴 적 듣던 유성기 소리처럼 머릿속에 맴돌면서 나도 모르게 콧소리로 되풀이 되풀이해 흥얼거렸다. 아직 전쟁의 상흔이 잔설처럼 남아있던 시절이라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일상으로 들렸고 그 가사와 음률은 철없던 귀에도 무척이나 처연했다.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무심히 곡조를 흥얼거리는 중 해산령 밤길은 순간 화약 연기 자욱한 미아리고개로 페이드인 되어,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미아리고개로 끌려가시는 아버님의 모습이 환영처럼 체현되었다. 그 시절, 너무 어려서 뵌 기억조차 없는 아버님은 1950년 발발한 남북 전쟁 중 우리 가족에게서 종적이 사라지셨다. 오랜 세월 후 어느 해부터는 제사도 모시던 중 2006년 '남북 이산가족 생사 확인' 사업으로 북에 계시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어떤 연유로 민들레 홀씨처럼 그 모진 땅으로 가셨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다만 어떤 강제적인 힘에 떠밀려 가신 건 분명한 듯하다. 화상 상봉 대상자로 선정되었으나 간절한 천재일우의 기회는 애석하게도 그 후 재발한 남북 간 갈등으로 취소되고 말았다. 아버님은 6.25 발발 당시 서울에서 용산국민학교 교사로서 야간대학에도 다니시던 중이었다. 당시 중앙여중 재학 중으로 함께 자취하시던 고모님은 서울 하늘에 붉은 깃발이 날리던 어느 날 아침, 아버님께서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는 지금 못 가이 니 먼저 내려가그라." 라고 말씀하시고 나가셨다는데 그것이 아버님과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고모님께선 중앙선 철길 단절로, 안정면이 고향인 옥천 댁 친정 식구들에 의지해 풍찬노숙하며 죽령을 넘어 고향 영주에 당도하셨단다. 그리고 조부모님께서는 긴긴 세월 외 아드님 잃으신 한을 풀지 못하신 채 오래전 먼 길 떠나셨다. 질곡의 세월. 허깨비 같은 이데올로기의 굴레에 포박되어 끌려가셨을 아버님인들 사랑하는 부모 처자, 그리운 고향 산천을 촌각인들 잊으셨을까. 틀어진 운명으로 못하신 효도는 평생 오죽이나 한탄하셨을까? 불현듯 고방산 숙소에서 만났던 강 씨의 목소리가 환청인 듯 들렸다. "나이를 먹으니까 자꾸 어머니 생각이 나서…. 허허!" 이렇듯 북에서 살아야 할 사람은 오매불망 북쪽의 어머니를 그리며 남쪽에서 살고, 남쪽에서 사셔야 할 아버님은 그 모진 땅에서 평생 망향의 한을 삭이며 사셨을 터이니 이 무슨 기괴한 운명이란 말인가? 어두운 해산령. 스산한 바람에 스치는 늦가을 이운 풀잎 소리는, 혼인 십 년에 아버님과 생이별하신 어머님의 한숨 소리인 듯 비감스러웠다. 시부모님 앞이라 내색도 못하시고 숨어 눈물 훔치며 한 생 살아오신 어머님은 만년에야 아버님 소식을 들으셨다. "인제 와서 보먼 머하노?" 멀리서 전화로 드린 상봉 소식에 대한 어머님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어머님은 아버님이 미아리고개를 넘으셨을지도 모를 무더운 여름. 내가 이 해산령을 넘기 한 해 전 7월 어느 날, 한 많은 세월을 잊으셨다. 이런 내력들이 나로 하여금 '휴전선 따라 걷기 국토횡단'에 나서게끔 등을 떠밀었던 것이다. 기나긴 해산령 밤길에 온몸의 힘이 소진될 즈음, 멀리 고개 아래로 명멸하듯 반짝이는 불빛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드디어 가시거리로 다가오는 풍산리. 바닥 난 허벅지와 종아리의 힘을 애써 버티며 부지런히 걸어 내려 마침내 작은 교량에 발을 들여놓았다. 돌다리의 머리에는 '풍산교'라는 명패가 붙어있었다. 다리를 건너 어두운 난간 끄트머리에 무너지듯 지친 몸을 내려뜨렸다. 그리고 심호흡과 함께 열어 본 폴더 폰 화면에는 거의 정확히 여덟 시로 표시되어 있었다. - 끝 -

    2026-07-07 06:30:00

  •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수상작-천상으로의 비행/ 박희곤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수상작-천상으로의 비행/ 박희곤

    1. 프롤로그 인간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궤도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이치는 누구도 비켜 갈 수 없는 생사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승에서 살다 천상으로 갈 때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인생에 진리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물이나 명예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고, 베풀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직접 체험한 바에 의하면 사람이 죽어서 천상인 저승으로 갈 때는 유형의 재산은 가져갈 수 없지만, 무형의 재산은 가져갈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그 일은 내가 B대학교병원 흉부외과에서 심장 수술업무를 36년간 근무하다 정년 퇴임을 한 뒤, 전원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퇴임 후, 노년에 삶은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 나만의 목가적인 삶을 누리고 싶었다. 솔직한 심정은 무엇보다 피를 말리는 수술의 긴장에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텃밭에 채소나 키우며, 책도 읽고 등산도 하며 내 인생을 관조하며 생활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목가적인 전원생활을 이어 가던 중 어느 날이었다. 평소, 당뇨라는 지병이 있었지만, 지속적인 기침과 전신 피로감이 찾아왔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집 근처 병원을 찾아 진료를 받았다. 단순한 감기일 것이라 짐작했지만, 예상과 달리 간암이란 진단이 내려졌다. 내가 암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암은 갑자기 예고도 없이 찾아와 내 영혼에 집을 부수고 들어와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지금까지 지탱해 온 내 인생이 산산조각이 나는 느낌이었다.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평생, 다른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고 환자를 돌보던 나였다. 그런 내가 암에 걸려 치료의 대상이 되고, 내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공포였다. 나는 직업적으로 수많은 죽음을 보아 왔다. 내가 치료하던 환자에게 사망 선고를 내렸던 일도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정작,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이러니했고 말문이 막혔다. 하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두려움과 공포가 내 머리를 내려쳤다.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갈까. 미국으로 갈까. 아니면 친구들이 많이 있는 일본으로 가서 수술받을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수많은 갈등과 혼돈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가지고 있던 의학적 지식과 직업적 경험은 그 순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우선 내가 근무했던 B 대학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초음파 검사와 CT 촬영 그리고 피 검사 등 여러 가지 검사를 시행했다. 검사 결과는 B형 간염으로 인한 간암이었다. 간경화도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간암의 형태는 중등도 이상의 악성 종양이 두 개나 발견된 상황이었다. 간암을 확진 판정을 받고 나니 내 정신상태는 공황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불안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두려움은 마치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두려움은 텅 빈 머릿속을 허허둥둥 떠다니며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간 내과 담당 교수와 소식을 들은 동료들은 다행히 간 이식까지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특히, 36년 동안 함께 동고동락했던 병원장은 우리 병원의 간 수술 실적은 어느 병원에도 뒤지지 않는다며, 이곳에서 수술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결국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는 평생을 몸담았던 병원에서 수술을 받기로 결심했다. 간 내과에서 간 외과로 전과가 되어 수술 날짜가 정해지고, 수술에 필요한 추가 검사가 이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지난날의 일상들이 영상의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온몸이 불안과 공포로 후 덜덜 떨렸고 손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평소, 나는 환자나 보호자들에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수없이 해 왔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이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 걱정은 거대한 쓰나미처럼 밀고 들어와 내 오장육부를 초토화했다. 일생을 환자 치료에 헌신한 전문 의료인이었지만, 나 역시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물론 전문 의료인이라고 해서 죽음이 비켜 가는 것은 아니지만, 나 또한 평범한 인간으로서 암 환자가 되어 죽음을 마주하고 보니, 마음은 한없이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수술 날짜까지 시간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수술실에서는 많은 환자가 내 손에서 살아났고, 많은 환자가 내 손에서 죽어갔다. 그 기억들은 번개처럼 번쩍이며 내 머리를 치고 달아났다. 그러나 지금에 내 귓가에 들려오는 것은, 환자의 신음소리가 아니라, 나 자신의 앓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왔다가 한숨 속에 사라졌다. 수술 날짜까지 기다린 시간은 비몽사몽 같은 시간이었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정신은 몽롱했다. 악몽을 꾸듯 마치 술 취한 사람 같았다.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살 수 있을지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2. 삶의 진실 지나온 과거를 곱씹어 보자, 끝없는 후회가 밀려왔다. 환자에게 조금 더 따뜻하게 해주지 못했던 지난날이 못내 아쉬웠다. 정작 환자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환자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아무리 마음을 가라앉히려 해도 불안한 마음을 도저히 다스릴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막연한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는 눈앞에 피어 있는 꽃들도 더 이상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으며, 평소 맛있던 음식마저도 맛이 없었다. 수술을 앞두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 삶을 정리해야 했다. 아내 몰래 유언장도 작성했다. 늦은 밤, 홀로 컴퓨터 앞에 앉아 유언장을 쓰고 있자니 눈물이 앞을 가려 자판의 커서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과거 나는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열 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당시에는 흥부네 자식처럼 방임 상태였다. 형제가 서로 부대끼며 사는 것 또한 고달팠다. 성장기에 낮에는 알바로,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며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해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일용직 잡부로 세상의 결핍을 견뎌야 했다. 그 시절은 시리고도 아팠으며 방황했던 청춘이었다. 한겨울, 연탄재가 쌓인 삼복도로 위 쪽방에서 자취하던 날, 어머니가 당뇨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 외로움과 궁핍은 늘 나를 옥죄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결코 내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가난을 무기로 직장을 다니며 어렵게 대학을 마쳤고, 주경야독으로 대학원에서 학위를 2개나 취득했다. 당시, 대학병원 의료직 공무원으로 심장 수술팀으로 발령이 났다. 내 전공은 아니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심장 수술이 활발하지 못한 시기였다. 심장 수술 기술을 배우기 위해 미국, 일본, 싱가포르 등 세계 여러 나라의 병원을 찾아다녀야만 했다. 어렵고도 위험한 심장 수술을 위한 해외연수였다. 짧은 영어 실력과 공무 출장비는 나를 옥죄게 했지만, 우리병원에서 심장 수술을 가르칠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결혼식 날, 나는 신부의 손가락에 금반지 대신 가짜 반지를 끼워 주었다. 결혼식 비용을 절약하여 전세 비용을 치렀다. 미안함과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그때는 내가 할 수 있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해외나 제주도로 떠나는 신혼여행 대신 가까운 운문사의 산문 밖, 허름한 여인숙에서 신혼 첫날밤을 보내야 했다. 신부의 빨간 치마로 창문을 가려, 한겨울 외풍을 막아야 했다. 그날의 기억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지워지지 않은 한恨으로 맺혀, 응어리가 되어 눈물샘에 고여 있다. 어린 시절의 가난과 결핍, 상실과 외로움 속에서도 나는 늘 강한 사람인 척하며 살아야 했다. 이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앞에서 세상 모든 그것을 뒤로한 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길을 가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끝내 오열하고 말았다. 내가 떠난 뒤 남겨질 처자식들, 가난 때문에 지키지 못했던 약속들, 끝내 하지 못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나는 한순간도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늘이 빙글빙글 돌던 허기의 순간에도, 텅 빈 세상에서 홀로서기를 해야 했던 외로움 속에서도, 가짜 반지를 끼워 주던 궁핍한 남편의 자리에서도, 나는 끝내 참고 버텨냈다. 나는 속으로는 절대 죽지 않을 거야. 수술만 잘 되면 다시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다짐하며 생각을 바꾸었다. 혹시 모를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유언장을 작성했다. 자신에게는 후회뿐이었고, 처자식에게는 미안함뿐인 유언장이었다. 나를 화장하여 선산 부모님 산소 옆, 수목장을 해 달라는 것 외에 가장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내 재산의 일부인 00억 원을 병원 발전 기금으로 기부하는 일이었다. 내 생각은 내 재산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여 나와 같은 암 환자들을 위해 사용해 달라는 것이 내 뜻이었다. 그러나 아내와 자식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걱정이 되었다. 혹시, 사후에라도 병원과 소송이 벌어진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만 못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한편으로는 유언장을 쓰면서 '뭐 하러 이렇게 열심히 살았나'하는 허무함이 밀려왔다. 아등바등 살아온 내 인생이 이렇게 허망하게 끝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눈물로 흐려진 모니터 창에서 『타이핑』하는 유언장은 후회의 유언장이었다. 어쩌면 이 유언장은 죽음을 향한 내 마지막을 정리하는 유언이 아니라, 끝끝내 내 삶을 버텨낸, 한 인간의 마지막 기록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참으로 인간의 마음은 간사했다. 내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파도 위에 떠 있는 작은 쪽배처럼 마음이 요동쳤다. 겉으로는 죽지 않을 것이라 자신을 다독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현대의학이 발전하여 '다빈치' 로봇이 수술한다 해도, 수술 중에는 언제든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 또한 수없이 겪어 온 일이었다. 수술의 부작용과 사망 위험에서 내가 제외된다는 보장은 없다. 사망률이 1%라 하더라도 그 1%에 해당하는 환자에게는 곧, 본인에게는 100%의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수술 날짜에 맞추어 입원했다. 환자복을 갈아입고 오후부터 금식한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니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휘돌았다. 기분이 묘했다. 나는 평생 심장 수술을 위한 '체외순환(體外循環)'을 전공하여 심장 수술 시 환자의 심장과 폐를 대신하는 체외순환사라는 전문 의료인으로 살아왔다. 이것은 심장정지 시, 환자의 심장과 폐의 역할을 대신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처럼 정작 내 건강을 돌보지 않고, 무리하게 일을 하며 살아온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는지 스스로에게 되묻게 되었다. 살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버티는 입원한 첫날은 거의 일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늦은 오후, 담당 교수가 수술 동의서를 받으러 왔다. 아내와 나는 간호사실에서 수술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수술 절차와 여러 부작용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담당 교수는 내 간의 크기가 지나치게 작다고 설명했다. 우엽 간의 70%를 절제하게 되면 남은 좌엽 간 30%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간이 충분히 자랄 때까지 절개한 복부를 닫지 않고 개복한 상태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설명은 여러 가능성을 열어둔 채 계속 이어졌다. 수술 후에도 간이 제때 자라지 않고 또 기능을 회복하지 못하면 결국, 간 이식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간 이식하려면 기증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내 간과 맞는 사람도, 간을 기증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딸들은 너무 어렸고, 형제들은 모두 당뇨가 심해 간을 기증할 가능, 그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결국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의미로 들렸다. 순간, 숨이 턱턱 막히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수술 전, 작성하는 수술 동의서가 결코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설명은 당뇨 합병증으로 회복하는 과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출혈과 수혈 부작용 등 다른 부작용들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오직 '죽을 수 있다'라는 말만 귓가에 맴돌았다. 마지막으로 아내가 담당 교수에게 질문했다. "재발 확률은 얼마나 됩니까?" "간암의 특성상 50%가 넘습니다." 귀에서는 윙윙 소리가 울렸고 달팽이관에서는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재발은 뒷전이고 우선 살고 봐야 했다. 이마에는 열이 오르고 손발은 힘이 없고 떨렸다.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마친 뒤,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한동안, 변기에 앉아 물을 내리고 또 내리며, 울고 또 울었다. 심장 수술 전문가였지만 이제 나약한 암 환자가 된 나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는 의료인의 본분도 자존심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이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그러나 수술 동의서에 적힌 사망률은 85%가 넘었다. 죽을 확률이 살 확률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에 나는 숨이 턱턱 막혔다. 마음속으로는 무조건 간절히 기도했다. 만약 나를 창조한 존재가 있다면 제발 살려 달라고. 하느님, 부처님, 예수님, 그리고 조상님… 절박한 나의 목소리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고, 그 소망은 마치 허공 속에 메아리처럼 흩어져 버렸다. 그렇게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수술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수술 전날, 간의 기능과 크기 문제로 CT 촬영을 다시 했다. CT 검사 결과, 간의 크기가 너무 작아 수술 후, 간의 제 기능을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했다. 어쩌면 간 이식해야 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설명을 들었다. 따라서 아내가 간 이식이 가능한지 적합 여부를 검사했지만, 불가 판정이 났다. 나의 마지막 희망도 절망으로 끝이나 버렸다. 이제, 무대책이 상 대책이었다. 수술 전, 피 검사 결과가 나왔다. 간 기능 수치인 알부민 수치와 콩팥 기능은 정상이었지만, 간 기능의 지표인 'GoT, GPT, 빌리루빈' 수치가 정상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자포자기가 되었지만, 나는 결코 자포자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살아야 했다. 또한 간 이식에 관한 그 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간 기능에 문제가 있으면 회복하기가 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초기, 우리병원에서 간 이식 수술은 체외순환사인 내가 함께 참여 해야만 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간 이식수술 교육을 장기간 받았고, 여러 차례 간 이식수술 팀원으로 참여한 경험이 많았다. 이러한 간 수술 전 과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에게는 그 설명은 더욱 큰 충격이자 고통이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 환자였다면 덜 두려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최악의 경우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차선의 경우에는 오른쪽 간을 절제한 뒤 남은 간이 자랄 때까지 복부를 개방한 상태로 기다려야 한다는 설명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것은 나에게는 죽음보다 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사망하는 것 보다 배를 갈라 꿰매지 않고, 그대로 둔 채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상황은 일반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간 수술 전 과정을 잘 아는 나는, 그 고통이 얼마나 처절한지 알고 있었다. 그만큼 나에게는 간암 수술이 예단하기 힘든, 수술 예후였다. 수술 담당 교수는 장시간 고민 끝에 개복 후, 간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고 간 이식할 것인지, 개복 상태로 둘 것인지, 아니면 절제술로 마무리할 것 인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수술자가 아닌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저 나는 처분을 기다리는 불안한 암 환자일 뿐이었다. 수술만 잘되면 살 수 있다는 단 하나의 희망에 매달렸다. 나는 마치 물 밖으로 던져진 물 없는 물고기처럼 산소 없는 사람 같았다. 평생, 심장 수술을 하며 개흉과 개복 환자들을 치료해 온 나로서는 뱃속의 장기들이 노출된 상태에서 밤을 새워 환자를 돌보아야 했다. 개복의 고통은 어떤 말로도 어떤 형용사로도 표현은 불가능했다. 마취가 풀릴 때면 환자들은 말 대신 손짓으로, 온몸으로 저항했고 눈물로 고통을 호소했다. 이 과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나에게는 '알면 병, 모르면 약'이 되는 경우가 되었다. 3. 천상에서 파노라마 운명의 시간은 이튿날 아침 첫 수술로 정해졌다. 직장 동료와 가족들은 수술실 입구까지 따라와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 속에는 걱정과 응원하는 마음이 함께 담겨 있었다. 이제 나는 간 이식이나 심장 수술을 집도하던 전문가가 아니라, 간 수술을 받는 환자로서 수술 침대 위에 누워야 했다. 수술 준비가 끝나자, 마취과 B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박 선생님. '펜타닐' 마취제 들어갑니다."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끊겼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끝난 것 같았다. 의식이 희미해질 무렵이었다. 내 몸이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과 함께 아득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마치 천상으로 비행하여 저승길로 접어드는 것 같았다. '육신이라는 옷을 벗고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것이 이런 것일까.'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는 많은 시간이 흘렀고 금단의 깊은 암흑 속으로 빨러 들어갔다. 아주 먼 전생에서 보고 들은 듯한 환각처럼, 어가 행렬의 취타대 행진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천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가에서는 천사의 나팔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나는 안개 밭 같은 구름 속을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자욱한 안개 길을 헤쳐 나가듯, 밝은 빛이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치, 천마天馬를 타고 하늘로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내가 탄 비행기가 양력의 원리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보이지 않는 와류 속에서 순풍을 타고 부드럽게 이동하는 느낌이었다. 빛의 속도로, 마하의 음속으로, 이동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속도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여기가 어디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북극의 『오로라』 속에 갇혀 있다 빠져나오는 느낌이었다. 분위기는 환상적이지만 차분했다. 마치 넓은 바다에서 도착할 항구를 잃어버린 쪽배 같았고, 광막한 우주공간에서 기착할 행성을 잃어버린 우주선 같았다. 순간, 장면이 바뀌었다. 심연의 암흑 속 임에도 불구하고 낮달처럼 수억 개의 행성이 빛나고 있었다. 『빅뱅』이 일어나는 듯한 천연색 빛의 향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아! 감탄의 입만 벌어졌다. '허블' 우주 망원경으로 보는 것처럼 360〬 를 돌려보아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신비롭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내가 날아온 시간과 거리는 윤회설처럼 내가 죽어 다시 환생한다 해도, 수억 광년이 지나야 다시 올 수 있을 것 같은 시간과 거리였다. 이것은 내가 천지天地 간에 넓은 땅과 높은 하늘 사이를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아득한 무중력의 우주공간을 끝없이 비행하고 있었다. 푸르다 못해 암흑의 우주공간을 비행하는 사이 축지법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드론'이 촬영하듯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육신에서 빠져나온 내 영혼이 내 육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술실 무영등 아래 보이는 그 장면은 마치 흑백 영상처럼 보였다. 수술 침대 위에 인공호흡기를 단 채 수많은 링거 줄을 꽂고,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내 모습이었다. 뇌파와 심전도는 규칙적인 파형을 그리고 있었고, 각종 의료 장비는 쉼 없이 알람을 울리고 있었다. 담당 교수와 간호사들이 내 배를 갈라놓고 수술하면서 손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몸속의 장기들은 수술 기구에 의해 고정되어 있었고, 창자는 소독비닐에 싸여 한쪽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내가 늘 보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나는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했으며 몸은 마치 솜털처럼 가벼운 느낌뿐이었다. 그 순간, 내 몸속을 빠져나온 내 영혼이 다시 내 몸속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영혼이 바라보는 내 육신은 한없이 가여워 보였다. 나는 그저 자기연민에 빠져 안타까운 눈물만이 얼굴에 가득 번졌다. 그 안타까움은 결국, 내가 나의 육신을 두고 내가 떠나야 하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현 세상의 모든 인연과 미련을 남겨둔 채 떠나야 하는 순간이었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누가 붙잡는 것도 아닌데, 그 순간은 마치 정지 화면처럼 멈춰 서 있는 듯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죽음이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의 윤회설이 어쩌면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것은 참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현생의 업業에 의해 결정되는 '중의식(中意識)'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나는 한 가지를 확신하게 되었다.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육신은 이승에 두고 가지만, 영혼은 저세상인 천상으로 갈 때는 가져갈 수 있는 것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돈이나 집, 자동차 같은 물질적인 유형의 재산은 가져갈 수 없지만, 내가 살면서 얻은 추억과 경험 같은 정신적인 무형의 재산은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무형의 재산은 영혼 깊숙이 각인되어 천상으로 갈 때 가져간다는 사실을 나는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내가 체험한 사실은 사람의 영혼은 육체처럼 죽어 없어지지 않았다. 영혼에 자산은 세상을 살아가며 느꼈던 행복과 상실, 기쁨과 후회 그리고 삶에 깨달음, 이것들은 영혼에 깊이 각인되어 천상에 갈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진정한 무형의 자산들이었다. 그날, 가장 먼저 떠오른 무형의 자산은 부모님과 자식 그리고 아내에 대한 모습이었다. 어느 공간에서 갑자기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간암과 당뇨로 돌아가신 지 이미 50여 년이 지났지만, 어릴 적 내가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비녀를 꽂은 어머니는 나를 보지 못한 채 삼베옷을 짜는 물레를 계속 돌리고 계셨다. 방 안에는 누나와 동생들이 함께 있는 모습도 보였다. 너무나 반가워 나는 "엄마!"하고 크게 불렀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했으며 나를 보지도 못했다. 묵묵히 하던 일만 계속하고 있었다. 너무나 아쉬웠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볼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내와 딸들이 보였다. 여기에는 아파트가 아닌 온돌방처럼 온기가 깔려 있었다. 아내는 부엌 싱크대에 서 있었고, 내가 가장 애틋하게 생각하던 딸은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한 채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어깨 너머에서 바라본 그림은 피카소가 그린 것 같은 그림이었다. 칭찬해 주고 싶었지만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애통했다.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후회로 남았다. 모 텔레비전 방송국에 출현하여 공개적으로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다고 했던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딸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오직 수술실에서만 살아온 아버지, 한 번도 함께 놀아주지 못했고 가족여행 한 번 제대로 가지 못했던 삶이 내 가슴 깊이 저미어 왔다. 잠시 후, 어렴풋이 떠오른 또 다른 경험은 첫사랑에 대한 장면이었다. 사춘기를 지나 성년이 된 후 헤어진 뒤, 다시는 보지 못했던 단발머리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지금은 할머니가 되었겠지만, 그 당시 말하지 못했던 말들, 남몰래 흘렸던 눈물, 끝내 하지 못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특히, 첫사랑이 그리워 이불 속에서 몰래 울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했다. 만약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저 하지 못했던 일들을 다시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러한 풍경들은 그 많은 무형의 자산 중에서도 오직 내가 경험하여 기억할 수 있는 것들만 가져갈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임사체험이라고 하는 죽음을 미리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것은 내가 내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한 처음이자 마지막 시간인지도 몰랐다. 이것들은 이승에서 경험한 기억과 천상으로 비행해 가는 길에서 만난 체험들이 서로 뒤섞이며 나타났다. 이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내가 직접 경험한 아주 특별한 순간이었다. 결국, 이 기억들은 내가 평생 살면서 쌓아온 소중한 무형의 자산들이었다. 4. 이승에서 끈 수술실에서 담당 교수는 내 배를 열어놓고 간암 조직으로 향하는 미세혈관까지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다. 우엽을 절제하기 위해 간으로 들어가는 대혈관인 간문맥을 박리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대혈관 조직이 '켈리'인 겸자에 의해 찢어지면서 대량 출혈이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치달았다. 혈압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수술 부위 주변은 점점 붉은 호수처럼 변해 갔다. 심장이 뛸 때마다 간문맥에서 피가 옹달샘처럼 솟구쳐 올라왔다. 붉은 피는 수술 부위 위로 흘러넘쳤다. 흡입기로 피를 아무리 빨아들여도 수술 시야는 확보되지 않았다. 파바다 위에 기름이 둥둥 떠다녔다. 피비린내가 수술실 긴장을 가득 채웠다. "혈압 상승제 '아트로핀' 10ml 주사!, 혈액 투여!" 담당 교수의 다급한 외침이 수술실 전체를 울렸다. 극도의 긴장감이 공간을 팽팽하게 조여 왔다. 마취과 교수와 전문 간호사는 즉시 혈압 상 승제를 투여하고 수혈을 시작했다. 초응급 상황이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담당 교수의 머릿속은 온통 붉은 경고등이 번쩍이고 있었다. 수술실의 분위기는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긴박해졌다. 수술팀 모두의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자칫하면 환자인 내 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심한 출혈로 혈압은 바닥을 쳤고, 심장은 겨우 약하게 뛰고 있었다. 순간, 뇌파와 산소포화도는 한동안 파형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내 생명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때, 담당 교수가 자가 수혈기를 긴급 요청했다. 수술 부위에서 출혈되는 피를 모아 재생한 뒤 다시 내 몸속으로 넣어 주는 장치였다. 수혈기를 가동한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혈압은 서서히 정상범위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수술은 다시 이어질 수 있었다. 긴박한 수술 중, 간의 생 조직을 때어 조직 검사를 실시 했다. 임파절이나 다른 조직까지 전이되지는 않았다는 소견이 나왔다. 수술 후, 방사선 항암치료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것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한 일이었다. 나는 거의 죽음의 상태까지 갔다가 죽지 않고 되돌아왔다. 이승인 현승에서 천상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내 일생의 기적중에서도 가장 큰 기적이었다. 한편, 첫사랑을 그리워하며 이불 속에서 울던 장면이 떠오르던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내 몸이 붕 떠오르더니 우주공간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대기권을 벗어나 상층권을 통과했다. 태양계를 지나 몇억 광년 떨어진 은하계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는 동안 별들은 마치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빅뱅』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태양계를 돌아 몇 광년을 더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달을 지나 해왕성, 목성, 화성, 금성, 명왕성, 토성, 수성, 천왕성 같은 행성들이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은하수의 별들처럼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수많은 행성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가 영화 화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태양을 가까이 지나갈 때는 열기로 인하여 온몸이 타들어 가듯 뜨거워서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반대로 태양계를 떠나 은하계의 어느 무명無名의 행성을 지나갈 때는 살을 에는 한기가 몰려왔다. 마치 냉동 인간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얼마나 더 비행했는지 또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우주 쇼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거대한 행성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마치 『블랙홀』을 빠져나온 우주인처럼 아무런 저항 없이 그 공간을 표류하고 있었다. 끝없이 떠다니던 중 문득 깨달았다. 나는, 방금 이승인 지구에서 유체 이탈했다는 사실을. 고고히 떠다니는 영혼마저 허허로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표류하여 이동해 가는 동안은 은하철도나 우주 비행선을 타고 가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맨몸으로 마치 용의 머리에 올라타 수염을 붙잡고, 불꽃놀이에 불꽃이 터지는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실제로 날아가는 것인지 걸어가는 것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그곳에는 공기저항도 없었다. 도착할 목적지도, 좌표도 없이 빛에 먼지처럼 파동을 일으키며 우주공간을 끝없이 표류하고 있었다. 어느 공간, 표류 후 뒤돌아보니 내 육신은 수술실 침대 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영혼은 다른 세계, 곧 천상으로 비행해 가는 저승길 위에 있었다. 느낌은 육체와 영혼이 함께 어느 공간을 비행하며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혼이 육체를 떠나 홀로 표류하고 있었다. 그때, 내 영혼은 존재(存在) 유무도 무게감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며, 마치 구름 같았고 바람 같았다. 다시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어느 순간, 마치 시간의 왜곡이 생긴 것 같았다. 내가 살았던 이승에서 천상으로 가는 길에서 환승장 같은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생生과 사死의 환승장이 아니라, 천상으로 가는 길목 어딘가에 존재하는 우주정거장 같은 행성 예식장이었다. 놀랍게도 그곳은 마치 장례식장 같았다. 그러나 처음 경험하는 광경이라 결혼예식장인지 장례식장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었다. 그곳으로 갈 때는 저승사자가 나를 데리고 가지도 않았고, 도착한 그곳에는 옥황상제도 염라대왕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은 죽은 사람도 서로 사랑하는 천상의 행성으로 나는 신랑이 되어 행성 예식장에 도착해 있었다. 예식장은 온통 황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대기실 벽면, 거울 앞에 비친 내 모습은 흘러간 세월에 손님 같았다. 젊은 날에 새신랑이 아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사내였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 치르는 재혼식이었다. 혼주와 가족들은 모두 이승에서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부모님과 큰형님 그리고 누나가 보였다. 혼주석에 앉아 있는 아버지를 보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머니는 연신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하객들은 모두 우주복을 입은 로봇 같은 사람들이었다. 마치 『애니메이션』이나 『판타지아』 영화에서 볼 법한 장면 같았다. 어딘가 어색하고 머쓱했다. 그러나 예식장에 장식은 순금으로 화려했고 수많은 보석과 꽃들로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하객석은 궁전 무도장에 '뷔페식 홀' 같은 깔끔한 공간이었다. 나는 대기실에 앉아 있는 누나에게 물었다. "신부는 어떤 사람이야?" 누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무엇 하는지 몰라. 하지만 전생인 지구에서는 너 도우미를 했대." "뭐라고? 신부가 사람이 아니라… 내 가사 도우미 로봇이라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반려동물과 결혼했다는 해외 토픽으로 들은 적이 있었지만, 로봇과 결혼한다는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내 신부는 로봇을 주체로 인간의 요소를 통합한 '휴머노이드' 로봇이었다. 반도체에 관한 TV 뉴스에서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인간형 '로봇' 같은 존재였다. 이곳 행성 예식장은 산 자들의 이승 결혼식장이 아니라, 사자(死者)들이 하는 저승 결혼식장이었다. 내가 어릴 적, 먼저 세상을 떠난 형님의 사자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원래, 이승에서 결혼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하는 사자결혼식은 사전에 신랑 신부가 되는 사람들의 사진을 주고받았다. 그다음에 혼인을 약조한 뒤. 택일하여 짚으로 만든 인형을 가지고 예식을 치르던 것이 관례였다. 지금 상황은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반려동물의 결혼식도, 죽은 사람끼리 하는 사자결혼식도 아니었다. 나는 휴머노이드 로봇과 결혼식을 하고 있었다. 'SF영화'인 공상과학 영화에서 나올법한 일이었다. 이것은 너무도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이것은 마치 내 영혼이 인식의 편차나 시공간에 편차가 일어난 것 같았다. 현실적으로 이 결혼식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실제로 곧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머지않아 휴머노이드 로봇과 결혼하는 일이 다반사가 될 것이다. 마치, 이것은 인식과 시공간의 편차로 인하여 특정 시간과 장소를 선택하여 내가 미래로 가서 과거를 바꿀 수 있는 일 같았다. 평소, 나는 꿈 속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베이비 붐 세대인 나는 이미 노년에 나이였다. '디지털' 시대 사람이 아니라 '아날로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었다. 스마트폰 사용조차 서툰 구세대였다. 그런 내가 미래에 있을 로봇과 결혼식을 한다는 것은, 정말 믿기 힘든 일이었다. 나는 원래 미래를 꿈꾸기보다 현재에 안주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행성 예식장 여기에서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이미 정해진 운명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신부인 휴머노이드 로봇은, 공장에서 일하는 인간형 로봇과 달리 지구에서 혼자 전원생활 할 때 독거노인을 돌보듯 나의 건강을 관리하던 가사 도우미였다. 당뇨와 고혈압을 앓던 내 상태를 매일 체크했다. 혈압을 재고 약 먹을 시간을 알려주며 이상징후가 생기면 구조 신호를 보내던 존재였다. 사람 같으면서도 사람이 아닌 존재. 그 존재가 지금 바로 내 신부였다. 나는 마치 '좀비'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멍한 상태였다. 예식장 내부의 실내장식은 몽환적인 분위기였다. 외국영화에 나오는 궁전 같았다.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안견의 '몽유도원도'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몽유도원도에서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복숭아나무가 수천 그루가 펼쳐진다. 그 복사꽃 색깔은 연분홍이 아니었으며 좀 더 짙은 색이었다. 마치 노을이 물 위에 비치는 듯한 황홀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예식장의 분위기는 마치 무도회 조명처럼 밝게 빛났고, 공간은 무중력 상태였다. 옅은 안개 속에서 하객들의 움직임은 느린 비디오 잔상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우주복 대신 연미복과 나비넥타이를 매고 예식장 중앙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봄날의 나비처럼, 바닷속 잠수부처럼, 무중력 속에 우주인처럼 걸어 들어갔다. 주례는 보이지 않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친한 친구가 사회를 보고 있었다. "먼저 우주 행성 예식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객 여러분은 좌석에 착석해 주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이승에서 온 신랑 박○곤 씨와 천상에서 기다려온 신부 정 도우미 양의 우주결혼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신랑 신부 동시 입장!" 중략…. 예식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는 신부에게 반지를 끼워 주며 문득 아내에게 가짜 결혼반지를 끼워 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면사포를 살짝 들어 올려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얼굴이 첫사랑 여인 같기도 했고 아니면 지구에서 함께 살던 아내 같기도 했다. 묘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뒤섞였다. 나는 말했다. "내 아내가 되어 주어 고맙소." 로봇 신부는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내가 기대했던 말은 "네, 저도 고맙습니다."였다. 그러나 그녀의 기계적인 대답은 내 기대와는 달리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인간의 감정과 정(情)을 기대했던 내 마음이 속으로는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위해 평생 일해 온 존재라는 생각에 측은함이 밀려왔다. 그녀 또한 지구에서 수명이 다해 폐기된 뒤 이곳으로 온 존재였다. 그녀가 가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과거 전생의 지구에서 있었던 기억은 기억할수록 그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고 나중에는 없어져 버렸다. 대신 지금 이곳의 현실이 또 다른 현재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식이 끝나고 로봇 신부와 같이 앉아 궁금한 이야기를 했다. 전원생활 할 때 이승에서 같이 살아온 로봇 신부는 'VR 가상현실'인 음성 재현 기술이 탑재되어 있었다. 신부는 아내의 목소리와 똑같았고 그녀 또한 나에게 별 거부감도 느끼지 않았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는지 신부에게 물었다, 그녀는 식이 끝나면 우주선을 타고 토성으로 간다고 했다. 토성의 빙하 분화구에서 마련된 별장에서 숙박할 예정이라고 했다, 토성의 분화구는 마치 미국의 그랜드캐니언 같은 사막과 협곡이 장관을 이룬다고 했다. 그리고 태양계를 한 바퀴 도는 일정이지만, 친정인 지구에는 갈 수 없다고 했다. 차마, 왜 못 가는지는 묻지 못했다. 아마도 나와 같은 처지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5 환생 하객과 인사가 끝나고 신부와 신혼여행을 가자며 손을 잡고 우주선 같은 '캡슐'을 타려는 순간. 그때 누군가 내 손을 세게 잡아끌었다. 깜짝 놀랐다. 갑자기 눈이 떠졌다. 단번에 천상에서의 예식장 풍경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그때, 직장 동료인 이 선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손을 잡으며 "박 선생님, 수술 잘됐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찰나, 나는 마취에서 깨어나며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산소마스크를 쓴 채 나는 중환자실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나는 천상의 행성 예식장에서 신혼여행도 가지 못한 채, 저승길 한가운데쯤에서 갑자기 되돌아온 셈이었다. 정말 아쉬운 순간이었다. 동시에 다행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 찰나의 순간, 이승인 현승에서 아직 죽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과 함께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체험에서 깨어난 순간, 아무도 가보지 못한 현실 같은 천상의 경험은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그곳에는 시간과 공간 개념이 존재하지 않은 세계였다. 3차원이 아닌 5차원의 세계 같은 곳이었다. 마치 그곳은 깊은 어둠의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인식의 오류나 시공간의 왜곡이 일어난 것 같았다. 그 놀라움과 신비함도 잠시, 나는 조심스레 내 배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도 배는 열려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간 이식 상태도, 개복 된 상태도 아닌, 완전히 닫혀 있었다. "아! 살았다." 정말 살아 있었다. 다시 한번 살펴봐도 배에는 거즈와 같은 '패드'로 덮혀 있었고 나는 온전히 살아 있었다. 수술 후, 에너지 공장이라 불리는 간의 크기가 줄어들면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간 기능이 떨어지자, 몸 전체의 기능 역시 정상적일 리 없었다. 회복은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당뇨로 인해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았다. 절개된 복부에는 피고름이 차오르고 누런 농액이 흘러내렸다. 상처를 소독할 때마다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참을 수 없는 통증은 어떤 말이나 어떤 수화手話로도,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깊은 통증 속에서도 수술 중 의학적으로 사망상태에서 겪었던 경험은 한순간도 잊혀 지지 않았다. 혹시 내가 치매에 걸린 그것은 아닐까. 의심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정신은 너무나 멀쩡했다. 오히려 내 생애에서 가장 명료한 정신상태라고 느껴질 만큼 또렷했다. 이 모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무형의 자산을 얻는 순간이었다. 좀처럼 개복 된 배를 닫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당뇨가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깨달았다. 평소 당뇨 관리를 소홀히 했던 지난날이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었다. 일주일이 지나도 곪은 상처에서는 피고름이 흘러내렸다. 염증 수치도 계속 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염증 수치가 높으면 폐혈증에 걸려 사망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태였다. 담당 의사는 하루빨리 곪은 부위를 긁어내고 다시 봉합해야 한다고 했다. 간 기능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 전신마취 대신, 상처 부위에만 부분마취를 시행하여 꿰매기로 했다. 곪은 농양을 걷어내고 지혈하기 위해 전기 메스로 출혈 부위를 지졌다. 살갗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고, 고기 굽는 듯한 연기가 온 중환자실 안에 퍼졌다. 구토와 함께 메스꺼움이 밀려왔다. 차라리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이 극한의 고통은 결코 삶의 영역에 속한 고통은 아니었다. 마취에서 깰 때마다 통증이 밀려와 정신이 혼미해졌다. 몸부림을 치고 또 쳤다. 그러나 손발이 침대에 묶여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차라리 죽고 싶었다. "제발… 저 좀 죽여 주세요." 수없이 외쳤지만, 누구도 응답하지 않았다. 간호사들은 각자의 일을 열심히 수행할 뿐이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환자분, 기침하세요. 기침." 간호사는 등을 두드리며 통증을 유발했다. 폐에 고인 분비물을 빼내기 위한 처치였다. 환자를 살리기 위한 행위였지만 그 순간의 통증은 마치 죽음이 눈앞에 닥친 것처럼 불길 같은 통증 속에서도 몽롱하게 느껴졌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이 고통을 겪고 있는지 살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등을 두드려 주거나 체위를 바꾸어 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극심한 통증이 밀려올 때면, 나는 손가락으로 간호사의 손바닥 위에 '아파요.' 글씨를 썼다. 그제야 간호사는 진통제인 '모르핀'을 투여해 통증을 완화 시켜 주었다. 이 모든 고통 속에서 저승의 문턱에서 겪었던 경험은, 내 배에 남아 있는 상처처럼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의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더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이제 죽음도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황당한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실제로 겪은 체험이며 한 인간으로서의 솔직한 고백이다. 나는 시공간이 없는 천상의 나라에서 끝까지 가보지 못했다. 그 후, 사후 세계가 천상의 나라인지 저승인지 천국인지 아니면 지옥인지 어떤 곳인지 모른다. 다만, 죽음의 문턱에서 내가 겪었던 경험일 뿐이다. 불교의 윤회설에 따라 사람이 죽어 저승으로 간다면, 저승은 분명 전생일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천당이든 지옥이든 아니면 천국이던, 중요한 것은 현재를 어떻게 사는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현재를 살면서 죽음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였다. 인과응보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그 사실에 깨달음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환자들은 하루나 이틀 만에 중환자실을 떠나 일반 병실로 옮겨갔다. 그러나 나는 일주일이 지나도 올라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복부 절개 부위에 생긴 농양을 완전히 제거하고 상처가 아물기 전까지는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없었다. 농양을 제거한 뒤, 한 주가 지나자 마치 기적이 일어난 것 같았다. 간 기능 수치와 알부민 수치 그리고 콩팥 기능도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마침내 곪아 있던 상처를 닫을 수 있었고, 정상적인 치료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여분의 생生을 다시 선물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은 내 인생의 두 번째 탄생 즉, 또 다른 나의 환생이라 생각했다. 6. 에필로그 춥고 어두운 중환자실에서 겨울은 서서히 지나가고 있었다. 어느덧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졌다. 중환자실 창밖에는 초록빛이 번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봄날은 여전히 통증 속에 머물러 있었다. 장미가 피는 계절이 되어서야 간기능수치와 생체징후는 안정되었다. 담당 교수는 이제 일반 병실로 올라가자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비로소 살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장지통(斷腸之痛)의 고통 속에서도 나에게는 늦봄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제 빨리 일어나 퇴원하셔야죠." 직원들은 웃으며 진담 반, 농담을 건넸다. 나는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죽지 않고 끝내 살아남았다. 그래서 나에게는 늦봄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겨울이 아무리 춥고 매서워도 봄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사실을 참고 견디며 온몸으로 느꼈다. 고통의 중환자실에서도 싱싱한 봄바람이 불었던 것처럼, 일반 병실에서도 아내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이제 가족들과 면회도 하게 되었다. 몸과 마음이 조금씩 회복되자 퇴원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하루는 내 몸속에서 암을 제거한 수술 과정이 궁금해졌다. 간호사실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수술 기록지를 읽어 보았다.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나는 정말로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보험 청구를 위해 복사한 의무기록지도 몇 번이고 읽고 확인했다. 수술 중, 대량 출혈로 인해 피를 넷 『파인트』나 수혈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보통 한두 파인트이면 충분했다. 응급상황으로 심한 출혈로 인해 혈압이 유지되지 않았던 순간은 거의 심정지 상태나 다름없었다. 심전도는 비정상 파형을 그리고 있었고 뇌파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혈압이 낮아 거의 뇌사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바로 의학적 죽음에 가까운 상태였다. 내가 천상으로의 비행길에서 체험했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아! 당시 나는 살아 있었지만,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것은 반죽음의 상태, 즉 삶과 죽음의 경계에 매달려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제 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병실 침대에 돌아와 누워 있었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수술 중 일어났던 사건의 기억은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그것이 나에게는 꿈도 아니었고 무의식 상태도 아니었으며 환각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내 죽음의 경험을 재생하는 한 편의 드라마 영상 같았다. 그 영상은 정신이 또렷한 상태에서 초점 의식 같은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펜타닐' 마취제가 주입되고 하나, 둘, 셋을 세기도 전에 나는 깊은 암흑의 죽음 속으로 떨어졌다. 간의 70퍼센트를 절제했고 출혈로 인해 심정지에 이르렀다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경험이었다. 오른쪽 간 절제와 함께 쓸개도 같이 제거했다. 말 그대로 나는 쓸개 없는 놈이 되었다. 쓸개가 제거된 이후, 수술 후유증으로 소소한 일상은 불가능했다. 단백질인 육류와 식사를 하면 제대로 소화가 되지 않았고 곧바로 설사로 이어졌다. 결코, 참을 수 없는 설사는 지금도 계속 현재 진행형이다. 나는 죽음 대신 수술 부작용이라는 선물을 받은 셈이었다. 다른 선물도 있었다. 하루 네 번 이상 인슐린을 죽을 때까지 맞아야 한다. 또한 간암 예방약도 평생, 복용해야 한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 같은 몸이 되었지만, 나는 결코,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남았다. 고난 없는 일상이 어디 있으며, 아픔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남은 내 인생에 감사하고 위로하며 살아가고 있다. 체험하기 전, 나는 나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다. 이제, 울지마라"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또한 어리석게 살아온 나 자신을 용서하지도 못했다. 체험후 나는 자신을 위로하고 용서하며 살아가지만, 가장 어려운 점은 '완치가 없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행히도 살얼음판을 걷는 수술 예후는 아직 암이 재발하지 않았다. 고질병인 당뇨와 설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며 살날 또한 얼마 남지 않았다. 수술한 지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 기억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강산도 변한다는 계절이 지났지만, 그날의 경험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 기억은 지금까지 내 마음 심연 깊숙이 각인되어 정신적 무형의 자산으로 남아 있다. 천상의 비행길에서 떠올랐던 얼굴들을 나는 차마 잊지 못한다. 부모님, 형제들, 아내와 딸, 마음 한편에 남아 있던 첫사랑 그리고 우주 행성 예식장에서 결혼했던 경험까지.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육체는 사라져도 영혼은 다른 삶으로 이동하여 계속 이어지는 것이었다. 단지 다른 사람들은 체험한 것을 기억하지도, 환생하지도, 못할 뿐. 나는 이것을 직접 경험하고 체험한 것을 환생하여 기억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체험했어도 황당하고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은 내가 천상으로 가는 길에 체험했다는 증거로 남아 있다. 그 체험이 과학적이든 비과학적이든, 설명이 되든 설명되지 않든, 『픽션』이든 『논 픽션』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에게 중요하고 분명한 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그 체험을 기억하고 다시 환생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꿈도 환각도 아니라 깨달음이었다. 이 모든 체험을 기억한 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 창밖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하루가 더 이상 당연하지 않았다. 아파트, 자동차, 예금 통장, 사랑하는 사람도 결국 가져갈 수 없다. 그러나 살아오며 가슴에 새긴 기억과 감정 그리고 실제 경험했던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난에 흘렸던 눈물, 첫사랑과 이별했던 순간, 피땀 흘리며 노력했던 고통의 세월 그리고 평생, 남의 심장을 대신 뛰며 살았던 시간에 감사했던 마음까지. 이것들은 영혼 깊숙이 저장되고 각인되어 끝까지 나와 함께 갈 것이다. 이제, 나는 이제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을 다르게 이해한다. 비록 물질과 육신은 두고 가지만 정신적인 자산은 죽음과 함께 영혼에 각인되어 영원히 같이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결국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또 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언젠가 내가 천상으로 갈 때 가져갈 진짜 재산일 것이다. 이제는 하늘에 떠 있는 구름도, 내 뺨을 스치는 실바람도,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루를 살면서 보고 듣고 말하는 모든 순간, 이 글을 쓰는 순간조차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두 번째로 탄생한 내 인생, 여분으로 얻은 생명에 늘 감사하며 살아간다. 언젠가 천상으로 갈 때 가져갈 아름다운 추억인 정신적인 자산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뜨겁게 살아낸다. 마지막으로 나는 유형의 재산보다 무형의 재산을 쌓는 삶을 살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며 남은 노년의 인생길을 힘차게 걸어가고 있다.

    2026-07-07 06:30:00

  •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수상작-천사들의 점빵/ 변재영

    [2026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수상작-천사들의 점빵/ 변재영

    1. 프롤로그 아침 산책길이다. 골목 초입, 익숙한 풍경에 내 몸이 먼저 반응한다. 자신의 덩치보다 큰 뇌성마비로 인해 하반신이 마비된 아들을 자동차에 태우려고 어미가 절절맨다. 내가 냉큼 안아 올려 주자 목소리를 잃은 청년은 달덩이처럼 환한 미소로 고맙다는 인사를 대신한다. 미운 다섯 살 아이가 새의 부리 같은 입술로 건네는 인사가 저리 고울까. 가식 없는 그의 해맑은 미소가 대문간에 흐드러진 순백의 배꽃만큼이나 곱다. 스무 해가 꽉 차도록 팔매질 거리에 사는 그녀는 늘 입가에 촉촉한 미소를 꽃인 듯 물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 자식을 둔 어미에게 삶은 없다. 오죽하면 내 자식보다 하루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겠는가. 남몰래 곯은 마음의 상처에선 늘 단장 같은 속울음이 장강처럼 흘렀으리라.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내게도 가슴에 바위 하나 끌어안고 살던 시절이 있었다. 힘겨웠던 내 과거를 보는듯해 명치끝이 아리다. 길이 아름답다는 경북 청도 덕암리 418, 속칭 중리(中里)라는 동네가 나의 태자리다. 비탈에 기댄 산촌에는 논보다 밭이 많다. 한국전쟁의 포성 소리가 멎을 즈음 생을 외친 나는 태생부터가 화려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 원주변씨 18대손으로 종손인 할아버지는 내리 딸 다섯을 낳았다. 아들 타령으로 시작된 주벽은 결국 패가망신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 후유증이리라. 화병인지 술병인지 불혹 초반에 생을 접었다. 늦둥이를 어미 뱃속에 둔 채……. 죽어서도 작은 몸뚱이 하나 뉠 땅이 없어 처가댁 선산발치에 묻혔다. 2. 밥값은 해야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아버지 나이 겨우 일곱 살, 울긋불긋한 상여가 두려웠으리라. 동네 사람들은 먼산바라기 하는 어린 상주를 자꾸 상여 밑으로 밀어 넣으며 쯧쯧 혀를 찼다. 부잣집에서 화초처럼 자란 할머니는 마음씨만 고울 뿐 살림에는 젬병이었다. 설상가상 유복자로 태어난 삼촌은 첫돌도 맞기 전에 열병을 앓아 소리를 잃었다. 듣지 못하니 말도 못 한다. 아버지는 여남은 살을 넘기면서 꼴머슴으로 나섰다. 하지만 새경이래야 철에 따른 옷 두어 벌과 쌀 한 가마니가 고작이었다. 그것으로는 일곱 식구의 끼니도 부족했다. 굽도 접도 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포기를 생각한다. 아버지 나이 열일곱 살, 더 버티지 못하고 양잿물을 마셨다. 다행히 일찍 발견되어 쌀무리로 속을 씻어내는 바람에 목숨은 건졌다. 하지만 그때 속을 버려 평생 위통으로 소다를 복용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일사각오(一死覺悟)라고 했다. 죽을 용기로 일한다면 못 이룰 일이 무에 있으랴. 덤으로 목숨을 얻은 아버지는 머슴살이로만 안주할 수가 없었다. 눈만 뜨면 손발이 부르트도록 산밭을 일구었다. 일굴 땅이 있어서도 아니다. 남의 땅을 개간하여 길게는 10년쯤 경작하고는 땅 주인에게 돌려줬다.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소작인 셈이다. 산전을 일구는 일은 결혼 후에도 이어졌다. 청도군 매전면 중산리, 하늘 아래 첫 동네가 아버지의 처가댁이다. 집도 절도 없는 노총각에게 뉘가 딸을 주겠는가. 악착같이 집과 땅마지기를 마련하여 첩첩산중, 밀양박씨 가문으로 늦장가를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택호가 '중산이댁'이다. 빈촌의 상징이라 나는 늘 못마땅했다. 당시 그곳에는 내 외가를 비롯하여 스무 집이 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밤마다 빨갱이들이 곡식을 털어갔다. 결국 그 등쌀을 견디지 못해 죄다 산 아래 큰 마을로 이사하고 두 집만 남아 농사를 지었다. 그중 한집이 우리 집이다. 사는 일이 산밭처럼 가팔랐던 아버지는 소작료가 없는 흔한 땅에 혹하여 시퍼렇던 청춘이 툭 부러지도록 일을 했으리라. 일찍부터 험한 세파에 부대낀 아버지는 남달리 담이 컸다. 생명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는 게 빨갱이들이 아닌가. 그런 늑대인간들이 득실대는 산속에서 목숨을 담보로 농사를 지었으니 그만큼 아버지의 삶이 각박했으리라. 양식을 약탈하려고 빨갱이들이 밤마다 무리 지어 큰 마을을 오르내렸다. 이슥한 달밤에 섶에 숨어 그들의 행렬을 지켜보면 후미에는 총 개머리판이 땅에 닿을 듯 말 듯한 어린 소년들도 여럿 있어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단다. 땅이 소원이던 아버지는 눈만 뜨면 묵정밭을 일궈, 보리와 콩을 심었다. 가뭄에 강한 작물이라 세세연년 풍작을 맞았다. 그 덕에 해마다 고향에 자갈논 한 마지기씩을 샀다고 하니 우리 가족에게는 고마운 땅이다. 그 넓은 땅을 경작하자면 손에 물집이 잡히기를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그 고통이 오죽했겠는가. 아버지가 피땀으로 일군 그 땅에는 이제 한 많은 세월을 뒤로하고 2010년 '오션힐스 골프장'이 들어섰다. 생각하면 금석지감이 인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고향에 오두막이지만 집도 마련하고, 네댓 마지기의 전답도 있었다. 그때는 왜 그리도 가뭄이 심했는지. 물꼬를 생판 하늘에만 꽂고 있는 천둥지기는 툭하면 가뭄에 논바닥이 거북등처럼 갈라져 반작으로 그칠 때가 많았다. 말이 논이지 기름진 밭보다 못했다. 그래도 풀죽이지만 굶주림은 면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형편이 좀 나아져서인지 손재주가 남다른 아버지는 산밭 일구는 일을 그만두고 목수 일을 배워 집 짓는 일을 했다. 하지만 그 일이 늘 있는 건 아니다. 일이 없을 때는 지게, 쟁기, 써레 등 농기구를 만들어 팔았다. 솜씨가 좋아 삼십 리 밖에서도 주문이 쇄도 할 만큼 인기가 많았다. 농투성이들의 본능일까. 아버지는 글공부보다는 땅을 믿었다. 한 뼘의 땅이라도 더 늘이려는 욕심에 누나 둘은 초등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하고 열네댓 살 나이에 식모살이로 팔려 갔다. 월급도 없었다. 입 하나 들자고 여린 손이 얼어 터지도록 일을 해야 했다. 그 고통이 오죽했겠는가. "밥값은 해야지" 내가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얘기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이란 말이 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철학이자 종교였다. 저녁 밥상머리에 둘러앉으면 아버지는 마치 선생님이 숙제 검사를 하듯 그날 우리 형제들이 한 일을 하나하나 챙긴다. 어리다고, 몸이 불편하다고 더덜이는 없었다. 어쩌다 농땡이라도 부린 날이면 그날 밥은 없다. 주린 배를 움켜쥐던 시절, 아버지에게 밥 먹는 일보다 더 절실한 게 또 있었으랴. 밥은 그냥 밥이 아니라 신앙이고 목숨이었다. 그 밥그릇의 무게가 자식에게도 밥값이라는 이름으로 고스란히 전해진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소여물을 안치고 쇠꼴을 한 짐 베어와야 수저가 주어졌다. 이처럼 너무 일찍부터 노동에 휘둘린 탓이리라. 우리 형제들에게 구슬치고, 연 날리고, 썰매 타는 추억이 없다. 팝콘 한 줌을 얻기 위해 종일 돌을 깨는 네팔의 어린 소년을 TV 화면으로 만나면 내 유년을 보는 듯해 가슴이 아리다. 3. 불행은 소리 없이 온다. 베이비 붐 세대만 해도 아들은 곧 금이고 옥이었다. 둘째 아들을 얻었다는 반가움도 잠시, 동생은 돌이 지나도 걷지를 못했다. 설마 했는데 아니었다. 두 돌이 가까워질 무렵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다. 축 처진 왼쪽 수족을 인지한 것이다. 놀란 어머니는 그 핏덩이를 들쳐업고 용하다는 병의원을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쫓아다녔다. 하지만 허사였다.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뇌성마비를 앓았다는 진단이 전부일 뿐, 처방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환은 누구도 엄습하지 못할 공포와 슬픔으로 슬그머니 우리의 곁에 똬리를 튼다. 한집에 불치병 환자가 한 사람이라도 생기는 순간 집안의 웃음과 희망은 사라진다. 손가락 끝으로 허공에다 언어를 쓰는 삼촌이랑 깜부기 같은 병으로 한쪽 수족이 마비된 동생과 나는 같은 방을 섰다. 논밭일에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몸이 불편한 동생을 거두는 일은 내 몫이었다.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학용품을 챙겨주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오른쪽 발목이 뒤틀려 게걸음을 걷는 동생은 모든 것이 느렸다. 한 발짝 떼자면 하늘이 출렁거렸다. 그마저 보폭이 30㎝를 넘지 못한다. 세 살 무렵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렀고, 다섯 살 때 겨우 두 발로 일어섰다. 학교도 한 해 유예했다. 언제나 다른 친구들보다 일찍 학교에 가고 늦게 돌아왔다. 한쪽 날개가 꺾인 아들을 바라보는 어미의 심정이 어땠을까. 철없는 또래 아이들이 곰배팔에 절름발이 흉내를 낼 때면 나는 그들을 혼내주려고 쫓아다녔고, 어머니는 아궁이 속에 지피던 솔가지 연기로 눈물을 감추었다. 큰누나가 결혼했다. 그러자 이미 혼기를 놓친 삼촌은 자기가 먼저 장가를 들어야 한다며 일손을 놓고 투쟁에 들어갔다. 듣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까지 없는 건 아니다. 반응이 없자 두문불출로 식음까지 전폐했다. 난감했다. 신붓감을 찾기 위해 지인을 통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짚신도 짝이 있다고 했던가. 멀리 경남 밀양에 마땅한 규수가 있었다. 그녀 역시 첫돌 전에 청력을 잃어 소리가 없는 노처녀로 삼촌과는 천생연분이었다. 그 규수를 숙모로 맞았다. 처음엔 내림이 염려되어 자녀를 두는 게 꺼림 척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남매를 뒀는데 둘 다 똑똑하다. 집안의 기둥인 맏아들은 지금도 지적 공사에 간부로 근무한다. 똘똘한 손자까지 삼촌 내외는 물론 온 가족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 게걸음을 걷는 동생 역시 평생 앉은뱅이로 산다고 여겼는데 목발 없이 걸을 수 있으니 이 또한 신이 내린 축복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공부까지 잘해서 우리 집의 꽃이었다. 행복은 작은 일에서 비롯된다. 소확행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대물림 된 가난이야 어쩔 수 없지만 욕심을 내려놓으니 얼음 냉골 같았던 우리 집에도 봄볕처럼 따스한 온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4. 인생 삼세판 내가 아홉 살이 되어도 아버지는 학교에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새 나는 쇠꼴 베고, 소먹이고, 목수인 아버지가 만들어 준 맞춤 지게를 지고 땔나무까지 하며 밥값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당시 여자들은 살림만 잘하면 된다는 어른들의 편견으로 초등학교를 보내지 않는 가정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남자로서는 70여 호나 되는 동네에서 내가 유일했다. 그렇다고 학교에 보내달라고 억지를 부릴 수도 없었다. 보챈다고 들어줄 아버지도 아니었다. 내가 열 살이 되던 해 늦깎이로 입학했다. 어차피 공부는 초등학교 졸업으로 마침표를 찍을 건데 구태여 일찍 학교에 보낼 필요가 없었으리라. 용산초등학교, 전교생이 780명쯤 되었다. 입학식은 운동장에서 이루어졌다. 푸른 하늘, 맑은 햇살, 교정을 에워싼 측백나무 숲이 왜 그리도 싱그럽던지. 난생처음 배움의 날개를 달던 그날, 내 뜨겁던 숨결은 지구촌 누군가의 어제와 내일을 넘어섰다. 교장선생님의 훈시보다 내 높은 꿈을 축복하듯 교실 창문을 기웃대며 짹짹거리던 참새들의 수다가 더욱 기억에 남는다. 양복보다는 코르덴 재건복을 즐겨 입으시던 예해식 선생님, 참으로 가슴 따뜻한 선생님을 담임으로 만났다. 누덕누덕 누빈 솜옷을 입고 다니는 내가 딱했을까. "좋은 옷이란 값비싼 옷이 아니라, 꿰맨 옷이라도 깨끗이 빨아서 입으면 그것이 좋은 옷이다"라며 수시로 용기를 주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반에서 가장 어려운 학생 예닐곱 명을 골라 당시 유일한 참고서인 '수련장'을 당신 사비로 사주시던 기억도 난다. 촌지 대신 꿀단지가 오가던 시절, 선생님 같은 청백리도 흔치 않을 것이다. 나도 그 수련장을 선물로 받아 공부했으니 우리 집 살림이 얼마나 팍팍했었는지 짐작이 간다. 그때 내가 지키지 못할 약속은 오로지 육성회비였다. 두어 달 수업 후, 선생님은 나를 반장으로 임명했다. 치맛바람이 통하지 않는 선생님이다. 공부는 식은 죽 먹기였다. 꽃길만 걸어온 사람들에게 공부가 쉽다고 하면 코웃음을 칠 것이다. 하지만 일 년 내내 휴일도 없이 밤낮으로 거친 농사일에 시달려보라. 앉아서 하는 공부가 얼마나 쉬운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노동은 밤낮이 없었다. 공부는 학교에서나 하는 것이고 집에 오면 책보자기 풀 틈도 없다. 칠전팔기의 속성이 잡초의 정신인가. 비탈에 켜켜이 누운 논두렁의 풀은 깎고 또 깎아도 돌아서면 수북했다. 저녁에도 밤이 이슥하도록 호롱불 아래 어머니가 캐온 삽주라는 약초 뿌리를 깎아야 잠을 잘 수 있었다. 2학기부터는 반장인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잔무를 정리하는 날도 종종 있었다. 1학년을 끝내고 2학년이 되던 날이다. 서둘러 들어오신 선생님이 대뜸 내게 책보자기를 싸서 따라오라고 했다. 선생님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건너편 3학년 교실이 있는 별동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운동장 한가운데를 지날 무렵이다. 앞서 걷던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재영아, 너는 이제부터 3학년이다. 2학년에서는 더 배울 것이 없구나. 앞으로도 열심히 하거라" 그제야 나는 월반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교정에 두어 번 꽃물이 졌다. 5학년에서 다시 봄을 맞았다. 무슨 인연일까. 1학년 때 담임이셨던 예해식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내심 뛸 듯이 기뻤다. 매주 문예반 특활 시간에 뵙기는 했지만 담임으로 만난 것과는 또 달랐다. 문예반에서 작문 지도를 맡고 계셔서인지 선생님은 일기 쓰기에 관심이 많았다. 주말마다 또박또박 일기장 검사를 했다. 그때마다 내 일기장만 슬그머니 가져가셨다. 다음 날 돌려줄 때도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연유가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여쭤볼 수도 없었다. 늦봄 어느 날이다. 수업이 끝나고 돌연 선생님이 나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는 자갈이 질펀한 비포장도로를 달려 우리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를 만나 상의할 일이 있다는 게 말씀의 전부였다. 뜬금없는 선생님의 방문에 놀란 건 조용했던 산골도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이 아버지에게 던진 화두는 내 일기책을 발간하자는 것이었다. 너무 뜻밖의 일이라 깜짝 놀란 나는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몽롱했다. 그제야 그동안 선생님이 슬그머니 내 일기장을 가져가시던 수수께끼가 풀렸다. "우리 집은 왜 이리도 가난할까? 이 고통의 끝은 어디쯤일까……?" 햇살 쏟아지는 봄날에도 춥고 시리기만 했던 내 아픔과 슬픔을 넋두리로 읊은 것이 선생님의 마음을 움직였으리라. 돌이켜보면 그때 끼니 챙기듯 꼬박꼬박 쓴 일기가 지금 나를 문학의 길로 인도한 뿌리가 되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발간 비용이 16만 원, 그중 절반은 선생님이 부담하고 절반을 아버지가 부담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당시 선생님 월급이 1만 원에 불과했다, 8만 원은 결코 만만한 돈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형편이 안 된다며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 수익금으로 나를 대학까지 무난히 공부시킬 수 있다고 설득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오직 땅이 목숨인 아버지에게 통할 리가 만무했다. 선생님은 빈손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표정을 보아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오신 듯했다. 시간은 계절을 돌아 나뭇가지에 젖은 가을이 저물고 있었다. 『초록 메아리』 내 일기책 제목이다. 돌연 선생님이 책 발간을 서둘렀다. 읍내 변두리에서 머슴을 들여 농사까지 짓는 선생님은 그동안 소리 소문 없이 혼자 월급을 모아 인쇄비를 마련하신 것이다. 대구 남산동, 인쇄 골목 끝자락이었다. 선생님의 지인이 운영하는 인쇄소를 찾았다. 선생님은 사장님에게 "불우 학생이니 염가에 발간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고, 나는 사장님께 큰절을 올렸다. 미리 원고를 받아 읽어 보신 사장님은 베스트셀러감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출간을 기다렸다. 윤전기가 막 돌아가고 있을 때다. 정확히 1964년 11월 15일,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대구 명덕초교에 다니는 이윤복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일기책이 발간되었다는 보도가 부산일보 조간신문에 실린 것이다. 책도 나오기 전에 기사가 먼저 떴다. 어쨌든 내 일기책보다 한발 앞서 세상에 나온 것이다. 가파른 운명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던가. 신문 한 줄에 내 꿈은 깨진 유리그릇처럼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그는 나와 학교만 다를 뿐 한동갑에 학년도 같았다. 4학년 한 해 동안에 쓴 일기를 모아 5학년 들어 책으로 펴내는 것조차 똑같았다. 다만 도시와 농촌이라는 삶의 무대만 달랐다. 그것만으로는 뒤에 나온 내 책까지 빛을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선생님은 돌아가는 윤전기를 멈추었다. 결국 내 일기는 활자가 되지 못했다. 선생님도 나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먼 하늘만 바라봤다. 미련이 남았을까, 선생님은 청도 교육장님을 찾아갔다. 군내 모든 초등학교에서 권당 150원 하는 내 일기책을 학급마다 한 권씩만 사달라고 애원했다. 베이비 붐 시대라 그것으로 발간 원가는 된다고 했다. 결과는 거절이었다. 만약 그때 내 일기책이 세상에 먼저 나왔다면 내 삶은 달라졌을까? 내 인생 첫 번째로 찾아온 기회는 그렇게 문턱에서 놓치고 말았다. 일기책 발간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 선생님은 내게 난생처음 기차를 태워주었고, 군내 백일장에 참가하여 입상했을 때다. 해물이 일품인 중국집 짬뽕 맛을 알게 해주는 등 많은 추억을 남겨주신 고마운 분이시다. 이듬해 졸업식장이다. 최고 권위인 교육장 상을 받을 학생이 호명되었다. 빡빡머리에 검정 고무신, 물이 다 빠진 허름한 양복을 걸친 꼬맹이가 받아 갔다. 우등상, 개근상, 그리고 일기 쓰기 등 시상을 미뤄 둔 겨울방학 우수 과제물 전시회 때 입상한 상장 2개까지 무려 5개의 상을 그 꼬맹이가 석권했다. 그러자 모든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그 꼬마가 바로 나다. 그날 교육장 상을 전수하러 오신 분이 청도중학교 허삼극 교장선생님이었다. 당시 청도에는 모계중고등학교와 청도중학교 2개교가 있었다. 둘 다 사립이다. 공부를 좀 한다고 하면 죄다 대구로 유학길에 오르기 때문에 두 학교는 우수 학생 유치경쟁이 심했다. 내가 형편이 어려워 농사꾼이 된다는 사실을 인지한 교장선생님은 곧장 교실 뒤쪽에 갓을 쓰고 엄전하게 지켜보고 있는 아버지와 마주 앉아 담판을 벌였다. "교장인 제가 3년 장학생을 보장할 터이니 아드님을 우리 학교에 보내주십시오" "공부시킬 수 있는 형편이 못됩니다. 월사금만 해결된다고 돈이 안 들어갑니까? 책값도 만만찮고요" "아, 책은 학교에서 구입해 드리겠습니다." "교복은 어쩐다요?" "옷은 곤란합니다만 형편이 딱하다니 교복도 드리죠. 이제 아들내미를 학교에 보내주시는 거죠." "글쎄요. 워낙 골짝이라 학생들이 죄다 자취나 하숙을 하던데 하숙비를 준다면 생각해 보죠" 아버지는 애당초 진학시킬 생각이 없어 거절할 꼬투리만 찾고 있었다. 어느 부모인들 자식 가르치는 일을 두고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한 자식 살리자고 열 자식을 굶어 죽게 할 수는 없었으리라. 중학교 졸업으로 반그치를 만들 바에야 농사일이나 제대로 가르치려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흥정은 파투가 나고, 내 인생 두 번째 찾아온 기회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며칠 후 아들을 경북대 사범대에 보낸 재종 숙부님까지 동원하여 교장선생님이 두어 번 더 우리 집에 걸음을 하셨지만 끝내 아버지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그 당시 어떻게 알았는지 대구 앞산 밑에 있는 심인중학교에서도 서무과장님이 첩첩산중에 웅크린 우리 집까지 찾아와 3년 장학생을 보장해 주겠다고 했으나 아버지는 똑같은 방법으로 거절했다. 나는 부지런히 일을 했다. 아니, 밥값을 하자면 농땡이를 부릴 수가 없었다.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는 아버지처럼 전답도 늘릴 수 있다고 믿었다. 결혼한 삼촌이 분가하자 땔나무 담당은 내 몫이 되었다. 매미가 두어 번 여름을 울고 갔다. 그제야 철이 든 것일까. 사람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에 똬리를 틀었다. 사춘기에 대한 반항심도 한몫했으리라. 농촌 일은 땔나무나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무더운 여름에 산판이라도 열리면 어깨에 피멍이 들도록 통나무를 져 날라야 푼돈 한 푼 만질 수 있었다. 추운 겨울도 예외는 아니다. 저수지를 보수하는 공사장에서 봄이 저물도록 흙을 져 날라야 했다. 저수지 바닥에서 싸리나무 발채에 흙을 무겁도록 퍼 담아 짊어지고 아녀자들이 망깨질을 하고 있는 못둑에 오르면 십장이 자신의 도장을 찍은 하얀 쪽지 한 장을 준다. 내게는 노란색 쪽지가 주어졌다. 노랑 쪽지는 두 장을 모아야 장정이 받는 흰색 쪽지 한 장이 된다. 하루 일을 마치고 그것을 모아 제출하면 보름마다 원조 밀가루 서너 포대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으며 보릿고개를 견뎌냈다. 동네에서 보리쌀 말이라도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집은 많지 않았다. 오일장마다 부녀자들은 푸성귀를 이고 가고, 남정네들은 땔나무를 내다 팔아 가용에 쓸 푼돈을 마련했다. 장날이면 신작로에 나뭇짐이 줄을 선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제작한 농기구를 짊어지고, 나는 땔나무를 지고 뒤따랐다. 주로 장작을 지고 갔지만 가끔은 솔가리나 삭정이를 지고 갈 때도 있었다. 나무전에 들리려면 장작 서너 개비를 장세로 내야 했다. 그것을 아끼려고 그 무거운 나뭇짐을 짊어지고 골목골목을 누볐다. "나무 사이소, 장작 사이소~" 읍내 후미진 골목을 헤매다 보면 몸은 땀범벅이 되고 목이 탄다. 시골처럼 물 한 쪽박 얻어 마실 곳도 없다. 그럴 때 아는 여학생이라도 만나면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나뭇짐의 무게가 주는 고통은 견딜 수 있지만 남루한 내 몰골이 주는 모멸감은 정말 참기 어려웠다. 지게는 힘보다 지는 요령이 먼저다. 예닐곱 살 때부터 지게질을 시작한 나는 누구보다 지게질에 익숙했다. 내 나이 열일곱, 내 나뭇짐은 웬만한 장정 못지않았다. 힘의 상징인 쟁기로 소를 부리며 보릿골도 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로부터 작은 거인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요령이 늘수록 더욱 무거운 짐에 도전하게 되고 그만큼 골병이 든다. 몸의 골격이 제대로 여물기 전에 무리하게 지게질을 한 탓이리라. 나는 두 어깨의 골육이 앞으로 굽어 평생 장애 아닌 장애인이 되어 기형으로 살고 있다. 몸이 고달플수록 잊어버렸던 공부에 대한 미련이 슬슬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4H 클럽에서 운영하는 마을문고에서 낡은 소설책이나 철 지난 잡지를 읽는 게 고작일 뿐, 배움의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꿈이 없는 삶은 곧 죽음이다. 절해고도의 끝점인 듯 해무에 뒤덮인 내 앞날은 아득했다. 어느 여름날이다. 어머니랑 읍내 정미소에서 한해 양식인 국수를 뽑아 이고 지고 신작로를 걷고 있었다. 알곡이라 무거웠다. 미루나무 그늘에 지게를 받쳐놓고 잠시 땀을 말리고 있을 때다. 국수 상자를 덮은 폐신문지에서 내 눈이 번쩍 경기를 일으켰다. '출세의 길! 중앙강의록' 산촌에서도 독학으로 배울 수 있는 길이 있었다. 나의 잿빛 등뼈 사이로 흘러든 한 줄기 빛이었다. 다음날 당장 1년 치 중학 과장 강의록 12권을 한꺼번에 주문했다. 아버지께는 소설책을 읽는다고 속이고 호롱불 밑에서 밤새워 책을 읽었다. 일터에서도 쉴 때마다 너럭바위에 영어단어를 쓰고 지우며 열정을 쏟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검정고시를 통과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향학열에 고무될수록 바람든 무처럼 손에서 일은 뜨고 몸을 다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해가 바뀌고 봄이 기울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된 동기생들은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과외수업에 들어갔다. 통학 거리가 멀어 읍내에서 자취 생활을 하는 바람에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말을 섞을 사람도 없고, 머리를 기댈 그 무엇도 없었다. 통금 같은 외로움에 그저 먼 하늘만 바라봤다.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영영 땔나무꾼으로 남는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땔감을 줍던 나는 맥이 풀려 너럭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멀리 기차가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땅이 꺼질 듯 긴 한숨이 나왔다. 비구름 아흐레에 햇빛 하루쯤이 우리의 삶일 진데 내 인생에는 어찌 빛 한 줌 없을까? 억울하고 서러웠다. 괜스레 심통이 났다. 애꿎은 보리수나무를 발로 툭 찼다. 잎자루에 붙어 흘레 중이던 무당벌레 한 쌍이 바위에 툭 떨어져 나뒹굴었다. 죽어도 한 몸이란다. 낫등으로 탁 쳤다. 딱지 속 명주 날개를 파르르 떨며 둘이 한꺼번에 요절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내 꼴이 한심해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날 저녁 나뭇짐을 부려 놓은 나는 사랑방으로 건너가 대뜸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저는 내일 공부하러 떠날 겁니다. 10월, 검정고시를 거쳐 고등학교에 가려고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 뜬금없는 소리에 아버지는 말없이 천정만 바라보셨다. 이제는 머리가 굵어져 우격다짐으로는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했으리라. 이튿날, 동네 서당에 마지막 훈장을 지낸 당숙을 부르고, 읍내로 시집간 누님 내외도 함께 호출했다. "이놈이 지금 공부하겠단다. 3년이나 썩혔는데 가당키나 하남?" "아이고 형님! 조카는 나뭇짐을 지고도 작대기로 땅에 글을 쓰며 다니는데, 당연히 공부시켜야죠" 다행히 당숙이 입에 거품을 물고 나를 비호했다. "농번기 때 모내기는 누가 하고?" "빙장어른, 우리가 거들어드릴 테니 걱정 말고 처남을 하루라도 빨리 공부하러 보내세요" 이번에는 매형이 거들었다. 다음 날 아침이다. 지게를 버리고 책을 택한 나는 학원 수강을 위해 대구행 기차에 올랐다. 10월 검정고시에 떨어지면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엄명이 족쇄처럼 따라붙었다. 농사꾼에게 갈음옷이 있겠는가. 닳아빠진 검정 고무신에 빛바랜 남방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청도역에서 한 시간을 달려 대구역에 내렸다. 자동차도 사람도 어찌 그리 많은지. 북적이는 인파로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역광장 끝 전봇대에 나붙은 전단지를 읽었다. '검정고시의 전문, 경북고시학원!' 약도를 보고 찾아갔다. 동성로 입구, 한일극장 앞에 있는 목조 건물 2층이었다. 합판으로 칸을 막아 그런지 바닥을 밟을 때마다 삐걱거려 불안했다. 지금은 고인이지만 당시 박재욱 원장님은 그 학원을 모태로 후일 범어동에 경신상업전수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취임한 뒤 1971년에 지금의 경신고등학교로 개편했다. 2003년에는 경산 남천에 대구외국어대학을 설립하고, 11대와 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검정고시가 치러질 10월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6개월, 마음이 급했다. 1년 과정이지만 그동안 읽은 강의록을 밑천으로 중학교 3학년 과정을 수강했다. 영어 시간이다. 칠판에 지렁이 기어가듯 꼬부랑글자를 가득 써 놓고 독해 중이었다. 선생님의 유창한 영어 발음이 신통함을 넘어 신기에 가까웠다. 한국 사람인지 서양 사람인지가 헷갈려 한 시간 내내 선생님의 코만 바라봤다. 읍내 당숙네의 쪽방에서 기차 통학을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나무로 불을 때어 손수 아침밥을 지어 먹고 도시락도 샀다. 코피를 쏟아내며 공부에 매달려도 영어와 수학 과목은 자신이 없었다. 고민하다가 염치 불고하고 글동냥에 나섰다. 하굣길에 생면부지의 청도중학교 교무실을 찾아갔다. 다행스럽게도 학교가 청도 역전에서 코앞이었다. 남녀 공학이다. 하얀 운동화에 말쑥하게 교복을 받쳐입은 여학생들이 길거리에서 거지라도 만난 듯 나를 한심한 표정으로 힐끔거렸다. 하지만 내 초라한 존재마저 꺼내 볼 여유가 없었다. 먼저 영어 선생님을 찾았다. 박재영 선생님, 내 이름과 같았다. 고학생임을 밝히고는 꾸벅 절을 했다. 그런 다음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난제를 요약한 A4 한 장을 내밀었다. 내 몰골이 측은했는지 흔쾌히 도와주셨다. 자리를 옮겨 수학 선생님을 찾았다. 이수동 선생님, 역시 친절하게 문제를 풀어주셨다.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재회로 이어진 수학 선생님과 나와의 인연의 두께는 몇 겁이나 될까. 후일 내가 대구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우리 학교로 전근 오셔서 내 담임을 맡았다. 그때 세상은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동냥이 오래 지속되자 내 얘기는 교장선생님의 귀에도 전해졌다. 3년 전, 하숙비까지 달라던 농투성이의 무례함이 떠올랐으리라. 나를 기억하신 교장선생님은 학교 도서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진정 가슴 따뜻한 분들이었다. 두 선생님의 도움이 지렛대가 되었으리라. 그해 시월, 나는 고입 검정고시를 무난히 통과했다. 반년 동안 하루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교재에 코피 쏟아붓기를 여러 차례, 시험 당일에도 위경련이 도져 진통제로 버텼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했던가. 내 인생 삼세판, 마지막 기회를 잡은 것이다. 당시만 해도 검정고시의 변별력이 높아 상위 성적으로 합격하면 일류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국립이라 공납금이 가장 저렴한 경북대 사대부고에 입학시험을 치렀다. 탈락했다. 전년도부터 남학생 3학급을 줄이고 여학생 3개 반을 별도로 뽑는 바람에 남학생의 커트라인이 상대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후기 모집에 중앙상업고등학교를 택했다.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못 되는지라 졸업하면 직장을 가져야 하고, 장학금으로 짓누르는 아버지 어깨의 짐도 들어드려야 했다. 3학년이 되던 해다. 1971년 10월, 남들이 부러워하는 9급 세무직 300명 모집에 90등(등록번호가 석차임)을 했다. 50명이 시험 보는 교실에서 겨우 한 명꼴로 합격자가 나왔다. 그러니 예나 지금이나 경쟁은 치열했다. 운명일까. 그해 공무원 정원제가 생기면서 감원 바람이 불었다. 부처마다 정원의 5%에 해당하는 인원이 자연 감소 될 때까지 임용이 보류된 것이다. 인력 소모가 큰 체신부에 임용을 원하면 일주일 이내에 발령을 내어주겠다고 총무처에서 매달 왕복 엽서를 보내왔다. 아버지는 바람 타지 않는다며 세무서보다는 우체국 근무를 원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엽서 동의란에 붉은 도장밥을 남겼다. 군대 입대를 10개월 앞두고 있었다. 일단 발령을 받아야 3년이라는 군 경력을 보탤 수 있었다. 하여 조바심도 났으나 그보다는 제대 후 당시 보통고시로 불리는 7급에 도전하려는 나의 또 다른 꿈이 가슴속에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흘 후다. 옛 가야의 서울인 고령우체국에 발령이 났다. 농투성이에서 일약 화이트칼라로 삶을 바꾼 것은 부모님도 선생님도 아니었다. 가난이 준 서러움과 고통과 눈물의 결정체라고나 할까. 사막처럼 물기 없는 세상에서 내가 마른침을 삼키며 무겁고 뜨겁게 피운 한 송이 소금꽃이었다. 후일 임종을 앞둔 아버지께서 내 손을 꼭 잡았다. "아들아, 그때 너를 중학교만 보냈어도 고등고시는 따 놓은 당상일 텐데 아비가 까막눈이라 안 할 고생만 시켰구나" "아니요. 아버지! 농부 아들로 태어나 이만하면 성공한 게 아닐까요. 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상장으로 벽을 도배해도 씩 웃기만 할 뿐 칭찬 한마디 없던 아버지였다. 그래도 중학교 진학을 막은 일이 평생 가슴에 갈고리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를 편안한 마음으로 보내드렸다. 5. 동생의 죽음 남영호 여객선 침몰로 326명의 목숨을 앗아간 1970년도 12월은 악마의 달이었다. 목숨 지고 꽃 지던 그달, 천사로 살아온 내 동생도 갔다. 음력 섣달 초하루, 할아버지의 기일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노을이 붉었다. 용광로 같은 노을을 붙잡고 동생이 보챘다. "형, 우리 역에 고모님 마중 가자" "응, 혼자 다녀와. 형은 문어도 오려야 하고, 밤도 쳐야 하고 향도 빚어야 해" 대구에 사는 막내 고모님은 제사 때면 늘 초저녁에 도착하는 막차를 타고 오셨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졌다. 한 마장 길인 신작로에서 동생이 뺑소니를 당한 것이다. 머리를 다쳐 의식을 잃은 동생은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다. 내가 동행했다면 무탈했을까. 아쉬움 그리움 안타까움에 죄책감까지 겹쳐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닭똥 같은 눈물만 펑펑 쏟아졌다. 초등학교 졸업반인 동생은 비록 게걸음을 걸지만 공부도 잘하고 마음 씀씀이가 샘물처럼 맑았다. 친구들이 학용품에 눈독을 들이면 죄다 나눠주고 정작 손이 불편한 자신은 늘 몽당연필로 글을 썼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뭇시선이 차갑고 따가울수록 공부에 매달렸다. 책벌레가 따로 없었다. 잠을 쪼개며 책과 씨름한 보답이리라. 한 번도 전교 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다. "형! 나도 공무원이 될 수 있을까?" "그럼, 당연하지! 발로 뛰는 공무원만 빼고" 아침까지만 해도 대학 갈 형편이 못되어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내가 부러웠는지 반짝이는 눈빛으로 푸른 꿈을 키우던 동생이 아니던가. 혐오와 조롱과 모욕까지 세상 사람들에게 인간 대접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평생 괴물 취급만 당하다가 그렇게 일찌감치 하늘나라로 갔다. 내 가슴에 뽑으려 해도 영원히 뽑을 수 없는 마목 같은 옹이 하나 심어놓고서……. 하긴 오히려 편견 없는 그곳이 편안할지도 모르겠다. 6. 천사들의 점빵 시간이 약이다. 빈말이다. 동생에 대한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직장을 갖자 더 심해졌다. 가슴이 무너져 내릴 때마다 나는 장애인 시설을 찾았다. 그렇게라도 그들과 함께하고 나면 꽉 막혔던 숨통이 조금은 트였다. 제대 후 대구로 전보된 나는 처음 두어 달은 주말마다 음성 꽃동네 희망의 집에 자원봉사를 신청하여 그들의 손발이 되어 함께 시간을 보냈다. 전신마비 환자를 목욕시킬 때 초보자들은 달라붙은 겨드랑이나 오금에는 선뜻 손이 들어가지 않는다. 동생을 키우다시피 한 나는 매만지는 손길이 익숙하여 그들과 쉬이 가까워질 수 있었다. 서로 대화까지 익숙해진 나는 대구에서 가까운 시설을 찾았다. 경산 고산에 자리한 자유재활원에서 정례적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자원봉사를 할 때마다 열악한 환경과 부족한 일손에 늘 가슴이 아팠다. 1982년 1월 1일, 철밥통 직장으로 치부되던 국가기관에서 정부 투자기관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그해 연말, 한국통신 대구본부에서 승진한 나는 첫 발령지였던 고령전화국 총무과장으로 영전했다. 그때 봉사활동을 위해 고령군청으로부터 안내받은 시설이 인근 성산면에 있는 국제재활원이다. 지금은 성요셉재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직원들에게 각출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들고 봉사에 뜻있는 직원들 몇 분과 함께 시설을 찾았다. 양지바른 언덕에 터 잡은 그 천사의 집에는 무연고로 세상에 버려진 갓난아이들도 여럿 있었다. 주로 뇌성마비를 앓는 중증 장애인 50여 명이 힘든 하루하루를 원장님의 기도로 극복하고 있었다. 오전 11시, 예배 시간이다. 원생들 모두 강당 바닥에 뉘어졌다. 천 가지 얼굴로 만 가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내심 나는 신은 죽었다고 외쳤다. 살아있다면 "이 잔인한 고통을 즐기고 있느냐?"고 말이다. 하늘이 원망스러워 슬쩍 부아까지 치밀어올랐다. 사지가 멀쩡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날부터 나는 평생을 그들의 손발이 되겠다고 하늘나라에 있는 동생에게 맹세했다. 연말이라 가끔 기관 단체에서 라면 상자나 쌀 포대를 들고 왔다. 그런데 그들은 미리 준비해 온 현수막까지 내걸고 기념사진만 찍고는 휑하니 사라졌다. 생색이나 내는 그들이 싫었다. 원장님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거절했다. 사진 속에서는 활짝 웃고 있지만 불편한 몸으로 억지 춘향이 된 그들이 좋아서 사진을 찍겠는가. 하긴 이 글을 쓰다 보니 사진 한 장쯤 남겨놓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없진 않다. 손에 쥔 게 있어야 봉사활동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직원들과 함께 고민하던 나는 전화국 내에 무인 판매대를 설치키로 했다. 그 수익금으로 시설에 도움을 줄 요량이다. 휴게실 문패를 내리고 『천사들의 점빵』이라는 근사한 간판을 달았다. 진열대를 짜고 각종 차와 음료수, 빵과 라면 등 주로 간식거리를 염가로 납품받아 진열했다. 직원들이 비치된 장부에 기록하고 물건을 소비하면 봉급날 월급에서 공제했다. 일일 결산은 별도 업무가 없는 노조 지부장님에게 부탁했더니 흔쾌히 맡아 줬다. 직원이 70여 명, 면회라도 오면 다방에 가는 시간과 비용도 절감되어 일거양득이라 전 직원이 환영했다. 특히 전자실 시험실 동력실 등 야간 숙직 인원이 예닐곱이나 되어 그들이 소비하는 야식비만 해도 상당하여 수입은 짭짤했다. 그 수익금으로 재활원의 보온물통, 정수기, 세탁기 등 낡은 비품을 차례로 교체해 주었다. 재활원과 전화국 간에 자매결연을 맺고 매주 예닐곱의 직원들과 봉사활동을 나갔다. 그때마다 원생들이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덤으로 챙겨갈 수 있어서 마음이 흐뭇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라는 음성 꽃동네의 돌비가 떠올랐다. 그랬다. 이곳에서는 휠체어만 탈 수 있어도 축복이다. 온전한 정신으로 혼자 걸을 수 있는 원생이라곤 열네댓 살의 은연(가명)이가 유일했다. 이곳 재활원의 마스코트라고나 할까. 그녀는 언제나 환한 웃음으로 맨 먼저 봉사단원을 맞았다. 그녀 역시 자폐증을 앓았다. 사지가 뒤틀린 몸, 달라붙은 왼팔, 절뚝이는 다리, 어눌한 말 한마디 뱉으려면 얼굴 전체가 일그러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래도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을까. 종일 엉덩이 한번 땅에 붙일 틈도 없이 자신보다 못한 이들의 손발이 되어 기꺼이 잔일을 도왔다. 이 땅에 정말로 천사가 존재한다면 바로 그녀가 아닐까. 종이 한 장에 떠나야 하는 게 공직자의 운명이다. 국제재활원 가족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지 3년째다. 전보 기간을 넘긴 나는 대구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이별을 고하던 날, 문정숙 원장님은 내게 감사장을 수여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줄게 종이 한 장밖에 없다"며 눈물을 훔쳤다. 내가 여태까지 받은 여느 상장이나 표창장보다 소중한 선물이었다. 손발이 굳어 박수를 칠 수 없는 은연이는 옆에 서서 훌쩍이고 있었다. 들이굽은 손으로 내 옷자락을 할퀴며 온몸으로 울던 그녀를 떠올리면 지금도 내 코끝이 아련하다. 세월이 꾸러미로 흘렀다. 1994년 방통대를 졸업하고 내부 고시를 거쳐 2급으로 승진한 나는 경북의 오지, 영양전화국장으로 부임했다. 맨 먼저 한 일이 『천사의 점빵』을 여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간식거리 외에도 비누, 샴푸 세제 등 간단한 생필품까지 확대했다. 그만큼 이문도 늘었다. 그런데 너무 오지이기 때문인지 그곳에는 중증 장애인 시설이 없었다. 숙고 끝에 내가 봉사활동을 하는 경산 고산의 자유재활원생과 그 자매 시설인 경산 남천의 만승근로복지관 원생을 초빙하여 하계 캠프를 열어주기로 했다. 이동이 자유롭지 못해 평생 시설에 갇혀 지내는 그들이다. 얼마나 바깥세상이 그립겠는가. 청정한 산골의 자연 이 주는 쾌적함을 좋은 추억으로 그들의 가슴에 심어주고 싶었다. 그해 여름, 영양군 수비면 송하리, 산 좋고 물 좋은 그곳에 폐교된 송하초등학교를 통째로 빌렸다. 그런 다음 관광버스와 직원들의 승용차를 동원하여 자유재활원생 250여 명과 만승근로복지관생 60여 명을 차례로 초청했다. 3박4일 동안 원생들의 숙박에 불편이 없도록 교실 바닥에 두툼한 스티로폼을 깔아 숙소로 사용했다. 몸놀림이 자유로운 원생들은 직원들과 어울려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보행이 자유롭지 못한 원생은 직원과 일대일로 짝을 지어 강에서 물놀이용 튜브를 타며 수영을 즐겼다. 밤에는 축제의 꽃인 캠프파이어로 흥취를 돋구었다. 그러자 천사들은 너무나 행복해했다. 별이 쏟아지는 야외에서 모닥불을 지피고 반딧불이를 보며, 자연 속에서의 휴식과 탐험을 즐기며 소중한 추억을 가슴에 마음껏 담았다. 3년째의 행사를 끝으로 지방 근무를 끝낸 나는 다시 한국통신 대구본부로 자리를 옮겼다. 7. 천상에서 온 메시지 코 묻은 아기들의 돌 반지까지 뽑아가던 IMF 외환위기가 세상을 휩쓸고 간 초하의 어느 날이다. 인사부장인 나는 기계직 한 사람 채용을 두고 본부장님과 마찰을 빚고 있었다. 상명하복이 미덕이던 시절, 상관과의 다툼은 옳고 그름을 떠나 불충 그 자체였다. 겪어본 사람만이 그 고충을 알 수 있으리라. 입술이 부르트고 밥맛까지 잃은 나는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새벽녘에야 설핏 풋잠이 들었다. "형! 용기를 내. 그 친구를 꼭 도와줘. 공기업이 그를 외면한다면 대한민국 어딘들 그를 받아주는 곳이 있겠는가? 장애인에게 인권이 없다는 건 형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니" 천상에서 온 메시지였다. 눈을 뜨니 오래전에 하늘의 별이 된 동생은 온데간데없고 베갯잇만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인사부장, 이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이면 불구를 뽑았어요? 성치 않은 팔로 보일러를 돌리는 일도 문제이거니와 회사의 이미지는 생각하지 않는 겁니까?" 도끼눈을 한 본부장님의 얼굴과 천상에 있는 동생의 얼굴이 뇌리에 자꾸 갈마들었다.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나는 혼란스러워 애꿎은 머리만 쥐어뜯었다. 일주일 전의 일이다. 기계직(보일러공) 신입사원 한 명을 채용하기 위해 공채로 임용 후보자 3명을 뽑았다. 그런데 그중에 장애인을 1순위로 뽑은 것이 화근이었다. 좀 더 부연하자면 이렇다. 장애인 전형 제도가 따로 없던 시절이다. 서류전형을 통과한 열네댓 사람을 상대로 면접시험을 치렀다. 그때다. '○동팔' 내 혼을 쏙 빼놓는 청년이 있었다. 자폐증을 앓은 그는 하늘의 별이 된 내 동생을 쏙 빼닮았다. 목발 신세는 겨우 면했으나 사지가 뒤틀린 몸, 절뚝이는 다리, 달라붙은 왼팔, 사시에다 말 한마디를 하려면 아랫입술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죽은 동생이 환생한 듯 착각을 할 정도였다. 그 청년을 뽑은 연유는 분명했다. 내 동생을 닮아서가 아니다. 장애인이라는 동정심의 발로는 더더욱 아니다. 탁월한 업무능력과 반듯한 인품이었다. 보일러 기능사 자격증으로도 응시가 충분한데 유일하게 기사 자격증을 갖고 있었다. 전문대학 학위도 응시자 중 혼자였다. 덤으로 용접기능사와 운전면허까지 갖고 있었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도 해내기 어렵거늘, 불편한 몸으로 그 많은 자격증을 따자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을까. 어쩌면 세상이 짓밟는 인격에 대한 설움과 통한이 빚은 훈장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아렸다. 질문이 막힐 때마다 "뽑아만 주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앵무새 같은 대답도 그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편한 몸으로 지원해서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 인간 됨됨이가 면접관들의 마음을 움직였으리라. 면접관 전원으로부터 최상의 점수를 받아 당당하게 선순위로 합격했다. 벽은 따로 있었다. 본부장님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임용을 거부하고 재시험을 요구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본부장님의 주장도 일리는 있었다. 장애인을 고용하는 대신에 돈 몇 푼으로 때우면 된다. 우리 회사만 먼저 장애인을 고용하라는 법도 없다. 그것이 내가 갈등을 겪고 있는 이유다. 장애인 고용부담금 몇 푼 내는 걸로 장애인을 채용하지 않는다는 건 법망은 피해 갈 수 있지만 분명 잘못된 편법이다. 그들의 고유한 인권을 무시하는 처사이고 비겁한 행동이었다. 잠을 자도 그 청년의 천사 같은 미소가 동생의 얼굴에 오버랩되어 자꾸 천정에 맴돌았다. 잠에서 깬 나는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출근하기 무섭게 퇴짜 맞은 문서를 꺼내었다. 먼지만 톡톡 털고는 본부장님 앞에 다시 내밀었다. "서명하십시오" "내 말이 말 같지 않아요?" 배신감을 느꼈으리라.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본부장님은 서류뭉치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래도 성이 풀리지 않는지 살균되지 않은 칼날 같은 폭언을 마구 쏟아냈다. 장애인에 대한 '인권유린'이라고 맞서고 싶었지만 일을 그르칠 수가 없어 애써 참았다. 이쯤의 수몰로 한 사람일망정 장애인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열 번, 아니 백번도 참을 수 있었다. 설득도 하고 애원도 했다. 소용없었다.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하지만 내게도 비장의 카드 한 장쯤은 남아있었다. "본부장님, 문밖에 보도 자료에 굶주린 기자들이 아우성들인데 '장애인 차별'이라는 기사가 온 매스컴을 도배질해도 괜찮겠습니까?" 공직자에게 좋지 못한 기사는 치명적이다. 보도라는 말에 꼬리를 내린 본부장님은 문서에 서명했다. 하긴 "임용 후 모든 책임은 당신이 지시오"라는 구두 단서가 따라붙긴 했었다. 별칭 '똥파리' 후일 동팔씨에게 직원들이 붙인 별명이다. 그 청년이 당시 7만 5천여 명이 종사하는 우리 직장에서 장애인임용 제1호였다. '보리밭에 길내기'라는 말이 있다. 무슨 일이든 처음이 어려운 법. 그 임용을 시작으로 지금 KT 산하에는 300명에 가까운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함께 어울려 일하고 있다. 처세와 정의는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직과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처세술임을 그때 알았다. 물론 내가 한 일이 태산의 출발인 티끌에 불과함을 안다. 하지만 처음 물꼬를 틔웠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가슴이 뿌듯했다. 장애는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일이 아니라 우리가 다 함께 풀어가야 한다는 생각은 제2 인생을 살고 있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나라 법에는 상시 근로자 50인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민간 기업도 종사자의 3.1%를 장애인으로 고용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고용부담금으로 때우는 철면피 같은 기업도 있다. 일부러 장애인들과 거리를 두고자 그들이 자립할 수 있는 권리까지 박탈하며 복지라는 이름으로 시설에나 가두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 모두 한 번쯤 되짚어볼 일이다. 임용은 시작에 불과했다. 동팔씨가 그토록 어렵사리 발령을 받고 일을 시작한 지 두어 달이 흘렀을까.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든 풍문이 마실 나온 수탉처럼 사무실 이곳저곳을 나돌아 다녔다. "공직에 불구를 채용하다니, 쯧쯧! 달라붙은 저 손으로 어찌 보일러를 돌린단 말인가? 이제 따습게 지내기는 다 틀렸네 그려. 뒷배가 인사부장이라나 뭐라나……." 여기저기 직원들이 쑥덕거렸다. 해가 바뀌어도 동팔씨를 동료 직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에게도 분명 '기계실 주임'이라는 직함이 있지만 하나같이 '똥파리'로 불렀다. 이 얼마나 고약한 호칭인가. 방열기 노후로 사무실이 가끔 추울 때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낡은 시설을 탓하는 직원은 없었다. 보일러 운용 능력을 문제 삼아 수시로 동팔씨를 강아지 부르듯 불러 닦달했다. "왜 하필이면 장애인을 뽑아 우리를 떨게 하느냐?"고 내게 책임추궁을 하는 것으로 들렸다. 직원들이 하나같이 모질게 굴어도 동팔씨는 속도 없는 듯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연신 허리를 굽혔다. 그동안 사회에서 받은 괄시와 천대가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습관처럼 몸에 익은 그 친절과 찔레꽃을 닮은 환한 미소는 거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의태요 보호색이라고 생각하니 내 가슴이 뜨거워졌다. 소문에 시달린 나는 그를 신뢰한 내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종종 보일러실을 돌며 동정을 살폈다. 몸이 성한 사람만큼 일하자면 갑절로 움직여야 함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한시도 책상에 앉아 있는 법이 없었다. 비번마저 반납하며 기름치고, 닦고, 조이며 기계에 매달렸다. 그 덕에 모든 밸브는 반짝반짝 빛이 났고, 보일러실 바닥은 떨어진 밥풀을 주워 먹어도 될 만큼 반질거렸다. 누가 보든 말든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이 나를 안심 시켰다. "동팔씨! 몸이 그렇다고 창피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장애는 좀 불편할 뿐이지 부끄러워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 직원들의 무례한 요구에는 당당하게 대처하세요." 지나치게 몸을 낮추는 모습이 안타까워 나는 수시로 사람으로 아프고, 사람으로 뒤척이는 그를 다독였다. 그렇게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동팔씨가 직무교육을 갔다. 불 때는 일은 이웃국에서 파견된 직원이 대신했다. 그는 숙련공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보일러가 터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굴뚝이 날아가고 집채 같은 주철제 섹션보일러가 폭삭 내려앉았다. 그 바람에 전 직원이 동태가 되어 일주일을 떨어야 했다. "그럼 그렇지, 외팔로 어찌 제대로 된 정비를 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듯 사무실이 술렁거렸다. 물론 직원들이 가리키는 손가락의 끝은 나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곧바로 감사가 뜨고 사고 경위 조사가 이루어졌다. 결과는 이외였다. 운용자의 안전 수칙 미준수로 밝혀졌다. 당시 주철제 섹션보일러는 점화전에 십여 분 통풍을 시켜 밤새 고인 가스를 불어내야 했다. 그런데 늦은 출근으로 시간에 쫓긴 기사가 바로 점화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 조사 과정에서 업무에 충실한 동팔씨의 진실이 밝혀져 그해 '숨은 일꾼'으로 발탁되어 표창까지 주어졌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이리라. 보일러 사고를 계기로 우리 일터에는 장애인을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다. 아니 확 바뀌었다. 색안경을 끼고 보던 본부장님도 직원들도 동팔씨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똥파리'라는 걸레 같은 호칭도 '○주임'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체득한 직원들이 늘어나면서 직장은 오히려 몸이 불편한 그들을 먼저 챙기는 살가운 분위기로 바뀌었다. 이제 AI가 시 짓고 소설 쓰는 시대가 아닌가. 불 때는 일을 용역기관에 넘긴 동팔씨는 또 다른 업무를 맡아 아직도 현직에서 남다른 정열로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고 있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업무능력이나 직무 역량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내 삼촌이 그랬고, 동팔씨도 그랬다. 단지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은 무시당하고 취업까지 거부당하고 있다. 취업이 어려우니 경제적으로도 여유롭지 못해 생활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그들을 우리의 품으로 끌어들여 함께 한다면 좀 더 살맛 나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한국의 모든 기업인이여! 장애인 고용에 주저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결코 돈 몇 푼을 바라지 않는다. 비장애인과 함께 차별 없이 일하는 것이 꿈이다. 세계적인 포도주의 소산인 일본의 '코코 팜 와이너리'를 움직이는 장인들도 모두가 지적 장애인이다. 가깝게는 세계적인 오페라로 뜨고 있는 우리나라의 '한빛예술단'의 모든 연주자도 시각장애인이다. 이처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구분 없이 어우러져 동행하는 지혜의 문이 열릴 때 우리 사회 역시 진정한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8. 『천사들의 점빵』 문을 닫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고 했던가. 2002년 3월 22일 정부 투자 기관이었던 한국통신은 『KT』라는 개명을 시작으로 민영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구조 조정을 위한 예고편이었다. 외환위기의 후유증이리라. 한창 일할 나이에 벌이터를 잃고 파란 낙엽으로 나뒹구는 실업자들이 하릴없이 공원 벤치를 지키고 있을 때다. 나는 다행히 IMF라는 칼바람은 비켜 갔으나 어느덧 30년을 훌쩍 넘긴 공직 생활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2005년 1월 1일 나는 KT 경주지사장으로 마지막 승차를 했다. 지방 근무 역시 마지막이다. 주요 기관을 돌며 부임 인사를 마친 나는 여느 때처럼 시청 복지과에 전화를 걸었다. 중증 장애인이 거주하는 시설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강동에 있는 『예티쉼터』를 추천해 주었다. 어디 누구냐고 물어왔지만 나는 함구했다. 봉사는 떠벌리고 하는 일이 아니다. 『천사들의 점빵』에 대하여 미리 소문을 들은 총무과장님은 휴게실 간판을 내리고 서둘러 점빵 문을 열었다. 직원들은 나를 두고 지사장이 아닌 점빵장이라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그 호칭이 싫지 않았다. 팍팍한 세상에 떳떳한 돈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전화국 건물에 세 들어 사는 국민연금 경주지점 식구들까지 2백수십여 명의 직원들이 이용하자 수익금의 규모도 상당했다. 집도 사람도 예쁜 『예티쉼터』는 경주의 끝자락 강동면 왕신리,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담한 쉼터에는 원장님인 정의호 목사님 내외와 스무 명에 가까운 지적 장애인(뇌성마비, 다운증후군, 자폐증, 학습 장애)들이 주로 포스코의 도움을 받아 한 가족처럼 오손도손 살아가고 있었다. 침구와 옷가지 등 세탁물을 빨아 널고, 원생들을 목욕시키고 나면 자신의 짝꿍과 놀이에 들어간다. 내 짝은 둘이었다. 뇌성마비를 앓은 삐돌이와 자폐증을 앓아 소리를 잃은 곰탱이다. 물론 호칭은 내가 선물한 닉네임이다. 오전에는 실내에서 삐돌이의 말벗이 되어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다가 끼니때가 되면 밥을 떠먹이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오후에는 곰탱이의 손을 꼭 잡고 야외에서 산책했다. 작은 일에도 잘 토라지는 삐돌이는 서른 중반을 훌쩍 넘겼으나 번데기처럼 오그라든 몸은 네댓 살배기 아이처럼 가볍다. 누구의 도움 없이는 꼼짝달싹도 할 수 없다. 그래도 언어 구사만은 자유롭다. 도우미들이 반말투로 아이 취급을 하거나 성의 없이 밥을 떠먹이면 입을 벌리지 않는다. 말을 할 수 없는 아기가 뱉는 행위로 어른을 꾸짖듯이 그들은 다문 입으로 봉사자들의 오만을 꾸짖는다. 언제나 느긋한 곰탱이는 스무 살의 건장한 체구를 가진 청년이다. 하지만 생각이 없다. 팔랑개비를 손에 쥐어 주면 몇 시간이든 그것만 돌린다. 하지만 훌훌 옷을 벗을 때는 미모사다. 목욕 시간에 내가 잠시라도 방심하면 알몸으로 뛰쳐나가 주위를 발칵 뒤집어놓는다. 뜻하지 않은 누드쇼에 기겁하던 여직원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나를 혼자 웃게 만든다. 그들과 함께 호흡한 지 2년여, 내게 대구에 있는 KT 협럭사로 자리를 옮기라는 교지가 내려왔다. 아쉽지만 지방 근무 때마다 분신처럼 달고 다녔던 『천사들의 점빵』도 경주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산책 시간에 꼭 잡은 곰탱이의 손에서 느껴지던 따뜻한 온기가 그립다. 9. 에필로그 자원봉사란 언어 그대로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은 아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는 일이다.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일이라 그런지 주는 기쁨이 받는 기쁨보다 배가 된다. 그래서일까. 콩나물 장사로 번 전 재산을 흔쾌히 장애인 시설에 보내는 할머니도 있고, 기계에 손가락이 잘린 회사원이 월급의 절반을 장애인 시설에 꼬박꼬박 보내오는 아름다운 손도 있다. 봉사는 하면 할수록 기분이 좋아진다는 게 그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얻은 교훈이다. 봉사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참맛이리라. 돌이켜보면 그들과 함께하는 동안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내 자신이었다. 영국의 정치가 처칠은 "우리는 일함으로 생계를 유지하지만 나눔으로 인생을 만들어 간다"고 했다. 어쩌면 몸이 불편한 그들은 나눔을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을 꾸짖기 위해 천사가 변신하여 장애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손발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와 다르다는 편견과 선입견부터 버려야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잠재적 장애인이 아닌가. 나이 들어 유모차를 끌면 그 또한 장애인과 다름이 아닐 터. 육신을 파괴하는 온갖 불의의 사고 역시 언제든 누구나 당할 수 있다. 어디 내 가족만이 가족이고 내 밥만이 밥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몸이 불편한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정화를 위해서라도 꼭 한 번쯤 재활원의 자원봉사를 권하고 싶다. 피할 수 없는 것이 흐르는 세월이고 쌓이는 게 연륜이라고 했던가. 어느덧 인생의 겨울이 성큼 내 발목을 적시고 있다. 공직에서 함께라는 이름으로 평생 그들과 나눔의 꽃을 피우던 그 시절이 그립다. 지금은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몇몇 천사들을 상대로 『소리 책방』이라는 작은 독서회를 꾸려 글쓰기 재능 기부로 위로의 손길을 이어가고 있다. 언젠가 인생 소풍을 끝내고 본향으로 돌아가는 날 동생 앞에 뜨뜻한 형이 되고 싶다. 나이 탓이리라. 잠시 머물고 가는 이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남겨야 할지를 고비샅샅 톺아본다. 생각하는 건 뜻으로 닦는 일일 터. 들꽃 같은 천사들에게 작은 사랑의 열매 한 톨 남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리. 오늘도 나는 살포시 『천사들의 점빵』문을 가슴으로 얼고 있다.

    2026-07-07 0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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