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농지 전수조사 수습 나서면서도 '괴담 탓' 하는 정부·여당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을 세우고 농지 투기를 근절하겠다며 시작한 농지 전수조사가 농촌을 뒤흔들자, 정부·여당이 뒤늦게 수습에 나섰다. 당정은 21일 상속·고령농의 농지와 관행적 임대차·휴경은 일률적으로 처분하지 않고, 자진 정비나 농지은행 위탁을 통해 정상화하기로 했다. 경미한 불법 전용(轉用)에도 사후 양성화 기회를 주고 특별조치법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방향성은 옳다. 문제는 왜 이 대책이 이제 나왔냐는 것이다. 농촌 현실은 조사 시작 전부터 알 수 있었다. 고령화로 직접 농사를 짓지 못하는 농민이 늘고, 상속 농지와 관행적(慣行的) 임대차도 흔하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불확실한 기준으로 전수조사부터 했으니, 농민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농지 거래가 끊기고 가격 급락, 지역 농협의 담보가치 하락까지 우려됐다. 그러나 정부·여당은 "전수조사 전보다 실거래 가격 하락 폭이 둔화했고, 거래 빈도는 오히려 늘었다"며 농촌의 고통을 외면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남 탓'을 하며 책임을 회피한다는 점이다. 여당은 농민들의 우려를 국민의힘의 '괴담'과 '선동'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정부·여당 스스로 이날 농촌의 관행적 위반을 구제하고 현행 농지 제도와 현실의 괴리(乖離)를 고치겠다고 대책을 내놓지 않았나. 제도가 현실과 맞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이를 반영했어야 옳았다. 이제 와서 농민들의 불안을 정치적 선동의 결과로 돌리는 것은 정책 실패의 책임을 농민과 야당에 떠넘기는 행태다. 정부가 새로운 정책을 시행할 때는 예상 가능한 피해를 최대한 걸러내야 한다. 농지처럼 농민의 생계와 재산권이 걸린 사안이라면 더욱 그렇다. 투기는 엄단하되 생계형·관행적 위반은 구제한다는 원칙을 먼저 세우고 전수조사에 들어갔어야 했다. 이번 대책이 민심을 달래기 위한 미봉책(彌縫策)에 그쳐서는 안 된다. 정책의 허점은 농민 탓이 아니다. 농민에게 혼란을 안겨놓고 그 불만을 '괴담'이라 부르는 순간, 국민은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
2026-09-22 05:00:00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이 21일 이재명 대통령에게 사의(辭意)를 표명했다. 청와대는 대통령이 지난주 회견에서 국정에 대한 국민의 시선을 자신의 부족함 탓으로 돌린 상황에서 비서실장으로서 종합적 책임을 지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참모가 책임을 지겠다고 나선 것 자체를 폄하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사의가 곧 해명은 아니다. 국민이 묻는 것은 누가 물러나느냐가 아니라 낙마한 김승원·용혜인 두 장관 후보자에 대한 검증이 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는지, 그 과정에 공식 라인 밖의 힘이 작용했는지다. 우선 책임의 범위부터 모호하다. 특정 인사 실패 등에 한정하지 않고 국정 운영 전반에 대한 종합적 책임으로 설명했다. 강 실장은 김승원·용혜인을 포함한 6개 부처 장관 후보자를 발표한 당사자이고, 인사 검증과 추천을 총괄한 인사위원장이다. 인사 실패에 대한 책임이라면 그렇게 적시(摘示)하는 게 맞다. '전반'이라는 말에 인사 책임이 희석되면 무엇이 왜 잘못됐는지라는 핵심 질문에 대한 답은 얻지 못한다. 여기에 정치권에서 이 대통령 최측근인 이른바 경기·성남 라인의 인사 개입 의혹을 제기하고, 국민의힘은 김현지 제1부속실장의 개입 여부를 밝히라며 국정감사 출석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총무비서관이었던 김 실장은 강선우 당시 장관 후보자와 직접 통화한 사실이 확인됐고, '현지 누나한테 추천할게요'라는 김남국 당시 비서관 인사 청탁 문자 사태 때도 등장하는 등 인사 논란이 터질 때마다 거론됐다. 인사 검증의 핵심은 언제, 누가, 무엇을 알았고 누구에게 어디까지 보고했는가다. 진상(眞相)이 밝혀지지 않은 채 참모의 사의만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책임의 완결이 아니라 규명의 차단이다. 공식 인사 라인 수장의 사의로 일단락되고 김 실장을 둘러싼 의문이 설명 없이 넘어간다면 이 사의는 '방탄'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인사 검증 경로와 비공식 접촉 창구까지 밝히지 않는다면 이번 사태도 사람 한 명을 바꾸는 데 그칠 수 있다. 강 실장의 사의는 인사 실패의 끝이 아니라 진상 규명의 시작이 돼야 한다.
2026-09-22 05:00:00
[사설] "잘된 인사" 김승원 옹위한 김민석·서영교 사과해야
김승원 전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사퇴에도 불구하고, 각종 의혹이 추가되면서 파문(波紋)은 더욱 확산하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21일 김 전 후보자의 '탄원서'와 관련, "청와대 정무수석에게 탄원서를 전달한 그날 더불어민주당은 청문보고서를 단독 채택했다"며 "정무수석이 탄원서를 뭉갠 게 아니라면 대통령과 민주당은 알면서도 임명을 강행하려 했던 것"이라고 했다. 또 그 사이 김승원은 탄원서 무마·은폐 작업에 나섰다고 폭로했다. 전직 보좌관들이 제출한 탄원서에는 성추행 및 은폐 의혹과 음주 후 상습 폭언, 추가 음주운전 적발 사실 등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민주당은 김 후보자가 사퇴한 지 하루 만인 20일 개헌 추진단을 띄우며, 그동안 김 후보자를 비호(庇護)해 온 책임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집권 여당으로서 국민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마저 망각한 것이다. 김 전 후보자의 경우 신약 로비, 주가조작 연루 논란, 경기도당 회계 부정 의혹, 가족 특혜 의혹 등이 불거졌지만, 민주당 김민석 대표는 "볼수록 잘된 인사"라면서 "(김 후보자를) 지킬 것"이라고 했다. 국회 법사위원장을 맡은 민주당 서영교 의원은 '증인 0명' 청문회를 열고, 야당 질의 차단과 답변 가로채기를 하는가 하면, 김 후보자와 함께 눈시울을 붉히고 눈물을 닦으며 감정적 엄호(掩護)를 하기도 했다. 전대미문의 이번 인사 대참사는 청와대 인사 라인의 무능에다, 집권 여당인 민주당의 막무가내식 '내 식구 감싸기'가 초래한 국가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김 후보자가 사퇴한 이후에도,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살신성인의 본보기"라고 했고, 서영교 의원은 결단을 존중한다면서도 조작·표적 수사의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고 우겼다. 국민을 무시하는 오만(傲慢)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국민의 삶과 미래를 책임진 집권 여당이라면 국정 실패에 대해 겸허해야 한다. 민주당은 이재명 정부와 함께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과(謝過)하는 것이 마땅하다. 계속되는 회피와 교만은 국민적 분노와 심판을 불러올 뿐이다.
2026-09-22 05:00:00
[관풍루] 정부가 이달 말 종료 예정이던 유류세 인하를 2개월 더 연장
○…연봉이 1억 원을 웃도는 미성년 사업장 대표가 최근 5년간 연평균 21명에 달하고 이 가운데는 취학 전인 5세 이하도 포함됐다고. 부모나 조부모에게 물려받은 부동산 임대업자라는데… 우리 사회 불평등의 현주소. ○…"비쌀수록 잘 팔린다"는 명품 공식 깨져. 세계 최대 명품 그룹 LVMH의 주가는 올해 들어 약 35% 떨어졌고, 구찌는 12분기 연속 매출 감소를 기록. 고물가 시대가 본격 도래했다는 방증. ○…정부가 이달 말 종료 예정이던 유류세 인하를 2개월 더 연장하고, 추석 연휴 기간 고속도로 주유소의 기름값을 100원 추가 인하키로. 가뜩이나 고삐 풀린 韓 유류 소비 막을 길이 없네.
2026-09-22 05:00:00
2026-09-21 18:42:44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방식은 종종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취사선택하려는 집단적 유혹에 빠지곤 한다. 뼈아픈 패배와 부끄러운 상처는 축소하거나 은폐하고, 부분적인 승리와 영광은 거대하게 부풀린다. 그리고 이를 민족적 자긍심이라는 이름 아래 가둬 하나의 무결한 신화로 박제해 버리는 것이다. 1419년(세종 1년), 상왕 태종의 주도 아래 단행된, 이른바 '대마도 정벌(기해동정)' 역시 우리 역사 인식 속에서 오랫동안 신화의 자리를 차지해 왔다. 교과서와 대중 역사 서술 속에서 이 원정은 해동의 조선 왕조가 남방의 해적(왜구) 소굴을 일거에 평정하고 국위를 만방에 떨친 통쾌한 대승의 상징으로 소비되어 왔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추적해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완전 반대다. 정벌, 대승, 압승이 아니라 참혹한 패배였다. 『조선왕조실록』의 날것 그대로의 기록과 바다 건너의 상반된 사료들을 엄정하게 교차 검증하면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국사학자들은 오랫동안 참혹한 군사적 실책과 지휘 체계의 붕괴, 험준한 이국의 산야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병사들의 모습을 외면한 채 '정벌'로 도배질을 해 왔다. ◆조선 초 왜구의 준동 당시 조선을 둘러싼 해양 안보 환경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왜구는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듯 해안가 촌락을 털고 달아나는 좀도둑 무리가 아니었다. 왜구는 일본 남북조 내란기를 거치며 생존 기반을 잃은 하급 무사들이 주축이었다. 여기에 명나라 밀수 선단의 병사들, 고려·조선의 탈영병까지 뒤섞인 수만 명 규모의 다국적 무장 해적 집단이었다. 이들은 조운선을 탈취하여 국가 재정의 혈맥을 끊었고, 해안선 수십 리 안쪽을 초토화하며 백성들을 납치해 동남아 일대에 노예로 팔아넘겼다. 조선 조정은 울릉도 등지의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 정책과 해안선 농경지를 폐쇄하는 극단적인 청야 전술로 맞섰다. 이런 정책은 바다를 외면하고 대양의 통제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구조적 악순환을 낳았을 뿐이다. 이러한 위기 국면에서 1419년 5월, 왜구 함선 50여 척이 충청도 비인 현을 기습했다. 그들은 군선을 불태우고 황해도 해주와 연평도 일대를 유린했다. 그 후 중국 발해만 방면으로 북상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들 세종에게 왕권을 넘기고 군사권만 틀어쥐고 있던 상왕 태종은 분노했다. 군사전문가였던 상왕 태종은 왜구의 주력 부대가 약탈을 위해 북쪽으로 출정하여 본거지가 비어 있는 순간을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 상왕 태종은 빈집을 털듯 대마도 본거지를 기습 소탕하겠다는 야심 찬 기획 아래, 군선 227척과 1만 7천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결성했다. 이것은 조선 왕조 500년을 통틀어 오직 자국의 독자적 결단과 기획에 의해 바다를 건너 타국 영토를 침공한 유일무이한 해외 군사 원정이었다. 음력 6월 20일, 이종무가 이끄는 원정 함대는 대마도 아소 만에 진입했다. 원정군은 포구에 정박해 있던 왜선 129척을 나포 및 소각하고 해안가의 가옥 1천900여 채를 불태우며 초반 기선을 제압했다. ◆상륙한 조선군, 궤멸적 참패 대마도 도주(島主) 소 사다모리(宗貞盛)를 비롯한 대마도 주민들이 산중으로 도주하자, 조선군은 초기 성과에 도취되어 승리를 낙관했다. 그러나 전황은 상륙 작전이 본격화되면서 궤멸적인 반전으로 치달았다. 음력 6월 26일, 좌군 절제사 박실이 이끄는 부대가 왜구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내륙의 험준한 산악 지대로 진격했다. 그러나 대마도 지형은 좁은 협곡과 가파른 암벽으로 이루어진 천혜의 요새였다. 지형 숙지도 없이 무모하게 산길 깊숙이 들어선 조선군은, 고지대에 매복해 있던 왜구들의 기습적인 포위 공격에 직면했다. 일본 사료에서 이른바 '누카다케(糠岳) 전투'로 기록된 이 격전의 참상은 참혹했다. 화살과 바위가 빗발치는 협곡 속에서 지휘 체계가 순식간에 붕괴하였다. 충청·전라·경상 삼도에서 차출된 최정예 무관이자, 수백 명의 병력을 이끌던 대대장급(편장·偏將) 7명이 현장에서 일시에 전사했다. 편장 7인의 동시 전사는 야전 지휘부의 붕괴를 의미했다. 설상가상으로 군을 수습해야 할 지휘관 박실은 부하들을 내팽개치고 가장 먼저 배로 달아났다. 퇴로가 끊기고 지휘 체계가 붕괴한 채 방치된 병사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들은 가파른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져 추락사하거나 아소 만의 깊은 바다에 빠져 익사했다. 『세종실록』은 이날의 패배를 장교 7명과 병사 180여 명의 전사로 축약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대마도 소(宗)씨 가문의 공식 기록인 『종씨가보(宗氏家譜)』와 일본 측 사료들은 전사한 조선군이 2천500명에서 3천명 이상에 달했다고 증언한다. 실록의 숫자가 군 상층부의 체면을 위해 은폐된 것이든, 일본 측 기록이 전과를 과장한 것이든, 분명한 사실은 조선군 최정예 부대가 복병에 걸려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는 점이다. 패전의 충격 속에서 총사령관 이종무는 기상 악화와 태풍을 구실로 삼아 출병 채 보름도 되지 않은 7월 초, 함대를 거제도로 서둘러 회군시켰다. 이 원정이 과연 우리가 기억해 온 '정벌'이었는지는 회군 직후 조선 조정에서 벌어진 처벌 과정을 통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만약 왜구를 토벌하고 개선한 장수들이었다면 성대한 승전보와 함께 논공행상이 뒤따라야 마땅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관들은 군령을 어기고 병사들을 무참히 죽게 만든 장수들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며 연일 탄핵을 쏟아냈다. ◆원정군 총사령관·지휘관 유배형에 처해 그 결과 총사령관 이종무는 모든 관직과 훈작을 삭탈당한 채 경상도 창원으로 유배되었다. 적전 도주한 박실은 의금부에 하옥되어 모진 국문을 받은 뒤 비인 현의 노비로 전락할 뻔한 위기 속에서 유배형에 처해졌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해 가을, 원정에서 돌아온 왜구들이 복수를 위해 재침략을 준비한다는 첩보가 전해졌다. 조정은 제2차 정벌을 논의했다. 그러나 1차 원정의 생지옥을 목격했던 병사들은 공포에 휩싸여 집단 탈영을 감행했다. 병조판서가 "무식한 백성들이 군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망치니 엄벌해야 한다"라고 탄식할 정도로 군 기강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결국 2차 정벌은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무산되었다. 조선은 대마도 도주가 보내온 형식적인 복종 서한과 타협했다. 무역 특혜와 식량을 제공하는 선에서 사태를 봉합한 것이다. 군사적 결판이 아니라 외교적 미봉책으로 끝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 역사 500년을 통틀어 자발적인 판단에 의해 군사력을 한반도 밖으로 투사한 최초의 전투는 이처럼 비참한 결말로 끝맺었다. 광해군 시절 강홍립 이하 1만여 명의 병력을 만주에 파병하여 누르하치 군과 싸운 사르후 전투는 조선군의 비참한 패전으로 끝났다. 효종 시절 두 차례 조선 조총수를 만주에 파병하여 전투를 벌인 사건은 우리 역사에서는 나선정벌로 기록되었다. 이때의 파병은 조선 정부 자의에 의한 파병이 아니라, 청나라에 등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파병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엉망진창으로 패전하여 도망 나온 대마도 침공을 뻥튀겨 마치 장엄한 승리를 거둔 것처럼 분칠을 해놓은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 역사의 제 모습을 찾아야 한다. 패배의 상처를 승전의 환각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후대에게 '정신 승리'를 강요하는 사기극이나 다름없다. 뼈아픈 실책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왜 패배했는지를 복기하는 지성을 갖춘 민족만이 뼈아픈 기록 위에서 현실을 냉정하게 헤쳐 나갈 안보적 지혜를 구축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펜앤마이크 대기자
2026-09-21 18:08:03
[매일춘추-임현락] 가을, 겸재의 시선으로 조선을 걷다
가을의 문턱, 대구 간송미술관으로 설레는 걸음을 옮긴다. 산지형을 살린 외관과 박석마당의 아름드리나무 기둥을 보며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이 품었던 풍경의 호흡을 떠올린다. 미술관 안으로 발을 디디면 동선은 자연스럽게 지하로 이어진다. 계단을 내려가 마주한 커다란 로비는 자연채광의 환한 여백으로 공간을 활짝 열어 놓았다. 간송(澗松)의 신념과 어우러진 소나무와 곳곳의 차경(借景)을 통해 자연을 품은 건축가 최문규의 안목이 탁월하다. 이번 전시는 '겸재 정선-조선의 눈으로 조선을 그리다'로, 간송 소장품과 삼성문화재단, 국립중앙박물관, 개인 컬렉터의 비장품까지 총 216점이 탄생 350주년을 기념해 모인 대규모 기획전이다. 전시실에서 조선의 시간과 마주하는 순간, 혼백처럼 살아 숨 쉬는 진경산수화의 향연에 숨이 멎는다. 한수주유(漢水舟遊)로 시작해 금강산 절경에 이르러 폭발하는 겸재의 붓질은 조선 산수의 형세와 흐름을 그만의 호흡으로 기막히게 그려냈다. 18세기, 조선 성리학은 우주와 인간의 본질을 주체적으로 사색하여 외래 사상을 '우리의 삶과 정신'으로 완벽하게 체화(體化)했다. 전시 마지막 벽면에 화성(畫聖)으로 추앙한 최완수 선생의 글귀처럼, 겸재 정선은 그 지적 자존감을 붓끝으로 실천하여 조선의 진짜 산천을 독창적 진경(眞景)으로 꽃피워냈다. 중국의 틀을 벗어나 조선 고유의 바탕과 주체적 아름다움의 선언이었다. 우리 그림을 강의할 때마다 진품을 볼 곳이 없어 항상 서울로 학생들을 보내곤 했다. 이제 영남의 독자들이 이곳에서 유감없이 마주하게 됐으니, 소외됐던 대구의 안목이 비로소 제 자리를 찾은 셈이다. 학창 시절 성북동 간송미술관 보화각(葆華閣)에서 공부할 당시 같은 전시가 열렸을 때, 관람객 행렬이 도로 너머까지 줄지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젠 외지에서도 많은 이들이 모여들고 있다. 문화로 나라를 지키던 '문화보국(文化保國)'의 정신이 이제 이곳 대구에서 새로운 문화적 기틀로 다시 피어나고 있다. 이 전시가 새삼 절박한 희망으로 다가오는 것은, 강대국의 패권 사이 우리 현실이 과거 조선의 격동기와 닮아 있다는 기시감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는 고유한 문화와 국가적 자존을 세울 절호의 기회다. 간송의 혜안과 후학들의 정성이 이리로 이끌었듯, 문화 유전자를 주체적으로 세울 준비는 바로 지금이다. 전시 오픈 행사에서 어떤 이가 말했다. "이런 전시는 50년 뒤 겸재 탄생 400주년에나 다시 볼 수 있겠군요." 50년 후면 우리는 세상에 없다. 이 시간을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마음속 작은 스케치북에 거장의 붓질을 따라 우리 산천의 흐름을 눈으로 그려 보라. 그 순간, 세상의 풍경이 다르게 보이고 문화의 유전자가 새롭게 피어날 것이다.
2026-09-21 15:52:14
9·18 이재명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5월까지 60%대를 기록하던 대통령 지지율이 지난 3~4개월 사이 30%대까지 자유낙하했다. 30%대 지지율이란 핵심 지지층마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정치가에겐 암 선고에 가깝다. 이런 지지율로는 국정 운영이 어렵다. 집권 1년을 겨우 넘겼는데 레임덕에 들어선 것이다. 지난 17일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정책'보다 대통령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고 경고했다. 정책이 잘못이면 고치면 되지만, 신뢰가 무너진다는 건 아무리 잘해도 "쳐다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기자회견은 그 갈림길에서 던진 승부수였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보다는 낫다. 윤 전 대통령은 취임 2개월 만에 데드 크로스를 맞았다. 하지만 끝내 "지지율 올리는 꼼수 같은 건 쓸 줄도 모르고 체질에도 안 맞는다" "전광판 안 보고 뛰겠다"고 고집했다. 그러다 결국 12·3 비상계엄으로 자멸한 것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지지율이 왜 떨어졌을까? 많이 고심했다"고 고백했다. 또 "저의 부족 때문"이라고 반성했다. 지지율 급락을 솔직히 인정하고, 민심에 고개 숙인 것이다. 윤건영 의원도 "오늘 기자회견을 보니, 적잖이 마음이 놓인다"고 평가했다. 과연 그럴까? 먼저 이 대통령은 "연임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의 공소 취소와 관련해, 연임 개헌은 국민이 품은 큰 의혹 중 하나였다. 이 대통령은 이전에도 헌법상 연임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내놓은 적 있었다. 하지만 간접 화법이 아닌, 스스로 자신의 의지를 밝힌 건 처음이다. 이번 기자회견에서 가장 평가받을 점이다. 다만 효과가 반감했다. 지지율 하락에 떠밀린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연임이란 본래 헌법상 불가능한 평지풍파였을 뿐이다. 다음으로 공소 취소 문제다. 이 대통령은 민주당이 주도한 '조작기소 특검법'에서 공소 취소 조항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공소 취소는 이재명 정부가 사활을 걸고 추진해 온 과제다. 이재명 대통령 개인의 입장만 놓고 보면, 공소 취소는 대통령직을 걸 만큼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도 똑같은 문제였다. 퇴임 후 감옥에 가야 한다면, 대통령이란 지위가 무슨 소용인가? 이 대통령은 검찰의 기소가 조작됐다고 주장한다. 조사도 하기 전에 특검의 명칭에 '조작기소'란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검찰의 조작기소는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다. 오히려 국회 국정조사에서 '연어 술 파티'가 없었다는 게 드러났다. 대법원은 쌍방울이 이재명 당시 경기지사의 방북 비용을 대납한 것도 사실로 판결했다. 국민 여론도 우호적이지 않다. 코리아정보리서치의 지난 8월 6일 발표에 따르면, 국민 51.9%가 이 대통령의 재판 재개에 찬성했다. 반대는 44.1%였다. 이런 여론의 역풍을 우려해, 6·3 지방선거 전 통과시키려던 '조작기소 특검법'도 유보되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진상 규명'에 치중하겠다고 밝혔다. 즉, 공소 취소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불씨만 살려두면, 우회로는 많다. 대통령이 임명한 특검이 '조작' 사실을 밝히면, 사건 담당 검사와 재판관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다. 이론상 법무장관이 검찰총장에게 지휘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사면법을 개정하면 셀프 사면도 가능하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처음엔 단순한 건물 침입 범죄였다. 하지만 대통령이 사건 은폐에 집착하면서, 결국 닉슨의 정치적 운명이 되었다. 집권 후 지난 1년간, 이 대통령이 공소 취소에 기울인 노력도 '집착'에 가깝다. 사법부 독립이 위기에 빠져도 강행을 거듭했다. 운명이란 몰라서 빠지는 게 아니다. 대통령은 만인이 보고 있으니, 사방에서 호루라기를 분다. 이석연 전 국민통합위원장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당사자 귀엔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데드덕이란 운명은 그렇게 온다. 피할 방법도 간단하다. 집착을 내려놓으면 된다. 그런데 그게 그토록 어렵다.
2026-09-21 14:10:15
[사설] 의혹 부풀린 김승원 사퇴, 철저한 진상 규명 뒤따라야
김승원 법무장관 후보자가 지명 20일 만인 지난 19일 자진 사퇴(辭退)했다. 김 후보자는 "민생과 정부의 성공을 위해 작은 부담도 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면서 18일 이재명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보고 결심을 굳혔다고 했다. 청와대 대변인은 "김 후보자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했다. 김 후보자가 대의(大義)를 위해 장관직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 후보자의 전직 보좌진들이 작성한 탄원서가 17일 밤 청와대 등에 접수됐다는 뉴스가 뒤따랐다. 성추행 의혹과 무마 시도, 음주운전을 한 뒤 국회의원 회관으로 도망, 음주 후 폭언 등 각종 의혹(疑惑)들이 전해졌다. 김 후보자는 "탄원서 소문은 사실과 다르거나 과장·오류가 있다"고 했지만, 탄원서가 법무장관직 자진 사퇴의 결정적 이유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서영교 국회 법사위원장 등은 신약 로비, 주가조작, 국민을 대상으로 한 독약 임상시험, 인사청문회 위증 논란 등 각종 의혹에도 불구하고 17일 김 후보자의 청문보고서를 일방적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청와대와 교감 아래 임명 강행을 위한 수순이었다. 이 대통령 역시 18일 기자회견에서 김 후보자 임명 여부에 대해 "최종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국민의 눈높이를 고려해서 신중하게 결정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김 후보자의 추가 의혹에 대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이 대통령이 임명 강행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결국 자진 사퇴 '쇼'로 끝났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사실이라면 국민으로선 배신감(背信感)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오해(誤解)라면 청와대가 "확인하기 어렵다"며 발뺌할 것이 아니라, 전후 사실 관계를 국민 앞에 명확히 밝혀야 한다. 또 쏟아진 김 전 후보자의 의혹에 대해선 경찰 조사, 특검 등을 통해 진상을 철저히 규명한 뒤 마땅한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법무장관직 사퇴로 김 전 후보자에 대한 범죄 혐의를 적당히 덮으려 한다면, 이재명 정부에 대한 국민 신뢰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
2026-09-21 05:00:00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8일 기자회견에서 지지율 하락과 국정 혼선에 대해 "모두 저의 부족함 때문"이라며 "국민에 대한 존중심이 부족했다"고 했다. 책임을 인정하고 자세를 낮췄지만, 정책 방향은 옳았고 문제는 추진 방식과 소통이라고 끝내 강변(强辯)했다. 공소취소 논란의 경우 조작기소 특검법에서 특검이 기존 사건을 넘겨받아 처분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고, "연임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자신의 사건을 포함한 조작기소 의혹에 대해서는 특검을 통한 진상 규명 필요성을 거듭 주장했고, 임기 후 중단된 재판을 받겠느냐는 질문에도 명확하게 답하지 않았다. 논란을 끝내기에는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와 관련, 이 대통령은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어떤 과정으로 결정됐는지 세부적인 절차 내용은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 결정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 업무보고 과제로 추진된 중요 금융정책이 논란을 일으켰는데 대통령조차 누가 어떤 검토와 판단을 거쳐 결정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부동산 정책도 기존 기조(基調)를 바꾸겠다는 신호는 없었다. 대통령은 집값 불안의 원인으로 이전 정부의 공급 감소와 서울시의 토지거래허가구역 해제 등을 거론하며 공급 확대와 기존 정책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사과했고 일부 정책의 부족함도 인정했지만 공소취소 논란에는 자신의 재판이라는 핵심 질문을 남겼고, ETF에선 정책 결정 경위를 설명하지 못했으며, 부동산은 현 정부 시행착오보다 이전 정부와 서울시 책임이 먼저 등장했다. 정점식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국정 기조 전환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 선언"이라고 비판한 까닭이다. 대통령의 반성은 "모두 제 부족함"이라는 두루뭉술한 수사(修辭)에 갇혀 있다. 어떤 정책이 잘못됐고 누가 결정했으며 왜 사전 검증이 작동하지 않았는지가 빠졌다. 반복된 실패에도 방향은 옳았다고 고집하면 반성은 무의미할 뿐이다.
2026-09-21 05:00:00
[사설] '듣고만 있었다'…경주시장은 경북의 지자체장 아닌가
한국가스공사와 한국석유공사 통합을 둘러싼 대구와 울산의 본사 유치전이 한창인 가운데 경북 경주시장의 처신(處身)이 논란이다. 울산시는 지난 17일 주낙영 경주시장이 김상욱 울산시장과 면담하며 에너지자원공사(가칭) 울산 유치에 공감하고 응원의 뜻을 밝혔다고 발표했다. 이후 논란이 일자 경주시는 사실이 확대 해석됐다며 수습에 나섰다. 시 관계자는 이튿날 "듣고만 있었는데 동의로 받아들였다니 당황스럽다"고 했고, 주 시장도 19일 "동의한 바도 없고, 입장 표명을 한 바도 없다"고 부인했다. 어느 쪽 말이 맞는지 가려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주 시장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울산 측 발표가 사실이라면 경북의 기초단체장인 경주시장이 대구 핵심 공공기관을 두고 경쟁 도시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본인 해명이 맞다 해도 마찬가지다. 울산시장이 자기 도시의 유치를 주장하는 자리에서 경북의 지자체장이 침묵하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 활용할지는 불 보듯 뻔하다. 실제로 울산시장은 경주시가 뜻을 모아줘 감사하다고 했다. '듣고만 있었다'는 해명은 면죄부(免罪符)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선을 긋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경북도 행정부지사까지 지낸 인물이라 더욱 실망스럽다. 이후 대응도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 않은 말이 발표되고 보도까지 됐다면 즉각 항의하고 정정을 요구하는 게 일반적이다. 반박도 하루이틀 뒤에야 나왔고, 정정 요구도 확인되지 않는다. 그 와중에 울산과 맺은 해오름동맹 협력을 위해 논란이 더 확대되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논란 전날인 16일, 대구시의회는 성명을 내고 통합 공사 본사는 대구에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대구시도 통합의 중심은 가스공사여야 하고 본사도 대구에 두는 것이 타당하다는 공식 입장을 냈다. 시도는 국회에 계류 중인 행정통합 특별법의 9월 통과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대구경북의 중요한 현안임을 알면서도 침묵했다면 주 시장이 경북의 지자체장이 맞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2026-09-21 05:00:00
[관풍루] 이 대통령이 김성수 대법관 임명을 재가하면서 압박 가하는 가운데 노태악 전 대법관 후임 인선을 둘러싼 청와대와 대법원의 '재제청' 갈등 23일째
○한국은행, 지난해 공공 부문 수지가 83조1천억원 적자를 기록하며 2007년 통계 작성 이후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고. 중앙정부 적자가 90조1천억원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한 것이 결정적이라는데 민생회복 소비쿠폰의 여파. ○…이 대통령이 김성수 대법관 임명을 재가하면서 압박 가하는 가운데 노태악 전 대법관 후임 인선을 둘러싼 청와대와 대법원의 '재제청' 갈등 23일째. '사법부 독립'은 유명무실 구호일 뿐. ○…N% 성과급 쟁취 후 자중지란에 빠진 삼성전자 노조. 직무 대행 논란 등 집행부 내부 갈등에 위원장 개인 회계 부정까지. 그러길래 '공존'과 '상생'이라는 노조 뿌리부터 챙겼어야지.
2026-09-21 05:00:00
2026-09-20 18:41:08
더위가 물러나기 시작하자 지역축제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아니, 우후죽순 나타난다. 봄이면 벚꽃축제, 여름이면 워터밤, 가을이면 국화축제, 겨울이면 얼음축제처럼 계절별 축제뿐만 아니라 지역마다 축제를 홍보하고, 기관들이 저마다 축제를 연다. 주말에 어딘가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간단히 검색창에 지역이나 날짜만 검색해보면 갈 수 있는 축제가 줄줄이 나타난다. 그중에서 사진이나 전년도의 후기를 보고 고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축제들은 유명인이나 인기 가수 섭외에 목을 맨다. 이렇게 많아지는 축제 속에서도 나에게는 막상 가보고 싶은 축제는 많지 않다. 영화제나 공연 관련 축제들도 있지만 지역의 관광지나 특산물을 메인으로 한 축제, 지역명을 재밌게 풀어낸 축제도 있다. 다만 그 내용은 어떨까. 무대가 있고 공연이 있다. 초대 가수가 노래하고, 한쪽에는 먹거리 부스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체험 프로그램이나 플리마켓이 자리한다. 뭔가 명칭만 다를 뿐 비슷해진 느낌이 든다. 물론 이런 구성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축제 사무국에서 일해왔고, 궁극적인 목적은 축제에 오는 사람들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만족을 느끼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축제 기획자로선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좋은 반응을 얻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관람객 수나 만족도 같은 숫자로 축제의 성과를 설명해야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사람을 모으는 데 집중하게 되고, 축제의 이유가 흐릿해지는 순간도 생긴다. 그럼 지역축제에서 진짜 '지역'은 무엇일까. 언젠가 일본에서 작게 열린 마츠리(축제)에 간 적이 있다. 학교 운동장에서 지역 상점가 사람들이 음식을 팔고, 아이들은 게임을 하는 작은 규모였다. 특별한 네이밍도 없고, 어쩌면 매년 반복해 온 축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먹은 소시지의 맛, 밤이 되자 어두워진 운동장, 더운 여름의 열기 같은 기억들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있다. 결국 축제에서 중요한 것은 거창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곳에 가야 할 이유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지역축제에서 '지역'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축제가 아니라 여기가 아니면 이런 걸 볼 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 10년이 지난 나에게 소시지 하나가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2026-09-20 09:04:27
[사설] 선관위 특검, 한 점 부정선거 의혹도 남지 않도록 밝혀야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 등 각종 선관위 의혹을 수사하는 이태한 특별검사팀(이하 특검)이 중앙선관위와 지방 선거관리위원회 등 총 9곳을 압수수색(押收搜索)했다. 특검은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와 투표 통계 조작 의혹, 선관위 직원 외유성 출장, 부정 채용 및 승진 특혜, 수의계약 특혜 의혹 등 12개 의혹을 수사한다. 6·3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들은 투표용지가 모자라 발을 구르고 참정권을 행사하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여러 곳에서 나타난 쌍둥이 득표는 납득(納得)하기 어렵고, 투표 통계 조작 정황은 투·개표 조작이 얼마든지 가능함을 보여준 중대한 사건이다. 이번 특검은 단순히 선관위의 부실과 비리를 파헤치는 수준을 넘어, 무너진 선거 관리 시스템을 바로잡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선관위는 각종 부정선거 의혹과 직원 채용 편법 등으로 비판을 받아왔지만, 성역처럼 군림(君臨)해 왔다. 내부 견제 장치는 작동하지 않았고, 외부 감사나 수사 시도는 정치적 중립성과 헌법상 선관위 독립성을 핑계로 피해 왔다. 특검팀은 정치적 외압이나 진영 논리에 단 한 치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 서버 데이터와 내부 자료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투표용지 부족과 통계 조작 배경에 어떤 배후(背後)나 묵인, 공모가 있었는지 명명백백하게 밝혀내야 한다. 현재 한국에는 부정선거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특검의 수사 과정에 미흡한 점이 있거나 의혹이 남는다면 특검이 어떤 수사 결과를 내놓더라도 부정선거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수긍(首肯)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 부정선거가 아니더라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부정선거 의혹 자체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특검은 현재까지 드러난 선거 관리 부실과 투표 통계 조작은 물론이고, '부정선거 의혹'까지 일소(一掃)해야 할 사명이 있다. 단순히 "수사 결과, 부정선거는 없었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부정선거와 관련해 현재 제기되어 있는 모든 '질문'과 '의혹'에 대해 실체적 입증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2026-09-18 05:00:00
[사설] 미 금리 4% 시대, 고유가·강달러·고금리 삼중 압박 커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기준금리를 연 3.75~4.00%로 0.25%p(포인트) 올렸다. 2023년 7월 이후 3년 2개월 만의 인상이다. 연말까지 한 차례 이상 추가 금리 인상도 예상되는 등 미국이 긴축(緊縮)으로 방향을 틀면서 한국 경제에 고유가·강달러·고금리의 삼중 압박이 본격화하고 있다. 연준을 움직인 것은 물가(物價)다. 트럼프 대통령이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금리 인하를 요구했지만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만장일치로 인상을 결정한 이유는 물가 불안이다. 한국 상황은 더 복잡하다. 물가뿐 아니라 한·미 금리차가 1%p로 벌어졌고 원·달러 환율은 1천370원대로 올라섰다. 강달러와 고유가는 원화 약세와 수입물가 상승을 거쳐 국내 물가를 자극한다. 한국은행의 선택지는 넓지 않다. 2분기 말 가계신용은 2천조원을 훌쩍 넘겼는데, 수도권 일부 집값과 가계대출은 다시 불안하다. 물가, 환율, 부동산 불안은 금리를 더 올리라는 신호이지만 취약차주, 자영업자, 내수 기업 부담이 걱정이다. 금리를 올려도, 묶어둬도 위태로운 구조다. 재정과 통화정책의 충돌 가능성은 우려스럽다. 정부는 내년 총지출을 올해 본예산보다 12.8% 늘어난 820조9천억원으로 편성한 반면 한은은 물가와 가계부채, 부동산 불안을 이유로 7·8월 두 달 연속 금리를 올렸다. 경기 진작(振作)을 위해 돈을 풀겠다지만 물가 불안은 누가 책임질 수 있나. 물론 재정 확대와 긴축의 이분법으로 바라볼 문제는 아니다. 어디에, 어떻게 돈을 쓸지에 대한 정책 정밀도가 중요하다. 연준의 금리 인상 역시 한국도 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신호가 아니다. 고유가와 강달러, 2천조원이 넘는 가계부채가 동시에 충돌하는 상황에서 통화정책만으로 경제를 지킬 수 없다는 경고다. 한은이 물가 잡기에 안간힘을 써도 정부가 경기·민생 지원을 이유로 확장 재정을 밀어붙이면 국민은 더 높은 물가와 더 높은 이자를 부담해야 한다. 고유가·강달러·고금리의 삼중 압박 앞에서 당국이 서로의 정책 효과를 상쇄(相殺)하는 일만큼은 피해야 한다.
2026-09-18 05:00:00
[사설] SOC 예타 기준 상향, 이번 국회에선 매듭지어라
지방의 숙원(宿願)인 사회간접자본(SOC) 사업 예비타당성조사(예타) 기준 상향이 이번 정기국회에선 결실을 맺어야 한다. 여야가 예타 대상 총사업비 기준을 현행 500억원에서 1천억원으로 높이기로 했다. 1999년 이후 그대로인 기준을 현실에 맞게 고쳐야 한다는 데 공감한 것이다. 그동안 국가 경제 규모는 커졌다. 물가와 건설비도 크게 올랐다. 그런데 예타 잣대만 과거에 머물러 있다. 특히 경제성 중심의 평가 방식은 인구와 수요가 상대적으로 적은 비수도권에 불리하다. 지방은 인구가 적어 경제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경제성이 낮다는 이유로 SOC 투자가 막히면 인구 감소의 악순환이 이어진다. 정치권은 지방 소멸(消滅)을 막겠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지방 인프라 투자의 높은 문턱을 방치하고 있다. 앞뒤가 맞지 않다. 여야는 3년 전에도 예타 기준 상향에 뜻을 모았다. 하지만 '지역구 선심성(善心性) SOC 사업 남발 우려'란 비판에 갇혀 법안 처리를 포기했다. 물론 기준 상향이 SOC 사업의 무분별한 추진으로 이어지면 안 된다. 그러나 낡은 기준을 붙들고 있는다고 해서 포퓰리즘을 막을 순 없다. '운용의 묘'를 살리면 된다. 예타 대상 기준은 현실화하되, 사업 선정의 투명성·재원 조달 능력·사후평가와 책임을 엄격히 하면 부작용을 예방할 수 있다. 지방에 도로와 항만을 건설하는 것을 '선심성'으로 매도하는 것은 수도권주의자들의 왜곡(歪曲)된 시각이다. 지방은 수도권과 출발선이 다르다. 수도권은 기업과 인구가 몰리면서, 교통망과 산업 기반시설이 계속 확충된다. 반면 지방은 도로 하나 만들려면 몇 년씩 예타 문턱을 넘나들면서 속을 태우거나 좌절한다. 이 과정에서 지방의 투자·정주(定住) 여건은 악화되고, 인구 유출은 가속화된다. 이를 그대로 둔 채 국가균형발전을 말하는 것은 공허하다. 여야는 예타 기준 상향이 민생(民生)과 직결된다고 판단했다. 이번 정기국회에선 관련 법안을 신속히 심사해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지방은 정치권의 생각보다 더 절박하다.
2026-09-18 05:00:00
[관풍루] 어릴 땐 입시, 나이 들면 병원비…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2024년 국민이전계정'에 나타난 '평생 적자'에 갇힌 한국인의 삶
○…어릴 땐 입시, 나이 들면 병원비…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2024년 국민이전계정'에 나타난 '평생 적자'에 갇힌 한국인의 삶. 정부와 사회는 '입시 적자'와 '질병 적자'라는 이중고를 해소할 근본적인 구조 개혁에 나서야. ○…이식 대기 중 숨지는 환자 매일 8.6명. 고령화와 만성 질환의 증가로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환자가 늘어나기 때문이라는데. 누군가의 삶의 끝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될 수도. ○…국회 법제사법위,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경과보고서를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채택하자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 항의하며 퇴장.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지지율 나락 가겠네.
2026-09-18 05:00:00
[캐나다에 비춰 본 한국] 사회는 나에게… '피터팬 아빠'가 남긴 질문
'피터팬 아빠' 전경철 작가가 지난 5일 세상을 떠났다. 말기 간암 판정 뒤 그가 가장 다급히 한 일은 중증 자폐가 있는 아들 제원 씨가 자신 없이도 살아갈 곳을 찾는 일이었다. 전국 시설과 복지기관 약 1천 곳을 수소문했지만 받아줄 곳을 찾기 어려웠다. 어렵게 들어간 곳에서도 4시간 만에 돌아와야 했다. 시민들의 도움으로 공동체 마을에서 지낼 길이 열렸지만, 그 과정은 한 아버지가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길고 절박했다. 왜 아들의 다음 삶을 마련하는 일까지 온전히 아버지의 몫이어야 했을까. 우리 사회에서는 자녀는 부모가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여긴다. 장애가 있는 자녀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1천 곳을 찾아다닌 사연 앞에서도 안타까워할 뿐, 왜 그 일을 국가와 사회가 맡지 않았는지는 좀처럼 묻지 않는다. 각자도생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문제의 주어를 가족에서 사회로 옮기는 일 자체가 낯설다. 그러나 민주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물어야 한다. 부모가 더는 돌볼 수 없을 때, 그 사람의 삶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부모가 홀로 찾지 않게 하는 창구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BC·비씨)주에는 성인 발달장애인 지원을 맡는 '씨엘비씨(CLBC)'가 있다. 2005년 비씨주정부가 설립했다. 지원 대상자로 확인되면 담당자가 연락 창구가 되어 당사자와 가족을 만난다. 어떤 삶을 원하는지, 일상생활에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상황이 얼마나 긴급한지를 살피고 ▷주거 ▷지역사회 활동 ▷취업 ▷행동 지원 등을 함께 계획한다. CLBC가 모든 서비스를 직접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와 우선순위에 따라 예산을 배정하고, 서비스를 맡을 기관이나 인력을 계약해 연결한다. 가족이 신청하고 정보를 제공해야 하지만, 그 다음 과정까지 기관 명단을 들고 혼자 문을 두드리게 하지는 않는다. 지원의 연결과 조정을 맡는 공공 담당자와 창구가 존재한다. 물론 캐나다도 완성된 답은 아니다. 지원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지역과 필요에 따라 적합한 집과 인력이 부족하다. 부모가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우리가 분발할 지점은 보여준다. 부모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삶을 가족의 몫으로 남겨두지 않고, 이를 연결하는 일을 사회의 책임으로 본다는 기준이다. ◆가족을 넘어, 끝까지 닿는 지원 우리나라도 2024년부터 최중증 발달장애인 통합돌봄을 시작했고, 지난 10일 정부는 돌봄 대상과 가족 양육지원 시간, 주말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반갑고 응원할 일이다. 이제는 그 정책이 한 사람의 실제 삶에 닿게 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어느 기관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할 때 공공이 끝까지 연결해야 한다. 며칠 전 만난 한 가족은 "아이가 다 클 때까지 가족만 데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지원 필요가 크고 공격적 행동까지 나타나면 부모가 늙은 뒤 갑자기 낯선 삶으로 옮기기 더욱 어렵다는 뜻이었다. 가족의 힘이 다하기 전에 돌봄을 사회와 나눌 준비를 시작하라는 절박한 경고였다. 여러 나라가 지향하는 방향도 대규모 시설을 늘리는 데만 있지 않다. 당사자가 살아갈 작은 집이나 보통의 주거공간에, 필요에 따라 숙련된 인력과 행동·의료 지원이 따라가게 하는 것이다. 비씨주의 '지원 인력 배치형 주거'도 그 한 사례다. 누구에게나 맞는 것은 아니나 사람의 삶에 지원을 맞춘다는 방향은 중요하다. 우리 현실과 지향점 사이의 간극은 크다. 그래서 먼저 기준을 세워야 한다. 부모가 살아 있을 때부터 지역사회 생활을 경험하며 그 사람에게 맞는 집과 지원을 함께 준비하는 것, 기존 서비스로 감당할 수 없다면 공공이 새 방법을 마련하는 데까지 책임을 이어가는 것이다. 피터팬재단과 네버랜드 마을에 더 많은 이들이 함께하기를 바라며 나도 보탤 몫을 찾고 싶다. '사회는 나에게' 무엇이어야 하는가. 피터팬 아빠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질문은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2026-09-18 00:30:00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덕업일치가 뉴노멀이 된 세상에서
며칠 전, 세어 보았다. 올해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9월 현재, 정확히 여든다섯 권을 읽었더라. 당연히 지금도 서너 권은 읽는 중이고. 그러니까 일주일에 신문 칼럼 한 편을 쓰려면 기본 한 권은 읽어야 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책도 읽다 보니 이런 숫자가 남겨진 것. 주로 처음 읽는 책들이지만, 어떤 건 오래전에 읽었으나 글을 쓰기 위해서 다시 읽기도 했다. 고백하자면, 서점에서도 분량 적은 책에 눈길이 머무는 나쁜 습관도 생겼다. 영화평론가가 되기 전까지의 나는 영화를 좋아했고 사랑했으며 영화를 보면 세상 행복한 사람이었다. (어느 후배는 언젠가 씨네큐브 계단을 헐레벌떡 뛰어 내려오던 내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관람한 영화는 반드시 기록으로 남기면서 언젠가 공식적으로 선보일 기회가 오길 빌고 또 빌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 영화들의 대다수는 이 시기, 그러니까 영화를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했던 시절에 본 것들이다. 그러나 영화평론가라는 타이틀이 붙으면서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눈은 언제나 찌푸린 상태였다. 팔짱 낀 채 거만한 태도로 영화를 재단하면서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낀 풋내기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대상 자체를 즐기던 애호가에서 따지기나 하는 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덕업일치'라는 말이 있다. 덕후(광적인 하위문화 폐인을 뜻하는 일본어 '오타쿠'에서 나온 말)의 능력이 일로 연결된다는 뜻이다. 무수한 덕후 중에서도 압권은 '치킨 덕후'다. 대한민국의 웬만한 치킨 마니아는 명함도 못 내미는 사람, 그는 다 먹고 난 치킨 뼈로 닭 한 마리 모습을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공룡 모형처럼 똑같이 뼈를 맞춰낸다고. 이런 능력자를 치킨 업체가 가만 놔둘 리 없다. 내 주위에도 이런 덕후가 있다. 물리학자인데 취미로 시작한 가야금 제작이 상당한 경지에 이른 이가 있고, 클래식 마니아이면서 그림 애호가인 정신과 전문의는 대학원에서 작곡을 전공하더니 학위를 받았다. 혹자는 말한다. 덕력이 스펙인 세상이라고. 모 영화의 카피를 빌리자면 어쩌면 '우리는 모두 한때 덕후였다'. 내가 영화평론가가 된 것도 영화 덕후여서 가능한 일이었고, 북 칼럼 쓰는 것 역시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터. 그러고 보니 나도 덕업일치의 유사 모델이다. 내 취향을 고수하면서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는 일. 독자를 가르치거나 섣불리 권하기보다는 내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데 집중하면서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한 권의 책이라도 더 읽게 만드는 것, 내가 칼럼을 쓰는 목적이자 이유였다. 다행스러운 건, 칼럼 시작할 때 다짐한 내용을 철저하게 지켰다는 점이다. 첫째, 자기개발서와 서점 베스트셀러는 배제할 것. 둘째, 가능하면 출간된 지 1년 미만의 책은 신중하게 선택할 것. 끝으로, 반드시 완독한 책만 다룰 것. 천천히 오랫동안 곱씹으면서 읽고 싶은 책이 널렸는데도, 책이 눈앞에 빤히 보이는데도, 시작은커녕 애써 외면하며 게으름 피웠다는 점은 아쉽다. 책은 사방에 가득했으나 내겐 일로 보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젠 시간 여유가 생길 듯하다. 가을이 가기 전에 미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이번 겨울에는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다시 읽을 작정이다. 오늘이 마지막 칼럼이다. 과문한 사람이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그동안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를 읽어준 독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2026-09-18 00: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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