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21 18:36:35
최근 대구시립 3개 박물관이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하는 2025년 공립박물관 평가인증에서 모두 인증기관이 되는 성과를 거뒀다. 이번이 4회째 평가인데, 그 전까지는 매번 1개 관만이 인증을 받았기에 지역 문화계에서는 좀 놀라워하는 분위기다. 대구문화예술진흥원이 발족하면서 박물관운영본부가 신설돼 지난 3년간 3개 박물관을 통합 운영하며 어려운 여건에서도 구성원들이 열심히 노력한 결과, 이런 좋은 성적표를 받았다. 대구에 시립박물관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2023년 10월 대구시가 제정한 '대구광역시립박물관 관리 및 운영 조례'에는 대구근대역사관·대구방짜유기박물관·대구향토역사관을 시립박물관으로 규정하고 있다. 큰 규모의 중대형급 종합박물관을 시립박물관으로 생각하시는 분이 많겠지만, 규모가 작은 전문박물관도 대구시가 설립해 운영하면 시립박물관이다. 현재 대구에는 전문박물관 규모의 시립박물관은 있고, 종합박물관으로 본관 같은 시립박물관이 아직 없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대구의 박물관 역사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대구는 우리나라에서 인천 다음으로 두 번째로 공립박물관을 설립한 도시다. 일제의 지배 하에서도 전통문화에 대한 안목이 높았던 대구 시민들은 해방 직후 박물관 설립에 대한 열망이 높았다. 그래서 1947년 5월 15일 달성공원에 있던 대구신사(大邱神社) 부속 건물인 국체명징관을 박물관으로 꾸며 대구부립박물관을 개관했다. 이때 대구 시민들은 후원회를 만들어 박물관을 적극 지원했다. 이후 대구부가 시로 승격되면서 이름을 대구시립박물관으로 바꿨다. 불행하게 박물관 운영이 중단된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1950년 8월, 전쟁 중인 비상상황에서 육군이 박물관 건물을 사용하게 됨에 따라 박물관은 문을 닫았다. 소장유물은 여러 개의 상자에 담아 대구시립도서관 한 켠으로 옮겼다. 이후 유물 도난과 관리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1959년 대구시는 소장유물 1천300여 점을 경북대학교에 위탁했다. 경북대는 도서관 건물 일부를 전시실로 개편하고, 그해 5월 경북대박물관을 개관했다. 필자는 달성공원 대구시립박물관이 그대로 유지됐다면 대구 문화는 어떻게 달라졌을 지 상상해 보곤 한다. 아마 78년 역사를 지닌 대구시립박물관에는 본관과 분관에서 많은 실적이 다채롭게 쌓였을 것이다. 대구 관련 각종 자료 수집과 보존, 대구를 주제로 하는 다양한 기획전시, 지역사 자료 발굴과 조사·연구, 수백 권의 전시도록과 학술자료집, 각종 교육·문화 행사들, 대구에 관한 잘못된 상식들의 수정, 도시 홍보, 관광 활성화 등 70여 년간 이런 역할을 해왔다면 대구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대구시립박물관이 있던 자리는 현재 테니스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구시는 1997년 10월 1일 달성공원 종합문화관 건물 일부를 전시실로 꾸며 대구향토역사관을 개관했다. 필자는 달성공원을 갈 때마다 테니스장 쪽으로 가서 대구시립박물관의 지난 역사를 떠올려보곤 한다. 매년 5월이면 대구향토역사관 직원들과 시립박물관을 기억하는 자리도 만들고 있다. 그동안 대구시립 종합박물관을 새로 건립하자는 논의는 여러 차례 있어 왔다. 시장 공약에 반영되기도 했다. 기본계획용역도 이뤄졌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한반도의 3대 도시라 자랑하는 대구는 중기 구석기시대부터 고대 달구벌국의 역사를 비롯해 경상도 71개 고을을 통괄한 경상감영 역사, 근·현대 역사까지 풍부한 자료와 역사들이 있다. 대구가 품고 있는 역사문화 깊이와 양을 생각하면 이 전문박물관 3곳에서 다 담아내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대구의 역사와 미래를 담는 큰 그릇'인 중대형급 시립종합박물관이 꼭 필요한 이유이다. 지방자치시대에 많은 지자체는 핵심 문화시설인 공립박물관을 중심으로 그 지역의 역사문화를 발굴해 시민과 공유하며, 공동체의식 함양과 시민의식 제고, 도시 발전에 활용하고 있다. 중기 구석기 유적 발굴과 군위군 편입 등으로 시간적·공간적으로 달라진 대구, 더 늦기 전에 새로운 대구 역사를 정립해 시민과 공유해야 하며, 이를 도시 발전에 적극 활용해야 한다. 대구에서 시립종합박물관이 부활하는 날은 언제일까?
2025-12-20 09:30:05
[여행이 들려주는 마케팅 이야기-하태길] 장계향(張桂香)의 부엌에서 안동의 골목까지
몇 달 전, '수운잡방(需雲雜方)과 음식디미방(閨壺是議方)'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후보에 올랐다는 기사를 읽었다. 한반도의 전통 조리 지식이 담긴 이 기록물들은 2026년 6월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특히 음식디미방은 현존하는 최고의 한글 조리서로 평가받으며 여성도 지식의 전승에 기여했음을 보여주는 기록물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오래 닫혀 있던 조선의 부엌이 유네스코를 향하고 있다. 나는 1670년경 집필되었던 그 목소리를 맛보기 위해 영양 두들마을 장계향 문화체험교육원으로 달려갔다. "어서 오시오, 400년 전의 맛이 기다립니다" 감향주(甘香酒)와 도토리죽이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떠먹는 술'이라 불리는 감향주는 깊고 고운 질감이 혀끝을 살짝 어루만졌다. 이어서 도토리죽이 입안을 매끈하게 코팅했다. 음식디미방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다음 장에 이어질 조선시대 맛이 더욱 궁금해졌다. ◆꿩고기 잡채, 사라진 재료의 귀환 '꿩고기'는 400년 전에는 일상적인 재료였다. 조선시대는 농업이 생업의 근간이었기에 소고기는 쉽게 먹을 수 없는 귀한 고기였다. 소는 논과 밭을 갈아 생계를 지탱하는 노동력이었기 때문에 산야를 오가는 꿩이 단백질 식재료로 자주 사용되었다. 잡내가 거의 없는 담백한 속살을 삶아 가늘게 찢은 꿩고기를 간장, 생강, 참기름 등으로 양념하고 각종 버섯, 도라지, 미나리, 오이, 무 등의 산나물과 채소를 더해 겹겹이 고운 향을 포갰다. 지나치게 기름지지 않은 은근한 꿩 향이 채소의 산뜻함과 만나 순식간에 산자락 한복판으로 나를 데려갔다. 장계향은 이 꿩고기를 전골과 탕에도 사용한 기록을 남겼다. 절제된 풍성함과 자연을 담아낸 지혜로운 조선의 맛이었다. ◆빈자법, 손이 만드는 노동의 맛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노란 녹두전이었다. 녹두 껍질을 벗기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음식은 무거운 맷돌을 수십 번 수백 번 돌려야 만들어지는 고운 녹두 반죽이 주재료다. 맷돌 손잡이를 잡은 손은 금세 저리고 허리에는 묵직한 통증이 내려앉는 과정을 거치는 음식이다. 기름이 살짝 스칠 만큼만 부쳐내는 마지막 순간까지 노란빛을 내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금빛에 가까운 노란색은 고된 노동의 흔적이며 여인들의 힘과 정성으로 완성된 색감이었다. 빈자법을 한입 베어 물자 녹두의 고소함 뒤로 재료 그대로의 단맛이 살짝 따라 나왔다. 재료 본연의 단정한 맛을 최우선으로 했던 장계향의 품격이 맛으로 치환되었다. ◆숭어 만두, 네 고장의 맛이 만나다 구부정한 만두 모양으로 누워있는 숭어 만두는 얇게 저민 숭어로 속 재료를 단단히 말았다. 한입 베어 물자 수묵화의 붓 결 같은 무늬를 따라 영덕의 짠바람이 입안으로 불어왔다. 그다음 한입에는 영양의 청량한 산소가 녹진하게 배어들었다.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의 부인인 장계향의 고향은 깊은 장맛으로 유명한 안동이었다. 게다가 외가는 예천 맛질 마을이었으니 어린 시절부터 맛을 체득하며 자랐을 것이다. 결혼 후에 산나물과 약초의 고장 영양과 해산물이 풍부한 영덕을 오가며 익힌 맛을 더해 음식디미방에 견고히 담아냈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영덕 물길에서 잡히는 숭어의 담백함, 내륙에서 정성껏 길러낸 채소와 곡물의 은은한 향, 그리고 장계향의 정갈한 조리법이 고루 어우러져 완성되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식재료의 결이 숭어살 속에 스며들어 숭어 만두 하나에 네 고장의 풍경이 겹겹이 펼쳐지는 듯했다. 음식디미방 속 여러 음식 가운데서 단연 돋보이는 숭어 만두는 여행하는 맛이 되었다. ◆수증계(水蒸鷄), 산골 아침의 맛 자작하게 밴 국물은 윤기를 머금고 닭고기 사이로 은근히 흘렀다. 한 숟가락을 들면 순한 풍미가 오랜 세월을 버텨온 흙 그릇 안에서 따스한 김이 되었다. 고요한 산골에 다가오는 아침 풍경처럼. 음식디미방에는 양념으로 고추를 사용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고추는 1614년 지봉유설(芝峰類說)에 등장하지만 장계향이 살던 경북 영양까지는 그 매운 열기가 닿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천초(川椒), 후추, 생강 등으로 매운맛을 대신하여 재료 고유의 맛이 더욱 또렷하게 드러났다. 옛사람들은 음식을 그저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하나의 문학이자 철학으로 여겼다. 과한 양념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이 준 재료 그 자체로 한 그릇의 균형을 완성하는 방식이다. 산골 아침의 맑은 공기처럼 수증계는 시대를 건너온 지혜로운 맛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석류탕, 한 그릇의 미감 석류탕이라는 이름은 겹겹이 접힌 둥근 만두가 실제 석류알을 닮았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투명한 국물 위로 떠오른 만두는 붉은빛과 크림빛이 섞여 작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만두 속을 살짝 찢으니 속 재료가 부드럽게 흘러나와 국물과 어우러져 슴슴한 풍미를 자아냈다. 여성만이 가진 미감, 손맛, 섬세함이 아름다운 한복 자태처럼 한 그릇 안에서 은유처럼 피어났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던 석류탕은 그 이름만큼 아름다운 음식이었다. ◆삶을 조리한 여인, 장계향 음식디미방을 집필한 장계향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무남독녀이자, 소설가 이문열(李文烈) 선생의 선대 할머니로 알려진 인물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초서, 그림, 자수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녀가 어려서부터 남다른 총명함과 감각을 지녔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여성에게 학문적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고 사회적 제약이 많았던 시대에, 장계향은 자신의 재능을 허영처럼 드러내기보다 가문을 품고 일으켜 세우는 데 힘을 쏟았다. 평범한 딸, 며느리, 그리고 한 집안의 주부라는 자리에서 시가와 본가 모두를 화평하게 이끌었고, 열 명의 자녀를 훌륭하게 길러냈다. 말년에는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한글로 정리해 후대에 남겼는데, 이는 음식 기록을 넘어 그녀가 몸소 실천해 온 삶의 철학을 담아낸 유산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장계향은 조선시대를 지혜롭게 살아낸 여인, 여중군자(女中君子)로 기억된다. ◆안동으로, 생활의 맛을 찾아서 영양 두들마을에서 조선시대 양반가 음식을 경험했다면, 조금 더 서민적인 맛을 만나기 위해 안동으로 향했다. 안동이 빚어낸 '생활의 맛'을 여행길에서 찾아보기 위해 음식디미방의 마지막 장을 닫았다. ▷헛제사밥, 유교문화의 맛 안동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음식 중 하나가 바로 헛제사밥이다. 실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연습 삼아 상을 차렸던 옛 풍습에서 비롯된 음식으로 한 그릇에 모아 비벼 먹으며 생겨났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고도 불리는 안동 유교문화의 한 축인 제사 음식은 오랜 전통을 지키는 태도를 보여주는 생활의 지혜가 담겨 있다. 입안에서 조용히 살아나는 익숙한 기억을 담은 번잡함이 없는 맛이었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안동식혜. 우리가 흔히 아는 음료형 식혜와 달리 생강의 알싸함과 고추에서 오는 붉은 빛이 특징이다. 헛제사밥을 먹고 난 뒤 톡 쏘는 생강 향이 밀려오는 안동식혜는 입안을 산뜻하게 정리해 주었다. ▷맘모스제과 & 지관서가(止觀書架) - 안동의 간식 타임 1974년에 문을 연 맘모스제과는 2011년 미슐랭가이드(Michelin Guide), 블루리본 서베이(Blue Ribbon Survey) 등 다양한 매체에 소개될 만큼 유명한 곳이다. 빵 굽는 냄새는 언제나 기분이 좋다. 가게로 들어서서 빵을 고르던 찰나, 갓 구운 크림치즈 빵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매장 안이 은근한 설렘으로 가득 찼다. 호주에서 왔다는 자신타 록(Jacinta Louise) 씨도 여러 개를 담으며 말했다. "한국인 친구가 소개해줬어요. 안동에 올 때마다 꼭 들르는 곳이죠." 알고 보니 크림치즈 빵은 이곳의 대표 메뉴였다. 대전 성심당 튀김소보로와 경쟁해도 손색없을 만큼 부드러운 말랑함이 보였다. 따끈한 빵을 들고 웅부공원(雄府公園)으로 갔다. 벤치에 앉아 크림치즈의 달콤함을 베어 물자 가을의 평화가 한입 가득 퍼졌다. 커피를 마실 곳을 찾다가 바로 옆의 지관서가에 들어갔다. 부드러운 햇살을 창살로 받아내는 실내, 그리고 안동포로 마감된 지관서가의 은은한 책 향기가 곧장 마음을 사로잡았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선비처럼 보이는 마법 같은 곳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가을의 쌀쌀함을 녹였다. ▷안동갈비 - 좋은 재료가 만드는 실패 없는 시간 안동에는 '갈비 골목'이 있을 만큼 안동갈비가 널리 알려져 있다. 갈비를 재우는 과정은 복잡하지 않다. 마늘을 중심으로 한 양념으로 고기를 재워 화려한 맛보다 재료 본연의 힘을 믿는 철학을 이어가는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숯불 위에 올려진 고기는 천천히 온기를 머금으며 한우 고유의 풍미를 그대로 드러낸다. 예전부터 안동은 소 사육이 활발했던 지역이라 질 좋은 한우를 구하기 쉬웠다. 숯불의 열기와 연기가 고기 결을 부드럽게 열어 주고, 은근한 향이 깊이를 더한다. 그렇게 완성된 한 점에는 담백함과 진한 향미가 있다. 안동갈비는 화려한 기술보다 '좋은 재료, 정직한 불, 시간'이 만드는 맛이었다. ▷버버리찰떡 - 버버리(Burberry)를 이긴 버버리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대표 버버리찰떡이 있다. 80년 전통을 지닌 찰떡으로 수십 년간 지역 주민들의 입맛을 책임져왔다. 찹쌀을 오래 불리고, 찌고, 떡메로 두들기는 과정 덕분에 기계로 만든 떡과는 비교할 수 없는 씹히는 쫄깃함이 있다. 2013년, '버버리'라는 이름을 두고 영국의 명품 브랜드 버버리와 상표권 분쟁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특허심판원은 지역 사투리 '벙어리'에서 유래한 이 상표가 혼동될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전통 음식과 지역 언어가 법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은 뜻깊은 순간이었다. "영국 브랜드에서 문제를 삼았었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름을 지키고 싶었어요. 안동의 이야기니까요. 쫄깃하고 달지 않아 씹을수록 자연스러운 단맛이 나는 떡. 그 맛과 이름과 역사는 우리가 지켜야 했던 이유였지요." 담담하게 말하던 주인의 눈빛에는 오랜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떡집을 나서며 생각했다. 세계적인 브랜드와 맞서 싸운 작은 찰떡 한 조각. 그 안에 담긴 것은 안동 사투리에 깃든 정성 어린 마음과 기억들이었다. 그래서 버버리찰떡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랐다. ◆400년 전 레시피, K-푸드를 움직이다 장계향의 조리 철학과 안동의 생활 음식 문화는 미식을 넘어 '시간을 체험하게 하는 힘'을 지닌다. 오늘의 여행자는 유명 맛집을 찾는 소비자가 아니라, 조리서가 열어 둔 세계 속에서 직접 참여하며 의미를 만들어가는 존재다. 장계향 문화체험교육원은 전통 음식과 전통주를 스스로 빚어보는 과정을 통해 그 시대의 손맛과 호흡을 몸으로 느끼게 한다. 이는 과거를 새롭게 구성하는 여행이자 경험 마케팅이 지향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영양과 안동이 보여주듯, 지역의 음식은 여행을 독자적 콘텐츠로 확장시키고 그곳을 오래 기억하게 한다. 특히 음식디미방은 400년 전 장계향의 부엌에서 피어난 향과 온기를 오늘의 감각으로 되살려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러한 경험은 지역을 다시 찾게 만드는 힘이 되며, K-푸드 시대에 한국적 진정성을 설득력 있게 전하는 스토리텔링이 되고 있다.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경영학 박사)
2025-12-19 16:34:03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어느 북콘서트 관람기: 좋은 사람이 먼저다
늦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던 11월 마지막 주 토요일. 앞산 자락에 자리한 〈남대영 기념관〉에서 의미 있는 북 콘서트가 열렸다. 대구에서 나고 자라 대구에 사는 304050대로 이뤄진 세 명의 여자들 이야기. 지역 출판사 〈피서산장〉에서 펴낸 『블루베리 스무디』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그들은 3년 동안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과 가족과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꾸준히 기록했고, 나는 저자들과 각별한 친분이 있어 책의 기획과 출판과 콘서트 준비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저자들은 50석 정도의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지 고심했다. 무엇보다 자리를 다 채울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서로가 올 사람이 별로 없다고 엄살 피웠는데, 평소 그들의 대인관계를 고려할 때 기우가 아닌 듯해보였다. 저자가 셋이나 되는데 공간을 못 채우면 어쩐다? 하지만 당일 행사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이들로 북적거렸고, 저자들은 사인에 여념 없었다. 안내 데스크엔 '블루베리 스무디' 글자가 선명한 블루베리 색 기념 떡이 놓였다. 블루베리 음료와 차까지 블루베리 일색이었다. 책과 음료와 선물까지 테마에 맞춘 센스 넘치는 기획이라니. 손님은 속속 도착했다. 콘서트가 시작된 이후에도 멈출 줄 몰랐다. 뒤에 서서 관람한 사람도 상당수였다. 좌석을 다 채울지 걱정했던 저자들은 한껏 고무되어 관객과 하나 된 축하의 자리를 만끽했다. 듣기로는 책의 현장 판매량도 상당했다고 한다. 책이 잘 팔리려면 내용이 좋아야 하고, 편집도 한몫해야 하며 표지도 예쁘면서 시류에 맞게 제목까지 잘 뽑아야 한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책을 쓴 사람 즉 저자가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는 걸 이번 콘서트를 보면서 깨달았다는 얘기. 이런 저런 인연으로 10권의 책이 내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언제나 고민은 콘텐츠였다. 잘 쓰여진 원고가 먼저라고 여겼던 내게, 좋은 글로 다듬는 데만 몰두했던 내게, 새로운 화두가 던져진 셈이다. 세 명의 저자는 올 사람이 없다고 너스레 떨었지만, 북 콘서트 당일 현장에서 내가 확인한 건 각자가 자기 영역과 지역사회에서 잘 살아왔다는 사실이었다. 갓 새 식구가 된 며느리의 책 출간을 축하하는 시부모님의 화환이 놓였고, 멀리 상주에서 편치 않은 몸으로 참석한 내담자가 있었으며, 자녀와 공동체 가족들이 내 일처럼 기뻐해주고 손발이 닳도록 헌신하는 장면은 어느 영화에서도 만나기 힘든 감동적인 미장센이었다. 그러니까 '영화는 극장에서 관객과 만날 때 비로소 완성된다.'던 히치콕의 명언이 책 출간에도 적용된다면, 책이 출간되어 ㅇㅇ독자를 만나는 연장선상에 북 콘서트가 있다면, 북 콘서트에서 관객이 보여주는 반응이야 말로 저자에 대한 신뢰와 명예를 드높이는 일이고 어떤 비평가의 리뷰보다 깊이 새겨질 터였다. 한국 중장년층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책을 내는 것이라고 한다. 대부분 희망하고 소망하고 갈망할 뿐 욕망을 현실로 재현하려는 노력은 게을리 한다. 저자들은 3년 동안 꾸준하고 성실하게 자기 목소리를 글로 적었다. 작가가 되거나 유명해지고 싶은 욕심은 애초에 없었으나, 마침내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 시간 동안, 의심할 바 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소임을 다하며 잘 살았을 것이다. 그 결과가 『블루베리 스무디』이고, 만추의 북 콘서트였다.
2025-12-19 16:12:33
[사설] 정부의 외환 규제 완화 카드, 환율 흐름 바꿀 수 있을지 의문
원·달러 환율이 17일 장중 1,480원을 넘어서며 시장 불안이 극대화하자 정부가 '외환 규제 완화' 카드를 꺼냈다. 한국은행은 원·달러 수급(需給), 즉 한국에서 달러를 많이 사들이고, 외국에서 원화를 많이 팔면서 발생하는 불균형이 고환율에 미치는 비중을 70% 수준으로 파악한다. 18일 발표한 '외환 건전성 제도 탄력적 조정 방안'은 금융사, 수출 기업, 외국계 기업 등에 적용했던 규제를 풀어 시중에 달러 공급을 늘리려는 목적이다. 다만 환율 변동 속도 조절용일 뿐 방향 전환급은 아니라는 평가가 우세하다. 우선 국내 은행들이 위기에 대비해 충분한 달러를 쌓아 두지 않았을 때 가하는 제재를 내년 6월 말까지 유예(猶豫)한다. 시중에 달러를 더 풀게 하려는 의도다. 외국계 은행 국내 법인들의 '선물환 포지션' 한도도 확대한다. 나중에 달러를 팔겠다는 약속을 하고 더 많이 쌓아둔다는 의미로, 시장에는 달러가 나올 가능성이 커진다는 신호로 읽힌다. 수출 기업의 '원화 용도 외화대출' 제한도 푸는데, 기업이 빌린 달러를 시중에서 원화로 바꾸면 환율 하락 요인이 된다. 외국인의 국내 주식 투자도 쉽게 바꾸고, 해외 상장 외국 기업의 환헤지 거래 불편도 대폭 개선한다. 환율 급등 시 제동을 거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들 조치는 외화 흐름 전반을 정비해 달러가 한국에 오래 머무르게 하기 위함이다. 시장에 보내는 신호는 명확하지만 효과는 장담하기 어렵다. 우선 환율의 방향 자체를 바꿀 만한 획기적 조치가 아니다. 미국·일본 등 외국 금리, 글로벌 달러 흐름, 위험 회피 심리가 계속되면 환율 추세를 바꾸기 쉽잖다. 외국인이 한국 주식을 사지 않거나 기업이 달러 대출을 꺼리면 이번 조치의 효과는 숫자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정부가 국민연금 카드까지 동원했지만 아직 환율 흐름을 역전시키지 못했다. 고환율이 지속되면 내년 물가가 요동치게 된다. 한은이 바라는 2% 물가 상승률을 훌쩍 뛰어넘게 된다. 잇따른 환율 조치가 시장에 먹혀들지 않으면 외환시장 변동성은 위험 수준까지 증폭될 수도 있다.
2025-12-19 05:00:00
[사설] 이 대통령이 주문한 내년 지방선거 대전·충남 통합단체장, 졸속 아닌가
이재명 대통령이 18일 대전·충남을 통합(統合)해 내년 지방선거에서 통합단체장을 뽑아야 한다고 발언, 대구·경북에도 적용될지에 관심이 쏠린다. 이 대통령은 이날 대전·충남 더불어민주당 의원들과의 오찬에서 "2월까지 두 지역 통합 특별법을 통과시키자"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둘러 통합하면 6월 지선에선 단일 광역단체장을 뽑을 수 있다는 얘기다. 내년에 통합단체장을 선출하려면 일단 2월까지 특별법이 통과돼야 한다. 여당도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위원회'를 꾸려 특별법 제정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대전·충남 통합 추진 논의는 지난해 11월 시작됐고, '대전충남특별시 설치 특별법'은 지난 10월 발의됐다. 대구와 경북은 이보다 훨씬 앞서 행정통합을 논의하고 추진했다. 2019년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권영진 당시 대구시장이 합의해 추진했으나 홍준표 대구시장 취임 후 중단됐다. 홍 전 시장도 2024년 행정통합을 제안하면서 논의가 다시 시작됐으나 통합 명칭·통합 방향 및 실행 방식·행정 조직 중심축, 주민 투표 여부 등을 놓고 갈등을 빚다 중단됐다. 시도 통합은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특별법을 제정하고 지역민 공론화 및 찬반 논의, 통합 방식 설계, 재정·행정 계획 수립 등 밟아야 할 절차가 적잖다. 대통령과 여당까지 나선 만큼 추진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급히 먹는 밥은 체하는 법이다. 대전·충남 행정통합 및 내년 지방선거 통합단체장 선출은 이후 다른 시도 통합의 기준, 이정표(里程標)가 될 수 있어 더욱 신중해야 한다. 이 대통령의 '5극(수도권·동남권·대경권·중부권·호남권) 3특(제주·강원·전북 특별자치도)' 구상에 맞춰 대구·경북을 포함해 전국 시도와 함께 차근차근 추진할 필요가 있다. 특히 지역 여당 의원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한 대통령 말 한마디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추진할 사안도 아니다.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을 초대 대전·충남 통합단체장으로 만들기 위한 무리수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괜한 오해도 부르지 않는 것이 좋겠다.
2025-12-19 05:00:00
[사설] 사법부 자체 내란·외환 전담재판부, 삼권분립 지키는 길
대법원이 형법상 내란·외환죄 등 국가적 중요 사건을 집중 심리하는 전담재판부를 설치하기 위한 예규(例規)를 제정하기로 했다. 사건 배당은 무작위로 하되, 사건을 배당받은 재판부가 해당 사건만 전담토록 이미 맡고 있는 사건들은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다. 비상계엄 관련 재판을 놓고 더불어민주당은 '지귀연 재판부'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드러내며 '내란전담특별재판부'를 밀어붙였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장·법무장관·판사회의가 추천(推薦)한 9명이 판사추천위원회를 구성해 전담재판부 판사들을 추천하는 방식이 위헌 논란에 휩싸였다. 이에 민주당은 내란전담재판부를 2심부터 도입하고, 재판부 명칭과 추천 방식을 변경(추천위원회를 전국법관대표회의 6명, 각급 법원 판사회의 3명으로 구성)하는 방향으로 법안 수정을 검토하고 있다. 법원 외부의 추천을 없애 위헌성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법 역시 위헌이다. 특정 사건을 겨냥해 전담재판부를 구성해 사건을 맡김으로써 입법부가 재판을 대신 한다는 논란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설치하려는 전담재판부는 민주당이 추진하는 '내란특별재판부'의 위헌성을 모두 없앨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본다. 사건을 무작위로 배당함으로써, 민주당 법률안(무작위 배당이 아닌 별도 재판부를 설치해 맡기는 것)이 안고 있는 '처분적 법률'이라는 위헌 소지를 없앨 수 있다. 외부 입김 없이 재판부를 구성할 수 있어 삼권분립을 지킬 수 있고, 특정 성향 판사들의 영향을 줄일 수 있어 중립성 논란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속한 재판도 가능하다. 대법원이 예규를 제정하면 별도 외부 절차(국회 의결이나 정부 공포) 없이 최소 10일 이상의 행정예고 기간을 거쳐 곧바로 시행할 수 있다. 대법원은 절차를 신속하게 진행해 '내란 재판 항소심'부터 전담재판부가 사건을 맡도록 해 국민적 우려를 불식(拂拭)해야 한다. 이를 통해 민주당의 특별재판부 입법과 국민의힘의 위헌 제청, 이를 무력화하려는 민주당의 헌법재판소법 개정안 등 혼란을 차단해야 한다.
2025-12-19 05:00:00
[관풍루] 이규연 대통령실 홍보소통수석, 통일교 특검 주장에 대해…우리 편에 해가 되면 시기상조, 득이 되면 '속도전'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언론 인터뷰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이 한동훈을 업어 키우다시피 했다는 말도 있었다'는 질문에 "업어 키우다니? 개똥 같은 소리"라고 대답.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했지. ○…이규연 대통령실 홍보소통수석, 통일교 특검 주장에 대해 "지금 경찰이 안 움직이는 게 아니라 굉장히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다"며 "시기상조"라고 말해. 우리 편에 해가 되면 시기상조, 득이 되면 '속도전'. ○…서울고법 형사 2부, '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으로 기소된 허종식 의원과 윤관석·임종성 전 의원에 대한 1심의 집행유예 징역형 선고 뒤집고 무죄 선고. 돈 받아 뿌렸지만 죄는 없다?
2025-12-19 05:00:00
2025-12-18 19:09:52
지난 콘서트하우스에서의 공연이 끝난 뒤, 한 청중을 만났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악가로 살면 어떤 기분이에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답했다. 음악가로서 사는 건, 행복하다고. 한 공연을 위해 오랜 시간 에너지를 쏟아 연구하고 준비한다. 악보 위의 음을 정확히 연주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왜 이 음악을 지금 내가 연주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이 더 길다.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연주는 아직 완성되지 않는다. 공연 준비의 많은 순간은 동료들과 함께한다. 같은 악보를 두고 같은 시간을 반복하며 서로의 호흡이 조금씩 맞아 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에는 분명한 기쁨이 있다. 의견이 다른 순간도 있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확신이 생기는 순간 음악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관계가 된다. 연주할 작곡가와 교감하는 시간 역시 중요하다. 악보에 적힌 음표 너머로 그가 어떤 시간을 통과하며 이 음악에 도달했는지를 생각한다. 그 당시의 공기와 삶의 무게, 그가 견뎌야 했던 감정들을 상상하며 이 선율이 만들어진 이유를 이해하려 애쓴다. 그 감정을 지금의 호흡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고, 그것을 청중에게 전하는 일은 내가 음악가로서 맡고 있는 사명에 가깝다. 무대에 오르기 전의 긴장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보다 더 분명한 감정은 내가 사랑하는 것을 청중에게 건네고 싶다는 마음이다. 연주가 시작되면 그동안 쌓아온 생각과 감정은 하나의 흐름으로 모여 무대 위에서 흘러간다. 음악에 몰입하고, 그 시간이 청중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마음은 벅차오른다. 공연이 끝났을 때 남는 감정은 허무만은 아니다. 무대 위에서 충분히 누렸다는 감각, 그리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건넸다는 확신이 함께 남는다. 감동과 안도, 조용한 행복감. 이 모든 것이 겹쳐진 상태를 나는 여운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 여운은 외롭지 않다. 이미 충분히 연결되었다는 감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음악은 시간을 재료로 하는 예술이다. 한 번의 순간에 모든 것을 쏟아내야 하고, 그 시간은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연주는 기록으로 남을 수 있지만, 그날의 공기와 시선, 청중과 주고받은 미세한 호흡은 돌아오지 않는다.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이는 이미 잠들어 있고, 집 안에는 하루의 소음이 빠져나간 뒤의 고요가 남아 있다. 그제야 나는 무대 위에서 미처 내려놓지 못한 감정들과 다시 마주한다. 라면을 끓인다. 끓는 물에 면을 넣고, 스프를 붓고, 김이 오르는 냄비 앞에 서 있는 이 짧은 시간 동안 무대 위의 소리는 조금씩 일상으로 내려온다. 뜨거운 국물을 넘길 때마다 한 번에 쏟아냈던 감정들이 서서히 제 온도를 되찾는다. 화려했던 무대도 이 국물 앞에서는 모두 같은 높이로 내려온다. 공연은 그렇게, 아주 소박한 생활의 장면 속에서 비로소 끝난다. 그리고 이런 순간마다 나는 음악가라서 행복하다는 마음을 느낀다. 쉽지 않은 직업이고 늘 긴장과 함께하지만, 이 시간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다음 무대를 준비한다.
2025-12-18 16:24:57
미각기행 빵의 인문학(중)[문화식객 이춘호의 미각기행]
추억의 빵을 생각하며 비오는 지난 주말 동성로를 걸었다. 공룡같이 성장했던 1950~70년대 빵집들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고작 남은 건 최가네케이크, 삼송 베이커리, 밀밭베이커리 정도였다. 하지만 사라진 건 아니었다. 새로운 세상에 걸맞는 모습으로 추억의 빵집이 모던하게 진화를 했다. 동서로 같은 '동성당'도 보였다. 단팥빵은 호떡과 찰떡을 호령하고 그리고 골목표 찐빵과 붕어빵을 양산시켰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빵 하나가 또 있다. 한국 빵의 금자탑으로 평가받았던 '경주황남빵'. 최근 시진핑이 '엄지척' 해서 화제가 됐는데 한동안 '천안호두과자'는 물론 대전의 '성심당', 군산의 '이성당'도 대적하기 힘들었다. 1939년 창업자 최영화(1917~1995)가 만든 황남빵은 이후 '황남빵'과 '최영화빵'으로 양분되고 이어 창업주의 수제자로 불리는 이상복이 독립해 만든 '경주빵'(찰보리빵)으로 분파된다. 게다가 황리단길 '동전빵'까지 가세하면서 경주는 '빵빵시티'로 발돋움했다. ◆단팥빵의 기원 단팥빵은 일본에서 건너왔다. 메이지 일왕 시절 왕실 주방 조리사였던 기무라 야스베. 그는 독립해 도쿄 직업훈련소에 취직을 한다. 그곳에서 네덜란드인의 조리사로 일했던 우메치키라는 사람을 만나 서양빵의 비밀을 전수하게 된다. 기무라는 일본 찐빵도 아니고 중국 만두도 아닌, 서양식 빵과도 다른 신개념 단팥빵을 개발한다. 기무라는 개발자인 우메키치와 1869년 도쿄에 서양식 제과점을 창업한다. 이 빵집이 도쿄의 첫 제과점이다. 하지만 1873년 화재로 전소된다. 기무라는 아들과 함께 이듬해 긴자에서 '기무라야'(木村屋)를 오픈한다. 일본 최초 단팥빵 가게였다. 단팥빵 위 참깨는 무슨 의미인가. 내용물을 암시한다. 단팥도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팥 알갱이가 씹힐 수 있도록 팥을 체로 거르지 않고 통단팥을 넣은 것, 또 다른 건 팥을 체로 걸러서 앙금을 가라앉힌 고운 팥빵이었다. 통단팥은 겨자씨, 팥앙금은 참깨를 뿌렸다. 일왕 때문에 대중화된다. 일왕이 벚꽃놀이 행차를 하는데 기무라의 단팥빵을 원했다. 기무라는 감격했다. 그는 일본풍이 감돌도록 소금에 절인 벚나무 열매를 빵 복판에 눌러 얹었다. 현재 단팥빵의 중심부가 조금 내려앉은 이유다. 1875년 4월 메일지 일왕의 식탁에 기무라의 단팥빵이 올라간다. 기무라는 궁중에 자기 빵을 계속 공급할 수 있었다. 매년 4월 4일은 일본의 단팥빵의 날. ◆1950~60년대 대구의 대표 빵집1950년대 중부경찰서 네거리 일대는 '빵거리'로 군림한다. 삼미·삼송·송영사·수형당을 필두로 옛 대구극장 초입 고려당, 중부경찰서 바로 북측에 일성당(사장 김도권), 바로 옆에 동양당, 종로초등 정문 맞은편에 덕인당, 대구역 앞 대우센터 뒤편에 구일제과점(박태준), 동성로 미도방 맞은편에 풍년당, 종로초등 근처에 풍곡당(사장 이을수), 약전골목 동문 근처엔 백일당, 학원서림 부근에는 맘모스 등이 나타난다. 특히 구일제과는 건과자 전문점으로 유명했다. 60년대를 화려하게 물들인 맘모스의 기술은 뉴욕을 거쳐 뉴델로 이어져 70~80년대 대구를 빵의 도시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훗날 그 기술력은 안동으로 건너가 안동 맘모스제과점을 잉태하기에 이른다. 그만큼 기술이 출중했다. 맘모스는 대구에선 처음으로 즉석 도넛과 고로케를 유행시켰다. 이 무렵 잘 나가는 7개 제과점 주인들이 모여 '7인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일본 연수까지 다녀오면서 일본의 선진 제빵 기술을 가져왔고, 이 모임은 90년대 뉴델제과 사장 최종수씨가 주축이 된 '과우회'(菓友會)'로 발전한다. 삼미제과사 최팔용 사장, 삼송빵집 서모 사장, 송영사 사장, 고려당 하경봉 사장, 수형당 진병수 사장, 이들은 모두 북성로 일본 빵집 이마사카 출신이었고 다들 유도 유단자였다. 삼미제과사는 삼덕동 대구형무소(1910년 대구감옥으로 출발해 23년 대구형무소, 61년 대구교도소로 개칭한 뒤 71년 6월1일 화원으로 이전) 정문 바로 근처에 있어 수형자들에겐 잊지 못할 추억의 빵집이 된다. 바람 불면 빵 굽는 냄새가 형무소 담 안으로 들어갔다. 재소자들은 '냄새와의 싸움'을 벌여야 했다. 최 사장은 50년대 초 수형당보다 앞서 군에 빵을 납품하기도 했지만 친구인 진 사장의 사업 수완을 이겨내지 못하고 57년쯤 좌초되고 만다. 현재 아카데미 옆 골목 안에 자릴 잡고 있는 최가네 케이크 사장 최무갑이 그의 아들이다. ◆마약빵 삼송빵집 현재 중구 동성로 3가 옛 제일극장 맞은편 삼송베이커리는 광복 직후 서 모 사장이 동산약국 옆에 세운 삼송빵집의 상호를 계승했다. 지금은 하나밖에 없지만 예전에는 변두리에 같은 상호가 여러 개 있었다. 삼송이 그만큼 유명한 탓이다. 삼송의 주인은 10여번 바뀐다. 중구 공평동 스텔라 베이커리 김호상 사장, 옛 송죽극장 옆 뉴델제과 최종수 사장도 삼송 간판을 걸기도 했다. 삼송은 60년대 중반 대형화재를 당한다. 그로 인해 동산약국과 삼송빵집이 동시에 피해를 입는다. 이 화재는 73년 6월6일 송죽극장 옆 뉴델제과 화재와 함께 대구의 대표적 빵집 화재로 기록된다. 삼송은 신축된 뒤 종업원이 한번 맡았다가 73년쯤 역시 삼송의 기술자였던 박명호·정옥희 부부한테 넘어온다. 이들이 삼송의 마지막 사장이 된다. 7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했던 대신동 상권은 80년대로 접어들면서 급속도로 추락하게 된다. 바로 서문시장 상권이 쇠락한 것이다. 박 사장은 '탈(脫)대신동'을 결심하고 87년 2월 제일극장 맞은편으로 이전한다. 하지만 장사가 별로였다. 대구도시철도 1호선 공사, 그리고 파리바게트의 공세로 일락서산을 신세로 저물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삼송에 대반전이 일어난다. 바로 '마약빵(옥수수크로켓) 신드롬'이 발생한 것이다. 그건 그의 절친인 시내 밀밭베이커리의 이정부 대표가 기존 야채크로켓인 '크래존'을 제안했고 그걸 삼송이 기회의 발판으로 삼은 것이다. 아무튼, 제빵업계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빛나는 우정이었다. ◆뉴욕·뉴델·런던 50~60년대 빵집들은 결국 맘모스한테 무릎을 꿇고 만다. 하지만 맘모스의 신기술을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뉴욕과 뉴델 사장이었다. 50년대 4인방 제빵인이 있었듯 70년대에도 대구제빵계를 주름잡던 3인방이 있었다. 뉴욕의 강신영과 이점석 사장, 뉴델의 최종수, 런던의 조원길이었다. 이들로 인해 대구가 비로소 제빵도시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섬유경기는 호황이었고 패스트푸드가 대구에 본격 상륙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과점은 호황을 누릴 수밖에 없었다. 교동시장 초입 오른쪽 모퉁이 보래옥을 인수한 강신영은 '뉴욕제과'로 상호를 바꾼다. 훗날 한일극장 근처로 이전해 대구 최고의 제과점으로 성공시킨다. 강 사장은 70년대 대구 상권이 남동진한다는 사실을 알고 한일극장 근처로 자릴 옮긴다. 그는 직원 복이 많았다. 대구에선 처음으로 '모닝식빵'을 개발한 중구 포정동 풍차베이커리 사장 권영오, 수성구 시지에서 뉴욕제과를 경영했던 김정환, 고려당 베이커리 강대건 등이 그곳을 거쳐갔다. 뉴욕은 역시 '사라다빵'이었다. 일반 집과는 달리 뉴욕은 감자를 깍두기처럼 썰어 찬물에 4~5시간 담가둔 뒤 삶아 아린 맛을 없앴다. 포장 빵이 귀했는데 뉴욕은 낱개 포장 시스템을 도입한다. 한창 때는 한강 이남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제과점이 된다. 하지만 집안 사정으로 뉴욕은 도중하차, 옛 동원예식장 지하 동원제과점을 운영한 상주 출신의 이점석(전 대구경북제과협회 지회장)이 뉴욕을 인수해 더욱 발전시킨다. 뉴욕은 경비행기를 동원해 시가 전역에 전단을 뿌렸다. 개점일과 생일이 일치하는 손님에게 케이크를 무료로 제공한다는 광고문구까지 삽입했다. 뉴욕의 아성에 도전한 게 바로 옛 송죽극장 동편에 있었던 '뉴델제과'. 교동시장 입구 맞은편 동성로변에 자리 잡고 있어 초창기 뉴욕처럼 장사가 잘 됐다. 뉴델의 최종수 사장은 처음엔 과자 도매점도 하면서 기반을 다진다. 최 사장은 원래 수형당 기술자 출신으로 처음엔 대신동 삼송빵집을 운영하다가 뉴델제과를 만들어 성공한다. 이땐 백화점에선 빵을 팔지 않았다. 상품권 개념도 생겨나지 않았다. 가장 인기 있는 건 버터로 만든 케이크와 롤케이크류가 선물용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뉴델은 무려 1만여 개를 철야작업을 통해 만들어냈다. 크리스마스 한 달 전부터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지금은 아무도 안 먹지만 그땐 버터로 만든 꽃잎을 만들어 꽂아놓기도 했다. 요즘 백화점 제빵 코너 판매 스타일이 이때 등장한다. 최 사장은 런던제과와 뉴욕제과 사이에서 고사 직전이던 킹뉴델을 황제당으로 상호를 바꾸어 런던과 팽팽한 접전을 펼친다. 황제당 '즉석 제빵 시스템'은 이후 전국적으로 선풍을 일으켰고 후에 지역 제빵사들은 너도 나도 그 모델을 도입하게 된다. 70년대초 동성로 동아백화점 네거리 근처에 있었던 옛 원호청 자리에 또 하나의 무시무시한 저력을 가진 제과점이 들어온다. 바로 '런던제과'였다. 규모도 뉴욕보다 더 컸다. 특히 하절기엔 얼음 빙설이 강했다. 삶은 팥, 프루츠와 수박을 얹었다. 뉴델 최 사장은 비록 친구간이긴 하지만 런던의 등장에 초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엔 제과점 허가가 무척 까다로웠다. 그만큼 진입장벽이 높았던 것이다. 런던은 번번이 시설 미비로 중구청 위생과로부터 영업허가를 받지 못한다. 어렵게 개점한 조원길 사장에게 호재가 안겨진다. 런던이 개업하고 1년 남짓 지난 뒤 바로 경쟁업소 뉴델이 전소된 것이다. 그 덕분에 런던은 한때 미도백화점 1년 매출에 버금갈 정도로 고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1983년 대구빵의 침몰의 해 하지만 뉴욕·뉴델·런던은 전두환 정권하였던 1983년쯤 갑자기 사라진다. 그건 지역 제빵인들에겐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3인방은 나름대로 부동산 자본을 확보하고 있었고, 또한 제빵 영업이 갈수록 마진율이 줄어든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부가가치세(77년 도입)로 인해 수익률까지 날로 감소하고 있었다. 설상가상 방위성금 명목으로 정치자금 제공 압력도 측면에서 받고 있었다. 각종 패스트푸드가 대구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제빵산업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걸 안 것이다. 또한 지역자본가로 성장한 그들을 겨냥한 정부 당국의 정치적 압력도 달갑지 않았다. 돈을 벌어도 그렇게 맘이 편하지 못했다. 제빵 사업다각화를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이들은 지쳐 있었다. 설상가상 장남들도 하나 같이 공부에만 열중했고, 사장들도 장남에게 빵집을 물려줄 맘이 없었다. 3인방은 그런 연유로 86아시안게임·88서울올림픽 특수를 누려보지도 못하고 한꺼번에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2025-12-18 14:30:00
[사설] 민생지원금 등 통화량 증가가 초래한 고환율, 한은은 엉뚱한 변명만
원·달러 환율 움직임이 심상찮다. 17일 환율은 외국인의 국내 주식 대량 매도로 장중 1,480원을 넘겼다. 세계적인 달러화 약세에도 고환율이 이어지는 원인은 개인의 해외투자 확대와 외국인의 원화 매도세, 미국 연방준비제도 금리 인하에 대한 불확실성, 국내 기준금리 동결에 따른 한미 금리 차 확대 등이 꼽힌다. 이런 와중에 '광의(廣義)통화(M2) 급증' 논란이 벌어졌다. 미국 달러화보다 원화가 시중에 빠른 속도로 더 풀려 고환율이 왔다는 주장이다. M2는 현금에다 2년 미만 정기 예적금, 수익증권, 환매조건부채권(RP) 등을 합친 넓은 의미의 시중 통화량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0월 시중 통화량(M2)은 전년 동기보다 8.7% 늘어 역대 최고치인 4천470조원대를 돌파했다. 9월 기준 M2 증가율은 미국 4.5%, 한국 8.5%다. 2022년부터 한국 M2 증가율이 더 높았다. 민생지원금 등으로 시중에 돈을 풀어 원화 가치 하락, 즉 고환율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한은은 즉각 반박(反駁)했다. 핵심은 미국과 달리 한국의 M2에는 상장지수펀드(ETF)가 포함된다는 것이다. 올 들어 증시 호황에 힘입어 ETF가 포함된 수익증권에 돈이 몰리면서 M2 증가로 나타났는데, ETF를 빼고 계산하면 9월 M2 증가율은 기존 8.5%가 아니라 5.4%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내년부터 M2 구성 항목에서 ETF 등 수익증권을 빼기로 했다. 정확한 처방을 위해 다각도의 원인 분석은 필요하다. 그런데 정부와 한은의 태도는 시장 혼란을 부추기는 엇박자투성이다. 국민연금의 연간 650억달러 한도 외환 스와프 가동 소식이 들리고, 정부는 주요 수출기업들에 시중에 달러를 풀도록 환헤지를 요구했다. 그런데 아직 외환시장 진정 기미는 없다. 환율이 1,500원대를 넘지 않는다는 낙관론이 아직 우세하지만 당국의 직간접 개입에도 속히 안정세를 찾지 못하거나 고환율 원인을 두고 책임 공방만 오가면 외환시장은 요동(搖動)칠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한은이 통계 방식을 바꾼다고 통화량이 줄지는 않는다.
2025-12-18 05:00:00
[사설] 명칭·판사 추천 방식 바꿔도 내란재판부가 위헌임은 바뀌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이 위헌(違憲) 소지를 인정하면서 내란전담재판부 판사 추천 과정부터 임명까지 법원 외부 인사를 배제하는 등 법안을 대폭 수정해 이달 21일 또는 22일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민주당 지도부는 기존의 헌법재판소 사무처장·법무부 장관·판사회의 대신 좌파 성향 법관들이 주도하는 전국법관대표회의에 6명, 각급 법원의 판사회의 3명으로 내란전담재판부 판사 추천위원(推薦委員)을 구성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복수의 전담재판부를 설치하고 그중 하나는 반드시 영장재판부여야 한다"고 했다. 민주당은 결국 법원 내 좌파 성향 판사들을 중심으로 내란전담재판부를 구성하도록 함으로써 위헌 논란(論難)을 비켜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 헌법은 군사법원만을 유일한 특별법원(特別法院)으로 인정하고 있다. 내란전담재판부와 같은 특별법원을 법률로 설치하는 것 자체가 위헌이다. 또 특정 사건에 관련된 특정인을 처벌하기 위해 사후적으로 전담재판부를 만든다는 것은 문명 법치국가(法治國家)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법안 명칭에서 '12·3 윤석열 비상계엄'이라는 표현을 없앤다고 해서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 같은 사실을 민주당과 이재명 정부 측이 모를 리가 없다. 도대체 왜 민주당 등 여권은 명백히 위헌인 내란전담재판부 설치 법안(法案)을 통과시키려는 것일까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첫째는 내년 지방선거 때까지 '계엄은 내란'이라는 프레임을 계속 끌고 가는 것이 여권에 유리하다는 분석이다. 나중에 위헌 판결이 내려져도 이미 선거는 끝났다. 또 여권이 '윤석열 내란 무죄' 선고를 미리 예상하고 책임을 사법부로 돌려 정치적 위기를 탈출하는 출구전략(出口戰略)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민주당은 재판부 명칭과 판사 추천 방식을 바꿔 내란재판부가 '위헌'임을 가리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을 언제까지 속일 수는 없다.
2025-12-18 05:00:00
[사설] 대장동 일당 범죄 수익 의심 동결 재산 찾기 본격화, 이게 나라냐
대장동 개발 비리 사건 부당 이득 환수 및 항소 포기 사태가 최근 터진 '통일교 게이트'에 묻힌 사이 대장동 일당의 동결(凍結) 재산 찾기가 본격화되고 있다.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 씨와 남욱 변호사는 이달 5~11일 사이 잇따라 검찰의 몰수·추징 보전으로 묶인 재산을 풀어 달라는 청구를 법원에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1심에서 검찰은 7천524억원의 추징을 구형했으나 법원이 473억원만 인정한 데 이어 검찰이 항소까지 포기하면서 수천억원이 묶여 있는 상태로, 이를 찾겠다는 것이다. 1심 판결 및 항소 포기 때 이미 우려됐던 바다. '통일교 게이트' 이슈에 묻혀 정치권의 대장동 부당 이득 환수 논의도 사실상 중단됐다. '대장동 사건 범죄 수익을 소급(遡及) 적용해 환수하겠다'며 국민의힘이 발의한 '환수 특별법'은 상임위원회에 계류 중이거나 논의가 중단된 상태다. 상임위 문턱을 넘는다 해도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될 가능성이 낮다. 여야 합의가 필수이지만 거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반대하면 국민의힘 단독으로 처리할 수 없다. 민주당은 대장동 항소 포기 사태가 터졌을 때만 해도 국정조사·특검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진상을 밝히겠다고 했으나 국민의힘의 '환수 특별법'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대로라면 1심에서 유죄 판결로 징역 4~8년을 선고받은 범죄자들의 손에 범죄 수익으로 의심되는 동결 재산이 쥐여질 우려가 크다. 물론 몰수·추징 보전 취소 청구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지켜봐야겠지만 혹여 받아들여질 경우 해당 재산을 처분·이전할 수 있게 돼 환수 가능성은 더 낮아진다. 또 정민용 변호사,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본부장, 정영학 회계사 등 다른 일당의 추가 청구로 이어질 게 분명하다. 결국 김 씨와 남 변호사의 재산 동결 해제 신청 결과가 환수 규모를 결정 짓는 분수령(分水嶺)이 될 것으로 보인다. '통일교 게이트'로 어수선한 정국이지만 부당 이득이 사라지기 전에 특별법이든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가 제시한 '독립몰수제'든 환수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2025-12-18 05:00:00
[관풍루] 박수현 민주당 수석대변인, 내란전담재판부 도입 결정에 대해 "윤석열 무죄 선고 가능성은 0%"라고. 대단한 판사 한 분 나셨군.
○…이재명 대통령, 이학재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 겨냥해 "권한을 행사하며 명예와 혜택은 누리면서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은 천하의 도둑놈 심보"라고 공격. 입이 거시네, 입에 걸레 물고 주무셨나? ○…이학재 인국공 사장, 외화 밀반출 단속이 공사 소관이라는 이재명 대통령의 지적에 또다시 "단속의 법적 책임은 관세청에 있다"고 반박. 계급장으로 찍어 누른다고 흰 것이 검은 것 될 수 없지. ○…박수현 민주당 수석대변인, 내란전담재판부 도입 결정에 대해 "지귀연 재판부처럼 재판하면 안 된다는 확실한 경고의 의미" 운운하며 "윤석열 무죄 선고 가능성은 0%"라고. 대단한 판사 한 분 나셨군.
2025-12-18 05:00:00
2025-12-17 18:46:11
[기고-조오현] 해상풍력 설치 선박 유럽형은 한국에 맞지 않다
대한민국 해상풍력 산업이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정부는 2035년까지 해상풍력 발전단가(LCOE)를 150원/㎾h 이하로 낮추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내걸었지만, 정작 그 목표를 달성할 핵심 장비인 WTIV(해상풍력 설치 선박) 도입 전략에 치명적인 '한국형 리스크'가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한국 서남해안의 '연약지반' 문제 때문이다. 유럽, 특히 해상풍력 강국들이 주력하는 북해 지역은 해저 지반이 단단한 경우가 많아 초대형 WTIV가 안정적으로 작업을 수행하기 좋다. 하지만 우리의 서해와 남해는 진흙과 뻘이 뒤섞인 푸딩처럼 무른 지반이 광범위하게 깔려 있다. 이 특수한 환경을 무시하고 유럽에서 검증되었다는 이유로 WTIV를 그대로 들여오는 것은 '한국 해상풍력 목표를 연약지반이라는 모래성에 세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연약지반의 어려움은 이미 현장에서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현재 서남해 지역 해상풍력 현장에 투입된 10㎿급 국내 WTIV인 현대프론티어호를 보자. 이 선박은 무른 지반에 대비해 지지대 발(스퍼드캔) 밑에 지름 17m에 달하는 거대한 머드매트(Mudmat·흙받이)까지 부착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선박의 무게를 지반에 분산시켜 안정화하는 프리로딩(Pre-loading) 과정에서 지지대가 계속해서 해저 깊이 빠지는 침하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이 때문에 터빈 한 기를 설치하는 데 한 달 가까이 걸리는 심각한 공기 지연이 발생하고 있다. 설치 속도가 느려진다는 것은 곧 '시간=비용'이라는 공식에 따라 건설 비용이 폭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미 국내 WTIV로도 이런 문제를 겪는데, 만약 그보다 선체 무게가 두 배 이상 무거운 유럽의 대형 고중량 WTIV가 들어온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전문가들은 그 선박이 안정적으로 서기 위해서는 지름 32m에 달하는 비현실적인 초대형 머드매트가 필요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유럽식 '만능 WTIV'는 한국의 연약지반에서 시간만 잡아먹는 고철 덩어리가 될지도 모른다. 이는 정부의 LCOE 150원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적이 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기술 자립의 기회를 잃는다는 점이다. 현재 도입이 논의되는 외국산 모델은 유럽의 설계와 크레인을 국내에서 단순히 조립 생산하는 방식에 그친다. 핵심 기술이 해외에 종속된 채 부품을 가져와 조립하는 것만으로는 국내 기술 축적을 기대할 수 없으며, 부품 공급의 가격 경쟁력 또한 확보할 수 없다. 우리는 K-방산의 성공 사례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K-방산이 중동 사막과 유럽 진흙 지대 등 어떤 혹독한 환경에서도 뛰어난 성능과 가성비를 입증하며 세계 시장을 선도한 비결은 한국만의 독자 기술이 탑재되었기 때문이다. WTIV는 해상풍력의 '핵미사일'이나 다름없는 핵심 장비다. 한국의 연약지반을 극복할 수 있는 '한국형 K-WTIV'라는 가성비 높은 독자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국내 조선 강국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국 해역에 최적화된 설계와 가성비를 갖춘 WTIV를 확보해야 한다. 이는 나아가 아시아-태평양 지역 연약지반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수출 효자 상품이 될 것이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단순 유럽형 WTIV 도입 전략을 재고하고, 한국 해역 특성에 맞는 KWTIV 개발에 모든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K-해상풍력의 꿈을 연약지반 위에 단단하게 뿌리내릴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다.
2025-12-17 14:54:23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326>선풍도골의 신선 풍모 미수 허목 초상화
'문정공 허목 팔십이세 진(文正公許穆八十二歲眞)'으로 표제가 있는 미수(眉叟) 허목(1595~1682)의 모습이다. 담홍색(淡紅色)이라고 했던 분홍빛 시복(時服) 차림인 조선 관료의 반신상 초상화이다. 허목의 관직 진출은 곡절이 많았다. 젊은 시절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인조에게 밉보여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된다. 나중에 정거(停擧)가 풀렸음에도 과거를 보지 않고 독서와 학문, 교육에 전념했다. 명성이 높아지자 56세 때 학행(學行)으로 천거됐으나 벼슬길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60대가 돼서다. 81세 때(1675년) 우의정에 제수된다. 허목은 과거제도를 비껴서 정승 반열에 오른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눈썹 노인'이라는 호대로 희게 세었을 뿐 82세인데도 무성한 눈썹이 눈꼬리까지 내려왔다. 오사모에 가려 귓등으로 조금 보이는 머리칼, 덥수룩한 눈썹, 살짝 휘날리는 멋진 수염이 모두 새하얀 백발이라 관복을 입었으나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신선 같은 풍모다. 허목의 범상치 않은 외모와 연관되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지금도 집에 두면 액운을 막아주는 벽사의 효능이 있다고 믿어지고 있는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비문도 그렇다. 척주는 삼척의 다른 이름이다. 허목이 삼척부사로 좌천됐을 때 바닷가 백성들을 위해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자신만의 전서체로 써서 빗돌에 새겨 세우게 한 이 비로 풍랑을 막았다고 한다. 파도를 물러나게 하는 신비한 힘을 가졌다고 해서 '퇴조비(退潮碑)'로도 불렸다. 허목은 남인의 영수로 노론의 우암 송시열과 대립했던 정치가로 먼저 떠오르지만 대학자이자 서예가인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미수전(眉叟篆)으로 명명된 독특한 전서는 육경고학(六經古學)을 추구한 그의 학문에서 나온 글씨다. 허목은 송나라 신유학이 아니라 진(秦)나라 이전의 원시유학을 이상으로 삼아 의거하는 경전이나, 실행하는 예법이나, 글쓰기인 문장이나, 글씨체인 서체에 이르기까지 하은주 삼대의 문화를 스스로 구현하고자 했다. 이런 신념으로 학문과 서예를 일치시켜 고대의 이상을 서예로 실천해 글씨로 복귀하려한 허목의 특이한 창작이 미수전이다. '허목 초상'은 1794년 정조가 허목의 후손가에서 초상화를 가져오도록 해 어람하는 과정에서 이명기가 모사한 이모본(移模本)이다. 표제는 당시 75세인 채제공이 썼다. 그런데 표제가 보통과 다르다. 사실은 '문정공 미수 허선생 팔십이세 진'이라고 해야 맞다. 채제공은 그림 위쪽에 같이 표구된 발문에 이 초상화의 전말을 기록하며 '허목'으로 선생의 성휘(姓諱)를 곧장 쓴 것은 어람을 대비해서였다고 밝혔다. 표제가 예법에 어긋난 것을 이상하게 여길 후세 사람들을 위해 기록해둔 것이다. 왕 앞에서는 이름(名)을 부를 뿐 자(字)나 호(號)를 들먹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구의 미술사 연구자
2025-12-17 13:35:47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 하면 떠오르는 게 뭐냐는 질문에 사람들이 차를 마시며 대화하는 풍경만 떠올렸다면 당신은 꽤 연배가 높거나 사회 트랜드에 둔감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헤드폰을 낀 젊은이들의 눈길이 태블릿과 책을 바삐 오가는 걸 보곤 아하, 요즘 젊은이들은 음악을 들으면서 독서를 하는구나. 멀티태스킹 세대란 말이 정말이구나, 하고 감탄했다면 이 땅의 젊은이들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들고 있는 책 표지엔 대부분 시험이니 합격이니 하는 말이 써져 있다. 그렇다. 그들이 보는 건 대부분 자격증 취득이나 취업과 관련된 수험서적이다. 간혹 문학서적이나 교양서적을 읽는 이들을 보는데 읽는 자세부터 다르다. 느슨한 자세의 대척점에 공벌레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는 젊은이들이 있다. 그 모습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아파지기까지 한다. 카페에서 작업을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사람들의 대화를 듣는 경우가 있다. 그 중 학부모들의 화젯거리는 대동소이하다. 여기에도 순열 공식이 적용되는지 한 사람이 '자랑'을 시작하면 또 다른 자랑이, '불만'을 시작하면 또 다른 불만이 크기와 모양에 따라 조합되고 열을 맞춘다. 이건 또 무슨 악취미인지 내 귀는 불만 레퍼토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런 테이블의 분위기는 비슷한 색채를 띤다. 성적은 기본이고 예체능에서 생활습관에 이르까지 자녀들의 행태가 성에 차지 않는 어른들의 의기투합이다. 그런데 내 귀에 쏙 들어온 건 따로 있다. "그 집 애는 그래도 영어는 잘하잖아"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다 잘해야지 그거 하나 잘한다고 등급이 나와?"라는 말. 메타인지. 발달심리학자인 존 플라벨이 창안한 개념이다. 스스로 자신의 인지 능력을 판단하고 해결책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학습 과정에 적용하면 부족한 영역의 개선은 물론 훨씬 나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다. 기실 아이고 어른이고 뭘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안다. 나아가 이 개념을 체화할 경우 학업뿐만 아니라 대인 관계에서도 긍정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이뤄지기에 실수를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잘못을 수습하거나 해결하는 데에도 유리하다. 그걸 이해한다면 무엇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그리하여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자녀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는 것도 알 것이다. 부모는 결정권자가 아니라 자녀의 선택을 돕는 도우미라는 건 공교육의 지침을 정하는 데도 필요충분조건이지 않을까. '잘하는 건 더 잘할 수 있게, 못하는 건 적어도 이해는 할 수 있게.' 그런 모토가 필요하지 않을까. 흔히 듣는 말, "축구는 못해도 보는 건 좋아해요" 그 말에 힌트가 있다.
2025-12-17 13:32:23
지난 6일, 영국의 사진작가 마틴 파(Martin Parr)는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현대인의 일상을 특유의 강렬한 색감과 유머, 날카로운 사회적 시선으로 포착한 그는 사진이 한 시대의 초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작가였다. 올 한 해 국내 사진계에서도 거목들이 잇따라 우리 곁을 떠났다. 평생 한국인의 원초적 의식과 그 내면을 집요하게 포착해 온 육명심 작가가 그중 한 명이다. 지난 1월에는 "사진가로 살았던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라고 말했던 윤주영 작가도 생을 마감했다. 이어진 소식들은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을 떠올리게 했다. 직업으로서 사진작가로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작가'라는 단어에는 여전히 낭만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그 외피를 벗기면 사진을 통해 생계를 이어 가는 한 직업인의 현실이 드러난다. 무엇을 찍을 것인가,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하루를 어떤 리듬으로 살아갈 것인가. 이런 고민은 결국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 물음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반복된다. 사진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원 사업을 찾고, 레지던시에 참여하며, 미술관과 후원자의 언어를 읽어 내는 적극적인 의지와 태도가 필요하다. 이는 단지 생계 전략만이 아니다. 외부 자원을 끌어와 작업을 확장하고 지속하기 위한 필수 역량이다. 예술은 더 이상 고독한 천재의 영역이 아니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스스로 설득하며 지속해야 하는 노동이다. 이런 삶은 비단 예술가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불확실한 미래 환경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일해야 하는 오늘날 대부분의 직업인이 마주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다만 사진가의 경우 그 불확실성은 더 노골적이다. 결과는 이미지 한 장으로 즉각 평가되고, 축적된 시간보다 눈앞의 성과가 먼저 소비된다. 사진은 쉽게 복제되지만, 한 장의 사진을 위해 쏟은 사진가의 시간은 절대 가볍지 않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했다. "인생의 목적은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사진작가로 산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으로 살아내는 일이다. 속도와 효율이 최우선 가치가 된 사회에서 그 선택은 여전히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직업으로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빠르게 소비되는 이미지의 속도전에 자신을 전부 내맡기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셔터를 누른다는 것은 시간을 거스르며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자기만의 리듬을 지키려는 가장 느리면서도 단호한 저항이다.
2025-12-17 13:2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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