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임현락] 미움과 마음, 그 사이 '점 하나'
죽기 직전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까? 과학자들은 사람의 사망 직전과 직후의 15분 동안의 뇌파 기록에서 특이한 현상을 발견했다. 심장 박동 정지 전후 30초 동안 꿈을 꾸거나 명상, 과거의 일을 회상할 때 나타나는 감마파로 알려진 뇌파 활동이 증가한 것이다. 이는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순간에 뭔가를 체험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죽음 직후 혼백이 몸을 완전히 떠나기 전까지도 자기애(自己愛)가 머문다고 한다. 그만큼 자기에 대한 연민과 애착은 우리의 본래 모습이다. 인간 스스로는 어쩔 수 없는 굴레이니 차라리 이 불안한 존재의 본능에 순응하고 받아들이자. 다만 이것에 너무 빠져 있지 않게 균형을 잡는 것, 나아가 그 마음을 타인으로 확장할 수 있다면 더 좋다. 나를 챙기는 것만큼 타인을 챙길 수 있는 마음.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를 넘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도 있지 않은가. 사랑이 바로 평화의 주춧돌이고 이것이 부족하면 관계의 균열이 생겨 미움의 싹이 튼다. 문학과 영화, 밴드의 이름에서도 '사랑과 평화'와 '전쟁과 평화'라는 단어들이 서로 짝으로 대칭을 이루지만 결론은 평화로 모여진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미 수많은 모순과 결과들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모든 것은 마음이 문제다. 스스로 내려가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자. 그 마음에서 요동치는 이기와 탐욕을 어느 선에서 끊어낼 수 있는 지혜와 결단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러한 조화와 균형이 깨진 극단적인 상태가 치명적인 질병, 암(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혼자 영원히 살겠다는 이기의 끝판왕 암세포에 끌려다닌 게 결국 화근인 셈이다. 온몸을 오염시켜 혈관과 장기들을 막아 다른 세포들을 굶어 죽게 하고 결국 자신도 몸과 함께 사망하는 것이 바로 공멸을 지향하는 암의 속성이다. 끊임없는 욕망과 이기의 종말이다. 삶의 끝은 결국 죽음이지만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는 그래서 중요하다. 그래야 우리는 비로소 잘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화즉심(畵卽心). 그림은 곧 마음이다. 동양 회화의 오랜 진리 같은 문구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 체화된 감각이 바로 핵심이다. 수묵화는 대상의 외형보다 뜻을 중시한다. 그린 이의 의도가 그림에 반영돼 나오기에 사람과 그림이 동일시될 수밖에 없다. 같은 시대를 살았어도 이완용과 안중근의 글씨를 다르게 평가하는 이유다. 미움과 마음은 점 하나 차이다. 점 하나가 어디에 붙는가에 따라 미움이 되기도 하고 마음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점 하나를 어디에 놓고 살아야 하는지 글자 자체가 이를 보여준다. "사랑 참 어렵다. 많이 아프다." 이승철의 노래 가사처럼 평화로 가는 길은 이 무겁고 어려운 점 하나를 어디에 찍는가에 달렸다. 삶이 끝나는 그 시점에 우리 뇌에선 과연 어떤 장면이 흐를까.
2026-09-16 06:30:00
[사설] 성범죄 피해자 보호, '자구 수정'만으로 넘어갈 문제인가
국회 성평등가족위원회는 15일 검사의 직접수사권·보완수사권 폐지를 골자(骨子)로 한 형사소송법 개정에 따른 후속 법안들을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의결했다.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인신매매 등 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서 수사 주체에 관한 문구를 수정한 게 핵심이다. 이에 따라 검사는 송치된 사건에서 스스로 보완수사를 하지 못하고 경찰에 보완수사를 요구한 뒤 다시 그 결과를 받아 기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그 기간 동안의 피해자 보호 공백 우려를 감안해 청소년 대상 성범죄는 사건 전부를 검사에게 넘기는 '전건 송치'를, 인신매매 사건에 대해선 검사의 사실관계 확인·면담 제도를 도입하는 내용을 새로 담았다. 형사소송법 개정안은 지난 7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지난달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공포됐고, 이날 여당 주도로 후속 법안이 처리됐다. 1954년 형사소송법 제정 이후 72년간 유지된 검찰의 직접 수사 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는 조치다. 그런데 이러한 중차대한 재편 상황에서 이를 뒷받침할 세 개 법률의 후속 조치가 '자구(字句) 수정' 수준에서 처리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아동·청소년 성범죄, 성매매, 인신매매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확인과 초기 대응 속도가 무엇보다 중요한 사건이다. 정말 단어 몇 개 고치는 것으로 정리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궁금하다. '전건 송치'나 검사의 '사실관계 확인·면담 제도' 도입도 얼핏 보완 장치처럼 보이지만 뒤집어 보면 보완수사권 폐지가 만들어낼 공백(空白)을 위원회 스스로 인정한 것과 다름없다. 실제로 작동할 구체적 매뉴얼이나 인력, 예산이 제대로 마련됐는지도 알 수 없다. 경찰과 검사 사이에 사건이 오가는 동안 피해자가 진술을 반복하거나 대응이 지연되는 이른바 '사건 핑퐁' 우려는 이미 학계와 실무에서 꾸준히 제기돼 온 사안이다. 이런 우려에도 야당 없이 여당 단독 의결로 통과시켰다. 국민의힘 소속 위원들은 이날 피해자 보호 공백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처리해서는 안 된다며 퇴장해 표결에 불참했다. 그러나 여당 간사인 이수진 의원은 이날 의사 일정이 여야 합의에 따른 것이고, 이번 법안은 앞선 형사소송법 개정 당시 국민의힘이 제기한 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며 위원장에게 법안 상정(上程)을 요청했다. 여당, 야당 모두 무책임하다. 일정을 합의했다는 것과 법안 내용까지 동의했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특히 여성과 청소년, 인신매매 피해자의 권익을 다루는 상임위에서조차 여야가 내용을 함께 만들지 못하면 피해는 약자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검찰개혁이라는 큰 틀의 방향을 되돌리기는 이제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후속 법안은 아직 국회 본회의 처리와 시행령 마련이라는 절차가 남아 있다. 약자와 피해자 보호에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이제라도 성평등위는 부대 의견(附帶意見)을 통해 경찰의 보완수사 이행 기간에 성범죄·인신매매 피해자가 방치되지 않도록 하는 구체적 이행 계획을 정부에 요구해야 한다. 또 개정안 시행 이후 전건 송치와 확인·면담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정기 점검하는 장치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2026-09-16 05:00:00
[사설] 김승원 의혹도 문제, 맹탕 청문회도 문제 지명 철회가 맞다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 국회 인사청문회는 공직 후보자의 자질과 도덕성을 검증(檢證)하는 자리가 아니라, 정치적 변명과 맹탕 청문회로 흘러갔다. 국민의힘이 신청한 증인을 더불어민주당이 모두 거부해 '증인 0명 청문회'를 만들고, 후보자 역시 제출 요구된 자료 중 약 65%를 제출하지 않았을 때 예견(豫見)됐던 바다. 민주당과 김 후보자가 청문회를 의혹 해소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하루만 견디면 되는 자리로 세팅한 결과라고 본다. 김 후보자는 자신의 식약처 청탁 의혹과 관련해 혐의를 털어내기는커녕 검찰 내부 자료 유출 경위를 밝혀야 한다며 한동훈 무소속 의원을 향해 위법성 공세를 펼쳤다. 의혹을 깔끔하게 설명하기는커녕, 자료 수집의 불법성을 따지며 논점(論點)을 흐린 것이다. 또 자신에게 민원을 전달한 브로커 양모 씨에 대한 검찰 수사에 대해 "선별 수사" "정치 수사"라고 폄훼(貶毁)하고, 알선뇌물약속 혐의 기소유예에 대해 "쪼개기 기소"라고 주장했다. 언론 보도에 대해서는 "일부 언론사에 미운털이 박혔다"면서 악의적 보도로 치부했다. 청문회가 열리기 전에는 공세를 피하기 위해 '청문회에서 소상히 설명하겠다'고 말해 놓고 막상 청문회가 열리자 변명과 역공을 펼친 것이다. 배우자와 자녀가 관련된 발달장애인 돌봄 협동조합 특혜(特惠) 의혹에 대해서도 객관적 증거와 자료로 명백히 해명하기보다는 아내의 성실성과 발달장애인에 대한 헌신, 자식에 대한 애틋한 감정 등 감성(感性)에 호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 후보자는 국회 법사위원으로 변호사들의 음주운전에 대해 엄벌을 주장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의 음주운전 판결문 청문회 제출 요청에 대해서는 '개인정보'를 핑계로 거부했다.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김 후보자 측은 민주당 청문위원들에게 '인사청문 대비 예상 Q&A' 문답집을 제공했다고 한다. 여당 의원들이 국민을 대신해 공직 후보자의 자질과 도덕성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후보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자리를 깔아준 셈이다. 준비된 답안에 맞춰 질문을 하는 식이니 국민 우롱(愚弄)이다. 청문회가 그렇게 흘러가니 브로커 양 씨와 후보자가 어떤 관계인지, 제넨셀 설립자 구속영장 기각 판사와 브로커가 왜 어울렸는지, 배우자의 협동조합 특혜가 사실인지 아닌지, 제넨셀 대표 구속영장을 기각한 판사 아들의 국회의원실 채용은 어떤 경위(經緯)로 이루어졌는지, 이재명 대통령 공소를 취소할 것인지 등 각종 의혹과 궁금증이 명쾌하게 해소되지 않고 후보자의 변명만 남는 것이다. 김 후보자는 대통령 공소취소를 위한 의원 모임을 이끄는 등 공소취소를 강하게 주장하더니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직후에는 "공소취소를 지휘할 생각이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청문회 서면 답변서에서는 공소취소에 대해 '가정적(假定的) 상황에 대해 말씀 드리기 어렵다'고 했다. 말이 수시로 바뀌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법치와 공정(公正)이 어느 분야보다 중요한 법무부 장관직에 어울리는가. 이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지명 철회(撤回)로 공직 사회에 법치와 공정이 살아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김 후보자가 숱한 의혹을 털어내지 못한 채 법무부 장관직에 오른다면, 국민들은 질타(叱咤)의 시선을 김 후보자에서 이재명 대통령에게로 옮길 것이다.
2026-09-16 05:00:00
[관풍루] 중동 사태 격화하면서 국제 유가가 배럴당 120달러를 넘어서는 가운데 정작 한국에서는 7월 휘발유 소비량이 역대 7월 최고치 기록 갈아치워
○…중동 사태 격화하면서 국제 유가가 배럴당 120달러를 넘어서는 가운데 정작 한국에서는 7월 휘발유 소비량이 역대 7월 최고치 기록 갈아치워. 최고가격제를 통한 정부의 인위적 가격 통제가 불러온 비정상적 시장 신호. ○…점심 식사 한 끼에 1만원이 훌쩍 넘는 등 '런치플레이션'이 이어지면서 최근 2천500원짜리 반줄 김밥의 수요가 늘고 있다고. 이젠 고작 김밥 한 줄도 마음껏 못 사 먹는 세상이라니! ○…재정 비상이라며 예산 깎더니 12억원 관사 혼자 사용 논란에 휩싸인 추미애 경기지사. 사퇴 청원이 3만 명을 돌파하자 서둘러 소통 차단. 비상 상황이면 도지사부터 예산 절감에 앞장섰어야지.
2026-09-16 05:00:00
2026-09-15 19:01:19
[사설] 패가망신한다더니, 범죄 의혹 범벅 김승원 임명 강행하나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하루 앞둔 14일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김 후보의 배우자가 대표로 있는 복지기관이 수원시 방과후활동 서비스 제공 기관으로 선정되는 과정에서 평가 점수를 조작해 특혜(特惠)를 줬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경쟁업체 고의 탈락을 위해 '부당한 0점'을 남발한 증거도 제시했다. 김 후보에게 또 하나의 의혹이 추가된 셈이다. 김 후보는 지난달 30일 지명된 이후 재산 신고 누락, 종합소득세 지각 납부, 자녀 위장 전입, 미성년자 성폭행 가해자 변호 이력, 변호사 시절 음주운전 등 각종 논란(論難)에 휩싸였다. 이 정도만 하더라도 김 후보는 정의와 공정, 인권을 담당하는 주무 부처의 장관으로서 부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런데 김 후보가 유흥주점 점주 출신 브로커 양모 씨의 청탁을 받고, 당시 식약처장에게 제약사 제넨셀의 코로나19 신약 임상시험(臨牀試驗) 계획 승인 로비를 했다는 구체적 정황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제넨셀의 '가짜 신약'이 93명을 대상으로 임상시험까지 진행된 충격적 사실도 밝혀졌다. 게다가 제넨셀 창업주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부장판사의 아들이 김 후보의 의원실 입법 보조원으로 채용됐던 것도 드러났다. 김 후보와 여성 브로커 양모 씨, 구속영장을 기각한 부장판사가 함께 찍은 셀카 사진도 국민 앞에 공개됐다. 부정부패·비리 냄새가 풀풀 풍기는 최악(最惡)의 법무장관 후보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신약 임상 승인을 주가조작에 이용했다는 정황이 밝혀졌고, 3만 명에 이르는 소액주주들이 지금도 피해(被害)를 호소하고 있다. "주가조작 하면 패가망신(敗家亡身)한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말을 되새겨보면 김 후보는 법무장관에 임명되어서는 안 된다. 여당이 장악한 국회 법사위는 증인 없는 청문회를 만들어 변명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여권이 민심에 역행해 김 후보 임명을 강행한다면 무한 책임(無限責任)을 져야 한다.
2026-09-15 05:00:00
[사설] 청와대 인사 기준, 사적 관계·사익 아닌 국익이 되어야 한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야합과 꼼수로 두 번이나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었고, 장관과 비례대표 국회의원 겸직 특혜를 누리려다가 낙마했다면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여러 흠결(欠缺)에도 '이재명 대통령 공소취소'를 위해 발탁(拔擢)됐다는 분석이 많다. 청와대는 '용 의원이 장관과 비례대표 의원직을 다 갖겠다고 할 줄 몰랐다'고 했지만 과연 몰랐을까? 기본소득당이 국회의원을 보유한 정당에 주는 '국고 지원'을 포기할 것이라고 믿었다는 말인가? 청와대는 또 '용 의원이 성별·세대 갈등을 극복할 적임자'라고 주장했지만 '특혜' '갈등' 논란을 예상하고도 지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용 의원이 자신에 대한 비판 여론에 휘둘리는 더불어민주당을 향해 유감(遺憾)을 표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니 인사 시스템은 작동했지만 그 시스템을 능가하는 힘(진영 논리 또는 사적 관계)이 작용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용혜인 지명과 관련해 일각에서 김현지 제1부속실장이 배경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김승원 후보자는 ▷코로나 신약 임상시험 승인 청탁 ▷제넨셀 창업주 구속영장 기각 판사 아들을 의원실 보조원으로 채용 ▷배우자 운영 발달장애아동 협동조합 특혜 의혹 ▷음주운전 등 논란이 많다. 이 역시 청와대 인사 검증 시스템이 파악하지 못했을 리 없다고 본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지명했고, 김민석 민주당 대표는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잘된 인사라고 판단된다. 지키겠다"고 했다. 김승원 후보자를 지키자면 정부·여당은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하는데 그 '출혈'을 감수(甘受)하겠다고 한다. '이 대통령 사건 공소 취소'라는 미션 완수를 위해 여론의 강한 반대, 정부·여당의 지지율 폭락까지 떠안겠다는 것이다. 상식과 국민의 뜻보다 사익(私益)이 우선인가? 인사가 국익과 상식이 아닌 사적 이익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인사 참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지지율은 계속 떨어질 것이고 정권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지금부터라도 인사 기준을 사적 관계나 사익이 아니라 국익에 맞춰야 한다.
2026-09-15 05:00:00
[사설] 정부, 원화 강세 따른 中企·금융 불안 대비해야
원·달러 환율이 불과 두 달여 만에 200원 넘게 떨어지는 등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지난 7월 초 1천550원을 웃돌던 환율은 이달 들어 1천340원 선까지 떨어지는 등 원화 가치가 15% 이상 급등했다. 같은 기간 달러 가치가 거의 제자리걸음을 하고 엔화 절상률(切上率)이 5% 수준에 그친 점을 감안하면 원화의 강세 폭은 독보적이다. 1천500원대 환율이 뉴노멀이 되는 것 아니냐며 고환율 쇼크를 걱정하던 기업들이 이제는 원화 강세를 걱정하고 있다. 여기에는 올해 1~8월 2천800억 달러를 넘어선 반도체 수출 흑자가 핵심 배경이 됐다. 수출 호조로 벌어들인 대규모 달러가 외환시장에 풀리면서 원화 가치를 끌어올린 것이다. '반도체 호황'의 역설(逆說)이다. 원화 강세가 원유와 원자재 등 수입 가격을 낮춰 기업의 비용 부담과 물가 압력을 덜어주고, 해외 유학·여행 등 가계 외화 지출 부담을 줄여주는 측면도 있다. 문제는 환율의 급변동이 실물경제와 기업 실적에 가하는 충격의 크기와 속도다. 당장 수출 주력 기업들의 수익 기반을 흔들고 있다는 점은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더욱 우려스러운 대목은 예측 불가능한 환율 널뛰기가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중견기업과 금융시장 전반으로 불확실성을 확산시킨다는 점이다. 특히 환헤지 수단이 부재한 중소 수출기업들은 수익성이 악화할 수밖에 없다. 환차손 우려가 커지면 국내 증시 및 채권 시장에서의 외국인 투자자 자금 유출입이 급격해져 금융시장의 불안정을 부추긴다. 정부와 외환 당국은 외환시장의 수급 불균형과 투기적 쏠림을 완화하는 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 기업들이 안정적인 투자와 수출 전략을 수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시급하다. 급격한 환율 변동이 우리 경제의 성장 동력을 훼손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2026-09-15 05:00:00
[관풍루] 김민석 대표, 14일 이재명 대통령을 향한 당내 일각의 비판에 "노무현 대통령 시절 안팎에서 힘을 합쳐 탄핵하려 했던 전조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대표, 14일 이재명 대통령을 향한 당내 일각의 비판에 "노무현 대통령 시절 안팎에서 힘을 합쳐 탄핵하려 했던 전조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자신도 노 전 대통령을 버려 본 처지라 그 심정을 잘 알 터. ○…국회 법사위 여당 간사 김의겸 의원, 14일 법무장관 후보자의 각종 의혹에 "이슬만 먹고 사는 분을 후보자로 고를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언급. 같은 이슬을 먹고도 독사는 독을, 젖소는 젖을 만드는데…. ○…대구시와 경북도가 14일 국회 계류 중인 '대구경북 행정통합 특별법'의 정기국회 통과에 힘 모으기로 공감. 일단 통합하고 보자는 식 대신 통합 후 대구경북의 모습과 비전부터 먼저 보여 주시길.
2026-09-15 05:00:00
2026-09-14 18:47:02
[화요초대석-이정훈] '제청'과 '사퇴'와 '不동의'의 정치학
더불어민주당 대표 선거에 '명픽'으로 투입된 전 국무총리 김민석 후보는 과반을 얻지 못하고 '친명'인 3위 후보 표의 '2차 선택'을 보탠 결선 집계로 겨우 당선됐다. 최고위원 선거에서는 두 명의 '친명' 후보가 이재명 대통령의 '오른팔'인 김용 후보 지지를 밝히며 사퇴했는데도, 김 후보는 낙선했다. 김민석 민주당 대표는 이진숙·한동훈 의원의 '아웃'이 어려울 것 같자, '국회의원 직무정지'를 넣은 쪽으로 국회법을 개정해 이들의 의정 활동을 정지시키고자 할 정도로 반야(反野) 투쟁에 '너무' 열심이다.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었던' 용혜인 후보 사건은 그의 사퇴로 뱉을 수'는' 있게 됐다. 하지만 '보약'으로 보고 삼킨 것도, '독약'으로 알고 뱉은 것도 그들이었으니, 이를 잘했다고 할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이 대통령 지지율이 축축 처지고 있다. 이런 사태를 가속한 계기는 '제청'이라고 본다. 한성숙 국무총리는 야당 의원의 질의에 김승원·용혜인 후보자에 대한 '제청'은 자신이 했다고 밝혔다. 헌법은 국무위원에 대한 제청은 총리의 고유 권한으로 해놓았다(87조 ①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총리가 제청한 국무위원은 누구도 거부할 수가 없다. 국회는 청문회를 열지만 '통과의례'일 뿐이다. 대통령은 임명을 늦출 수는 있어도 거부하진 못한다. 헌재가 한덕수·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적법한 과정으로 선정된 헌재 재판관을 임명하지 않은 것을 위헌·위법으로 판단했으니, 대통령은 '지나친 임명 지연'도 할 수가 없다. 헌법에는 재제청에 대한 규정이 없어, 제청한 것은 물릴 수도 없다. 방법은 '단 하나' 후보자의 사퇴뿐인데, 용 후보자는 이를 해 당황한 정권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가 사퇴하지 않았다면 이 대통령은 '무조건' 그를 장관에 임명했다가, 헌법 87조 ③항에 따라 한 총리가 '해임 건의'를 해주면 이를 받아들여 해임할 수 있을 뿐이었다. 국무위원을 '사실상' 결정하는 제청권이 총리에게 있다면, 피(被)제청 인물을 추천해 주는 조직도 총리에게 있어야 하는데, 없다. 총리 산하의 인사혁신처는 장관 후보자를 추천하지 못한다. 이 추천은 법적 근거 없이 대통령실의 인사수석이 맡고 있다. 대통령의 참모인 인사수석이 국무총리에게 장관 후보자를 추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놀랍게도 우리의 헌법과 법률은 국무총리가 추천해 주는 기관도 없이 사실상 국무위원을 정하는 '제청권'을 독단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해놓았다. 한 총리는 이를 행사했다가 용혜인 사퇴라는 망신을 당하고 정권에 부담을 줬으니, 대통령과 여당은 그에게 책임을 묻고 총리는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하는데, 희한하게도 없다. 이와 매우 다른 것이 대법관 제청이다. 대법관은 헌법 104조 ②항에 따라 대법원장이 제청하면 국회는 동의·부동의로 판단을 하고, 국회가 동의했으면 대통령은 '무조건' 임명하게 돼 있다. 헌법 어디에도 대통령이 제청된 대법관을 거부할 수 있다는 규정은 없기 때문이다. 그의 임명을 막는 것은 국회의 부동의뿐이다.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은 총리의 국무위원 제청처럼 '막' 하지도 않는다. 법원조직법 41조의 2 등에 따라 행정부의 법무부 장관도 참여하는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를 만들어, 여러 곳에서 천거한 이를 검토해 복수의 후보자를 추천한다. 대법원장은 피추천된 이들만 놓고 대법관 회의를 열어 한 사람을 골라 제청한다. 대법관 후보자는 국무위원 후보자보다 훨씬 더 엄격한 과정을 거쳐 제청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법적 근거를 밝히지 않고 두 차례나 재제청을 요구했다. 대법원은 우회적으로 '재체청 불가'를 밝히며 거부했다. 양쪽은 헌법에 있는 제청에 대한 해석을 놓고, '지면 무너질 수도 있는' 대단한 기싸움에 들어간 것이다. 이 대립을 피하려면 제청된 후보자의 사퇴나 유고 또는 민주당이 다수인 국회의 '부동의'가 있으면 되겠지만, 그 후폭풍은 만만찮을 것이다. 헌재에서도 대통령의 재제청이 묵살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더 큰 후폭풍이 일 것이다. '낮은 지지율'의 대통령이 제청권 행사에 실패한 총리는 놔두고 적법하게 대법관을 제청한 대법원장에 다시 하라고 다그치는 것은 논리 모순이자 법 위반이며 현명한 행동이 아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2년 전처럼 '겪어보지 못한' 정치 대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2026-09-14 18:30:00
용광로의 도시 포항을 뜨겁게 달궜던 온기가 식어가며 사람들의 마음마저 차갑게 가라앉히고 있다. 포스코가 창사 58년 만에 첫 파업을 겪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파업은 11일 오전 끝났지만, 이것으로 모든 갈등이 끝난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나는 포항에서 나고 자랐다.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고, 지금도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현재는 죽도시장 한복 골목에서 로컬 편집숍을 운영하며 지역의 이야기를 콘텐츠로 만들고 있다. 포스코에서 일하지 않지만 이번 사태가 결코 '남의 회사'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미 또래 친구 대다수가 포항을 떠났다. 포스코 말고는 일할 만한 곳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도시에는 '그래도 포스코는 남아 있다'는 믿음이 오랜 세월 깔려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매일 아침 죽도시장으로 출근할 때마다 피부로 와닿는 서늘함이 있다. 불황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뉴스 속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는 매출로, 손님 수로 느껴진다. 주변 상인들의 깊어지는 한숨은 상경하지 않기로 결심한 청년에게 남의 일이 아닌, 어느 순간 나의 한숨이 된다. 그래서 지금 포스코 노사 갈등을 지켜보는 마음은 더 절박하다. 뉴스 한 줄에 도시 전체가 술렁인다. 노사 갈등은 어느새 한 기업과 노조 사이의 문제를 넘어 포항 전체를 흔드는 불안이 됐다. 두 주체만의 문제였다면 온 도시가 이토록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포스코의 갈등은 이미 이 도시 모두의 문제가 되었다. 노동조합에 무조건 양보하라는 뜻은 아니다. 정당한 권리를 말하는 노조의 입장은 존중해야 마땅하다. 동시에 회사가 처한 현실 역시 모른 척할 수 없다. 다만 솔직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2차 파업 소식이 결코 반갑지만은 않다. 이 싸움이 누구 하나 이기지 못하는 진흙탕 싸움으로 길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어떻게든 버텨온 포스코마저 더 휘청인다면 '그래도 포스코는 있다'는 믿음마저 얇아질 것이다. 청년들이 이 도시에 남을 이유 역시 하나씩 사라진다. 협상이 길어질수록 상처 입는 것은 노사 양측만이 아니다. 명절 대목을 앞둔 죽도시장 상인들, 그리고 이 도시에서 버텨보려는 청년들의 마음도 함께 얼어붙는다. 포스코에도 전하고 싶다. 회사는 오랜 세월 지역사회가 보내준 묵묵한 신뢰 위에서 성장했다. 재무제표에 기록되지는 않지만, 회사를 지탱해 온 가장 튼튼한 뿌리였을 것이다. 현장의 목소리를 걸림돌로만 여긴다면 그 뿌리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 뿌리가 흔들리면 고향에 남기로 한 청년들의 결심 역시 함께 흔들린다. 쇳물을 녹이는 뜨거운 용광로는 식더라도 다시 불을 지필 수 있다. 하지만 한 세대가 이 도시를 등지기로 마음먹은 뒤에는 그 마음을 되돌리기가 훨씬 어렵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순진하거나 이기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말하고 싶다. 죽도시장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상경 대신 포항에 남기로 한 청년으로서 바라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포항이 청년에게 떠나야 할 이유를 보태는 도시가 아니라, 남아도 괜찮은 도시였으면 한다. 용광로의 불이 꺼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 불빛을 바라보며 이 도시에 남기로 한 청년들의 마음까지 함께 식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의 포항이 그저 수확 가득한 가을을 보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2026-09-14 16:30:00
[윤명철의 다시 보는 한국역사와 문화] 동아시아 국제대전의 대단원
지금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 군대가 파미르를 넘어 점령했던 파키스탄의 소발률국(길기트)을 보고 쿤자랍 패스를 넘어 카슈카르를 거쳐 투르판에 와있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직전인 640년에 멸망시켰던 고창국의 수도이다. 이제는 우리 역사를 거시적으로, 유라시아 세계와 연동시켜 해석해야 한다. ◆나당전쟁과 동부 유라시아 질서의 재편 668년 음력 9월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는 끝내 붕괴했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수나라를 공격한 598년부터 이어진 동아시아의 그레이트 게임도 끝난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백제와 고구려가 사라지자 그 빈 공간을 누가 차지하고 어떤 질서를 만들 것인가를 둘러싼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 공동의 적을 공격했던 신라와 당은 곧 적으로 돌아섰다. 670년부터 676년까지 벌어진 '나당전쟁'이다. 그러나 이 전쟁을 신라와 당 두 나라가 한반도의 영토를 놓고 싸운 전쟁으로만 이해하면 본질을 놓친다. 고구려 유민과 백제계 주민들이 참여했고, 당은 말갈과 거란 등 동북방 여러 집단의 군사력을 동원했다(서영교). 경기만과 금강 하구에서는 수군이 맞섰다. 같은 시기 서쪽에서는 왕이 바뀐 토번이 당을 압박했고, 북방에서는 돌궐 세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663년 백강전투에서 패한 왜국도 국가체제를 재편하면서 670년에 '일본'이라는 새 국호로 국제무대에 등장했다. 결국 나당전쟁은 고수전쟁, 고당전쟁, 소위 삼국통일 전쟁의 뒤를 이은 동아시아 국제대전의 제4단계이자 대단원이었다.(고구려해양사연구) ◆승전한 동맹국들은 왜 다시 싸웠나신라와 당은 처음부터 목적이 달랐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에서 살아남고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고 당과 손을 잡았다. 반면 당은 고구려를 무너뜨린 뒤 요동과 한반도를 제국의 동방질서 안에 편입시키려 했다. 당은 백제의 옛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했고, 고구려 멸망 뒤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신라에도 계림대도독부라는 이름을 붙였다. 신라는 당의 제국질서에 들어갈 것인가, 세계제국과 다시 싸울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고, 결국은 후자를 선택했다. 670년에 신라 장군 설오유와 고구려의 고연무는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오골성(단동 외곽의 봉황성) 방면으로 진출했다. 불과 2년 전에 신라는 당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이제는 고구려 유민과 손잡고 당과 싸웠다. 적과 동맹의 조합이 뒤집힌 것이다. 나당전쟁은 단순한 양국전이 아니라 국제전쟁의 또 다른 재편 국면임을 보여준다. ◆멸망한 고구려가 다시 전쟁의 주체가 되다국가는 멸망했지만 터와 사람과 기억, 군사경험과 정치적 의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검모잠·고안승·고연무 등을 중심으로 고구려 복국전쟁이 일어났고, 신라는 보장왕 의 서자인 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해 익산인 금마저에 자리 잡게 했고, 이어 보덕국으로 재편했다. 신라가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인 데에는 현실적인 전략이 강했다. 고구려인들은 오랫동안 수·당과 싸우며 성곽전과 산악전, 장거리 방어전에 익숙했다. 그들의 대당 적대감과 경험은 신라에게 중요한 전쟁자산이었다. 이 때문에 나당전쟁은 고당전쟁의 연속이기도 했다. 고구려라는 국가는 사라졌지만 고구려인의 대당전쟁은 신라와 결합해 계속되었다. 신라는 어제의 적을 오늘의 동반자로 바꾸었다. 군사적 필요에서 시작했지만 이것은 훗날 고구려·백제계 주민들을 신라 체제 안에 받아들이는 통합으로 연결됐다. ◆말갈과 거란, 또 다른 전쟁 주체당군도 단일한 중국인 군대가 아니었다. 당은 광대한 제국을 운영하면서 돌궐·철륵·거란·말갈 등 여러 집단을 군사력으로 활용했다. 나당전쟁에서도 말갈군은 당군과 함께 신라와 싸웠고, 거란계 병력도 동북방 군사체제에 동원됐다. 실제 전쟁구도는 '신라 대 당'보다 훨씬 복합적이었다. 신라군과 고구려계 세력, 백제 옛 지역의 주민들이 한쪽에서 움직였고, 다른 쪽에서는 당의 정규군과 안동도호부 세력, 말갈·거란 군사집단이 움직였다. 7세기 동북아시아는 오늘날의 고정된 국경과 민족 범주로 설명하기 어려운 다종족·다중심 세계였다. 이때 고구려 유민과 말갈의 결합은 뒤에 발해를 건국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나당전쟁은 이미 다음 시대의 동북아 질서를 품고 있었다. ◆670년, 동서 양쪽에서 동시에 흔들린 당신라가 당을 상대로 버틸 수 있었던 배경에는 더 큰 유라시아 국제정세가 있었다. 7세기 중반 당의 세력은 절정에 올랐다. 630년 동돌궐을 무너뜨렸고 657년 서돌궐마져 격파해 중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했다. 동쪽에서는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그 절정기에 균열이 일어났다. 토번이 성장해 청해 지역과 타림분지로 진출했고, 670년 당군은 대비천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당연히 안서 4진의 지배권도 흔들렸다. 놀랍게도 이 해가 나당전쟁이 본격화된 해다. 동쪽에서는 신라와 고구려 유민이 당에 도전했고, 서쪽에서는 토번이 중앙아시아의 당 질서를 흔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토번 때문에 신라가 이겼다"고 할 수는 없다. 당은 670년대에도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했다. 토번은 신라 승리의 직접 원인이라기보다 당이 한반도에 모든 힘을 집중하지 못하게 만든 중요한 국제적 조건이었다. ◆돌궐과 유라시아 질서의 재편돌궐 문제는 연대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다. 제1돌궐제국은 630년에 무너졌고 서돌궐도 657년 크게 해체됐다. 따라서 나당전쟁에서 독립된 돌궐제국이 신라를 직접 도왔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북방의 불안정은 계속됐다. 679년 이후 돌궐계 반란이 커졌고 682년에 제2돌궐 제국이 성립했다. 나당전쟁 직후에 당의 북방질서도 흔들리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서남의 토번, 북방의 돌궐, 동북의 고구려 유민·말갈·거란, 동쪽의 신라가 각자의 공간에서 움직이면서 660년대 당이 거의 완성한 듯 보였던 일극적 유라시아 질서는 다시 다극화됐다. ◆백강의 패전과 '일본'의 등장일본열도의 변화도 이 국제대전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663년 백강전투에서 백제·왜 연합군은 나당연합군에게 참패했다. 이후 왜국은 대마도·이키·규슈와 세토내해의 방어를 강화하고, 한반도에서 건너간 백제계 기술자와 지식인을 활용했다. 외침의 공포는 중앙집권과 율령국가 건설을 재촉했다. 그리고 670년 전후 '일본'이라는 국호가 국제기록에 나타난다. 백강 패전과 백제·고구려 멸망이 왜국의 국가 정체성 재편에 강한 충격을 준 것은 분명하다. 7세기 국제대전은 한반도의 국경만 바꾼 것이 아니라 바다 건너 왜국의 정치체제와 대외정체성도 변화시켰다. ◆신라는 어떻게 세계제국을 막았나신라는 처음부터 승리한 것이 아니다. 672년 석문(황해도 서흥)전투에서는 크게 패했다. 이후에 전쟁방식을 바꾸었다. 당군과 넓은 평지에서 정면결전을 하기보다 산성과 강, 좁은 통로를 활용하면서 장기전으로 전환했고, 당의 병참과 이동로를 끊는 데 힘을 쏟았다.당군은 요동과 평양을 거쳐 남하하거나 산동반도에서 황해를 건너야 했다. 말·무기·식량을 긴 거리로 공급해야 했다. 반면 신라는 자기 생활권에서 싸우며 산성과 하천·산악로·해안을 활용할 수 있었다. 고구려가 수와 당을 상대로 사용했던 '거리와 병참의 전쟁'을 신라도 이어받은 것이다. 675년 매소성(경기 연천) 전투는 분수령이었다. 『삼국사기』는 이근행의 당군을 20만 명으로 기록한다. 숫자의 정확성은 검토가 필요하지만 대규모 원정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신라는 당군을 물리치고 많은 군마와 무기를 노획했다. 동시에 서해에서도 당 수군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676년에는 금강 하구인 기벌포에서 해전이 벌어졌다. 신라 수군은 여러 차례 격전 끝에 당군을 물리쳤다. 660년 당 수군이 이 서해와 금강 하구를 이용해 백제를 공격했는데, 16년 뒤에는 신라가 같은 바닷길에서 당군을 막아낸 것이다. 매소성과 기벌포는 육지와 바다의 서로 다른 전투였지만 하나의 전략으로 보아야 한다. 신라는 북방 육상 진입축과 황해 해상축을 동시에 차단했다. 나당전쟁의 승리는 성 하나를 지킨 승리가 아니라 당의 해륙 복합전선을 끊어낸 승리였다. ◆전쟁과 외교를 함께 사용하다신라의 승리에는 외교도 중요했다. 신라는 당과 싸우면서도 외교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았다. 문무왕은 설인귀와 서신을 주고받고 당 황제에게 사죄사절도 보냈다. 674년 당의 고종이 문무왕의 관작을 빼앗고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압박했을 때에도 신라는 군사적으로 저항하면서 외교적 출구를 열어두었다. 싸우되 관계를 끊지 않고, 저항하되 상대의 체면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았다. 신라는 당보다 국력이 강해서 이긴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공간에서 전쟁 지속능력을 높이고, 고구려 유민을 끌어들이며, 해륙의 병참로를 끊고, 국제정세와 외교를 함께 이용해 상대의 힘을 분산시켰다. 약소국이 대제국을 상대할 때 필요한 것은 상대보다 더 큰 힘이 아니라 힘이 작동하는 조건을 바꾸는 전략이었다. ◆군사적 승리에서 사람의 통합으로676년 당군을 밀어냈다고 통일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오랜 전쟁은 국토를 황폐하게 했고 백제·고구려·신라 사람들 사이에는 적대와 불신이 남았다. 이제 신라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영토보다 사람이었다. 신라는 우선 고구려와 백제 유민에게 관직을 주고 군사체제에 편입시켰다. 뒤에 정비된 9서당에는 신라인뿐 아니라 고구려·백제계와 말갈계 사람들도 포함됐다. 지방제도도 확대된 영토와 주민을 관리하는 방향으로 재편됐다. 불교와 사찰, 원효·의상 등의 사상 활동 역시 전쟁 뒤 사회를 통합하고 공동의 정신세계를 만드는 데 작용했다. 신라의 통일은 두 단계로 볼 필요가 있다. 첫 단계는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군사적 통합이었다. 두 번째는 나당전쟁을 거쳐 외부의 직접지배를 막고 서로 적대했던 주민들을 하나의 정치공동체에 편입시키는 과정이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통일의 끝이 아니라 통합의 시작이었다. ◆한민족사와 동아시아사에서 무엇을 남겼나한민족사의 장기 흐름에서 나당전쟁의 가장 큰 의미는 당의 한반도 직접지배를 저지한 데 있다. 신라는 이 전쟁을 통해 독립적인 정치공간을 지켰고, 고구려와 백제의 사람들을 새 체제 안에 받아들이면서 후대 한국사의 중요한 공동체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를 완전한 민족통일로 과장해서도 안 된다. 고구려의 요동과 만주 지역 대부분은 신라 영역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곳에서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세력이 다시 결집해 698년 발해를 세웠다. 따라서 나당전쟁은 통합의 완성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분화의 출발점이었다. 남쪽에서는 신라가 삼국 주민을 포괄하는 국가로 발전했고, 북쪽에서는 발해가 성장했다. 598년 수의 고구려 공격에서 시작된 전쟁은 당의 고구려 공격, 660년 백제전쟁, 663년 백강전투, 668년 고구려 붕괴를 거쳐 670~676년 나당전쟁으로 이어졌다. 약 80년에 걸쳐 적과 동맹은 끊임없이 바뀌었고, 전쟁의 범위는 요동과 한반도에서 황해·일본열도·몽골초원·타림분지와 티베트고원까지 연결됐다. 676년 기벌포의 파도가 잦아들면서 이 장기 국제대전도 한 시대의 막을 내렸다. 고구려와 백제는 사라졌지만 당의 일극적 동아시아 지배도 완성되지 못했다. 신라는 새로운 통합을 시작했고, 북방에서는 발해가 태어날 조건이 마련됐다. 왜국은 일본으로 변신했고 토번과 돌궐은 유라시아의 강국으로 다시 등장했다. 나당전쟁은 단순한 신라의 대당 승리가 아니다. 한반도의 독자적인 정치공간을 지켜낸 전쟁이면서, 동부 유라시아가 하나의 제국질서로 수렴되지 않고 여러 중심이 공존하는 방향으로 전환되는 결정적인 분기점이었다. 수십 년 동안 계속된 전쟁이 끝난 자리에서 새로운 동아시아가 시작되고 있었다.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
2026-09-14 11:25:40
[사설] 용혜인 후보 사퇴, 특혜와 꼼수 정치 바로잡는 계기 되기를
용혜인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후보직을 사퇴했다. 그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이후 비례대표 의원 겸직(兼職) 논란 등이 불거지며 비판 여론이 비등(沸騰)하고, 야당뿐만 아니라 더불어민주당에서도 사퇴 압박이 나왔다. 사퇴에 앞서 민주당은 "비례대표 의원과 장관 겸직을 두고 국민적 공감대가 넓지 못한 상황을 고려해 후보자가 결단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용 후보자는 국회의원 쪽을 택했다. 평소 여성과 평등을 내세웠지만 결국 '딸린 식구들(기본소득당)'과 '돈'을 생각한 셈이다. 여성과 평등에 관한 정책을 펼치는 데는 1석의 기본소득당보다 성평등가족부 장관직이 효과적임에도 그 직(職)을 포기했으니 말이다. 용혜인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후 의석수 감소를 피하기 위해 만든 범야권 비례위성정당(2020년엔 더불어시민당, 2024년엔 더불어민주연합)의 비례대표 후보로 두 번 국회의원이 됐고, 당선된 후 꼼수 제명을 통해 원소속 당인 기본소득당으로 돌아갔다. 애초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민주당과 정의당 등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법과 검경 수사권 조정안 통과를 위한 야합(野合·패스트트랙 공조)이었고, 그 야합을 깨고 만든 또 다른 야합이 비례위성정당 창당이었고, 거기서 또 '꼼수 제명'을 통해 용혜인을 기본소득당으로 돌려보냈다. 야합에 야합에 야합이 범벅된 결과물이 비례대표 용혜인 의원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비례대표 의원들은 장관이 되면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는 비례대표제의 의미(후보가 아니라 정당 정책 지지)와 의원직 계승으로 비례대표제의 연속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나아가 행정부 견제라는 국회의원 직무와 장관 직무(職務) 간 충돌을 피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용 의원은 '국회의원과 장관 겸직은 법률이 허용하는 원칙'이라며 겸직 특혜를 누리겠다고 나섰다가 역풍(逆風)을 맞았다. '용혜인 논란'이 우리나라 정치에서 각종 '꼼수'와 '특혜'를 바로잡는 계기가 돼야 한다. 그 시작은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 사퇴이다.
2026-09-14 05:00:00
[사설] 외교 장관의 부적절한 발언, 남의 손에 생명줄 맡기려 하나
호르무즈 파병을 두고 이재명 정부의 고심이 깊어지는 모양새이다. UAE에 파견됐던 정부 실사단이 귀국하는 등 실무 작업은 이어지고 있지만, 이 정부는 '검토' 단계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미국의 압박과 국내 좌파 세력의 파병 반대 사이에서 진퇴양난(進退兩難)에 처한 셈이다. 그런데 조현 외교부 장관은 최근 아바스 아라그치 이란 외무장관과의 통화에서 호르무즈 파병(派兵)에 대해 "결정된 것이 없다"고 했다. 이란 외교부 대변인은 앞서 7일(현지 시간) X(옛 트위터)에 "호르무즈 해협에서 군사적으로 주둔하거나 작전에 참여하는 것은 침략 행위의 당사자를 직접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으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한글로 경고한 바 있다. 조 장관의 발언은 이란 측에 '한국이 파병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만일 파병을 하지 않는다면 이란의 협박(脅迫)에 굴복하는 꼴이 되고, 파병을 한다면 이란이 느끼는 배신감(背信感)은 더욱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조 장관은 "호르무즈 해협의 자유로운 항행이 조속히 회복되는 게 중요하다"는 원칙만 거듭 강조했어야 한다. 지난 12일 540여 개 좌파 종교·시민·사회단체들은 호르무즈 파병 반대 집회를 열고, 주한미국대사관을 거쳐 청와대까지 행진을 벌였다. 범여권으로 분류되는 조국혁신당, 진보당, 사회민주당, 기본소득당도 "파병 검토 즉각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오직 국민과 국익(國益)에 더 나은 내일을 생각하며 그 길을 묵묵히 개척해 나가겠다"고 했다. 그렇다. 파병 여부의 핵심(核心)은 국익이다. 호르무즈 해협 분쟁은 '남의 일'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 원유의 70% 이상이 통과하는 생명줄을 온전히 남의 나라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일이다. 파병의 결과 못지않게 파병하지 않았을 때의 제재와 국제적 지위 하락 등 국익 손실(損失) 역시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2026-09-14 05:00:00
대구시와 경상북도가 14일 'TK 행정통합 킥오프 회의'를 갖고 국회 계류(繫留) 중인 통합 특별법 처리에 다시 힘을 모으기로 했다. 지난 2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를 통과하고도 법제사법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해 7월 통합특별시 출범 계획이 무산된 지 반년 만이다. 추경호 대구시장과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TK신공항 건설과 2차 공공기관 유치 등 지역 핵심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통합이 우선돼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를 위해 9월 정기국회 통과와 2028년 총선 시 통합자치단체장 선출 및 통합특별시 출범에 의견을 모았다. 이에 현재 국회 법사위에 계류 중인 통합 특별법의 통과를 위해 국회 설득에 역량을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국회 설득을 위해 선행돼야 할 것은 지역 내 합의다. 지난번 통합 무산의 표면적인 이유도 '지역 내 이견(異見)'이었다. 당시 추미애 법사위원장은 "대구시의회가 통합 추진을 말아 달라는 성명을 발표했다"며 "전남광주를 먼저 통합하고, 시간을 가지고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고, 이재명 대통령도 "TK는 내부 반발로 성사되지 못했다"고 했다. 아무리 국회 설득에 힘을 쏟아도 지역 내 이견 문제 해결이 선행되지 않으면 결과는 똑같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주민투표 없이 시·도의회 의결과 여론조사만으로 통합을 추진한 절차에 대한 반발도 여전하다. 국회를 설득하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반대 지역을 설득해 의견을 모으는 작업이 우선이다. 지역 합의가 선행되지 않으면 국회 설득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물론 반대 지역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없는 현실적 한계는 있다. 그렇다 해도 반대하는 주민이 납득할 수 있는 정당한 절차를 밟고, 행정통합으로 피해를 보는 지역이 있다면 최대한 구제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마음을 얻어야 한다. 정부 여당 입장에서 '지역 내 이견'보다 더 확실한 반대 명분은 없다. '지역 차별'이라고 아무리 외치고 반발해 봐도 '지역 합의'가 안 되면 또 무산이다. 이번엔 그 명분을 다시 제공하는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2026-09-14 05:00:00
○…여성가족부·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 지명 후 낙마한 인사, 김행·강선우 이어 용혜인까지 3명으로 늘어. '현역 의원 불패 공식'도 안 통하는 성평등부 수장에 도전할 다음 낙점자는 과연 누가 되려나? ○…두 달 새 10% 넘게 떨어진 원·달러 환율로 수입 물가는 내려가서 안심, 반도체 등 수출업체는 수익성 악화로 고심. 정작 걱정은 환율 수준보다 롤러코스터 변동 폭. ○…5년 새 초·중·고 학생 자살 65% 증가했고, 2~4.7배 늘어난 지역도 있다고. 2035년까지 10대 자살률 절반 줄이겠다며 지난해 정부가 내놓은 대책, 제대로 작동하나?
2026-09-14 05:00:00
2026-09-13 18:45:56
추석이 불과 2주도 채 남지 않았다. 매년 이맘때면 절반이 넘는 국민이 대이동하면서 이런저런 소식과 소문이 나라 전체에 퍼진다. 정치권으로선 추석 밥상 대화의 주제가 무엇이냐에 따라 정국 흐름이 변화할 수 있어 경쟁적으로 추석 민심 잡기에 나선다. 올 추석 민심의 주제로는 부동산 문제와 일부 장관 후보자의 부적절성,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 등이 꼽힌다. 부동산은 지금보다 어려운 적이 있었나 할 정도로 심각하다. 청년들은 잔금 대출은 물론, 전세금 상환 연장도 안 돼 살던 곳에서 쫓겨날 판이다. 소위 강남 3구는 주춤하지만, 대신 풍선효과로 서울과 수도권, 특히 삼전닉스 직원들이 많이 산다는 용인, 동탄 지구는 천정부지다. 각종 정책을 쏟아 내면서 계곡 정비나 주식시장보다 쉽다고 큰소리치던 대통령은 대부분의 정책을 철회했지만 이미 미친 듯이 올라간 가격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 놓고도 국민에게 사과는커녕 바꾸라 해서 바꿨는데 날 보고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고 오히려 국민을 나무란다. 오만의 극치가 아니면 이럴 수는 없다. 국정 지지도의 하락 추세를 반전시키기 위해 소폭 수요가 있던 상황에서 중폭 개각을 단행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일부 장관 후보자가 말썽이다. 가장 큰 문제는 용혜인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다. 지난 2019년, 공수처 신설과 검경 수사권 조정을 위해 소수당의 지원이 필요했던 민주당이 그들이 원하던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다. 이를 반대하던 당시 자유한국당은 위성정당 출현을 경고했고, 실제로 위성정당을 만들어 비례대표 의원 배분에 참여했다. 민주당도 이에 질세라 진보좌파 진영의 소수 정당과 정치세력을 연합한 위성정당을 만들었다. 선거 후 위성정당을 합당하고, 당선된 비례대표 중 소수 정당 출신들을 제명해 그들이 원소속 정당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국민은 기본소득당에 투표하지 않았는데도 이런 편법으로 기본소득당 등 일부가 원내 정당이 됐고, 그들은 국민 세금으로 매년 막대한 선거 및 정당 지원비를 받았다. 용혜인 의원은 남편까지 당직자로 만들어 가족회사가 세금을 착취한 꼴이 됐다. 그것도 모자라 장관에 지명되자 비례대표 의원직을 사퇴하지 않고 겸직하겠다고 선언해 국민의 염장을 질렀다. 국회법에 의원직과 국무위원을 겸직할 수 있어 불법이 아니라는 것이 이유인데, 그럼 왜 그동안 비례대표 의원들이 장관직에 기용되면 사퇴했을까. 지역구 의원이 사퇴하면 보궐선거를 해야 하고 그동안 해당 지역의 주민 대표성이 제한된다. 그러나 비례대표는 바로 승계가 가능해 관례적으로 겸직하지 않았다. 용혜인 의원은 욕심에 눈이 멀어 입법 의도를 살피지 못하고 생떼를 부린 것이고, 그 책임은 오롯이 임명권자인 이재명 대통령에게 있다.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도 많은 보도가 나오고 있어 짧은 칼럼에서 반복할 필요가 없지만 그나마 날짜가 잡힌 인사청문회에 증인은 한 명도 없이 후보자 본인만을 대상으로 질문한다니 이런 '팥소 빠진 찐빵'이 있는가? 아무튼 추석 밥상에서 '승원 오빠'는 꽤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것이 틀림없다. 심각한 물가와 금리 상승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강력한 호르무즈 해협 파병 및 천무 II 등 대공 방어시스템의 우크라이나 지원 요구, 3천500억 달러 대미 투자 구체화, 반도체의 미국 내 생산 요구, 심상치 않은 북한 핵 및 미사일 도발과 북러 밀착, 그리고 예상을 뛰어넘는 초과 세수에도 국가 채무를 갚지 않고 사상 최대 규모로 편성한 내년도 예산 등에 대한 걱정이 많다. 이것들 대신 부동산과 장관 인사가 추석 밥상의 주메뉴가 된다면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이 이재명 대통령에게 집권 후 첫 고비가 될 것이다. 만초손(滿招損)이요, 겸수익(謙受益)이다. 오만하면 손해를 부르고, 겸손하면 이익을 얻는다는 말이다. 이제라도 국민 앞에 겸손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실패한 정책과 부적절 인사를 철회함으로써 민의를 반영하는 진솔한 노력을 보인다면, 그리고 민주당이 독단적 국회 운영을 중단하고 야당과 협치를 회복한다면 국민은 한 번 더 기회를 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의 분노는 다음 선거에서 재앙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2026-09-13 18:30:00
오랜만에 배리어프리 연극인 '젤리피쉬'를 봤다. 예전에는 수어로 진행되는 연극을 본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식의 공연이었다. 공연을 보기 전 안내문에서 '릴렉스드 퍼포먼스'라는 말을 만났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릴렉스드 퍼포먼스'는 공연을 보는 동안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는 것이 허용되는 공연이다. 신경 다양성을 가진 관객을 포함한 모든 관객이 편안하게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포용적인 관람 환경을 제공한다. 발달장애가 있는 관객의 행동이나 감각적인 반응을 공연 일부로 수용하고, 객석 조명을 어둡지 않게 유지하며 객석의 출입과 이동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시체관극'이라는 말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공연계에서 '릴렉스드 퍼포먼스'라는 말은 꼭 이단아같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공연은 꽤 많은 것을 요구한다. 정해진 시간에 와야 하고, 정해진 자리에 앉아야 한다. 식음료를 먹어선 안 되고, 촬영도 금지된다. 무대에서도 정해진 대사와 동선에 따라 배우가 움직이고 맞춰둔 약속에 맞춰 조명과 음악, 무대 장치가 움직인다. 그런데 '젤리피쉬'를 보면서 조금 다르게 해도 공연은 계속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객석에서 소리를 내도, 잠시 밖을 나갔다 돌아와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배우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사람도 무대 일부가 된다. 원래라면 숨기려고 했을지도 모를 것들이 이 공연에서는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공연장 곳곳 릴렉스존을 마련해두거나, 안정을 위해 말랑한 공과 인형이 놓여 있었다. 공연을 보는 방법뿐 아니라 공연장에 머무는 방법까지 조금씩 달랐다. 배리어프리라는 말은 장벽이 없는 공연이라는 뜻이지만, 장벽이라는 건 듣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연장에서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규칙도 누군가에게는 장벽이었을 것이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예전에 봤던 수어 공연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무대 위 두 명의 배우를 따라다니며 수어가 이어졌고, 나는 배우의 연기와 함께 수어를 바라봤다. 그때도 묘한 따뜻함을 느꼈던 것 같다. 누군가를 특별히 배려하는 모습이라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하기 위해 공연의 모양을 바꿨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리고 그 변화는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에게도 공연을 편하게 보기 어려운 순간이 온다면, 그때 공연이 나를 받아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공연에 맞추기보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조금 더 편안해질 수 있길. 그리고 이런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공연들의 시도가 계속되면 좋겠다.
2026-09-13 10:5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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