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27 18:45:59
[기고-이재홍] 순국선열의 날, 대구의 역사를 다시 기억한다
11월은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순국선열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되새기는 시간이다. 순국선열의 날(11월 17일)을 맞을 때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결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범한 일상은 이름 없이 나라를 위해 헌신한 수많은 이들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 순국선열의 날은 과거를 추모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정신을 오늘의 삶 속에서 어떻게 이어갈지 고민하는 날이어야 한다. 역사를 기억하고 보존하는 일은 도시의 정체성과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과제다. 그런 점에서 대구는 깊이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독립운동의 역사를 품은 도시다. 대표적인 사례는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다. 일본에 진 빚을 국민의 힘으로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이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됐으며, 많은 시민이 패물과 재산을 내놓으며 뜻을 모았다. 평범한 시민들이 국가적 위기 앞에서 주체적으로 행동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준다. 관련 기록물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또한 1915년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가 결성됐고, 1919년 서문 밖 장날에는 3·8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이후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장진홍 의사의 폭탄 의거와 1941년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다혁당 결성 등 다양한 항일투쟁도 이어졌다. 2026년 8월 말 기준 대구의 독립유공자 등록 인원은 227명으로 서울 다음으로 많을 뿐 아니라, 대구형무소 순국자도 225명으로 서대문형무소의 195명보다 많은 것으로 집계돼 대구가 독립운동의 치열한 역사와 희생을 간직한 공간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유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역사가 시민의 기억 속에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현재 대구에는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을 비롯한 관련 유적이 있지만, 자료와 공간이 흩어져 있어 독립운동사를 하나의 흐름으로 이해하고 체험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제는 산재한 역사를 모아 시민 누구나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종합적인 역사 공간이 필요하다. 국회에서는 독립기념관 분원 설치의 법적 근거 마련을 위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며, 대구시도 향후 법 개정에 대비해 분원 유치를 준비하고 있다. 독립기념관 분원은 단순한 시설 건립을 넘어 대구와 영남권의 독립운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큰 흐름을 조명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이름난 독립운동가뿐 아니라 이름 없이 행동했던 평범한 시민들의 삶과 선택도 담아야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교육·체험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사진과 문서, 구술 자료를 수집해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한다면 역사는 박제된 과거를 넘어 오늘을 성찰하고 미래를 여는 살아 있는 자산이 될 것이다. 순국선열의 날은 희생을 기억하는 동시에 그 정신을 실천으로 잇는 날이다. 독립기념관 분원 건립을 추진하는 일은 오래된 과거를 보존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이름 없는 영웅들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대구의 새로운 선택을 시작하는 일이다.
2026-10-27 14:47:45
한국은 2025년 기준 세계 6위의 수출국이자 9위의 수입국이다. 무역의존도가 92.8%에 이르는 전형적인 수출주도형 통상 국가다. 올해는 반도체 수출 호황에 힘입어 수출 1조 달러를 달성하며, 일본을 제치고 세계 5위 수출 대국이 될 전망이다. 2026년 9월까지의 누적 수출액은 8천147억 달러로, 이미 2025년 연간 수출액 7천90억 달러를 앞질렀다. 그러나 수출 규모 확대가 곧 통상 강국의 완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한국 수출의 상위 5개국 비중이 2025년 55.7%에서 2026년 63.5%로 높아지면서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심화되고 있다. 올해 상반기 전체 수출의 42%를 반도체가 차지하는 등 수출 품목의 구조적 취약성도 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교역 상대국 다변화와 통상 생태계 확장을 위해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가입을 추진해 온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글로벌 통상 국가가 갖추어야 할 핵심 자산은 국가 차원의 '제도적 신뢰'와 기업 차원의 '거래적 신뢰'다. 제도적 신뢰는 투명하고 일관된 통상정책과 국제 규범 준수를 통해 확보된다. 거래적 신뢰는 공급망 관리, 지속가능 경영, ESG 역량 위에 세워진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농수산업계 반발로 CPTPP 가입 추진이 갑자기 재검토되는 상황은 우려할 만하다. 본격화되던 가입 논의가 국내 정치적 사정에 따라 흔들린다면, 교역국들은 한국의 통상정책이 언제든 바뀔 수 있다고 인식할 것이다. 이는 장기적 통상 확대 전략과도 정면으로 충돌한다. 전 EU 통상집행위원장 피터 맨델슨(Peter Mandelson)은 "정치가 운전대를 잡고 경제가 뒷좌석에 앉을 때, 통상정책은 항상 첫 번째 코너에서 전복된다"고 경고했다. 이는 도하개발라운드(DDA) 협상에서 프랑스 등 EU 농업 강국이 자국 농가의 표심을 의식해 농산물 관세와 보조금 인하에 저항하던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 지금의 한국에도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CPTPP는 단순한 관세 인하 협정이 아니다. 일본·호주·멕시코·캐나다·베트남 등 주요 회원국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공급망 구축과 경제 안보 강화를 추구하는 다자간 경제협력 체제다. 유럽 국가 최초로 영국이 12번째 회원국이 되면서 그 위상이 높아진 CPTPP는 전 세계 GDP의 약 15%를 차지하며, 5억 명 이상의 인구를 포괄한다. 관세 철폐를 넘어 회원국 간 공급망 연계와 협력을 심화하고 있는 이 협정은, 자원이 부족하고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게 통상 파트너로서의 신뢰를 높이고 공급망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중요한 통상 인프라다. 특히 CPTPP 회원국인 멕시코는 한국 기업의 미국 시장 진출 거점이다. 중국 의존도를 줄이려는 니어쇼어링 전략의 핵심 후보지이자 한국의 10대 수출국이기도 하다. 한국과 FTA를 체결하지 않은 멕시코는 2026년 1월부터 협정 미체결국을 대상으로 1천463개 품목에 대해 최대 50%까지 관세를 인상하는 등 보호무역 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멕시코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큰 타격을 받을 수 있으므로, CPTPP 가입을 통한 관세 혜택이 시급한 시점이다. 대러시아 석유제품 수출 문제 역시 국제 규범에 비춰 다뤄져야 한다. 한국 정부는 해당 품목이 국내 수출 통제 품목에 해당하지 않아 국내법상 위반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운송에 투입된 선박이 영국·EU 제재 대상이고, 최종 도착지가 불분명한 상황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국제 사회의 제재 대상 물자를 불법 또는 비공식적으로 운송하는 '그림자 선대(shadow fleet)'가 동원된 수출은, 비록 국내법상 위반이 아니더라도 서방 우방국의 대러 제재 효과를 약화시키고 지정학적 마찰을 초래할 소지가 크다. '신뢰할 수 있는 우방'이라는 한국의 이미지를 지키려면, 우방국들이 공유하는 규범과 제재의 취지에 부합하는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지정학적 위기의 상시화, 미국 관세정책의 불확실성, 공급망 무기화 속에서 글로벌 통상 환경은 복합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런 시기에 CPTPP 가입 추진 중단과 대러 제재 회피 논란은 한국의 신뢰를 훼손할 위험이 크다. 한국이 단순한 수출 규모를 넘어 글로벌 통상 및 공급망 규범을 선도하는 진정한 '통상 강국'으로 도약하려면, 정책의 일관성이 담보된 '제도적 신뢰'를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한다. 우방국과의 신뢰 확보가 그 출발점이다.
2026-10-27 13:30:00
'우리는 매일 죽는다' 처음 이 문장을 마주하면 지독한 역설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의 신체와 일상은 이미 이 거대한 대자연의 순환 주기를 가장 정직하게 증거하고 있다. 밤이 오면 우리는 잠이라는 고요한 소멸의 심연 속으로 침잠한다. 낮 동안 치열하게 앓았던 번뇌와 집착, 마모된 세포들을 밤의 어둠 속에 온전히 묻는 '매일의 장례식'이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 오면 눈부신 빛과 함께 눈을 뜬다. 어제의 내가 죽고, 새로운 호흡을 부여받는 경이로운 '매일의 부활'인 셈이다.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염색체의 끝단, '텔로미어(Telomere)'의 비밀도 바로 이 지극한 순환 속에 숨어 있다. 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조금씩 짧아지는 이 생물학적 시계는, 화가가 화폭 위에 묵직한 필획을 그을 때마다 닳아가는 먹의 길이와 닮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텔로미어의 마모를 막고 수명의 시계를 지켜내는 몸속의 효소가 지구가 자전하는 24시간의 생체 리듬, 즉 밤의 고요한 휴식 속에서만 가장 활발하게 깨어난다는 점이다. 대자연의 주기에 순명하여 매일 밤 온전히 소멸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세포는 비로소 내일을 살아갈 치유의 힘을 얻는다. 이 대목에서 문득 관습적으로 폄하되던 '하루살이의 삶'을 떠올린다. 물속 진흙에서 몇 년이나 되는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거친 하루살이가 세상 밖으로 나와 허락받는 시간은 고작 단 하루, 길어야 사흘 남짓의 찰나다. 언뜻 미래가 없는 하루살이의 덧없는 삶 같지만, 사실은 그것이 삶의 가장 정직한 정답일지도 모른다. 성충이 되는 순간 입마저 완전히 퇴화시킨 채, 먹지도 않고 오직 날갯짓과 사랑이라는 생의 본질적인 소명에만 온 존재를 던지는 눈물겨운 비행을 한다. 이 지극한 몰입은, 100년 가까이 살아가면서도 늘 내일을 핑계로 오늘을 유예하는 인간의 관성을 부끄럽게 만든다. 결국 인간의 삶 역시 하루라는 고유한 점(點)이 쌓여서 이어지는 선(線)이다. 하루살이가 입을 비우고 날아오르듯, 우리 역시 매일 밤 어제의 묵은 집착을 담담하게 비워내야만 새로운 아침의 거룩한 붓질을 시작할 수 있다. 자본의 속도에 맞춰 밤낮없이 달리는 현대인들은 어쩌면 스스로의 텔로미어를, 삶의 선을 이루는 이 소중한 하루의 점들을 너무 빨리 지워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에 목숨을 거는 저 하루살이보다도 더 조급하고 무감각하게 말이다. 화폭 위에 먹물이 닿는 1초의 찰나, 그 순간을 위해 나는 긴 숨을 고른다. 오늘 아침 마주한 하루는 관성적으로 이어지는 어제의 연장선이 아니다. 어젯밤 담담하게 소멸을 받아들인 내가, 오늘 아침 기적처럼 다시 눈을 떠 온 호흡을 다해 새로 그어내야 할 생(生)의 첫 번째 점이자 가장 눈부신 첫 획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산다'
2026-10-27 10:45:49
[사설] 선례 없고 사퇴했고 근거 없다며 증인 채택 안 하는 청와대 국감
국회 운영위원회의 대통령비서실 국정감사가 29일 열릴 예정이지만 관심을 모았던 김현지 제1부속실장, 김용범 전 정책실장 등은 증인으로 출석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운영위가 이들을 제외한 채 증인 출석요구안을 여당 주도로 의결해서다. 한병도 운영위원장 등 민주당이 내세운 논리는 크게 세 가지다. 부속실장이 국감에 나온 선례가 없고, 전직 참모는 사퇴했으며, 야당의 요구엔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얼핏 그럴듯하지만 모두 국감의 존재 이유와 충돌한다. 먼저 선례가 없다는 말은 면제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국감이 따지는 것은 직책이 아니라 그 자리를 둘러싸고 제기된 의혹이다. 야당이 김현지 실장을 부르려는 것은 '성남·경기 라인 인사 개입' 의혹 때문이다. 야당의 인사 개입설이 사실인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서 국회의 확인이 필요하다. 더욱이 대법원장을 일반증인으로 채택했던 여당이 선례를 운운하며 김현지 실장의 출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이중 잣대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법사위는 '이번에는 사안이 다르다'며 대법원장을 증인으로 채택했었다. 김용범 전 실장 증인 제외 이유도 그렇다. 급격한 증시 변동 원인으로 지목된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 도입 과정 등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 하는 국회가 사퇴했다고 증인에서 제외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 ETF를 둘러싼 투자자 손실 논란이 이어지는 만큼 국회는 김 전 실장이 이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확인해야 할 책무가 있다. 사퇴가 면책 수단이 돼서도 안 된다. '근거가 없다'는 것도 증인 제외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국감은 확정된 사실을 낭독하는 곳이 아니라 제기된 의혹을 검증하는 자리다. 근거를 먼저 대라는 요구는 국감의 순서를 뒤집는 것이다. 의혹이 허구라면 직접 나와 답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해명이다. 출석 한 번으로 끝낼 수 있는 일인데 증인 채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의혹을 더 키우고 있다. 여당이 특정 인물을 보호하려는 것으로 비칠수록 그 비용은 결국 정권이 치른다.
2026-10-27 05:00:00
[사설] CPTPP 가입 갈등·부작용 해결이 대통령과 정부의 역할
이재명 대통령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개최한 '농어민과의 대화'에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과 관련 "제 임기 안에 최종 타결이 안 될 가능성이 훨씬 많다"면서도 "대한민국 국가 전체를 위해서는 일부 비난, 비판이 있더라도 해 놔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발언은 '올해 안에 가입 신청은 하지 않겠다'는 방침(方針)을 재확인하면서도 우리는 무역 국가인 만큼 장기적 관점에서 가입에 필요한 절차는 진행해야 한다로 풀이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대한민국은 무역에 의존(依存)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수출 시장 확대를 위해 FTA가 불가피하다"고 했다. 하지만 농지 전수조사로 농민 반발이 거센 가운데 CPTPP 가입 추진으로 반발이 더욱 거세자 이달 6일 "원점에서 다시 대화를 시작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그러나 26일 간담회에서 대통령은 '가입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 '농어민 피해 최소화에 만전을 기하겠다'에 방점(傍點)을 찍었다. 성난 농어민을 달래는 동시에 국익을 위해 대통령으로서 할 일은 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정부 분석에 따르면 CPTPP 가입 시 제조업 생산 유발 효과는 15년간 연평균 6조3천억~6조7천억원이다. 다만 농산물 관세 철폐율이 90% 이상으로 다른 FTA(관세 철폐율 70%대)보다 높아 농어업 생산은 연평균 7천900억~8천500억원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입장에서 CPTPP 가입은 '찬반 논쟁' 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가입이 늦어질수록 수출 경쟁력(競爭力)은 떨어진다. 또 CPTPP는 이미 가입한 나라의 개별 동의(만장일치)를 받아야 하는 만큼 신청이 늦어질수록 가입 절차(節次)가 복잡해진다. 문제는 농어민 피해다. 논의의 초점은 CPTPP 가입 찬반이 아니라 개방에 따른 농어민 우려 및 피해 최소화와 수출 이익 최대화에 맞춰져야 한다. 갈등 조정, 피해 최소화, 경쟁력 강화 등 국가적 범위의 난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부와 대통령의 역할이다.
2026-10-27 05:00:00
[사설] 300배로 벌어진 주택 자산 격차, 주거 사다리 복원 시급하다
자산 상위 20% 가구와 하위 20% 가구가 보유·거주하는 주택 가격 격차가 300배에 육박하며 통계 집계 이래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국가데이터처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자산 하위 20%(1분위) 가구의 자가 거주 주택 평균 가격은 239만 원으로 1년 새 9.1% 하락한 반면, 자산 상위 20%(5분위) 가구는 6억9천341만 원으로 7.7% 올랐다. 이로 인해 두 집단 간 주택 가격 배율은 290.1배로 벌어졌고, 전체 자산 격차 역시 68.6배로 커졌다. 부동산을 매개로 한 자산 양극화가 날로 심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격차 폭증의 가장 큰 원인은 하위 계층의 자가 거주 비율 급감과 상위 계층의 자산 가치 상승이 겹쳤기 때문이다. 자산 1분위의 자가 거주 비율은 6.6%로 역대 최저 수준까지 떨어진 반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고가 아파트 가격 상승은 상위층의 자산 보유액을 대폭 끌어올렸다. 거주 주택 외에 상위층이 보유한 임대·투자용 부동산까지 합산할 경우 실제 체감하는 자산 불평등은 훨씬 더 심각할 것이다. 자산 양극화가 부의 세습(世襲)과 신분 고착화로 이어지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병폐(病弊)가 통계로 입증된 셈이다. 가계 자산의 70%가 부동산에 집중된 한국 경제의 특성상, 주택 자산의 불평등은 청년·신혼부부 등 미래 세대의 주거 사다리를 완전히 끊어놓고 있다. 아무리 일을 해도 솟구치는 집값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절망감(絕望感)은 노동 의욕을 꺾고 저출생과 인구 감소를 가속화하는 주된 원인으로 지목된다. 정부는 그동안의 집값 잡기식 단기 대책에서 벗어나 근본적인 주거 안정과 자산 양극화 해소를 위한 종합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시장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자산 가격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만큼, 주거 취약계층과 무주택 서민을 위한 실효성 있는 주거 안정망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청년과 신혼부부를 위한 공공분양 및 장기 임대주택 공급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임차 가구에 대한 금융·세제 지원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
2026-10-27 05:00:00
[관풍루] SK하이닉스 주가에 연동된 미국 상장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 2종이 상장 3개월여 만에 청산될 예정
○…SK하이닉스 주가에 연동된 미국 상장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 2종이 상장 3개월여 만에 청산될 예정. 이 펀드는 일간 수익률을 각각 2배, 역(逆) 2배로 추종하는 상품. 꿩 먹고 알 먹으려던 욕심이 화근. ○…김지용 중대범죄수사청장 26일 국감에서 "한동훈 딸 '허위 스펙 수사 무마 의혹'에 대해 진상규명 필요하다"고 발언. 조국 가족 동병상련일까 아니면 환호?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대표 26일 최고위서 오세훈 서울시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2심서 법원의 무죄 선고 두고 '사법부의 정치화 비판'. '사법부 흔드는 정치'는 민주당이 전문인데.
2026-10-27 05:00:00
2026-10-26 18:47:22
[심백강의 한국 고대사] 고구려의 살수는 어디인가(3)
◆수양제 양광(楊廣)이 제1차 고구려 침공 때 내린 조서(詔書) 내용 수문제를 이어 즉위한 수양제 양광은 동북방의 강자 고구려를 복속시킴으로써 아버지의 실패를 만회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612년 세계역사상 유례가 드문 30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친정(親征)에 나섰다. 이때 수양제가 고구려 침공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전국에 반포한 조서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고구려의 보잘것없는 추악한 무리들이 혼미하고 불공스러워 발해와 갈석산 사이에 모여서 살고 있고 요수와 예하 지역을 자주 침공하여 병탄하였다.(高麗小醜 迷昏不恭 崇聚勃竭之間 荐食遼獩之境)" 이 문장은 아주 짧지만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 고구려 강역의 정확한 위치를 밝혀줄 결정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다만 "숭취(崇聚)", "천식(荐食)"과 같은 다소 생소한 단어가 보이므로 먼저 이에 대한 이해를 정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숭취(崇聚)"는 함께 모여 있는 것을 말한다. 한나라 때 양웅(揚雄)이 지은 『태현경(太玄經)』에 "사물이 서로 모여 있다.(物相崇聚)" 한나라 때 왕부가 지은 『잠부론(潛夫論)』에 "여러 하찮은 무리들이 모여 있다.(崇聚群小)"라고 하여 "숭취"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천식(荐食)"은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여러 차례 침공하여 병탄한다는 의미이다. 천(荐) 자에는 자주, 누차의 뜻이 담겨 있고 식(食) 자에는 집어삼킨다는 뜻이 들어있다. "천식"의 출전은 『춘추좌전』이다. 좌전 정공(定公) 4년 조항에 "오나라가 큰 돼지, 긴 뱀이 되어 큰 나라를 누차에 걸쳐 침략하여 병탄하였다.(吳爲封豕長蛇 以荐食上國)"라고 보이는데 두예(杜預)가 이를 주석하기를 "천(荐) 자는 자주 삭(數) 자의 의미이다.(荐數也)"라고 하였다. 이는 탐욕스러운 침략자인 오나라가 중원의 큰 나라를 누차에 걸쳐 침략하여 병탄한 행위를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 것이다. 수양제가 내린 조서 가운데 "고구려가 발해와 갈석산 사이에 모여서 살고 있다.(崇聚勃竭之間)"라고 말한 내용을 분석해보면 발해와 갈석산 사이가 수나라 시대에 고구려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고구려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발해와 갈석산의 위치를 추적하면 고구려의 중심지 즉 당시 고구려 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 드러나게 된다. 역사상에서 갈석산은 한반도나 요녕성에는 존재한 적이 없고 하북성에 있었다. 그렇다면 수나라가 공격한 고구려 수도 평양성은 하북성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자료는 이 이상 더 확실한 것은 없다고 여긴다. 수양제 조서에서 언급한 발해와 갈석산 사이란 지금으로 말하면 구체적으로 어디쯤에 해당할까. 송나라 때까지도 조선성(朝鮮城) 유적이 남아 있었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부근의 창려현(昌黎縣) 일대가 그 지역이라고 본다. 창려현에는 현재 갈석산이 있고 갈석산은 발해를 마주하고 있다. 창려현은 지리적으로 발해 북쪽, 갈석산 남쪽에 위치하여 수양제 조서의 "발해와 갈석산 사이"라는 내용과 일치한다. 또한 송나라 왕응린은 『통감지리통석』에서 "하북도 평주 치소 창려현에 당나라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平治昌黎 唐安東府)"라고 말하여 하북성 창려현이 고구려 평양성이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수나라 시대 고구려의 수도가 오늘날의 하북성 창려현 일대였다면 당시 수나라와 고구려가 국경을 마주한 국경선은 거기서 훨씬 더 서쪽에 위치했다고 보는 것이 사리에 맞다. 수나라 때 고구려의 서쪽 국경선은 하북성 창려현에서 서남쪽으로 더 나아가 북경시 남쪽의 역수(易水), 호타하(滹沱河) 유역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기록이 바로 수양제 조서에 나오는 고구려가 "요수와 예하 지역을 자주 침공하여 병탄하였다.(荐食遼獩之境)"라는 내용이다.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천식(荐食)"은 그냥 한번 공격했다는 의미가 아니고 여러 차례 공격을 통해 그 지역을 고구려의 영토로 병합했다는 다시 말하면 고구려에 귀속시켰다는 뜻이다. 수양제가 그의 조서에서 직접 밝힌 고구려가 "요수와 예하 지역을 자주 침공하여 병탄하였다."라는 내용은 수나라 시대 고구려 서쪽 국경선은 압록강이 아닌 하북성의 요수와 예하 유역이었음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 ◆고구려 수도는 발해 갈석산 사이, 서쪽 경계는 요수, 예하 유역 수나라 때 고구려 수도가 발해와 갈석산 중간지대 즉 하북성 동남쪽 창려현 일대였다면 수양제 조서에서 예하와 함께 등장하는 요수는 결코 오늘날 요녕성의 요하를 가리킨 것일 수 없다. 그럴 경우 고구려가 갈석산 서쪽의 수나라 영토가 아닌 갈석산 이동의 자국 영토를 공격하여 병합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수양제가 말한 수나라 때의 요수는 어떤 요수를 가리킨 것일까. 남북조시대 대표적인 학자 유신(庾信, 513~581)은 시를 쓰면서 "비장하게 노래 부르며 요수를 건넜다(悲歌渡遼水)"라고 말했다. 형가(荊軻)가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역수가(易水歌)를 부르면서 건넜던 오늘날 하북성 보정시 역현에 있는 역수를 가리켜서 유신은 요수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시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직전 남북조시대 후기에 쓰여졌다는 점에서 수나라 당시 요수는 요녕성의 요수가 아닌 하북성의 역수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 근거가 된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요수와 함께 거론된 예하는 오늘날의 어느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던 강일까. 예(濊), 예(穢), 예(獩)는 고대에 통용되던 글자다. 그러므로 수양제 조서에 보이는 "천식요예(荐食遼獩)"의 예(獩)는 곧 예하(濊河)를 가리킨 것이다. 중국인들이 맥족의 맥자를 표기할 때 맥(貉), 맥(貊), 맥(貘) 등으로 모멸적인 의미를 담아 다양화했던 것처럼 예족에 대해서도 글자를 바꿔가며 다양하게 표현했다. 우리민족을 예맥족이라고 하지만 정작 우리 학계에서 지금까지 예하의 정확한 위치를 밝힌 연구는 거의 없었다. 수양제 조서에 나오는 "고구려가 요수와 예하 지역을 자주 침공하여 병탄하였다.(荐食遼獩之境)"라는, 예맥사 연구에서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될 이 진귀한 기록을 우리 학계는 주목하지 않았다. 이는 우리 역사학계의 한심한 고대사 연구수준의 민낯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명일통지(明一統志) 권3, 북경시 직할 진정부(眞定府) 조항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예하는 평산현 서북쪽 60리에 위치하고 있다. 강물이 흘러서 평산현 동남쪽을 경유하여 호타하로 유입된다.(濊河 在平山縣西北六十里 流經縣東南 入滹沱河)" 이 기록을 통해서 본다면 예하는 명나라 시기까지도 진정부 평산현 서북쪽에 있던 강물로서 평산현 동남쪽으로 흘러 호타하에 유입된 강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명나라 때 평산현에 있던 이 예하는 부여(扶餘)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국 조항에 "본래는 예의 땅이다.(本濊之也)"라고 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항에는 부여 왕은 "그 도장에 '예왕의 인'이라고 적혀 있다.(其印文 言濊王之印)" "나라에 옛 성이 있는데 예성이라고 한다.(國有古城 言濊城)"라고 하였다. 이런 기록들은 예하는 바로 고대 부여국의 강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명나라 때 진정부 평산현은 현재의 하북성 석가장시 평산현으로서 당나라 때(756) 안록산의 난을 평정했다는 의미를 취하여 평산현으로 지명을 변경했다. 서한 초기에는 평산현에 포오현(蒲吾縣)을 설치했는데 『대청일통지』 예하 조항에 "예하는 또한 포오거라고 한다.(濊河 亦名蒲吾渠)"라고 하였다. '포오'는 바로 '부여'의 다른 한자 음차표기다. 중국어에서 포(蒲)는 pu 오(吾)는 yu로 발음하여 부여(扶餘)의 puyu와 발음이 같다. 곧 예하는 중국어로는 푸위(puyu)강, 우리말로는 부여강이었다. 예하가 위치해 있었던 북경시 진정부는 춘추시대에는 선우국(鮮虞國), 진(秦)나라 때는 거록군(鉅鹿郡), 한나라 초기에는 항산군이 있던 지역으로서 송나라 시기에 이르러 진정부로 명칭이 바뀌었다. 현재의 중국 하북성 보정시 석가장시 일대가 바로 그 지역이다. 예하는 지금 중국 지도상에는 지워지고 없다. 그러나 이상에서 인용한 자료를 검토해 본다면 예하는 오늘날 하북성 중남부 호타하 부근에 위치했던 강으로서 하북성 보정시 역현에 있는 즉 남북조시대의 학자 유신이 요수라고 말한 역수와 이웃한 강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요수와 예하 지역을 자주 침공하여 병탄하였다.(荐食遼獩之境)"라는 수양제의 조서에 나오는 이 기록은, 수나라 시대 고구려의 서쪽 국경선은 하북성 서남쪽 오늘날의 하북성 보정시 역수와 그 부근의 호타하 일대였다는 경이로운 역사적 사실을 반도사관에 찌들어 있는 오늘 우리 한국인들에게 일깨워준다. 수양제 조서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의 영토는 고조선, 부여의 고토를 모두 회복하여 한반도 북쪽 동북 삼성은 물론 오늘날 북경시를 넘어 하북성 남쪽 역수, 호타하 유역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고구려 전쟁에 직접 참가한 수양제의 조서는 조작되지 않은 1차 사료 중국 황제의 조서는 황제가 직접 신하와 만백성들에게 반포하는 글이란 점에서 역사 사실을 조작하기 어렵고 후세 사가들의 위조나 날조 또한 쉽지 않았다. 고구려가 "발해와 갈석산 사이에 모여서 살고 있고 요수와 예하 지역을 병탄하였다."라는 발해유역 고구려 제국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이런 내용은 수양제 조서에만 보이고 다른 중국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사서를 편찬하면서 중국의 사관들이 중국의 국익에 위배된다고 여겨지는 동이족 관련 기록들을 임의로 삭제 수정했지만 황제의 조서에 대해서는 저들이 감히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양제는 고구려 전쟁에 직접 참가한 인물이고 황제의 조서는 후세의 사관들이 감히 한 글자도 보태거나 뺄 수 없는 성역이기 때문에 오늘에 전해지는 수양제의 조서는 최고의 사료적 가치를 지닌 1차 사료다. 그러므로 수나라 때 고구려의 수도는 발해 갈석산 사이에 있었고 서쪽 경계는 하북성 보정시 역수, 호타하 부근 예하 유역이었다는 것은, 조작이 가해지지 않은 황제 조서의 1차 사료를 통해 고구려의 속살이 빨갛게드러난 것이라고 하겠다. ◆수양제 조서에 의하면 고구려 살수는 결코 청천강이 될 수 없다 고구려가 "발해와 갈석산 사이에 모여서 살고 있고 요수와 예하 지역을 자주 침공하여 병탄하였다."라는 이 기록은 『수서』 양제기에 최초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내용은 우리나라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조항에도 그대로 인용되어 있다. 따라서 한양조선의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이 문장을 보았을 것으로 인정된다. 그런데 사대 사관에 물든 때문일까. 한국 고대사 연구에 지각변동을 가져다줄 만한 이 귀중한 자료를 다산 정약용, 성호 이익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신채호와 정인보 또한 이런 자료를 인용하여 고구려사를 연구하지 않고 살수가 청천강이라고 말하는 우를 범하였다. 지난날 우리 선배학자들이 일찍이 이런 내용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여 공론화시켰더라면 오늘날 고구려의 살수가 북한의 청천강이라는 엉터리 논리는 아예 발을 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한반도 중심의 우리 국사는 지금과는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고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주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국수주의자의 잠꼬대가 아닌 중국 황제 수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공개적으로 천하에 천명한 발언 "숭취발갈지간 천식요예지경(崇聚勃竭之間 荐食遼獩之境)"! 글자는 열 두자 밖에 안 되지만 지금까지의 식민 반도사관에 입각한 한국사 연구를 뒤엎고 근본적으로 재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하겠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2026-10-26 13:30:00
지금 한국 경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수출도 반도체가 하고, 성장도 반도체가 하고, 세금도 반도체가 내고, 국민연금 수익도 반도체가 내며, 주가 폭락도 반도체가 한다. 9월 수출은 사상 처음 1천209억 달러를 넘었는데 그중 반도체가 603억 달러로 거의 절반이다. 메모리 하나가 540억 달러를 실어 날랐다. KDI는 올해 성장률 전망을 3.2%로 0.7%포인트 올렸는데, 상향분 가운데 0.6%포인트가 반도체와 그 파급효과다. 수출 1조 달러 시대의 축포가 터지고 있지만 그 폭죽의 화약은 단 한 종류뿐이다. 우물 하나가 나라 전체의 갈증을 풀어주는 형국이다. 고마운 일이지만, 그 우물이 마르는 날을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하다. 벼락 중에 가장 무서운 벼락은 돈벼락이다. 왕관의 무게를 견딜 실력이 없는 황제는 결국 그 무게에 눌려 나라를 망친다. 지금 한국은 메모리 가격 폭등이 안겨준 횡재에 온 나라가 들떠 휘청인다. 그런데 청년 고용률은 2년 넘게 내리막이고, 고용탄성치는 8년 만의 최저 수준으로 추정된다. 숫자로는 호황인데 체감은 불황인, 통계만 배부른 경제다. 더 위험한 것은 착각이다. 반도체는 4년 주기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사이클 산업이다. 오늘의 슈퍼사이클은 내일의 공급과잉을 잉태하고 있고, 중국의 메모리 추격은 그 시계를 더 앞당기고 있다. 이 호황이 영원할 것이라 믿고 곳간을 헐어 지르고 황금 돈벼락을 미래의 씨앗으로 심지 않고 갈라먹기에 혈안이 되면 망한다. 햇빛 쨍쨍할 때 비 오는 날을 대비하지 않으면 쫄딱 젖어 울게 된다. 정치의 시야는 더 답답하다. AI는 국가의 전략무기이고, 그 핵심 인프라인 반도체는 전략물자이자 사실상의 방위산업이다. 그런데 한국 정치는 반도체 지원을 국방비로 보지 않고 재벌 보조금으로 본다. 1980년대 운동권식 사고와 철학으로 2026년의 기술 전쟁에 나서는 것은 이미 지고 들어가는 싸움이다. 미국, 중국, 일본은 물론 유럽까지 반도체에 천문학적 돈을 쏟아붓는데 한국만 지원을 금기시한다. 국방비를 아끼면 국방력이 약해진다는 것은 상식이다. 입으로는 AI 강국을 외치면서 국가 백년대계를 표심과 맞바꾸고, AI 전문가를 선거판으로 내모는 나라에 AI의 미래는 없다. 결국 문제는 사람, 그중에서도 리더다. 한국에는 지금 시대를 꿰뚫어 보는 테크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 가전이 전성기이던 1980년대, 한국의 테크 리더는 모두가 무모하다던 반도체를 이 땅에 심었고, 그의 아들은 그것을 세계 정상으로 키웠다. 오늘 우리가 먹는 밥은 40년 전 한 사람의 통찰이 지은 밥이다. 그런데 다음 세대의 밥을 지을 농사꾼은 보이지 않는다. 1980년대의 구루가 기업의 성패는 컴퓨터 활용에 비례한다고 내다봤듯, 2020년대 기업과 국가의 성패는 AI 활용에 비례한다. AI 시대를 꿰뚫어 보는 테크 리더가 있느냐 가 한국의 향후 40년을 좌우한다. 구루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처럼 집중과 천착, 관찰과 내공이 쌓여야 탄생한다. AI 시대는 한 트럭의 범재가 아니라 괴팍한 천재 하나가 나라를 먹여 살리는 시대다. 한국은 어떤가. 치맛바람이 유치원부터 군대, 직장까지 따라붙는 나라, 올림피아드 금메달리스트가 평범한 직장인으로 늙어가는 나라, 엔지니어를 존경하기보다 부리기 좋은 기능인으로 보는 나라에서 천재는 자라지 않는다. 모난 돌을 정으로 쪼아 둥글게 만드는 교육과 사회 시스템으로는 AI 시대의 나라를 먹여 살릴 괴짜를 길러낼 수 없다. 천재 하나에 제도와 정책, 국가 전략, 기업의 선제적 행동이 맞장구칠 때 비로소 AI에서 성공의 열쇠가 나온다. 이건희 회장처럼 시대를 앞서가는 기술 비전을 가진 테크 리더십이 절실하다. 반도체 돈벼락은 한국에 주어진 마지막 골든타임일지 모른다. 이 돈을 AI 인재와 원천기술, 인프라에 쏟아붓는다면 돈벼락은 독이 아니라 씨앗이 된다. 이 돈으로 잔치를 벌일 것인가, 다음 40년의 씨앗을 심을 것인가. 역사는 늘 축포 소리가 가장 클 때 몰락이 시작된다고 가르쳐 왔다.
2026-10-26 12:23:18
범여권(汎與圈)이 오세훈 서울시장의 항소심 무죄 판결에 반발하며 또 '조희대 대법원장 탄핵'을 꺼냈다. 자신들이 기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자 사법부를 압박하는 행태가 도를 넘었다. 사법부를 정치적 이해관계에 종속시키려 한다는 비판은 그들의 귀에 들리지 않는 듯하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판결을 "사법개혁의 도화선"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당 소속 서영교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은 "윤석열을 풀어줬던 지귀연 재판부와 오세훈을 풀어준 구회근 재판부는 닮은꼴"이라고 했고, 한민수 최고위원은 조 대법원장을 탄핵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고 했다. 조국 조국혁신당 혁신정책연구원장도 "사법개혁을 단호히 추진하지 않은 후과(後果)"라며 민주당에 탄핵 결단을 촉구했다. 재판부가 어떤 증거와 법리에 따라 무죄를 판단했는지 따지기보다,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법부 수장을 끌어내리겠다는 발상이다. 특히 판결 전 서영교 위원장이 보인 행태는 삼권분립(三權分立)을 침해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는 오 시장 항소심 선고를 하루 앞두고 법사위원장 명의로 "오 시장에게는 징역형이 선고돼야 한다"는 입장문을 냈다. 국정감사 도중 법원의 유죄 판결을 압박한 것이다. 법사위원장이 법원에 특정인의 유죄와 양형(量刑)을 요구할 권한은 없다. 서 위원장은 지난 지방선거 때 민주당 서울시장 경선에 출마했다. 오 시장의 유죄가 확정되면 보궐선거가 열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발언은 정치적 의도를 의심받을 만하다. 판결에 대한 비판은 가능하다. 1심 유죄가 항소심에서 뒤집혔다면, 그 이유를 놓고 논쟁할 수 있다. 그러나 판결에 대한 비판과 사법부를 겁박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법리적 반박 대신 대법원장 탄핵을 들이밀고, 법원을 '무죄 자판기'라고 조롱하는 것은 '사법부 길들이기'로 비친다. 더 큰 문제는 '내로남불'이다. 불리한 판결에는 법원의 정치적 편향을 지적하고, 유리한 판결에는 법원을 존중하라고 요구한다. 선량(善良)한 국민들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2026-10-26 05:00:00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민주당 박균택·양부남 의원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고검장 출신인 이들은 이재명 대통령의 사법 리스크 대응에 깊이 관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박 의원은 2022년 당 대표 법률특보로서 백현동·성남FC·대북송금 사건을 맡아 이 대통령 측 변호인으로 활동했고, 양 의원은 같은 해 당 법률위원장으로 약 1년 6개월간 당 차원의 사법 리스크 대응을 총괄했다. 대통령 개인의 형사적 위기를 방어하는 일에 앞장섰던 인물이 그 사건과 여전히 연결될 수 있는 부처의 수장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당장 국민의힘은 '대통령 본인 죄 지우기 임무를 완수할 인사를 찾느냐'며 공격하고 나섰다. 최은석 원내수석대변인은 25일 "이재명 정부의 법무부 장관 인선 기준은… 대통령 사법 리스크 방어 경력이냐"며 "법무부는 대통령의 사법 리스크를 관리하는 '사설 법률사무소'가 아니다"라고 직격했다. 법무부는 공소청을 관할하고 검사 인사 등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여기에 법무부가 위촉한 검찰인권존중미래위원회는 대통령 재판 사건들에 대한 검찰의 수사·기소 과정을 조사 중이며, 그 결과가 공소취소 추진의 명분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변호 경력이 있는 인사가 장관이 되면 공정성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게다가 두 의원 모두 앞서 이 대통령 사건의 공소취소를 주장하는 의원 모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법무부는 특정 정치인의 방어 기관이 아니라 법무행정을 책임지고 법치주의를 지켜야 하는 부처다. 공소청이 막 출범한 시기라 검찰 경험이 풍부한 인사가 필요하다는 게 인선 배경으로 거론되는 논리다. 그러나 검찰 조직을 잘 안다는 것과 이해충돌은 다른 문제다. 국민에게 '법무부가 법을 지키는 부처인가, 아니면 대통령을 지키는 부처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 사법 리스크를 방어했던 인물이 법무장관이 되는 순간, 그 직책의 공정성과 중립성에 대한 신뢰는 시작부터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2026-10-26 05:00:00
[사설] 물가·이자 부담 더 커지는데 정부는 땜질 처방
한국금융연구원이 24일 국제유가와 수입 원자재 가격 상승 등 공급 요인이 주도한 물가 불안에 소비와 투자 확대로 인한 수요 압력까지 가세할 수 있다며 보고서를 통해 경고했다. 앞서 9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대비 2.9% 올라 한국은행 목표 2%를 웃돌았고, 생산자물가는 7.7%나 올랐다. 석유·화학제품 등 중간재 가격 상승이 누적(累積)되면서 생산비 부담이 소비자가격으로 전이될 가능성도 커졌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는 내년 물가상승률도 목표치를 웃돌고, 2028년에야 2% 수준에 가까워진다고 전망했다. 공급 충격에 수요 압력까지 커진다면 고물가가 훨씬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경고다. 가계의 버틸 여력(餘力)은 바닥나고 있다. 올해 1~7월 실질임금 증가율은 0.2%에 그쳤다. 3분기 임시·일용근로자는 지난해 동기 대비 9만5천 명 감소한 572만7천 명으로, 3분기 기준 31년 만에 최소다. 소득 기반마저 불안한 가계에 추가 물가 상승은 생계를 위협하는 충격이 될 수 있다. 한국은행이 22일 기준금리를 연 3.0%로 동결했지만, 내년 상반기까지 금리가 3.50~3.75%까지 오른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생활비는 오르고 실질소득 증가는 미미한데 이자 부담까지 늘어나는 상황이다. 지난 3월 도입한 석유 최고가격제로 소비자가격을 억제하고 있지만 7개월 넘게 이어지며 재정 부담 역시 눈덩이처럼 쌓였다. 정부가 정유사 손실 보전을 위해 올해 편성한 예비비 4조2천억원에 내년도 예산안 1조4천497억원까지 더하면 5조6천억원이 넘는다.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은 재정 부담과 휘발유 소비 증가 우려를 고려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정부도 정책 한계를 안다는 얘기다. 그런데 국제유가가 다시 치솟으면서 가격 통제(統制)를 끝내기도 어려워졌다. 이재명 정부의 비상 물가 조치는 장기적 재정 부담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다. 당장의 물가 충격을 미래 세금 부담으로 넘기는 방식으로는 고금리 부담 속에 고물가의 악순환을 결코 끊을 수 없다.
2026-10-26 05:00:00
[관풍루] 주식 계좌를 보면 한숨이 나오는데, 원화 가치는 오르는 한국 경제의 묘한 풍경
○…경찰에 스토킹 피해 신고하고 긴급응급조치와 스마트워치 제공까지 받았던 40대 여성이 전 연인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이 또다시 발생. 잇따르는 관계성 범죄에 대한 보다 강력한 처벌과 현실적 대안 세워야 할 때. ○…주식 계좌를 보면 한숨이 나오는데, 원화 가치는 오르는 한국 경제의 묘한 풍경. 같은 경제 상황을 보고 움직이는 두 시장이 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걸까. 결국엔 AI 투자·수출 지속성이 관건. ○…추미애 경기도지사, 소방공무원 인건비 문제 관련 "정치적으로 화형을 당하더라도 해결하겠다"고. 최근 '소방 재정 빨대'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것과 관련해 거듭 사과한 것은 거짓이었나.
2026-10-26 05:00:00
[날씨] 10월 26일(월) "곳에 따라 흐리고 가끔 비"
2026-10-25 18:46:21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최근 EBS 강연에서 "굳이 대학 졸업장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점 잘 받는 우등생을 훌륭한 학생으로 여겨온 관행이 산업시대의 유물이라는 지적, 하나의 틀로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이 AI 시대에는 통하기 어렵다는 진단은 대학이 겸허히 들어야 할 비판이다. 다만 '졸업장이 필요 없다'에서 '대학이 필요 없다'는 주장 이전에 기술 변화가 사회에 무엇을 요구해 왔는지 역사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첫 장면은 1811년 영국이다. 방직기계에게 일자리를 빼앗긴다고 믿은 직조공들이 기계를 부수기 시작했고, 러다이트 운동은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막을 내렸다. 흔히 기술에 대한 무지의 소동으로 기억되지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이를 '폭동을 통한 단체교섭'이라 불렀다. 쟁점은 기계 자체가 아니라, 기계가 낳은 이익과 비용을 누가 짊어지느냐였다. 직물 산업 전체가 일자리를 잃은 것은 아니었으나 수작업 직조공의 시대는 저물었고, 전환기에 숙련을 잃은 세대는 수십 년간 생활고를 견뎌야 했다. 승패를 가른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전환기를 건널 역량을 사회가 어떻게 길러내느냐였다. 산업사회가 이후 교육을 넓혀온 배경의 하나다. 두 번째 장면은 1930년이다. 저명한 경제학자 케인즈는 에세이 '우리 손자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에서 100년 뒤에는 기술 발전 덕분에 인류가 주 15시간만 일하게 될 것이라 내다봤다. 부의 증가는 그의 예측에 근접했으나 노동시간 단축은 빗나갔다. 생산성이 향상되면서 사람들은 여가 대신 더 많은 소비와 새로운 욕구를 택했고, 늘어난 생산성의 열매를 어떻게 나눌지는 기술이 아니라 제도와 가치가 정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이 말한 'AI를 쓰면 한두 시간이면 생산성을 맞출 수 있다'는 전망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기술이 가능성을 열어도 그것이 현실이 되는 방식은 사회가 선택한다. 케인즈 스스로도 인류의 영원한 숙제는 경제적 근심에서 풀려난 자유를 어떻게 현명하게 쓸 것인가가 되리라 보았다. 이는 대학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오래 붙들어온 질문이다. 세 번째 장면은 20세기 후반이다. 컴퓨터가 사무실에 들어오면 종이가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라는 '종이 없는 사무실'의 전망이 쏟아졌다. 현실은 달랐다. 컴퓨터와 프린터가 보급된 뒤에도 사무실의 종이 소비는 오히려 늘었다. 애비게일 셀런과 리처드 하퍼는 2002년 저서 '종이 없는 사무실의 신화'에서 그 이유를 밝혔다. 사람들은 정보를 보관하려고 종이를 쓴 것이 아니라, 읽고 메모하고 서로 확인하고 합의하는 데 종이가 쓸모 있었기 때문이다.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비용은 낮아져도 정보를 이해하고 신뢰하며 함께 결정하는 인간의 일은 쉽게 대체되지 않았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대학은 지식을 건네주는 창구이기 이전에, 지식의 진위를 따지고 서로의 논리를 검증하며 합의를 만들어가는 공동체다. AI가 답을 즉시 내놓는 시대일수록 그 답이 옳은지 가려내고 책임질 사람이 더 필요하다. 그렇다고 대학이 지금 모습 그대로 옳다는 뜻은 아니다. 학점 경쟁과 간판 중심의 서열, 하나의 형식에 맞춘 교육은 바뀌어야 한다. 학교가 '배우는 곳'에서 '실험하는 곳'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문도 타당하다. 그러나 실험에도 방법과 윤리와 이론이 필요하다. 그 토대를 쌓는 곳이 대학이고, 시장이 당장 값을 매기지 않는 기초학문과 장기적 연구를 이어가는 곳도 대학이다. AI가 노동과 복지, 교육, 지역사회를 어떻게 바꾸는지 묻고 제도를 설계하는 일 또한 대학의 몫이다. 특히 지역에서 대학은 청년이 지식과 공동체를 만나는 핵심 공공 기반이다. 졸업장의 값어치는 흔들릴 수 있어도, 이 기반이 흔들리면 지역의 미래도 함께 흔들린다. 러다이트는 기계가 일자리를 모두 앗아갈 것이라 두려워했고, 컴퓨터로 인해 사무실에서 종이가 곧 사라질 것이라 했으며, 케인즈는 노동이 한가로울 만큼 줄어들 것이라 했다. 세 예측 모두 기술의 힘은 짚었으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제도의 선택은 헤아리지 못했다. AI 시대에 대학이 필요한 이유는 AI를 가르칠 수 있어서가 아니다. AI가 답하지 못하는 질문, 무엇을 위해 쓰고 누구와 나눌 것인가를 함께 묻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졸업장은 몰라도, 대학은 필요하다.
2026-10-25 12:52:30
[매일춘추] 더 플레이 댓 고우즈 롱(The Play That Goes Wrong)
대표가 도망가고 얼떨결에 극단 회색탄산의 대표가 된 김영. 갑작스레 극단 대표가 된 것도 모자라 폭탄이 떨어졌다. 지원사업을 통해 받은 연극 지원금 500만원을 연출이 들고 사라진 것. 대관비는 계약금만 나간 상태고, 무대든 소품이든 앞으로 나가야 하는 돈은 산더미다. 거기에 극단 사정을 눈치챈 배우들도 수익금에서 나누기로 한 돈을 먼저 요구한다. 제작비를 구하기 위해 김영은 극단을 떠난 사람들에게 찾아가 돈을 부탁하게 되는데…. 한때 고민했던 연극의 시놉시스다. 아마도 몇 년 전 '더 플레이 댓 고우즈 롱(The Play That Goes Wrong)'이라는 연극을 본 후였던 걸로 기억한다. 연극은 슬랩스틱 코미디 장르로 공연을 보며 깔깔 웃었다. 그런데 왜 나는 이걸 보고 애달픈 이야기를 떠올렸을까. 매년 돌아오는 아르코 지원사업 기간이다. 연말은 당해 사업 정산하느라 정신없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년도 지원사업을 준비해야 한다. 특히 아르코는 10월부터 공고가 올라오니 아르코 공고를 보면 벌써 내년도 사업을 준비해야 한다는 압박이 밀려온다. 창작자에게 지원사업은 단순히 돈을 받기 위한 절차가 아니다. 혼자서는 하기 어려운 작업을 현실로 옮길 기회고, 다음 작품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고를 기다린다. 작년에 떨어졌더라도, 올해는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기획서를 다시 쓴다. 물론 그 과정이 늘 설레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업 공고를 자세히 읽고 그 기준에 맞춰 기획 의도와 기대 효과, 세부 일정, 예산 등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작품을 왜 만들어야 하는지, 어떤 성과를 낼 수 있는지 설득해야 한다. 작품을 만드는 일과 작품을 설명하는 일은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기획서 10개를 내야 1개가 된다는 우스갯소리는 농담이 아니다. 오히려 기획서가 선정되지 않는 일이 더 익숙하다. 어떤 사람은 예술인은 지원금에 매달리면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별도의 기반이 없는 지역의 작은 극단으로서는 그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시놉시스 속 김영은 사라진 제작비를 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누군가는 그 책임을 감당해야만 공연이 무대에 오를 수 있다. 무대 위에 올릴 이야기를 고민하는 시간만큼 무대 밖의 일에도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 김영의 이야기가 무대에 오를 수 있을까. 그날을 위해 오늘도 기획서를 쓴다. 아직은 알 수 없는 이야기다.
2026-10-25 06:54:16
[여행이 들려주는 마케팅 이야기-하태길] 이탈리아 북부, 5개의 호수 위에 남겨진 시간
이탈리아 북부에는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호수들이 많다. 에메랄드빛 물결이 보석처럼 빛나는 호수, 호숫가를 감싼 숲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는 호수, 그리고 바다처럼 파도가 일렁이는 호수까지. 그런데 사진 속에서는 그토록 아름답던 풍경이 막상 눈앞에 펼쳐지면 어쩐지 다르게 다가올 때가 있다. 우리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 흐린 날씨 때문일까, 예상과 다른 호수의 규모 때문일까. 아니면 사진으로 미리 보았던 풍경과 실제로 마주한 풍경 사이에 카메라의 렌즈만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계획에 없던 선물, 산 펠레그리노 아침의 문을 열자 호수가 거기 있었다. 돌로미티(Dolomiti) 트레킹을 위해 산 펠레그리노 고개(Passo San Pellegrino)에 있는 호텔 몬조니 산 펠레그리노(Hotel Monzoni San Pellegrino)에 머물렀는데, 그곳은 1899년에 세워진 숙박시설이었다. 지친 피로를 풀고자 머물던 근처 호수를 찾아 걸어갔다. 차가운 아침 공기와 아침 햇살이 동시에 다가오던 가벼운 산책이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호숫가에 들어서자 발걸음이 놀라서 멈췄다. 호수 위로 자욱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높은 하늘에는 이미 아침 해가 떠 있었지만, 호수는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듯했다. 햇살은 안개를 연신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물 위에 반영된 숲의 모습까지 아침 호수의 모습을 신비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 호수의 이름은 산 펠레그리노(Lago di San Pellegrino). 해발 약 1,900미터의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산으로 둘러싸인 호수와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깊은 산속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날 아침에는 물안개가 풍경의 일부를 감추면서 호수의 끝을 쉽게 가늠할 수 없게 했다. 그래서 호수는 실제보다 더 넓었고 더 깊었다. 호숫가에는 입구에 놓인 물고기 조각상을 시작으로 여러 개의 조각들이 있었다. 작은 다리와 나무 데크를 지날 때마다 서로 다른 작품들이 호수를 지키고 있었다. 낯선 방문객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말을 건네게 된다. 나는 작은 바위 위에 올라 조각상 흉내를 내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거미 조각상이 눈길을 끌었다. 거대한 거미를 형상화한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작품 "마망(Maman)"을 떠올리게 했다. 이 거미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어 숲속에서 슬며시 나타난 것 같은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자연과 예술이 서로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고 나란히 존재하는 모습이었다. 호텔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지만, 물안개는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신비한 호수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끝내 다 돌지 못한 호수, 브라이에스 남티롤(Südtirol)의 산악 지대에 자리한 이 브라이에스 호수(Lago di Braies)는 해발 약 1,500미터에 놓여 있다. 호수 뒤편으로는 해발 2,810미터의 크로다 델 베코(Croda del Becco)가 솟아 있다. 산사태로 무너져 내린 암석이 계곡의 물길을 막으면서 형성된 호수로 알려져 있으며, 산과 호수가 만들어 내는 장대한 풍경으로 많은 여행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호수 둘레는 약 4킬로미터.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 반 남짓이면 돌아볼 수 있는 코스였다. 호숫가를 따라 걸으며 여러 각도에서 풍경을 바라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연은 여행자의 계획을 고려해 주지 않는다.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특히 돌로미티의 험준한 봉우리 사이를 휘돌아치는 바람은 온몸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호수에 도착했을 때는 가까이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선 따뜻한 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로 들어갔다. 창밖에서는 굵은 빗줄기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지만, 두 손으로 감싼 커피잔은 다행히 따뜻했다. 이대로 돌아가야 할까? 먼 길을 왔는데 호숫가를 제대로 걸어보지도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걱정에 잠겨 있는 사이 커피잔은 비워졌고, 다행히 비도 그쳤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다시 비가 쏟아질지 알 수 없었기에 호숫가로 향하는 발걸음은 당연히 빨라졌다. 그러나 비가 지나간 길은 질척거려서 편하게 걸을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다. 마음은 호수를 따라 계속 나아가고 싶었지만 발걸음은 자꾸만 망설이고 있었다. 결국 호수 한 바퀴를 트레킹 하겠다는 계획은 접어야 했다. 그런데도 비가 그친 뒤의 산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짙은 빗물을 머금은 듯 어두워진 산의 능선과 바위에 내려앉은 구름, 그 사이로 조금씩 밝아오는 하늘. 문득 정선(鄭敾)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가 떠올랐다. 비 온 뒤 산의 묵직한 기운이 번져 나오면서 기운을 차릴 수 있게 해주었다. 눈부시게 맑은 날에는 호수의 에메랄드빛을 보았겠지만 비 갠 뒤 브라이에스 호수의 풍경은 그만큼 드문 풍경이었으리라 생각했다. 조금 더 머물렀다면 산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겠지만 정해진 시간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여행자는 아쉬움을 달래며 돌아섰다. 그 아쉬움까지도 브라이에스의 일부가 되어 마음 한쪽에 미완성의 풍경으로 남은 것이다. 여행에는 끝내 하지 못한 일들이 있다. 다 걷지 못한 길, 들어가지 못한 건물, 날씨 때문에 놓친 전망. 여행이 끝나면 그런 것들은 사라질 것 같지만, 뜻밖에도 기억은 완성된 장면만을 선택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브라이에스 호수의 전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곳의 나머지 풍경을 상상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무지개는 어디에 있었을까, 카레짜 사쏘 포르도이(Sass Pordoi)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카레짜 호수(Lago di Carezza)에 들렀다. 사진 속 호수는 에메랄드빛 물 위로 라테마르 산군(Latemar Massif)이 선명하게 비치는 신비로운 풍경이었다. 햇빛과 계절에 따라 물빛이 달라져 무지개 호수라고도 불린다는 설명에 기대는 더욱 커졌다. 하지만 실제 호수는 생각보다 작았다.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20여 분이면 충분할 만큼 아담했다. 짙은 청록색 물에는 산의 반영도, 기대했던 무지개도 없었다. 생태계 보호를 위해 둘러친 펜스 너머로 호수를 바라보며 한 바퀴를 돌았지만, 먼 길을 찾아온 만큼 아쉬움이 남았다. 호수를 떠나며 문득 생각했다. 무지개 호수라는 이름이 내가 도착한 날의 풍경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구나. 그날 카레짜 호수에는 무지개 대신 뜨거운 햇살 아래 고요한 청록색 물과, 펜스 너머로 호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있었다. ◆호수를 따라 살아가는 마을들, 가르다 산악 지대의 호수들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오자 풍경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가르다 호수(Lago di Garda)는 북쪽의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 남쪽의 완만한 풍경으로 이어진다. 호수를 따라 세 마을을 만나는 동안, 하나의 이름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가르다 호수의 여러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호수 남쪽으로 길게 뻗은 반도의 끝에는 시르미오네(Sirmione)가 자리하고 있다. 호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길 끝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스칼리제로 성(Castello Scaligero)이다. 물길을 지키듯 서 있는 견고한 성벽과 탑, 성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가 중세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성문을 지나 구시가지에 들어서면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골목마다 이어진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의 촬영지로도 알려진 이곳은 물과 역사가 어우러진 풍경으로 여행자를 맞이했다. 동쪽 기슭의 말체시네(Malcesine)에서는 분위기가 한층 서정적으로 바뀌었다. 호숫가에는 백조들이 유유히 떠다니고, 스칼리제로성 뒤로 해발 2,218미터의 몬테 발도(Monte Baldo) 산이 웅장하게 솟아 있었다. 올리브나무 아래 꽃이 핀 창가와 낡은 돌벽, 물가에 묶인 배들이 어우러져 마을의 느린 일상을 보여 주었다. 운 좋게도 선상 결혼식이 열리는 순간을 목격했다. 배 위에서 웃고 떠드는 신랑과 신부 일행의 모습에 여행자의 풍경 속으로 누군가의 특별한 하루가 들어왔다. 말체시네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풍경화 "가르다 호숫가의 말체시네(Malcesine on Lake Garda)"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림 속 붉은 지붕과 다채로운 창문이 모자이크처럼 어우러지듯, 실제 마을의 건물들도 저마다의 색으로 풍경을 채우고 있었다. 호수와 산, 건축물이 빚어내는 색채의 조화 속에서 클림트가 이곳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쪽 기슭의 리모네 술 가르다(Limone sul Garda)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레몬 향이 여행의 기억을 채웠다. 가파른 바위산과 호수 사이 좁은 땅에 자리한 이 마을은 온화한 기후를 이용해 오래전부터 레몬을 재배해 왔다. 레몬은 이제 농작물을 넘어 마을의 정체성이 되었다. 골목과 상점마다 레몬을 활용한 물건들이 가득했고, 노란빛은 호수의 푸른색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한낮의 햇살은 뜨거웠지만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다. 레몬 향이 감도는 골목을 걷다 유명한 레몬 샤베트(Sherbet)를 맛보았다. 차갑고 새콤한 한입에 더위가 잠시 잊혔다. 하루의 끝을 장식한 것은 거창한 풍경이 아니라 입 안에 남은 상큼함과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물 위에 떠 있는 궁전, 마조레 마조레 호수(Lago Maggiore)에 도착하자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시 달라졌다. 이탈리아어로 '더 큰'이라는 뜻을 지닌 마조레 호수는 이탈리아와 스위스에 걸쳐 있으며, 오래전부터 귀족과 부유층의 휴양지로 사랑받아 왔다. 산악 호수의 거친 기운과 달리 호숫가에는 오래된 별장과 정원이 고전적인 유럽 휴양지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작은 배를 타고 이솔라 벨라(Isola Bella)로 향했다. 섬에 가까워질수록 궁전과 계단식 정원이 호수 위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이 선명해졌다. 보로메오 가문(Casa Borromeo)이 조성한 궁전은 정교한 장식과 미술 작품으로 가득했고, 밖으로 나오자 조각상과 분수, 이국적인 식물이 어우러진 정원이 펼쳐졌다. 자연 위에 인간이 얼마나 화려한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보여 주는 풍경이었다. 이솔라 벨라의 아름다움은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루이 비통(Louis Vuitton)도 주목했다. 2023년 5월, 루이 비통은 이곳의 보로메오 궁전(Palazzo Borromeo)과 계단식 정원을 배경으로 2024 크루즈 컬렉션 패션쇼를 열었다. 바로크 양식의 조각상과 이국적인 식물, 호수와 산이 어우러진 풍경은 브랜드가 추구하는 고급스럽고 낭만적인 이미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브랜드는 상품 자체뿐만 아니라 상품이 놓인 장소와 분위기를 통해 사람들이 동경하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그 화려한 정원에서 내 시선을 가장 오래 붙잡은 것은 뜻밖에도 새하얀 공작이었다. 공작은 조각상과 분수 사이를 자유롭게 거닐고 있었다. 처음에는 정원의 일부처럼 보였지만, 가만히 바라보니 오히려 정원이 공작을 위해 마련된 무대처럼 느껴졌다. 루이 비통이 이곳의 화려한 풍경을 패션쇼의 무대로 삼았다면, 내게 이솔라 벨라는 공작이 자유롭게 거니는 무대였다. ◆풍경은 기억 속에서 또다시 이탈리아 북부에서 만난 다섯 호수는 저마다 다른 얼굴로 기억에 남았다. 산 펠레그리노에서는 물안개가 빚어낸 우연한 아침을 만났고, 브라이에스에서는 끝내 완성하지 못한 산책의 아쉬움을 안고 돌아섰다. 카레짜에서는 기대했던 무지개를 보지 못했으며, 가르다에서는 호숫가에 뿌리내린 마을들의 다채로운 삶을 만났다. 마조레의 이솔라 벨라에서는 화려한 궁전과 정원보다 그 사이를 자유롭게 거닐던 하얀 공작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돌이켜 보면 나는 아름다운 풍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많은 것을 계획했다. 가야 할 곳을 정하고, 날씨를 확인하고, 때로는 먼 길을 돌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이 끝난 뒤 기억 속에 남은 풍경은 계획한 순서와 달랐다. 기대했던 장면보다 뜻밖의 순간이 더 오래 남았고, 아쉬움으로 돌아섰던 장소조차 여행의 일부로 기억되었다. 마케팅에서는 이를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라고 한다. 완성된 일보다 미완성된 일이 더 오래 기억되는 심리 현상이다. 드라마에서 가장 궁금한 순간에 이야기를 끝내 다음 회를 기다리게 하는 '클리프행어(Cliffhanger)' 기법이 대표적이듯이. 여행은 떠나기 전에 계획하지만, 기억은 돌아온 뒤에 제멋대로 풍경을 고른다. 그리고 그 선택은 언제나 뜻밖이다.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경영학 박사)
2026-10-24 15:58:55
AI가 대통령을 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가스인라이팅]
최근 공소청장과 중대범죄수사청장의 국무회의 배석을 두고 논란이 일자 이재명 대통령은 21일 "제미나이에게 물어봤습니다"라는 글을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올렸다. 사정기관의 수장이라 불리는 사람이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건 자칫 수사 가이드라인 제공으로 연결될 수 있기에 전통적으로 '배석불가론'이 원칙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이 대통령이 이런 배석불가론을 '위헌적 억지'이자 '궤변'이라고 규정한 AI 답변을 공개하며 반박에 나선 것이었다. 정치권이 AI를 아전인수격으로 활용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 대통령이 성남시장 시절 수행비서와 나눈 대화 녹취록을 AI로 분석해 이 대통령의 위증교사 혐의가 인정되기 어렵고 오히려 검찰의 무리한 기소였다는 답을 공개하며 여론전을 펼친 바 있다. 이해민 조국혁신당 의원 역시 청문회에서 이진숙 당시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의 사과에 진정성이 없다며 자신이 AI를 이용해 작성한 사과문을 낭독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몇 해 전 정일영 민주당 의원은 AI로 일하는 게 더 '경제적'이라는 논지의 주장을 한 적이 있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을 앞에 두고 "AI에게 금리 인하 여부를 물었더니 동결이 최적이라는 합리적 답변이 25초만에 나왔다. 연간 35억원에 달하는 금통위원의 보수를 지급하느니 월 3만5천원짜리 AI 구독료를 내는 게 낫지 않겠냐"고 비꼬았다. 정 의원의 논법을 그대로 가져온다면 우리 국민은 헌법적 쟁점이라는 중대한 사안 앞에서 월 몇만원짜리 AI의 답변을 정당성의 근거처럼 내세우는 이 대통령에게 연 2억7천만원을 지급하고 있다. 경제성만 따진다면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의 말처럼 AI가 대통령이 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안다. 금통위원에게도 대통령에게도 높은 보수와 큰 권한을 주는 이유는 빠른 답 때문이 아니다. 반대 의견을 충분히 검토하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판단한 결과를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하고 그 결과에 끝까지 책임지라는 무게다. 텍사스 A&M대와 신시내티대 연구진이 지난 9월 공개한 논문에 따르면 사용자가 잘못된 전제를 고집하며 AI를 수차례 압박하자 AI는 옳은 답변을 철회하고 잘못된 전제를 옳다고 받아들였다. 제미나이 3.1 Pro는 5회 반복에서 51%, 25회 반복에서는 97%의 붕괴율을 기록했다. 잘못된 정보도 5번만 우기면 절반 정도는 굴복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가장 잘 버틴 GPT-5.6 Terra도 각각 25%와 65%의 붕괴율을 보였다. 대통령과 정치인이 AI의 답변에 권위를 부여해 정치적 공방의 무기로 쓰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잘 나타내주는 조사 결과다. 국민이 필요로 하는 것은 AI식 답변이 아니다. 그 답변에 기대지 않고도 자신의 판단을 입증하고 책임질 수 있는 정치인의 소신과 역량이다. 박성준 프리드먼연구원 주임연구원 〈strong〉* 가스인라이팅(Gas Enlighting)은 매일신문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칼럼 공간입니다. '가스라이팅'은 1930년대 가스등을 사용하던 시절 파생된 용어입니다. 가스등을 조금씩 어둡게 해 누군가를 통제하는 걸 의미하는데요 '가스인라이팅'은 그 반대로 등불을 더 밝게 비춰주자는 뜻입니다. 젊은이들의 시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자주 선보이도록 하겠습니다.〈/strong〉 〈strong〉** 외부 기고문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strong〉
2026-10-24 02:3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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