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332>감히 그 누구도 훼손하지 못했던 종묘
조선 후기 관료인 하석(霞石) 한필교(1807~1878)는 1839년 종묘서령(宗廟署令)에 제수됐다. 종묘서는 종묘와 왕릉을 맡는 관청이다. 상관인 도제조와 제조는 재상이 겸직하는 자리여서 실제로는 영(令)이 관장했다. 33세의 나이에 종5품으로 승진해 중앙 관서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필교는 이듬해 자신이 근무한 관청을 화가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해서 남기겠다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며 장차 완성될 이 화첩의 서문을 자신의 서재 정관헌(靜觀軒)에서 쓴다. 이후 40여 년간 이 프로젝트를 착실히 실행에 옮겨 15점의 관아도가 개인적인 기록화이자 감상화인 독특한 '숙천제아도' 화첩으로 남았다. '거쳤던 여러 관청 그림'은 회화로 기록한 그의 이력서다. 한필교는 서울에 대대로 살며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명문가인 청주 한씨 집안에서 태어나 13세에 풍산 홍씨 집안에 장가들었다. 두 집안 모두 이른바 경화세족(京華世族)이다. 그의 장인 홍석주는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와 가까운 인척이고, 홍석주의 동생 홍현주는 정조의 유일한 사위다. 한필교는 25세 때 사은정사에 임명된 장인을 수행하는 자제군관으로 북경을 다녀오며 선진국을 체험했고 기행문도 남겼다. '숙천제아도' 화첩이 훈련받은 화원의 솜씨인 수준 높은 그림인 점은 그가 쏟은 애정과 아울러 그런 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던 집안 배경도 있었다. 아쉽게도 한필교는 '화공(畵工)'이라고만 했을 뿐 화가를 밝혀놓지 않았다. 이 화첩에 그려진 경관직 관아는 목릉, 제용감, 호조, 종묘서, 사복시, 선혜청, 종친부, 도총부, 공조 등 9곳이다. 이 중에서 지금까지 그 자리에 온전하게 정전, 영녕전, 공신당, 칠사당, 전사청, 재실, 악공청, 망묘루 등의 건축물이 남아 있는 곳은 종묘가 유일하다. 조선왕조에서 나라의 근본으로 삼은 최상위 시설물이어서 감히 누구도 훼손하지 못했다. 지금은 '정전'으로 부르는 건물이 '종묘서'에는 '종묘'로 적혀있다. 건물과 문을 비롯해 부속 시설을 세세히 그렸고 이름을 모두 기록해뒀다. 정전은 가로 100m가 넘는 웅장한 목조 건축이지만 여기서는 전체 공간의 구조와 위치 관계를 한 눈에 보여주는 압축적인 방식으로 이미지화 했다. 넓은 구역의 많은 건물을 작은 화첩에 모두 넣으면서도 세부 표현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붉은 직선으로 길도 표시했다. 궁궐 좌우에 종묘와 사직을 두는 좌묘우사(左廟右社)는 유학에서 수도를 경영하는 원칙이었다. 종묘는 조상을, 사직단은 땅과 농사를 상징한다. 1995년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2001년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건축 공간과 여기에서 펼쳐지는 제사 의례, 제사 음악까지 인류적 보편성을 얻은 장소가 종묘다. 대구의 미술사 연구자
2026-01-28 19:16:20
그 사람은 나무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나무를 가꾸는 건 자신의 면목을 세우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나무는 올봄에도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그 사람은 친구들을 불러 나무를 보여 주었습니다.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칭찬했습니다. 아름답다. 근사하다. 기품이 있다. 수려하다. 나무에 대한 소감이 이어졌습니다. 그때 한 친구가 나무의 키가 좀 더 크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친구들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나무를 쳐다보았습니다. 나무의 키가 커지면 꽃과 열매도 훨씬 많아질 거라고 친구 하나가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곤 친구들에게 열매를 건넸습니다. 다들 맛있다고 말했습니다. "나무의 약속은 언제나 달콤하지." 그 사람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무의 열매를 나무의 약속으로 치환한 재치가 훌륭하다고 친구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습니다. 늦가을. 나뭇잎도 열매도 다 떨어진 어느 날, 그 사람은 옆으로 뻗은 나뭇가지를 사정없이 잘랐습니다. 나무가 부르르 떨며 뭐라고 했지만 그 사람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 사람은 일고여덟 살 이후 본격적으로 인간의 언어를 습득하면서 나무와의 대화에 소홀했습니다. 그 사람의 팔뚝이 나뭇가지보다 굵게 되었을 무렵엔 나무의 언어를 깡그리 잊어버렸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은 나무와 대화한 적이 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이듬해 봄, 다시 꽃이 피고 열매가 달렸습니다. 그 사람은 또 친구들을 불러 나무를 보여 주었습니다. 친구들은 키가 커진 나무가 근사해 보인다고 했습니다. 너희들 덕분이야. 그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습니다. 그해 여름, 나무는 벼락을 맞고 커다란 가지 두 개가 부러졌습니다. 나무는 균형을 잃고 삐딱해졌습니다. 친구들이 말했습니다. "보기 싫다. 뽑고 새 나무를 심어. 정원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워." 그때 나무가 있는 힘을 다해 외쳤습니다. "벼락은 내 약속이 아니었어." 인간의 귀엔 그 말이 바람소리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채 익기도 전에 떨어진 열매를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고 하는군." 친구들은 볼품없는 열매를 나무의 공약(空約)으로 바꾼 그 사람의 순발력을 칭찬했습니다. 가만히 지켜보던 나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인간들과의 대화가 가능했다면 일일이 해명하고 바로잡느라 열매를 키울 시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날 밤, 나무는 착한 봄바람의 도움을 받아 계절과 한 약속을 지켰습니다. 부러진 가지에서 움을 틔운 것입니다. 나무는 인간과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꽃이나 열매는 계절의 낙관(落款)이며 벌과 나비는 자연영농조합에서 보낸 성실한 직원들입니다.
2026-01-28 19:12:39
[날씨] 1월 29일(목) "대체로 맑겠고, 울릉도 독도 눈"
2026-01-28 18:39:01
나이가 들수록 치근은 약해도 자꾸 갈비구이가 좋아진다. 갈비 관련 요리는 크게 탕·찜·구이로 삼분된다. 갈비찜, 이건 궁중요리 중 하나. 원래 달달한 것인데 70년대 대구에서 매콤한 버전으로 변신한다. 마늘과 고춧가루가 섞인 '동인동찜갈비'이다. 갈비탕은 설렁탕과 함께 서울의 양대 탕으로 자릴 잡는다. 구이용 쇠고기의 경우 서울은 등심, 대구는 갈빗살이 대세다.국내 갈비구이문화는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큰 흐름을 형성한다. 북한은 평양, 남한은 서울경기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특히 평양에서 갈비와 평양냉면이 1920년대부터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은 '평양우'라는 육질이 우수한 한우 품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주와 사리원의 너비아니(불고기)도 그런 배경을 안고 태어난다. 1931년 당시 인구 2천만 명이었던 한반도. 한우 숫자는 얼마나 될까. 무려 1백63만7천19두였다. 사실 1970년 대동기계에서 경운기와 트렉터를 생산하기 전만 해도 쇠고기는 소시민에게는 '언감생심 고기'였다. 아무튼, 남한 갈비구이의 시작은 1945년 수원 '화춘옥'에서 비롯된다. 화춘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단골집이기도 했다. 79년 화춘옥 자리에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화춘옥의 역사도 막을 내린다. 이후 이목동 노송거리와 동수원거리에 갈비촌이 형성된다. 1956년부터 선을 보인 수원갈비는 해운대로 전파돼 해운대갈비를 파생시킨다. 해운대 암소숯불갈비도 그런 연유로 태어난 것이다. 수원갈비는 갈비 폭이 10~13㎝. 간장과 조미료를 쓰지 않고 소금으로 양념을 한다는 특징이 있다. ◆팔도 갈비벨트이후 경기도 포천 이동갈비가 갈비특수를 선도한다. 포천군 이동면 일대는 이미 50~60년대 갈비구이 집단 촌락이 형성된다. 전성기는 86아시안·88서울올림픽게임 때. 그러나 이른바 '본드 갈비' 보도 여파 등 악재가 겹쳐 이동갈비촌은 점차 시들해진다. 이를 극복하려고 '원조 이동 김미자할머니갈비' 등이 새로운 진용을 짰다. 이동갈비는 양적인 푸짐함을 추구해 갈비를 반으로 잘라 2~3㎝ 크기로 짧게 토막을 내고 간장양념에 재는 형태였다. 그새 서울 도심에 각종 갈비촌이 확산된다. 81년 11월 강남 신사동에 '삼원가든'이 생기고 나서부터 '늘봄', '서라벌', '초성공원', '한강장', '강남장' 등 15개소의 대형 가든형 갈빗집이 들어섰다. 구파발, 일영, 벽제 등 변두리에 가든형 갈비집들이 우후죽순 들어선다. 대구도 발빠르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대신동 '진갈비', 그 다음은 신암동 '신성가든', 고성동 '대창가든' 등이 70년대 구이시대를 선도한다. 80년대 들면서 '대구갈비전성시대'가 전개된다. 서구에선 '한국가든', 이어 남구 앞산네거리 근처에 '앞산가든'과 '가야동산'이 맹위를 떨친다. 중구 반월당 근처에서 출발했던 '제주가든'은 범어네거리 쪽으로 옮겨 기세등등하게 성장한다. 이밖에 한솔가든, 부일갈비, 오륙도, 한일가든, 경북가든, 푸른동산, 늘봄 등이 불판을 뜨겁게 달구다가 사라지고 만다. ◆88서울올림픽 갈비붐서울 갈비집에선 갈비를 한쪽으로만 뜨는 '외갈비'를 선호했다. 다이아몬드 칼집도 이때부터 넣기 시작한 것. 반면 강북지역 식당에서는 갈비를 양쪽으로 포 뜨는 '양갈비'를 내밀었다.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양념을 하지 않은 생갈비가 득세를 한다. 90년대초 수입 LA갈비가 등장한다. 갈비구이를 집에서도 쉽게 먹을 수 있게 됐다. 갈비도 구역별로 이름이 있다. 제1~5번 갈비는 '본갈비'. 갈비 근육이 살코기와 지방이 세 겹으로 층을 이루는 것이 특징. 마블링이 좋아 생갈비구이에 이용해도 무난하나 등급이 낮은 것은 통갈비로 썰어 찜으로 만드는 것이 좋다. 제6~8번 갈비는 '꽃갈비'. 양념하지 않고 칼집을 넣은 생갈비구이에 좋다. 제9~13번 갈비는 '참갈비'. 본갈비에 비해 섬유질과 근막이 많고 거친 편이다. 꽃등심과 양지의 중간 정도 맛이 난다. 갈비뼈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 갈비탕에 좋다. 서울에서는 흔히 꽃갈비만을 구이용으로 사용하는데 영남지역은 1~13번을 통째로 사용한다. 아무튼 대구의 본격적 갈비붐을 주도한 건 동산동 갈비골목의 터주대감이었던 '진갈비'였다. ◆진갈비의 추억 대구에서 갈비용 전동톱을 맨 처음 사용한 식당은 어딜까? 중구 대신동 갈비골목의 첫 단추랄 수 있는 진갈비였다. 그전에는 다들 도끼로 절단했었다. 청도군 운문면에서 태어난 진홍렬. 그의 별명은 '진갈비'였다. 그가 등장할 때만 해도 대구에선 소갈비가 무척 낯설었다. 그는 모험을 걸기로 맘먹고 1961년 오픈한다. 5년 뒤 '태동갈비'가 생기고 뒤이어 '성주식당' 등 16개 업소가 밀집하게 된다. 진갈비는 훗날 원갈비, 태동갈비, 성주식당과 함께 동산동 갈비골목 4인방으로 수십년 호시절을 구가했지만 도심재개발 때문에 다 사라지고 지금은 이전한 성주식당 정도만 남았다. 진갈비는 진 사장이 고인이 되었지만 재개발 사업이 끝나면 가족경영이 재개될 모양이다. 그 시절엔 식육점 주인들이 도축할 소를 공동 구매해 서구 원대3가 내환병원 옆에 있었던 도축장(거기에 있던 신흥산업은 63년 성당못 옆에서 삼익뉴타운 근처로, 다시 북구 유통단지로 옮긴다)에서 고기를 가져왔다. 그는 금복주 대신 진로 측과 손을 잡고 진로의 '진'(眞) 자를 넣어 진갈비로 상호를 정한다. 어둠이 깔리면 대신네거리는 온통 갈비가 익으면서 생긴 연기로 뒤덮인다. 그 냄새가 워낙 구수해 경찰들도 은근하게 업소지도를 핑계로 접대를 받곤 했다. 당시 갈비는 1인분으로 팔지 않고 한 대(약 15㎝)씩 팔렸다. 초창기 한 대 가격은 20원이었고 생갈비보다는 양념갈비가 유행했다. 수원갈비는 큼직하게 잘랐지만 그는 5㎝ 정도로 알맞게 잘라 팔았다. 간장과 마늘, 설탕, 배, 참기름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갈비양념을 만들어 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재는 시간을 가르쳐주는 이가 없어 숱한 시행착오를 한 끝에 6~10시간이 적당하다는 걸 체험적으로 알아낸다. 그 시절 갈비 요리의 최대 제약조건은 저온숙성 문제였다. 지금처럼 고기 전용 냉장고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아이스박스에 얼음을 넣고 고길 저장했다. 여름엔 몇 시간만 방치해도 고기가 변질돼 먹을 수 없었다. 단골들의 상에 그런 고기를 얹을 수 없었다. 어떤 날에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하루에 황소 7마리 반을 팔아치운 적도 있다. 산림보호 차원에서 당국이 숯불가게에서 참나무 숯을 못 쓰게 하는 바람에 한때 화차용 갈탄으로 고기를 굽기도 했다. ◆대박 구이집대구의 소고기 관련 음식도 패턴을 갖고 발전해나간다. 처음에는 육개장, 따로국밥 등이 축이었다. 이어 시장, 섬유공장, 북성로 공구골목 등의 경기가 살아나면서 회식수요가 폭증한다. 이에 부응한 게 불고기와 갈비다. 불고기는 계산동 '땅집', 갈비는 '진갈비'가 대표격. 이 두 음식을 하나로 묶으려고 한 게 '동인동찜갈비'다. 1991년 수성구 만촌동에 가공할만한 숯불구이집이 등장한다. 바로 '비원'이다. 김옥순 사장은 그걸 인척에게 물려주고 1999년 갈비 전문 한정식인 '안압정'을 연다. 이 업소 때문에 그동안 등심 중심이었다가 갈비살 중심으로 변하게 된다. 안압정과 쌍벽을 이룬 갈비집 중 하나가 수성구 '만포장가든'. 사장 박영희는 1981년 대구에서 주물럭등심 붐을 주도한 '한국가든'의 오너였다. ◆대구의 안동갈비1998년 6월. 대구 갈비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직 흐름하기만 하던 신축 KBS대구총국 골목 중간에 '안동갈비'가 오픈한 것이다. 밀양 출신의 김희곤과 대구 출신의 김정원. 부부는 혹독한 신혼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외국계 회사 영업사원이었던 남편은 너무 착하고 세상 물정을 몰라 엄청난 부채를 떠안고 파산하게 된다. 돈이 만든 절벽 앞에 선 부부는 절규했다. 툭하면 사채업자가 찾아왔다. 아내는 한푼이라도 벌 요량으로 1일 학습지 선생으로 뛰어다녔다. 아내는 이제 도시의 꿈을 버리고 시골로 들어가자고 고집했다. 남편은 결국 트럭을 구입했고 적당한 길목에 세워놓고 종일 과일을 팔았다. 역시 아내의 육감은 남편보다 한 수 위였다. 갑자기 연애시절 안동역에서 먹었던 안동갈비가 생각났다. 60여년 전 안동역전에서 출발한 '서울식당'. 그 식당주는 서울에서 내려온 서원님, 서 씨 할매는 서울 갈비문화에다가 인근 의성의 좋은 마늘을 신의 한 수 식재료로 투입했다. 안동 토박이가 아니라 서울댁이 새로운 버전의 안동갈비를 붐업시키게 된다. 서울갈비 뒤에 거창갈비가 들어와 오래 두 식당이 안동갈비를 전국에 알린다. 현재 운흥동 안동역전은 갈비골목으로 변했다. 무려 15개 업소가 난립해 있다. 아무튼 부부는 안동의 맛을 대구로 갖고 왔다. 채 1주일도 안 돼 별미를 맛보려는 손님들로 장사진을 쳤다. 그렇게 19년 정도 거기서 보람찬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아내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터진다. 어느 날 남편이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2008년 8월, 아내가 사장이 된다. 안동갈비로는 특허가 나지 않아 유사 갈비집이 난립한다. 나중엔 남구 봉덕동 '봉덕맛길'도 안동갈비 거리로 변한다. 원래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수성구 범어동에 직영점격인 '정원갈비'를 열었다. 그걸 육부장한테 넘기고 새로운 장소를 찾아 새롭게 발진했다. 그게 황금네거리 '한국관' 맞은편 이면 골목에 자리한 '혜동식당'이다. 그 흐름을 이어받은 핫플 갈비집은 달서구 도원동 월광수변공원 내 '참한우숯불갈비집'이다. 이와 함께 대신동 섬유빌딩 옆 '국일생갈비', 범어동 하양농장식육식당, 경산 자인 남산식육식당 등도 꾼들을 많이 이끌고 있다.
2026-01-28 14:00:00
[세풍-이용호] 유엔 헌장 기초자들(drafters)의 통곡(痛哭)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마주하면서, 유엔 헌장의 기초자들은 이러한 대재앙이 다시는 이 땅에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꿈꾼 지구촌은 국가들이 대등한 입장에서 선량한 이웃으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국가 간 다툼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약속하였고, 동시에 무력 사용 및 그 위협을 금지하는 '무력사용금지원칙'도 수용하였다. 지난 81년 동안 국제 평화와 안전을 지키는 최후의 방파제로서 작동해 온, 유엔 헌장상의 '무력사용금지원칙'은 때때로 강대국들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곤 했다. 그들은 자국의 이익과 충돌되는 경우, '자유와 인권의 수호' 내지 '국내법 집행'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지를 둘러대서 무력 사용을 정당화해 왔다. 그런데 최근의 무력 사용, 예컨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베네수엘라의 마두로(MADURO) 전 대통령 압송 작전, 덴마크의 자치령인 그린란드의 병합 움직임 등에서는 거추장스럽던 포장지마저 아예 벗어던진 채 돌진하는 모양새이다. 그 다음 타깃은 어쩌면 캐나다와 쿠바가 될 것이고, 그다음은…. 이처럼 무력 사용(전쟁)을 통한 이익의 강탈이 거대한 흐름으로 퍼져가는 현실은 유엔 헌장을 한낱 종이 조각에 불과한 것으로 몰아가고 있다. 어쩌면 유엔 시대가 종언(終焉)을 고하고, 약육강식의 논리가 폭넓게 작동하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는 전환점을 맞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유엔 헌장의 기초자들이 영속될 것으로 믿었던 무력 사용의 금지라는 신념이 흐트러진다면, 그들은 한 세기도 버티지 못하고 폐기될 위기에 처한 자신들의 신념을 끌어안고 통곡할지도 모른다. 통계에 의하면, 역사의 기록이 남아 있는 기원전 1496년 이래 지금까지, 약 3천500년 동안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단지 227~268년에 불과하다. 실제로 불과 120년 전만 하더라도, 국가 간 다툼이 발발한 경우에, 국가는 전쟁에 호소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시대를 대변하는 대표적 이론이 '무차별전쟁관'이다. 전쟁을 서부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일종의 '결투'와 같은 것으로 인식한,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전쟁을 바라보는 주류적 관념이었다. 전쟁을 불법시한 최초의 국제적 문서가 1907년 제2차 헤이그평화회의에서 채택된 '포터(Porter) 조약'이고, 그 완결판은 유엔 헌장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당연시되고 있는 '무력사용금지원칙'이 도입된 것은 81년 전의 일에 불과하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이 벌이고 있는 '힘의 지배'는, 트럼프 대통령과 같은 유별난 지도자의 문제만이 아니라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을 것이다. 이러한 도전 앞에서, 세계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국제평화주의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제국주의로 회귀할 것인가? 이는 전적으로 세계인의 몫이다. 만약 세계의 평화를 원한다면, 분연히 일어나서 평화를 쟁취하는 일에 함께해야 한다. 81년 전, 유엔 헌장의 기초자들이 가졌던 '평화 공존'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되새기면서 말이다. 급변하는 안보 환경 속에 놓인 대한민국도 이러한 흐름을 잘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제평화주의의 길은 힘과 간절함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도 '자주국방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강조하였다.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차근차근 준비할 때이다. 이용호 영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26-01-28 05:00:00
[사설] 내부 분란 국민의힘, 지도부 중심으로 한목소리 내라
국민의힘 윤리위원회가 친한(친한동훈)계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게 '탈당 권유' 중징계를 내렸다. 이에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북한 수령론' '나치즘' 같다며 맞받았다. 정부·여당의 폭주(暴走)에 한목소리로 맞서도 부족한 마당에 '집안싸움'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김 전 최고위원이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관과 다르다고 당원과 국민이 선출한 장동혁 대표를 향해 "집권과 득표를 위해 영혼을 판 것" 등으로 비판한 것은 분명 잘못이다. 국민의힘 역시 이 문제를 '경고' 등으로 조치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것은 한 전 대표와 국민의힘 지도부 간의 갈등과 불신이 기저(基底)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 전 대표의 '당원게시판 논란' 역시 한 전 대표가 해명(解明)할 것은 해명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했더라면 지금처럼 돌이키기 힘든 상황(윤리위 제명 처분)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에 검사들이 반발하자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항명" "반란"이라며 엄중 처벌을 요구했다. 하지만 항소 포기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자 민주당 의원들은 '논쟁의 장'에서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철수했다. "동지란 비를 함께 맞아주는 것"이라던 민주당은 강선우·김병기 의원의 '공천 헌금' 등 논란이 여론의 뭇매를 맞자 탈당을 권유하거나 스스로 탈당했다. 내부 이견이 있더라도 어느 순간 '하나의 목소리'로 통일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국민의힘은 운명·정책 공동체라기보다 '각자도생(各自圖生) 정당'처럼 보인다. 사안마다 지도부 판단, 의원 개인의 계산이 다르다. 그 결과 국민의힘에서 나오는 말들은 정책이나 가치가 아니라 '소음'처럼 들리기 일쑤였다. 싸워도 홀로 싸우고, '위기'에 처하면 뭉쳐 싸우기는커녕 '거리두기'로 피해 버린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탄핵에 이른 과정에는 국민의힘의 '지리멸렬'과 '각자 다른 계산'도 하나의 큰 원인이었다고 본다. '한목소리' '일사불란함'은 집단사고(동조)에 따른 실패, 윤리 기준 퇴색, 외부 불신 초래(招來) 등 폐해와 위험을 내포한다. 하지만 지금 국민의힘처럼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걸음마도 떼지 못하는 수준에 비하면 훨씬 낫다. 넘어질 위험은 조심이라도 할 수 있지만, 걸음마도 떼지 못하는 정당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국민의힘은 '한목소리'를 내는 정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대책이 없다.
2026-01-28 05:00:00
[사설] TK 행정통합, 정치적 리더십과 상생 의지에 달렸다
대구경북(TK) 행정통합이 급진전되고 있다. 대구시와 경상북도는 TK통합추진단을 가동했고, 경북도의회는 28일 본의회에 통합 동의안을 상정(上程)해 표결한다. 통합 동의안이 경북도의회에서 가결되면, 대구시와 경북도는 주민 의견 수렴과 통합 법률 제정 등 후속(後續) 절차에 들어간다. 행정통합 재추진 의지는 확고하나, 통합을 위한 남은 과정은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경북도의회의 동의를 받는 게 일차 관문(關門)이다. 2024년 행정통합 추진 당시, 대구시의회는 통합 동의안을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통과시켰으나 경북에서는 '북부권 소외(疏外)'를 우려한 북부권 도의원 전원이 반대 입장을 밝히는 등 부정적 기류가 강했다. 물론 이번엔 여건이 다르다. 도의회 내부에 통합 긍정 여론이 형성되고 있고, 시·도가 통합청사 기존 체계 유지와 북부 지역 균형발전 방안을 명시했다. 그래도 낙관(樂觀)할 수 없다. 마지막까지 북부권 설득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국회의원을 비롯한 TK 정치권은 대체로 통합 필요성에 공감하지만, 각론(各論)에서는 여러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26일 국민의힘·경북도 주최로 열린 행정통합 간담회에 참석한 경북 지역구 의원 대부분은 통합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북부권 일부 의원들은 부정적 의견을 밝혔다고 한다. 시장·도지사 선거 출마 예정자들의 입장도 제각각이다. 행정통합 여부에 따라 선거 판도와 정치적 유불리(有不利)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현역 의원들이 대거 포함된 대구시장 선거 후보군에선 '속도론'과 '신중론'이 갈린다. 경북도지사 후보군에선 3선 도전을 선언한 이철우 도지사를 제외하면 '신중론'이 강세를 나타내고 있다. 행정통합은 대구경북 미래가 걸린 사안이며 국가 어젠다(agenda)다. '통합은 생존 전략'이란 점을 공감하는 정치인들이 각론에서 이견을 보인 것은 '정치 셈법'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정치인 개인의 이해득실이나 당리당략(黨利黨略)을 앞세울 상황이 아니다. 눈앞의 이익보다 대의(大義)를 좇는 정치적 리더십, TK의 상생 정신이 필요하다.
2026-01-28 05:00:00
[사설] 25% 관세 폭탄 위기 자초한 정부, 그동안 뭐 하고 있었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6일(현지시간) 소셜미디어를 통해 "한국 국회가 역사적인 무역 협정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면서 한국에 대한 관세(關稅)를 무역 합의 이전 수준인 25%로 다시 인상(引上)한다고 했다. 청와대는 "미국 측의 공식 통보나 설명은 없었다"며 당황했다. 그런데 미국은 이미 2주 전에 관세 협상 이행을 촉구하는 서한을 한국 경제부총리 앞으로 보냈다는 것이 전해졌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재명 정부는 미국 측의 요구에도 '가만히' 있다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인상 선언이 나오자 화들짝 놀라며 겨우 대책 마련에 들어간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무능(無能)과 무책임(無責任)의 전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미 정부는 지난해 7월과 10월 '전략적 무역 및 투자 협정'에 합의하고, 그해 11월에는 공동 팩트시트까지 발표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국회 비준(批准)이 필요하다는 국민의힘 제안을 무시하고 곧바로 '대미투자특별법'을 발의(發議)했다. 하지만 그 후 아무런 진전 없이 사실상 방치되어 왔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관세 공세에는 다른 속내도 포함되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와 여당은 미 국무부의 우려 표명에도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미국 기업에 대한 차별 조치라는 비판을 받는 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추진하고 있다. 쿠팡 사태와 표현의 자유 및 종교 탄압 논란 역시 미국의 우려를 사고 있다. 이재명 정부의 미국과 중국 사이의 어정쩡한 '실용'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해석이다. 안정세를 보이던 환율이 또다시 급등하고 있다. 책임 있고 안정적인 국정 운영 없이 경제 발전을 기대할 순 없다.
2026-01-28 05:00:00
[관풍루] 금(金)·은(銀)값 치솟는 사이에 다이아몬드 값은 반토막.
○…이재명 대통령이 생리대 가격 부담 문제를 지적한 가운데, 국내 주요 생리대 제조사들이 '반값' 중저가 제품을 잇달아 선보인다고. 진즉 생필품 담합 꿍꿍이 벌일 생각 말고 본질에 충실했어야. ○…지난해 대규모 해킹 사고 여파에 정부, 인공지능(AI) 및 유출된 개인정보 악용한 2차 피해 위험 경고. '개인' 정보가 아닌 '공용' 정보가 된 판국에 AI까지 가세하니 사이버 보안 빨간불. ○…금(金)·은(銀)값 치솟는 사이에 다이아몬드값은 반 토막. 인조 다이아몬드 기술 발달에 혼인 감소까지 여파를 미쳤다는데. 빛나던 다이아몬드의 시절은 이제 다시 오기 어려울 듯.
2026-01-28 05:00:00
[날씨] 1월 28일(수) "대체로 맑겠고, 울릉도 독도는 눈이 오겠음"
2026-01-27 18:48:49
대구의 주요 상권인 동성로와 들안길, 광장코아를 걷다 보면 활기 대신 '임대' 안내문이 눈에 들어온다. 환율 급등이 불러온 고물가, 장기화된 고금리, 회복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내수 침체가 동시에 덮쳤다. 여기에 인건비 상승과 임대료, 각종 공과금과 원재료비까지 더해지며 자영업자의 경영 여건은 한계점을 넘어섰다. 전국적으로 한 달에 수만 명의 개인사업자가 폐업 대열에 합류하고, 대구경북 지역 역시 예외가 아니다. 평균 대출액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불어나 있고, 연체율은 빠르게 상승 중이다. 중대형 상가의 공실률이 두 자릿수를 넘어섰다는 사실은 단순한 경기 순환이 아니라, 지역 상권 자체가 구조적으로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경고다. 지역 건설 경기 침체라는 또 다른 악재가 겹쳤다. 공사 중단과 미분양, 투자 위축은 건설 현장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일자리가 줄면 소비가 줄고, 소비가 줄면 골목 상권이 직격탄을 맞는다. 자재 업체와 운송, 숙박·외식업, 각종 서비스업으로 충격은 연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역 경제의 혈관이 막히는 상황이다. 시민들이 체감하는 행정의 존재감은 너무도 희미하다. 대구시장 부재로 인한 행정 공백은 장기화되고 있고, 관가는 위기 대응보다 상황 관망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정치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 정치권은 민생보다 셈법에 몰두한 모습이다. 책임 있는 해법은 잘 보이지 않는다. 시민의 박탈감은 커지고 있다. 정치인들 역시 공천과 유불리에 매달린 채, 고통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자영업자의 절규에는 둔감하다. 그 사이 현장은 무너지고, 문 닫는 가게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난다. 눈치 보기와 책임 회피는 결국 소극 행정과 무사안일로 귀결된다. "조금 더 지켜보자" "선거 이후에 논의하자"는 말이 반복되는 동안 민생은 하루하루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지금의 위기가 국내 문제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글로벌 금융 불안, 지정학적 긴장, 공급망 불안 등으로 서민경제는 가장 먼저, 가장 크게 흔들린다. 이런 시기일수록 공직자와 정치인은 본분을 돌아봐야 한다. 권력은 누리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국민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애민 정신이다. 국민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보듬는 자세, 무한한 봉사 정신, 그리고 선공후사의 태도다. 자영업자를 단순한 '지원 대상'이 아니라 지역 경제의 뿌리이자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대하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영세 자영업자를 위한 실질적인 채무 조정과 이자 부담 완화, 임대료 안정 장치, 플랫폼 수수료 개선과 같은 피부에 와닿는 대책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나아가 단기 처방을 넘어 지역 상권의 체질을 개선하는 중장기 전략도 고민해야 한다. 문화·관광·체험형 소비를 결합한 상권 재편, 지역 특성을 살린 콘텐츠 육성은 다시 장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만드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행정은 시민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존재여야 한다. 정치권은 신뢰를 증명해야 한다. 자영업자는 도시 경제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눈물이 멈추지 않는 한, 도시의 미래도 밝을 수 없다. 정치와 행정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다음 선거 이후에도 같은 절규는 반복될 것이다.
2026-01-27 15:45:18
뉴턴의 운동 제3법칙은 "모든 작용에는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반작용이 있다"라고 요약된다. 이 문장은 흔히 작용이 먼저이고 반작용이 뒤따른다는 인과 관계로 오해된다. 그러나 두 힘은 앞뒤의 관계가 아니다. 서로 다른 물체에서 동시에 발생한다. 과학 교과서에서 출발한 이 표현이 일상의 언어로 옮겨오는 순간, 그 동시성은 쉽게 사라진다. 사회의 언어 속에서 반작용은 대개 '뒤늦게 나타난 문제'나 '불필요한 저항'으로 소비된다. 하지만 작용과 반작용은 서로를 상쇄하거나 멈추게 하는 법칙이 아니다. 오히려 운동이 가능해지는 조건에 가깝다. 이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을 가르는 기준도, 옳고 그름을 기계적으로 나누는 양비론도 아니다. 작용만으로 완결되는 변화는 없고, 반작용 없이 지속되는 현실도 드물다. 귤을 까면 알맹이와 껍질은 분명히 나뉜다. 우리는 대개 알맹이를 목적처럼 여기고 껍질은 주저 없이 버린다. 그러나 껍질은 정말로 쓸모없는 것일까. 귤껍질은 말리면 '진피'라는 한약재가 된다. 소화를 돕고 담을 없앤다는 기록은 오래된 의서에 남아 있다. 알맹이를 먹고 남은 껍질은 쓰임을 알지 못할 때만 쓰레기다. 어릴 적 감기 기운이 있으면 어른들은 귤껍질을 말려 달인 물에 꿀을 타 주곤 했다. 김이 오르는 컵을 두 손으로 잡고 호호 불며 마시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달콤 쌉싸름한 맛과 향이 섞인 그 물은 약이자 위로였다. 알맹이를 먹고 남은 껍질은 시간이 지나며 전혀 다른 역할로 돌아왔다.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정책이든, 어떤 유행이든 등장하는 순간 반작용은 함께 발생한다. 그것은 변화의 실패라기보다 변화가 실제로 사회의 어딘가를 건드렸다는 신호에 가깝다. 반작용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변화가 현실에 닿았다는 증거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알맹이만 남기고 껍질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문화는 특히 그렇다. 중심이 생기면 주변이 생기고, 주류가 등장하면 비주류는 말을 건다. 작용만을 변화의 방향으로, 반작용을 장애물로 여기는 태도는 귤껍질을 무조건 버리는 습관과 닮아 있다. 알맹이와 껍질은 한 몸으로 태어났지만, 서로를 전제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자주 묻는다. 무엇이 더 옳은가, 무엇이 더 쓸모 있는가. 그러나 문화의 질문은 조금 달라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알맹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이며, 너무 쉽게 껍질로 밀어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 껍질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을까.
2026-01-27 09:53:38
[여행이 들려주는 마케팅 이야기-하태길] 인류 최초의 브랜드, 피라미드
피라미드(Pyramid)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초'의 브랜드다. '최초'라는 말은 '최고(古)'일 뿐, '최고(高)'는 아니다. 그럼에도 '최초'는 오리지널(Original)이라는 이미지 덕분에 언제나 대중에게 특별한 가치로 보장받는다. '최초임'을 부각시키는 전략은 마케팅에서 시장의 인식을 선점하고 지배하는 힘을 갖는다. '최초'라는 말이 새롭다(New)이면서 동시에 가장 오래되었음(The oldest)을 뜻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런 의미에서 피라미드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초이자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브랜드라 할 수 있다. ◆피라미드는 시간을, 브랜드는 신뢰를 수많은 해석과 추측이 난무하는 피라미드를 마주하기 위해, 나는 병오년(丙午年) 새해 이집트 카이로(Cairo)로 향했다. 아잔(Adhan) 소리로 시작된 카이로의 1월 아침 공기는 좀처럼 맑아질 생각이 없었다. 나일강 위를 떠다니는 회색 먼지는 시간의 경계마저 흐려놓았고 도시는 흑백 필름과 같은 풍경을 이어갔다. 그때 빌딩들 사이로 드러난 삼각형의 윤곽이 시선을 붙잡았다. 건물과 도로, 일상의 틈 속에 끼어든 4600년 시간은 그 크기조차 가늠하지 못하게 했다. 기자(Giza)의 피라미드는 오래전부터 나의 버킷리스트(Bucket List)였다. 기원전부터 한자리에 머물러 온 존재만으로 전 세계가 추앙해 온 건축물이다. 이집트는 문명의 시작일 뿐 아니라 메시지를 설계하는 방법을 가장 먼저 체득한 곳이기도 하다. 왕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각인시키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하나의 서사로 설득한 최초의 브랜딩이었다. 오늘날 마케팅이 감성과 스토리에 주목한다면, 우리가 브랜드라 부르는 것의 원형은 이미 이집트 문명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기자 평원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쿠푸(Khufu) 왕의 대피라미드가 시야를 압도했다. 태산처럼 솟아오른 그 모습 앞에서 시선은 자연스레 위로 끌려 올라갔다. 그 옆의 조금 더 높은 지대에 자리한 카프레(Khafre) 왕의 피라미드는 실제로는 쿠푸의 피라미드보다 작지만, 지형과 착시 효과로 인해 멀리서 보면 오히려 더 커 보였다. 꼭지점에 남아 있는 외장석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은 이 거대한 구조물이 한때 얼마나 눈부셨을지를 짐작하게 했다. 그 앞에는 스핑크스(Sphinx)가 있었다. 사자의 몸에 인간의 얼굴을 한 스핑크스는 동쪽, 곧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을 향해 수천 년 동안 묵묵히 서 있었다. 피라미드가 죽은 자의 시간을 품고 있다면 스핑크스는 살아 있는 세계와 그 시간을 잇는 수문장처럼 보였다. 여러 원인으로 훼손된 코와 달리 비교적 또렷이 남아 있는 귀는, 수천 년의 시간을 넘어 지금도 인간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듯했다. 마케팅에서도 외침이 아니라 경청이 중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광고는 조용할수록 더 주목받는다. 큰 소리와 화려한 영상 대신, 여백과 낮은 톤이 사람들의 마음을 오래 잡는다. 침묵에 가까운 순간, 사람들은 오히려 더 귀를 기울인다. 현대광고의 거장 데이비드 오길비(David Ogilvy)의 신형 롤스로이스(Rolls-Royce)의 광고, "달리는 차 안에서 가장 큰 소음은 시계 소리였다"를 시작으로, 대우자동차 레간자(Leganza) 광고 "쉿! 소리 없이 강하다", 나이키(Nike)의 차분한 내레이션(Narration), 애플(Apple)의 인간적인 사용자 목소리 역시 같은 맥락이다. 피라미드는 거대한 파라오(Pharaoh)의 무덤이기 전에, 계산된 사유의 결과물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세계를 숫자와 비율로 이해했고, 정사각형의 기단과 동일한 경사의 면을 통해 그 질서를 형태로 옮겼다. 중력에 순응하며 하중을 아래로 흘려보내는 구조와 위로 갈수록 작아지는 돌의 배열은, 공간을 감각이 아니라 힘과 균형의 문제로 인식했던 태도를 보여준다. 이처럼 피라미드는 수학과 물리의 산물이었지만, 그 계산은 현실에만 머물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이동이었다. 태양신 라(Ra)가 밤의 세계를 지나 다시 떠오르듯, 파라오 역시 육신을 벗고 다른 차원의 질서로 옮겨간다고 여겼다. 피라미드의 방향과 각도, 내부 구조는 모두 이 믿음을 전제로 설계되었다. 북쪽 하늘에 있는 불멸의 별들을 향한 통로와 태양의 상승과 하강을 반영한 배치는 신앙을 공간으로 구현한 장치였다. 사람 키만 한 돌 하나하나는 신에게 바치는 문장이었고, 그 거대한 구조 전체는 계산으로 세운 기도였다. 기원전의 피라미드를 올려다보고 있자니, 이 모든 돌덩이가 노예의 땀으로 쌓았을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그러나 기록은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피라미드는 숙련된 노동자들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나일강이 매년 범람하던 시기,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빵과 맥주를 지급하며 공사에 참여하게 했다. 피라미드는 신앙의 산물이자, 동시에 고대 이집트의 일자리 창출 프로젝트였다. 거대한 석재를 옮기기 위해 범람으로 젖은 모래의 마찰을 줄이는 방법을 찾아냈고, 이는 외계인의 도움이 아니라 자연을 관찰하고 반복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였다. 가까이서 본 피라미드는 누렇다 못해 검은빛에 가까웠다. 수천 년 동안 사막의 태양과 바람을 견뎌왔으니, 그 빛바램은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세 개의 피라미드가 한눈에 들어오는 기자 파노라마(Panoramic Point)에 섰을 때, 조금 전까지 검게 보이던 돌덩이들이 하얀색으로 변해있었다. 거리와 정오의 태양 각도가 만들어낸 착시였지만, 그 순간은 반짝이는 피라미드를 올려다보았을 고대인들의 시간과 겹쳐졌다. 낮의 빛이 사라지면 피라미드는 어둠 속으로 잠기지만 오늘의 인류는 밤에도 이 구조물을 놓아두지 않는다. 레이저 빔이라는 인공의 빛으로 태산 같은 구조물을 다시 불러내며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 기원전의 태양을 현대의 언어로 번역한다. 그렇게 낮에는 태양으로 밤에는 기술로 다시 빛나며 피라미드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살아낸다. ◆세계 박물관의 판도를 바꾼 GEM 2025년 11월 정식 개관한 그랜드 이집트 박물관(Grand Egyptian Museum)은 고대 피라미드의 시간을 현재로 이어 붙인 또 하나의 구조물이다. 외벽에서부터 내부 공간에 이르기까지 삼각형 모티프가 반복되는 디자인은 피라미드 형상을 일관되게 반영하고 있다. 박물관으로 들어서기 전,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람세스(Ramesses) 2세의 '공중에 매달린 오벨리스크(Hanging Obelisk)'였다. 전통적으로 오벨리스크는 땅에 묻히거나 받침대에 가려져 있어 고대에도 현대에도 밑면은 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 GEM(Grand Egyptian Museum)은 고대 권력의 상징을 현대 건축 언어로 재해석하여 관람객이 람세스 2세의 히에로글리프(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된 상형 문자)를 올려다볼 수 있게 의도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오벨리스크의 밑면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박물관 건립에는 약 1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었다. 그 비용에 일정 부분 기여한 국가들의 이름이 각 나라의 언어로 박물관 외벽에 새겨져 있는데, 한글 '이집트'도 찾아볼 수 있었다. 이것은 고대의 유산이 세계의 손길 위에서 지켜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내부로 들어서면, 이곳이 세계 최대 규모의 박물관이라는 사실보다 디자인이 눈을 사로잡는다. 유리와 석재는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공간 속에서 피라미드의 각을 반복적으로 구현하고 있었으며, 고대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동선 또한 삼각형 구도를 활용하고 있었다. 중앙홀을 차지한 람세스 2세의 거상 아래 펼쳐진 바닥 공간은 나일강을 형상화했다. 문명의 시작이자 왕권의 근원이었던 나일은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거대한 파라오의 반영을 물에 띄운다.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다"라는 헤로도토스(Herodotus)의 말이 이곳에서 실감 나게 되살아났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로 오르면,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기자의 피라미드가 시야에 들어온다. 그 옆 전시 공간에는 피라미드 건축의 기틀을 완성한 파라오 스네프루(Sneferu)의 석상이 놓여 있다. 제4왕조의 첫 파라오였던 그는 계단식 피라미드에서 굴절 피라미드를 거쳐, 마침내 최초의 완전한 붉은 피라미드를 완성했다. 그의 집요한 실험과 축적된 기술은 다음 파라오 쿠푸에게 이어져 대피라미드로 완성되었다. 피라미드를 등지고 서 있는 스네프루의 모습은, 이 거대한 건축 문명이 한 왕의 끈질긴 시행착오에서 시작되었음을 말없이 증언한다. 그랜드 이집트 박물관의 중심에는 투탕카멘(Tutankhamun) 전시관이 있다. 이곳에 모인 오천여 점의 부장품은 한 파라오의 짧고 연약했던 생애를 먼저 떠올리게 한다. 수십 개의 지팡이와 특별한 모양의 샌들은 찬란한 통치보다 버텨야 했던 일상이 더 많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전시된 한 줌의 머리카락은 그의 할머니 티예(Tiye) 왕비의 것으로 죽음 이후에도 가족의 보호를 받고자 했던 소망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황금관과 여러 겹의 관들은 현재 각각 분리되어 전시되어 있지만, 설명과 이미지를 통해 러시아 인형처럼 겹겹이 포개졌던 구조였음을 설명한다. 그것은 육신과 영혼을 단계적으로 지키려는 믿음의 결과였다. 1922년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에서 투탕카멘의 무덤이 훼손되지 않은 채로 발굴되면서 짧은 생애와 미미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투탕카멘은 인류 역사의 창이 되어 가장 유명한 파라오로 남게 되었다. ◆4600년을 지속한 브랜드, 피라미드 피라미드는 고대에서 머물지 않았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Pyramide du Louvre)를 떠올려 보자. 왕의 권력과 신성을 상징하던 피라미드는 예술과 지식을 상징하는 언어로 벤치마킹(Benchmarking) 되었다. 루브르의 소장품을 모두 알지 못해도 사람들은 유리 피라미드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설득된다. 또한 파리의 에펠탑(Eiffel Tower)은 기술과 진보를 과시하며 도시 전체를 하나의 브랜드로 압축했다. 그리고 현대의 미국 애플 본사(Apple Park Visitor Center)는 완벽한 원형으로 브랜드 철학과 완결성을 은밀하게 전달한다. 시대와 기술은 달라도 이러한 구조물들은 설명하지 않아도 신뢰와 경험을 심는다는 마케팅의 본질을 보여준다. 피라미드는 영원을, 에펠탑은 경험을, 애플 본사는 완결성을 쌓았다면 지금 우리가 만드는 브랜드 전략은 과연 수천 년 뒤에도 피라미드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 각인될 수 있을까?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경영학 박사)
2026-01-27 09:49:36
[사설] 예의 주시 해야 할 사상 최고 金·銀 가격의 불확실성 심화 경고음
국제 금(金)값이 사상 처음으로 온스당 5천달러를 넘어섰다. 26일(한국 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국제 금 현물 가격은 전 거래일보다 0.75% 상승한 온스당 5천19.85달러를 기록했다. 금값이 역사상 처음으로 5천달러를 넘어서 최고가를 기록한 순간이다. 은(銀)값 역시 지난 23일 사상 처음으로 온스당 100달러를 넘어선 뒤 완만한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금·은값이 치솟는 것은 지정학적 긴장과 글로벌 불확실성이 겹치며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강해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금값은 지난해 65% 상승했으며, 올해 들어서만도 16% 상승했다. 은은 귀금속인 동시에 첨단 산업 분야에서 수요가 높아 지난해 150% 이상 급등했다. 예로부터 금과 은은 부와 번영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의 금·은값 상승은 '불안 심리의 반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금·은값의 가파른 상승은 금융시장 내 다양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고 화폐 가치가 하락하고 있다는 일종의 위험 신호일 수 있다. 자본이 위험을 감수해 미래의 성장을 추구하기보다, '가치 보존'을 우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큰 폭의 금값 상승은 트럼프발(發) 국제 질서 흔들기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그린란드 병합 추진으로 인한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이 갈등과 관세 폭탄, 이란 공격 가능성 등 지정학적 리스크가 안전자산에 대한 선호를 부추겼다. 달러 시스템에 대한 불신도 금값 상승에 기름을 부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입맛대로 통화정책을 펼칠 인사가 이번 주 중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되면 독립성 훼손에 따른 증시 불확실성과 달러 약세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 현재 한국은 실물 경기 위축, 화폐 유동성(流動性) 증가, 부동산 가격 급등, 미국과의 금리 역전세 지속, 원화 약세 등 대내외 악재가 겹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 당국은 실물 자산 가격 급등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혹시나 모를 위기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때다.
2026-01-27 05:00:00
[사설] 신규 원전 건설로 유턴, 그동안 낭비한 시간이 아깝다
정부가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에 담긴 신규 원전 건설을 계획대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대형 원전 2기를 2037년과 2038년에 준공하고, 2035년까지 소형모듈원자로(SMR)를 도입한다는 기존 일정을 확인했다. 인공지능(AI) 확산과 산업 전력 수요 급증에 대응해 안정적 전원(電源) 확보가 불가피하다는 판단이다. 전기본은 향후 15년간 국가 전력 체계를 규정하는 최상위 계획이다. 11차 전기본은 재생에너지 확대 기조를 유지하면서 결국 기존 전원의 한계를 이유로 원전을 택했다. 그러나 허무하게 낭비한 시간은 마냥 아쉽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취임 직후 "신규 원전 건설 여부는 국민 공론을 거쳐야 한다"고 했고, 이재명 대통령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AI 확산에 따른 전력 수요 전망과 여론 흐름이 분명해지자 결국 신규 원전으로 회귀했다. 대형 원전 건설에 13년 이상 걸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문재인 정부 시절 탈원전 정책도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신한울 3·4호기 건설은 설계 단계에서 중단됐고, 영덕 천지원전을 비롯한 신규 계획이 백지화됐다. 당시엔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 등의 전력 수요 급증을 예측할 수 없었다고 해도 전력 정책은 장기적(長期的) 선택지를 넓히는 방향을 지켜야 했다. 문제는 선택 이후다. 원전은 방사성폐기물 처리와 부지 선정 갈등이라는 숙제를 동반한다. 정부는 원전 필요성을 설득하는 단계를 넘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의 주체가 됐다.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특별법' 처리 등 제도적 기반 마련은 미룰 수 없는 과제다. SMR은 기술보다 제도가 더 큰 장애물이다. 인허가, 안전 규제, 입지 기준, 전력 시장까지 새로 손봐야 한다. 원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를 뒷받침할 전력망 확충이다. 정부는 12차 전기본에서 수요 전망과 에너지 대책을 흔들림 없이 제시하고, 갈등 관리와 실행 능력을 구체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전력 정책의 혼선이 반복될수록 비용은 미래로 이월(移越)될 수밖에 없다.
2026-01-27 05:00:00
[사설] 李정부 '자주국방', 말만 앞선다는 우려 불식할 수 있나
트럼프 미 행정부는 지난 23일 발표한 국가방위전략(NDS)에서 한국이 "중요하면서도 더욱 제한적인 미군의 지원을 받으며 대북 억제에서 책임질 능력이 있다"고 했다. 북한의 핵(核) 위협에 대해서는 핵우산을 제공하지만, 북한의 재래식 공격을 막기 위한 억지력 구축에서는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이 더 빨라지고, 한국의 방위비 분담은 크게 증가할 전망이다. 주한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따른 대중(對中) 견제 등 역할 변화도 예상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와 관련, 소셜미디어를 통해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에 자주국방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며 "북한 GDP(국내총생산)의 1.4배나 국방비를 지출하며 세계 5위 군사력을 가진 대한민국이 스스로 방어하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씀처럼 들리지만,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벌어진 국방 관련 사안들을 돌이켜 보면 말만 앞서는 자주국방(自主國防)이 아닌지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국방부는 2028년까지 상비군 50만 명을 유지할 계획이었지만, 6년 사이 11만 명이 줄어들어 지난해 45만 명이 됐다. 지난 20년간 국군 사단 20개가 사라졌다. 이런 문제를 로봇과 드론 등으로 메운다고 했다. 그런데 이재명 정부 국방 자문위는 출범 2년 남짓 된 '드론작전사령부' 폐지를 권고(勸告)했다. 12·3 계엄에 따른 정치 보복이라는 분석이다. 정치를 앞세우면 자주국방은 구호(口號)로만 남는다. 최근에는 육군 한 부대에서 오발 사고 위험 등을 이유로 위병소 근무 시 총기 대신 플라스틱(또는 금속) 삼단봉을 휴대하라는 지침을 내렸다가 논란 끝에 철회(撤回)됐다. 군대가 아니라 보이스카우트 캠핑장 같다는 비판의 소리도 나온다. 연초에는 1조8천억원에 달하는 국방비가 제때 지급되지 않아 각급 부대의 정상적인 운영에 지장을 초래하는 사상 초유의 일도 발생했다. 모두가 국방력을 훼손하는 자해 행위이다. 안보관(安保觀)의 획기적 각성이 필요하다.
2026-01-27 05:00:00
[관풍루] 강선우 의원에게 '공천 헌금' 1억 원 건넨 김경 서울시의원 의원직 사퇴, 받은 사람은 끄떡없고, 준 사람은 사퇴.
○…李 대통령 최측근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 징역 5년 보석 중에 출판 기념회 연다고. 통일교 금품 수수 의혹 전재수 전 장관은 출마용 현수막 100개 걸어. "지금은 이재명 시대니까요." ○…강선우 의원에게 '공천 헌금' 1억원 건넨 김경 서울시의원 의원직 사퇴, 받은 사람은 끄떡없고, 준 사람은 사퇴. 믿는 구석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다르지. ○…총리실 "차기 서울시장 여론조사에 김민석 넣지 말아 달라" 요청에 방송인 김어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임명직 국무총리가 어디 감히 '상왕(上王)'에게!
2026-01-27 05:00:00
2026-01-26 19:10:10
[김용삼의 근대사] '개명군주' 고종의 망국 후 사생활을 엿보다
1910년 대한제국은 인구 1천600만 명, 만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였다. 그런데 총 한 방 쏘지 않고 허망하게 주권을 일본에 넘겼다. 고종이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이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맞서 싸우자"라면서 투쟁의 선두에 섰다면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변했을까? 반일 감정이 일상화된 한국에서 망국의 시기에 고종이 어떤 행동을 보였는가는 흥미로운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과연 고종은 나라가 망할 무렵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갔을까를 추적하는 것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일부일처제를 도입했다. 당시 서구 열강들이 일부다처제를 미개하고 야만적인 풍습이라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등장시킨 슬로건이 "강한 나라는 깨끗한 가정을 가진다"라는 것이었다. 근대화를 추구하던 메이지 정부는 천황 일가부터 일부일처제를 솔선수범하여 서구와 대등한 도덕 수준을 갖춘 문명국으로 나가고자 했다. 말하자면 천황을 통해 '모범적 가장(家長)'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였다. 문제는 메이지 천황의 부인 쇼켄(昭憲) 황후가 자녀 생산을 못 해 천황가의 대가 끊길 판이 되었다. 결국 메이지 천황만은 예외를 인정하여 측실(후궁) 제도를 통해 아들 요시히토를 얻었다. 그가 다이쇼 천황(재임 1912~1926)이다. 다이쇼 천황은 데이메이(貞明) 황후와의 사이에서 아들 넷을 두어 후계 구도가 안정되면서 이때부터 천황가는 일부일처제가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메이지 천황과 동갑(1852년생)이고, 비슷한 시기에 왕위에 오른 고종은 조선의 전통이었던 일부다처제를 승하할 때까지 온몸으로 실천했다. 왕실의 번창이 국가의 번창이라는 전통적 유교 가치관을 충실히 이행하려 했던 의지의 결과물로 보인다. 12세에 즉위한 고종은 15세 때 민치록의 딸과 혼인한다. 그가 '민비'라 불린 민 왕후다. 하지만 고종은 왕비보다 연상의 궁녀에 더 관심을 보였다. 1868년 4월 고종은 궁녀 이 씨에게 '승은(承恩)'을 입혀 아들 완화군을 얻었다. 당시 고종은 18세, 궁녀 이 씨는 고종보다 9년 연상인 27세였다. 1874년 정식 왕비인 민 왕후가 정통 적자 이척을 낳으면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다. 첫 아들 완화군은 뒷방으로 밀려났고, 완화군은 13세 때 홍역으로 죽었다. 두 번째 후궁 장 씨는 고종보다 14세 연상의 여인이었다. 그녀도 고종의 '승은'을 입어 임신했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 왕비 민 씨의 분노를 사게 될까 두려워 궁 밖으로 나가 1877년 아들 이강을 출산했다. 궁 밖에서 기구하게 자란 이강은 태어난 지 14년 후인 1891년에야 고종으로부터 '의화군'이란 군호를 받고 왕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입궁 전까지 시장바닥의 건달, 무뢰배들과 어울렸고, 왕자가 된 후에도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는 등 궁궐 법도를 무시하고 기행을 일삼는 사고뭉치 시한폭탄이었다. ◆'뚱뚱하고 천박한' 엄 상궁 총애한 고종 고종의 여성 편력 중에서 주목의 대상은 엄 상궁이다. 다섯 살에 입궁하여 궁녀가 된 엄 상궁에게 임오군란은 축복이었다. 민비는 난병을 피해 궁에서 탈출하여 장호원으로 피신했고, 실종된 민비를 대신하여 고종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사람이 엄 상궁이다. 이때의 공을 인정받아 그는 왕과 왕비 곁에서 시중을 드는 시위 상궁에 임명되었다. 이 와중에 1885년 엄 상궁이 고종의 '승은'을 입은 사실이 밝혀졌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이 된 민 왕후의 분노가 폭발했고, 엄 상궁은 그 즉시 궁에서 쫓겨났다. 내쫓긴 엄 상궁은 먹고 살기 위해 신분이 천한 남성과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하게 나돌았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895년, 을미사변으로 민 왕후가 일본인에게 참혹하게 시해 당했다. 사건 발생 닷새 후, 궁에서 왕비의 피비린내가 가시기도 전에 고종은 엄 상궁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다. 이 모습을 본 황현은 "임금이 쓸개 빠진 짓을 했다고 서울 사람들이 모두 한탄했다"는 말을 남겼다. 엄 상궁의 입궐 다음 날, 고종은 "왕비 자리는 하루라도 비어 있어서는 안 된다"라며 왕비 간택령을 내렸다. 이것은 고종의 뜻이 아니라 을미사변의 후유증을 축소하기 위해 일본공사관이 친일 내각에 압력을 넣어 벌인 일이었다. 고종은 "이는 나의 뜻이 아니므로, 누가 간택되든 왕비로 인정하지 않겠다"라며 저항했다. 친일 내각의 강압 조치로 광산 김씨 집안의 17세 된 처녀 정화당 김 씨가 새 왕비로 결정됐다. 고종은 새 왕비를 소가 닭 보듯 했고, 곧이어 발생한 춘생문 사건으로 정화당 김씨는 정식 간택되지 못하고 출궁 당한다. 그녀의 입궁이 허락된 것은 1917년 5월이다. 입궁 후에도 김 씨는 궁궐 후미진 방에서 독수공방했다. 고종 사망 후 유해를 상면했을 뿐, 그녀는 황후 예우는커녕 후궁 예우도 받지 못하고 수절하며 살다 죽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고종은 신분이 미천한 데다 추문이 자자했던 엄 상궁을 끔찍하게 총애했다. 엄 상궁은 민 왕후 찜쪄먹을 정도로 미신을 섬겼고, 고종의 총애를 등에 업고 매관매직에 앞장섰다. 독일 영사 크뤼거는 엄 상궁에 대해 "뚱뚱하고 천박하며, 얼굴에 마마 자국 가득한 추한 여인"이라고 기록했다. 다른 외교관들도 "지독하게 탐욕스럽고, 고종을 심리적으로 지배하여 국고를 탕진하게 만드는 인물", 혹은 "권모술수에 능한 기회주의자"로 평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엄 상궁 임신시켜 영친왕 출생 1896년 2월 고종은 궁녀 가마에 숨어 러시아공사관으로 탈출한다. 아관파천 당시 궁녀들을 단속하여 국왕을 무사히 탈출시킨 일등 공신은 엄 상궁이었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생활하는 동안 천러파 이범진과 결탁한 엄 상궁은 고종 주위를 내시·궁녀로 철통같이 에워싸고 권력 장악에 성공했다. 고종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러시아공사관에서 생활했다. 그 기간 내내 엄 상궁은 고종을 지극정성으로 보필했고, 고종은 그녀에게 '승은'을 입히는 것으로 화답했다.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환궁 8개월 만인 1897년 10월, 엄 상궁은 영친왕 이은을 낳았다. 출생일을 역산해 보면 고종은 남의 나라 공사관에 숨어 지내는 동안 그곳에서 엄 상궁을 임신시켰음을 유추할 수 있다. 뜻있는 선비들은 국모 원수도 갚지 못한 상황에서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에서 후궁과 아이 만든 사실을 참혹한 수치로 여겼다. 게다가 엄 상궁이 영친왕 이은을 낳았을 때 나이가 43세였다. 지금이야 의학의 발달로 노산(老産)이 흔하게 되었지만, 19세기 말에는 할머니 소릴 들을 나이에 첫 아이를 출산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40 넘은 여자가 어떻게 아이를 낳느냐"라는 의혹과 온갖 추문이 횡행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종은 자기 자식을 출산한 엄 상궁을 정4품 귀인에 봉했고, 1900년 정1품 순빈, 1년 후 순비로 승격하여 벼락출세했다. 엄비는 막대한 비자금을 살포하여 자기를 황후로 책봉키 위한 공작을 개시했다. 하지만 주자성리학 탈레반이나 다름없는 최익현의 태클에 걸렸다. 최익현은 "과거가 불분명하고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인을 어찌 국모로 모시겠느냐"라며 고종에게 목숨 걸고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고종의 눈 밖에 난 최익현은 흑산도로 유배 가는 신세가 되었다. 비자금의 효력 덕분인지 의정부 의정 윤용선은 엄비가 아관파천의 일등 공신이니 그 공로를 감안하여 황귀비(皇貴妃)로 봉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황귀비란 명·청 황제의 후궁 작위, 황후(皇后)에 준하는 으뜸 후궁 칭호다. 고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1903년 12월 순비 엄 씨를 황귀비로 봉해 국모나 다름없는 지위를 부여했다. 총애하는 엄비를 위해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작위를 급조한 것이다. ◆망국 후 궁녀에게서 2남 1녀 얻은 고종 엄비가 황귀비로 봉해지면서 그녀를 보필하는 경선궁이 설치되었고, 엄청난 규모의 내탕금(황실 개인 자산)과 토지가 하사되었다. 경선궁 관리를 맡은 엄비의 남동생 엄준원은 전국의 비옥한 토지를 헐값에, 혹은 강제 매입하거나 압류 방식으로 경선궁 재산으로 편입시켰다. 그는 황실의 공적 자신을 엄비 일가의 개인 금고처럼 운영하여 원성이 자자했다. 장안에는 "벼슬하려면 엄비 치맛자락을 잡거나, 엄준원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라는 말이 상식으로 통할 정도였다. 관직을 얻기 위해 엄준원에게 막대한 뇌물 바치면, 엄준원은 그 명단을 여동생 엄비에게 넘겼다. 경선궁을 중심으로 매관매직 시스템이 왕성하게 작동한 것이다. 이렇게 모은 자금은 엄씨 일가의 호화 생활과 재산 증식에 사용됐다. 엄준원은 숙명·진명학교를 세웠고, 엄비의 7촌 조카 엄주익은 양정의숙을 세웠다. 학교 설립 및 운영자금은 고종이 하사한 황실 자산과 경선궁 수익금이었다. 황실 자산으로 개인 명의의 사립학교를 설립한 셈이다. 1910년 한일병합 기운이 감돌자 엄준원·엄주익은 황실 소유의 토지와 자산을 학교 법인 명의로 돌려 일제의 몰수를 피했다. 두 사람은 떳떳치 못한 돈으로 학교를 세워 교육자로 행세했고, 일제 시절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유력자로 떵떵거리며 살다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고야 말았다. 황귀비 엄 씨는 병합 후인 1911년 7월 20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57세 나이로 사망했다. 병합 후 덕수궁 이태왕으로 물러난 고종은 여러 궁녀들에게 '승은'을 입히는 것으로 소일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고종이 61세 되던 1912년, 덕수궁 소주방 나인(주방 식모) 출신 양 씨가 덕혜옹주를 출산했다. 63세 때는 경복궁 세수간 나인(무수리) 출신 이 씨가 '승은'을 입어 아들 이육을 낳았고, 64세 되던 1915년에는 궁녀 정 씨가 '승은'을 입어 아들 이우를 낳았다. 두 아들은 유아 시절 죽고, 덕혜만 생존했다. 덕혜옹주는 일본 유학 시절 조현병이 발병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것이 '개명 군주' 고종의 망국 후 사생활의 진면목이다.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2026-01-26 15:08:35
〈여름 한낮〉 빽빽한 햇살이 광장을 가로질러 걷는다 위태롭지도, 번거롭지도 않다 수백 번, 수천 번 뜨겁게 용해되는 햇살의 문장들 광장 가득 퍼져 나간다 빛이 숨을 쉬며 침묵 사이로 일렁인다 나뭇가지 그림자가 꽉 찬 고요를 이끌고 한낮이 길게 포효하는 울음 사이 텅 빈 쓸쓸함 거품처럼 부풀어 오르는 먹구름 한줄기 소낙비가 간절한 칸나의 붉은 입술 〈시작 노트〉 대학 4학년 여름 방학. 혼자 완행열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 적 있었다. 시골 간이역에 내렸는데 작은 광장과 조용하고 깨끗한 시골 정취, 광장 주변에 가득한 여름꽃들과 소나기구름, 광장을 가득 채웠던 햇살, 앞날에 대한 불안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또 다른 설렘. 단지 뜨겁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을 그 여름. 이 모든 게 여름이면 꿈처럼 생각이 나서 시로 옮겨 보았다. 서툴고 여리기만 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2026-01-26 06:30:00
댓글 많은 뉴스
한동훈 "국민의힘, 북한수령론·나치즘…정상 아니야"
고국 품으로 돌아온 이해찬 前총리 시신…여권 인사들 '침통'
李대통령 "담배처럼 '설탕 부담금'은 어떤가" 제안
李대통령 "국회 입법 속도 너무 느려…일을 할 수가 없어"
홍준표, 김종혁 징계에 "용병세력 일당 절연 못하면 당 내분 끝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