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23 18:40:47
[사설] 호르무즈 봉쇄 규탄 뒷북에 국내 비축유 해외 유출, 뭐 하는 건가
이란 전쟁으로 원유 수급 불안이 증폭되고 있는 와중에, 해외 기업이 울산 석유비축기지에 보관 중이던 90만 배럴 규모의 국제공동비축 원유를 해외로 판매한 사실이 밝혀졌다. 국제공동비축 사업은 해외 기업의 원유를 석유공사의 유휴 비축시설에 저장하고, 비상시 우선 구매권을 행사해 국내 수급 안정을 도모하는 제도이다. 원유 수급 비상 사태가 발생한 현재, 우리 국민이 사용해야 할 원유를 정부 당국이 우선 구매권(優先購買券)을 행사하지 않아 해외로 유출되게 한 셈이다. 한국석유공사는 "지난 8일 해당 물량을 국내 정유사가 구매하는 협의가 진행 중인 점을 확인해 별도 조치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다음 날 해외 정유사로 판매를 추진하면서 공사는 우선 구매권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손주석 석유공사 사장은 지난 6일 취임하자마자 울산 석유비축기지를 찾아 "비축유 방출 무결점 대응"을 선언했지만 말뿐이었다. 산업통상부 역시 "감사 결과 규정 위반 등이 확인될 경우 엄중히 문책할 예정"이라며 석유공사 측에 책임을 떠넘기기 바쁜 모양새이다. '4월 에너지 대란설'이 현실로 다가오는 비상시국에 청와대와 정부는 '국내에 보관된 원유마저 지키지 못하면서 대체 뭘 하고 있나'라는 비판이 쏟아질 만하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 정부는 20일 밤 입장문을 내고 '이란군이 호르무즈 해협을 사실상 봉쇄한 것을 가장 강력한 표현으로 규탄한다'는 국제 공동성명(共同聲明)에 동참한다고 밝혔다.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사안의 전개를 돌이켜 보면 과연 이런 방식으로 국익(國益)을 지킬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당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군함 파견을 공식 요청했던 국가 중에서 미국의 동맹·우방이 아닌 중국을 제외하면 한국만 유일하게 성명에서 빠졌었다. 이후 캐나다마저 동참하자 뒤늦게 한국도 헐레벌떡 마지못해 참여한 모양이 되고 말았다. 국가의 명운(命運)이 달린 비상 상황인 만큼 정부의 위기관리·대처 능력을 재점검해야 한다.
2026-03-23 05:00:00
[사설] 대전 화재 대형 인명 피해, 위험물 관리 소홀이 부른 참사
지난 20일 오후 1시 17분쯤 대전의 자동차 부품 제조 공장 '안전공업'에서 불이 나 사망자 14명 등 7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인명 피해 규모가 커진 데는 공장 내 위험물질, 공장 건물 구조로 인한 급격한 연소(燃燒) 확대, 휴게(점심) 시간 중 화재로 인한 대피 어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특히 이 공장은 사고 20여 일 전 소방 당국으로부터 '위험물안전관리법 위반' 통보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초기 진화 골든타임을 놓치게 만든 '나트륨' 취급과 관련, 면밀한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건물 내부에는 나트륨 약 101㎏이 보관돼 있었는데, 물과 접촉하면 폭발할 수 있는 물질이다. 소방 당국은 폭발 위험을 고려해 나트륨을 별도의 안전한 공간으로 긴급 이송한 뒤에야 화재 진압에 나설 수 있었다. 이 와중에 보낸 시간이 2시간여로, 초기 인명 구조를 어렵게 만들었다. 그사이 불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는데, 공장의 샌드위치 패널 구조가 불길 확산을 키웠다. 철판 사이에 스티로폼이 들어간 '샌드위치 패널'은 스티로폼이 불쏘시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는 2년 전 30명의 사상자를 낸 리튬전지업체 아리셀 참사와 여러모로 닮았다. 샌드위치 패널이 화재에 취약(脆弱)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 3년간 전국에서 발생한 샌드위치 패널 화재는 모두 8천200여 건으로 모두 546명이 숨지거나 다친 것으로 집계됐다. 정부는 5년 전 불이 나도 10분 이상 견딜 수 있는 '준불연(準不燃)' 소재 샌드위치 패널만 생산하도록 의무화해 제도를 바꿨지만, 그 이전에 지어진 건물은 여전히 화재 안전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당장 모든 사업장의 외장(外裝)을 '준불연' 소재로 바꾸기는 현실적으로 어렵겠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 삼아 위험물 관리와 공장 내부에 오래 쌓인 기름때, 구불구불한 내부 구조 등 폭발을 일으키거나 화재를 확산시킬 수 있는 환경에 대해 전수 조사하고 대피로 확인 등 대책을 마련할 때다. 인명을 잃고 나면 이미 늦었다.
2026-03-23 05:00:00
[사설] 국힘 대구시장 후보 경선 확정, 흠결 철저히 검증되어야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대구시장) 공천 과정의 논란에 대해 당 대표로서 죄송스럽다"고 말했다. 장 대표는 "대구 의원들 얘기는 '시민 공천을 해달라'는 취지"라며 "공관위원장과 소통(疏通)해서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후보가 나올 수 있도록 당 대표로서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대구시장 후보 공천과 관련, 국민의힘 내부 갈등(葛藤)이 터진 것은 이정현 공천관리위원장이 '대구시장 후보 공천에서 지역 다선 의원 컷오프(공천 배제) 방침'을 밝히면서부터였다. 이 위원장은 변화와 쇄신을 위해 신인들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중앙당의 낙하산 공천'이라는 비판만 초래했다. 정당이 세대교체를 원한다면 제도(현직 단체장 또는 다선 의원 등 기득권에 경선 감점 등)를 통해 보완(補完)할 수 있음에도 특별한 흠결 사유도 아니고 다선이라고 '컷오프' 방침을 고집함으로써 분란을 키운 것이다. 특별한 결함(缺陷)이 없다면 경선 기회를 주는 것이 정당 민주주의에도 부합한다. 역대 대구경북 지방선거에서는 국민의힘 계열 정당이 사실상 독식(獨食)했다. 하지만 6·3 지방선거를 눈앞에 둔 현재 대구 민심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더불어민주당은 이번이야말로 대구 지방 권력을 쟁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총력전(김부겸 바람몰이·기초단체장 공천 혁신·국민의힘 후보 약점 공략)을 펼칠 태세다. 이런 마당에 국민의힘은 대구시장 후보 공천을 놓고 '집안싸움'을 펼치고 있으니 대구에서 국민의힘이 민주당에 패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고조(高調)되는 것이다. 공천 관련 전권(全權)을 공관위에 맡긴 장동혁 대표 입장에서 "민심이 (공천관리위원회에) 잘 반영(反映)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최대치 표현으로 평가된다. 이정현 공관위원장 역시 본인의 '정치 철학'이 '지역 민심'과 괴리(乖離)가 있다면 민심을 수용하는 것이 옳다. 시민들 또한 후보들의 장단점과 본선 경쟁력을 면밀히 살펴 주권자로서 권리를 충분히 행사해야 한다.
2026-03-23 05:00:00
[관풍루] 내정설 등 논란 일던 국힘 대구시장 후보 공천 관련 장동혁 대표 대구 찾아 "경선하겠다"며 급진화.
○…지난해 직장인 평균 연봉 처음으로 5천만원 돌파했다는 경총 보고서 나와, 대기업 성과급 잔치가 큰 영향 미쳤다는데 청년층 취업자 수 40개월 연속 감소해 일할 데 없는 청년들 허탈감·상실감 더 커지겠네. ○…트럼프 "48시간 내 호르무즈 개방 안 하면 발전소 초토화" 위협에 이란 "더 심한 대응" 맞불, 점점 더 수렁 속으로 빠지는 중동 전쟁과 트럼프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는 미 중간선거. ○…내정설 등 논란 일던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 공천 관련 장동혁 대표 대구 찾아 "경선하겠다"며 급진화.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전 총리 출마 가능성에 대구마저 내줄까 급하긴 급했던 모양.
2026-03-23 05:00:00
2026-03-22 18:54:29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돌아오면 하루가 바로 시작된다. 아침 공기가 아직 집 안에 남아 있는 시간, 나는 자연스럽게 악기를 꺼내 든다. 독주회가 가까워질수록 연습은 더 밀도 있게 이어지고, 한 음을 오래 붙잡은 채 원하는 표현이 나올 때까지 같은 프레이즈를 여러 번 반복하게 된다. 이번 독주회에서는 톨스토이에 관한 해설도 함께 준비하고 있어서, 음악과 문장을 오가다 보면 생각이 이어졌다가 끊기고, 다시 또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그렇게 연습에 몰입해 있는 동안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 돼있다. 현관 문을 나서는 순간, 나는 조금 전까지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된다. 그렇게 하루는 자연스럽게 가족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놀이터에서 아이와 그네를 타고, 밀어주고, 다시 밀어주고, 또 밀어주면서 시간을 보낸다. 시소 위에서는 함께 장난을 치며 웃고,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그 자리에 온전히 존재하고 있다. 아이와 눈을 맞추고 웃고 있는 나 자신이 분명히 있으니까. 그런데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또 다른 흐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연주할 곡들이 계속 맴돌고, 어디에서 숨을 더 길게 가져가야 할지, 어느 부분이 아직 충분하지 않은 지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조금 전까지 붙잡고 있던 톨스토이의 문장도 다시 떠오르고, 그 사이로 마감이 코앞까지 다가온 칼럼이 스쳐 지나간다. 가끔은 하루에 여섯 시간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이와 보내는 시간도, 연습하는 시간도 어느 하나 줄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늘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쪽을 내려놓아야 하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어쩌면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야 할 장면들이 많아진 것인지도 모른다. 연습과 육아는 당장 결과가 보이지 않는 시간을 반복해야 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예전에는 모든 것을 잘 해내고 싶었지만, 그건 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그래서 요즘은 조금 덜 잘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대신 그 순간에 있는 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이렇게 두 개의 삶을 오가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감사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삶은 하나의 시간이 아니라, 여러 시간을 동시에 살아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녁이 되면 아이를 재우다 나도 함께 잠들게 되고, 깨어 있으려 애써보지만 결국 몸이 먼저 멈추게 된다. 머릿속에는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지만, 하루의 에너지는 이미 다 써버린 뒤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아이 둘, 셋을 키우는 부모들이 너무 대단하게 느껴진다. 지금의 나는 솔직히 그럴 자신이 없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삶의 크기는 어쩌면 한 명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간다. 그네를 밀어주면서도 음악을 생각하고, 음악을 하면서도 아이를 떠올리는 하루를 살아가면서, 나는 오늘도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간 사이를 건너며 살아가고 있다.
2026-03-22 08:33:08
[사설] '4월 에너지 대란설', 고통스러워도 소비 억제로 대처할 수밖에
이스라엘이 18일 이란 LNG 가스 시설인 사우스파르스 등에 대한 폭격(爆擊)을 감행했다. 이란 전쟁 발발 이후 산업 기반에 대한 공격은 처음이다. 이란은 카타르의 가스 허브를 포함, 걸프 국가들의 석유·가스 시설에 대해 보복(報復) 공격을 가했다. 미국과 이란 모두 석유 시설에 대한 공격이 계속될 경우 '파괴적인 보복'을 경고하고 나섰다. UAE(아랍에미리트)·카타르 등 걸프 국가들의 석유 관련 인프라가 파괴될 경우 호르무즈 해협의 통행이 정상화되더라도 운송할 원유·가스 자체가 없어져 세계적 대란(大亂)이 우려된다. 특히 한국은 이곳에서 원유 등을 70%나 의존하고 있어 초비상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 탈원전(脫原電)을 주창하며 LNG 발전소를 대거 건설한 것이 에너지 안보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정부는 UAE로부터 2천400만 배럴을 최우선 공급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고 밝혔지만, 국내 8일치 소비량에 불과하다. 비축유(備蓄油)로 208일을 버틸 수 있다는 설명 역시 수출 물량을 빼면 68일치밖에 남지 않는다. 당장 4월이 오면 정유사 비축 물량이 소진(消盡)되기 시작한다. 국제 공동 비축분 우선 구매, 러시아산 수입 검토 등 대책을 세우고 있지만 수급 불안을 피할 길은 없어 보인다. 주유소 기름값만이 문제가 아니다. 원유를 추출해 만드는 나프타 등의 공급 부족으로 화장품·패션, 건설·반도체·의료기기, 라면·과자 등 포장지, 매트리스·침대, 자동차 시트까지 거의 전 산업에서 쇼크가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란 전쟁 초기부터 기름값을 낮춰 소비자 불만을 달래는 미봉책(彌縫策) 대신, 이 같은 공급 리스크를 반영해 수요를 줄이는 정책을 도입했어야 한다. 에너지 소비를 줄이지 않으면 석유·가스 구입에 막대한 외화를 지출하고, 가격 안정을 위해 또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어야 한다. 모두가 국민 부담이고 고통(苦痛)이다. 이제 대중교통 이용, 걷기, 절전 등 에너지 다이어트의 생활화와 이를 뒷받침할 정책으로 위기를 넘길 수밖에 없다.
2026-03-20 05:30:00
[사설] 대구시장 국민의힘 후보 공천, 경선만이 후유증 최소화하는 길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가 6·3 지방선거 대구시장 후보 선출에서 지역 다선 국회의원들을 '컷오프(공천 배제)'하겠다고 밝힌 이래 온갖 억측(臆測)과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공관위는 지역 다선 의원들을 기득권으로 규정, "새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다선 의원들은 "혁신 대상은 공관위가 아니라 지역민이 정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공관위 스스로 분란을 키우고 있다고 본다. 지역 의원들과 민심 반발에도 국힘 공관위가 '컷오프' 방침을 고집하자 일각에서는 "특정 후보를 밀어주기 위한 작전" 같은 확인되지 않은 말이 나온다. 그런 '설(說)'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그런 말이 떠도는 것 자체가 국민의힘에 도움이 될 리 없다. 게다가 그런 억측은 "대구는 국민의힘이 막대기를 후보로 꽂아도 찍어 주는 곳"이라는 오명(汚名)을 안기는 처사인 만큼 대구 지역민들에게는 모욕(侮辱)이다. 긴 세월, 미우나 고우나 국민의힘을 지지해 온 대구 시민들에게 모욕을 안겨서는 안 된다. 선거에서 공천 방식은 단순히 후보를 선정하는 절차를 넘어 민주주의의 질을 가늠하는 기준이다. 중앙당 공관위가 후보를 낙점(落點)하는 이른바 하향식 공천 또는 일방적 '컷오프'는 전략적 판단에 도움이 될 수 있으나 지역 주민 뜻과 괴리(乖離) 가능성이 크다. 지역 당원과 유권자의 참여를 유도하고, 각 후보들이 지역 현안을 더 열심히 살피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지역민의 뜻을 먼저 물어야 한다. 상향식 공천에는 조직 동원 능력, 지역 토호(土豪) 영향력 등 부작용이 존재한다. 이런 문제들은 감점 또는 가점 등을 통해 보완할 수 있다. 그런 노력 없이 공관위가 일방적으로 특정 후보를 '컷오프'할 경우 승복(承服)하지 않을 것이고, 후보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경쟁력을 키우기보다 중앙당만 바라보는 '해바라기'로 전락하게 된다. 국민의힘은 일정 지지율 이상 후보 모두에게 경선 기회를 제공, 잡음과 논란을 조속히 종식하고 본선거에 집중해야 한다.
2026-03-20 05:00:00
[사설] 고유가·강달러·금리 제약, 정부 정책 대응능력 시험에 들었다
미 연방준비제도가 18일(현지시간) 기준금리를 연 3.50~3.75%로 두 차례 연속 동결하며 긴축 기조를 이어갔다. 시장이 기대했던 금리 인하 시점은 중동발(發) 에너지 충격 변수에 밀려 후퇴하는 모양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관세와 에너지 가격 상승이 가져올 인플레이션 악화 우려를 표하며, 금리 인상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 매파적(통화 긴축 선호) 태도를 보였다. 국제 유가는 배럴당 110달러대로 올라섰고, 원·달러 환율은 1천500원을 돌파하며 금융위기 이후 유례(類例)없는 변동성을 보인다. 수입 물가는 8개월 연속 상승세다. 이란의 주요 가스전 피격 이후 유가 급등은 석유제품과 공공요금 등 소비자물가 전반에 그대로 반영된다. 1.25%포인트(p)까지 벌어진 한미 금리 격차는 자본 유출 위험을 키운다. 최근 한국은행 금통위가 공개한 점도표(點圖表·금리 전망을 나타낸 도표)에서 위원 대다수가 '6개월 후 금리 유지'를 택한 것은 대외 불확실성을 반영한 결정이다. 중동 사태가 장기화하면 한은은 경기 둔화에도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오히려 올려야 할 수 있다. 부동산 가격 불안과 고금리에 노출된 가계부채 문제는 한은의 선택지를 극도로 좁힌다. 정부가 외환시장에 경계감을 표하며 국내시장복귀계좌(RIA) 등 자본 유입책을 내놓은 것은 적절한 대응이다. 그러나 단기 처방을 넘어 환율 급등과 유가 폭등 등 극단적 상황에 대비한 '스트레스 테스트'에 만전을 기하고, 필요시 100조원 이상 시장 안정 프로그램을 즉각 가동할 수 있어야 한다. 국회 통과를 앞둔 추가경정예산 역시 재정 당국이 밝힌 대로 적자국채 발행 없는 '초과 세수 활용' 원칙을 지켜야 한다. 고유가 직격탄을 맞은 취약계층과 영세 자영업자에 대한 '핀셋형 차등 지원'에 집중해야 물가 자극을 최소화하며 정책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대외 환경 불확실성이 상수(常數)가 된 시대에 통화와 재정 정책 공조는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중동 긴장이 해소되지 않는 한 '긴 호흡의 위기 관리'라는 시험대에 서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26-03-20 05:00:00
[관풍루] 광화문 광장 방탄소년단(BTS) 컴백 공연 2일 앞두고, "연차 사용 강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여성 스토킹 살인 피의자 신상 공개에 사람 잃고 뒤늦은 사후 약방문. 올해만 5번 경찰에 신고한 바 있는데도 결국 길거리에서 허망하게 죽어 가. 필요시 가해자 신병 확보해 범행 원천적으로 막는 예방 노력 시급. ○…광화문 광장 방탄소년단(BTS) 컴백 공연 2일 앞두고 "전 직원 반차 사용하라"는 공지 올리거나 일방 휴업 통보했던 인근 회사들. 고용노동부 장관이 "연차 사용 강제는 안 된다"고 했는데? ○…국민의힘 공관위, 중진 의원과 현역 지자체장 '컷오프' 방침 속에서 갈등이 불거진 대구·충북 일대에서 특정 후보 내정설까지 등장. 오죽 뜬금없는 후보들이 등판하니 구설에 오르지.
2026-03-20 05:00:00
[베스트셀러] 3월 셋째 주(3월 12일~3월 18일)
◆이번주 베스트셀러(2026년 3월 12일~3월 18일 기준) 1. 인생을 위한 최소한의 생각/ 신영준, 고영성 2.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스즈키 유이 3. 완벽한 원시인/ 자청 4. 프로젝트 헤일메리 (영화 특별판)/ 앤디 위어 5. 나의 완벽한 장례식/ 조현선 6. 인생 마지막에 쓰는 주식투자 교과서/ 정규준 7. 부처님 말씀대로 살아보니/ 토니 페르난도 8. 2026 큰별쌤 최태성의 별별한국사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1,2,3급) 상/ 최태성 9. 2026 큰별쌤 최태성의 별별한국사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1,2,3급) 하/ 최태성 10. 박곰희 연금 부자 수업/ 박곰희
2026-03-19 09:51:36
[사설] 호르무즈 호송 작전 동참, 우리의 생존과 국익이 걸린 문제
UAE(아랍에미리트) 대통령 외교보좌관은 18일 "호르무즈 해협의 안전과 보안을 보장하기 위해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적 노력에 동참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앞서 아사히신문은 '(그동안 소극적이었던) 일본 정부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요구한 호르무즈 해협 함정 파견(派遣)과 관련해 자위대를 보내는 쪽으로 방침을 정하고 관련 세부 절차에 착수(着手)했다'고 긴급 뉴스로 보도했다. 독일을 포함한 일부 유럽 국가들이 "이란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은 것과 대비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17일(현지 시간) 트루스소셜을 통해 "미국은 대부분의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同盟國)으로부터 이란 테러 정권에 대한 우리의 군사작전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통보를 받았다"며 동맹국의 지원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동맹국의 배신(背信)적 행태에 대해 역대급 분노를 나타냈다는 소식도 들린다. 미군 중부사령부는 18일 이란 대함미사일 기지들에 대해 강력한 공습을 감행했다. 호르무즈 해협 통행 정상화에 대한 강력한 의지(意志)를 보인 셈이다. UAE와 일본의 태도 변화는 유럽 국가들과 달리 해협 정상화에 엄청난 국익(國益)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란으로부터 이스라엘보다 많은 미사일·드론 공격을 당한 UAE는 8명이 사망하고 원유 판매 차질로 막대한 손실을 보고 있으며, 일본은 수입 원유의 90%를 호르무즈 해협에 의존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원유 등은 대부분 아시아로 향한다. 한국 역시 원유 수입의 70%를 이곳에 의존하는 만큼 호르무즈 해협의 안전은 곧바로 생존(生存) 및 국익과 연결된다. 직접 전쟁에 참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自國) 유조선을 보호하는 군사 활동은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 국익과 나라의 운명이 걸린 호르무즈 해협 사태를 '남의 집 불구경' 하듯 하다가 향후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국제질서가 수립될 때 아무런 발언권도 갖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2026-03-19 05:00:00
[사설] 인공지능 반도체 50조원, 지원 규모보다 치밀한 전략이 우선이다
정부가 17일 'K-엔비디아 육성 프로젝트'를 통해 5년간 50조원의 금융 지원을 약속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엔비디아의 젠슨 황은 삼성전자와의 파운드리 협력을 공식화했고, AMD의 리사 수 회장은 삼성 평택캠퍼스를 찾아 차세대 동맹을 논의했는데, 이유는 명확하다. 인공지능(AI) 전쟁은 특정 반도체가 아니라 메모리·연산·전력 효율의 '통합 시스템' 최적화에 달려 있다. 데이터 병목을 해결하고 전력 소모를 줄이는 고대역폭 메모리 기술이 이를 결정짓는 핵심이다. 18일 삼성전자 주총에서 확인된 사상 최대 매출과 6세대 메모리(HBM4) 양산은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공급망의 이 같은 결정적 열쇠를 쥐고 있음을 재확인시킨다. 정부의 프로젝트는 특정 기업에 대한 반도체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의도인데, AI 경쟁을 특정 반도체 대체 싸움으로 봐선 곤란하다. 오히려 우리의 강력한 무기들을 국가적 전략에 기반해 어떻게 꿰어낼지가 필수다. 정부가 육성하려는 AI 전용 반도체(NPU)의 경우, 전력 효율은 높지만 용처가 한정적이어서 데이터센터, 자율주행, 로봇 등 명확한 공략 대상 선정이 우선이다. 전략적 부재 속에 50조원을 쏟아붓는다면 시장 혁신을 돕기는커녕, 기업들이 정부 과제 수주에 매몰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저금리 대출이나 보조금 등 일회성 수혈이 아니라 규제 혁파(革罷)를 통해 초격차 기술을 마음껏 펼칠 운동장을 만들고, 전문 인력이 넘쳐 나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반도체 패권(霸權)을 쥐기 위해 국가가 할 일은 "얼마를 투자할 것인가"라는 산술적 접근이 아니라 "어떤 반도체 생태계의 주도권을 잡을 것인가"라는 구조적 답변이다. 결국 관건은 50조원이라는 지원 규모가 아니다. 어떤 산업과 결합해 한국만의 독보적 우위를 점할지에 대한 국가적 밑그림이 먼저다. 시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뒷북 정책은 자칫 소중한 국부의 낭비로 이어질 뿐이다. 정책 당국은 지원 규모의 상징성에 취하기보다 한국 반도체가 나아갈 국가적 전략 지도부터 그려내야 한다.
2026-03-19 05:00:00
[사설] 공중보건의 실종, 지역의료 붕괴 보고만 있을 건가
오는 4월 9일 경북도 내 공중보건의(공보의) 160명이 무더기 전역(轉役)한다. 이는 현재 경북 전체 공보의 370명의 43%가 넘는 수치다. 그런데 신규 유입은 전국 통틀어도 고작 98명이다. 올해 복무가 끝나는 전국 450명 대비 충원율이 22%에 불과하다. 한 명의 의사가 여러 면(面)을 순회 진료해야 하는 '의료 난민' 사태가 불 보듯 뻔하다. 이미 보건지소 근무자의 상당수가 근무지 외에도 순회 진료를 통해 돌려막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지역의료 안전망의 붕괴' 우려가 크다. 공보의 체제 붕괴는 이미 예견(豫見)됐다. 전국 의과 공보의 규모는 2017년 2천116명에서 올해 593명으로 72%나 급감했다. 여기에 역대급 전역과 신규 유입 절벽 사태까지 겹쳤다. 정치적으로 보면 의정 갈등 사태로 학교·병원을 떠난 의대생·전공의들이 공보의 대신 '현역 일반병' 입대를 대거 선택, 의대생 현역 입대 인원이 2년 만에 11.6배나 폭증했다. 구조적으론 의대 내 여학생 비중도 늘어 공보의 자원 자체가 줄었다. 대구·경북 의대 여학생 비율은 2025학년도 38.6%로, 4년 전 대비 11.8%포인트나 상승했다. 제도적으론 복무 기간이 걸림돌이다. 육군 병사의 복무 기간은 18개월로 단축됐지만 공보의는 여전히 37개월에 묶여 있다. 사명감·경험도 중요하지만 배 이상 긴 공보의 선택을 기대하긴 힘들다는 얘기다. 경북은 전국에서 공보의 의존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다. 고령 인구에게 보건지소는 만성질환 관리와 응급 처치를 맡는 생명줄과 다름없다. 공보의가 사라지면 간단한 처방전을 받기 위해 먼 시내 병원까지 가야 한다. 이는 정주(定住) 여건 악화로 이어지고 지역 소멸을 부추기는 악순환의 고리가 될 수 있다. 현재 국회에 공보의 복무 기간을 24개월로 단축하는 법안이 발의돼 있지만 검찰개혁·사법개혁·대통령 방탄법 등에 밀려 방치된 상태다. 국민의 생명·삶과 직결된 법안보다 중요한 건 없다. 공보의의 헌신에만 기댔던 '저비용 지역의료 시스템'에 대한 수술이 필요할 때다.
2026-03-19 05:00:00
[관풍루] 정청래 민주당 대표, MBC 선거 정강·정책 방송 연설에서 "내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번이어야지…
○…정청래 민주당 대표, MBC 선거 정강·정책 방송 연설에서 "내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남아 있는 내란의 티끌까지도 완전히 청산하고 국가 정상화를 이뤄내겠다"고 말해.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어야지…. ○…국민의힘 조은희 의원, "장동혁 대표가 혁신 의지를 포기하고 바뀌지 않는다면 서울은 (선거를) 따로 하겠다는 생각"이라고 언급. 장동혁 물러나거나 아니면 살아 있어도 죽은 대표가 되라는 소리군. ○…양문석 전 민주당 의원, "변호사와 상의 결과 재판소원을 통해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한 번 더 묻는 절차를 더 이상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혀. 본인이 따져 봐도 재판소원은 말이 안 됐겠지.
2026-03-19 05:00:00
2026-03-18 19:02:05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338>인조의 어제가 있는 역사기록화 금궤도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모두 나오는 신라 김씨 왕계의 시조이자 경주 김씨 시조인 김알지(65~?) 설화를 그린 '금궤도'다. 인조의 어제가 포함된 제화가 있어 인조가 1636년 봄 이 그림을 그리게 했으며, 그림은 창강(滄江) 조속이, 글씨는 창주(滄洲) 김익희가 썼음을 알려준다. 금빛 나는 궤짝인 금궤에서 알지(아이)가 나왔으므로 금(金)을 성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기록으로 전해져왔지만 그림으로는 처음 그려진 것 같다. 조선 중기의 주요 화가인 조속은 어명으로 맡게 된 막중한 과제를 이렇게 멋진 작품으로 완성했다. 수묵화로 까치, 매화를 잘 그린 문인화가인 조속이 비단에 진채의 청록산수화로 한 폭의 역사화를 완성해낸 실력이 먼저 놀랍다. 붉은 끈으로 매단 금빛 상자, 신비스러운 형태의 나무, 사실적이면서도 우아한 하얀 닭을 좌우의 언덕과 계곡을 배경으로 중심부에 그렸다. 구름 위로 멀리 청록색 산봉우리들이 이 장면을 호위하는 듯하다. 조속은 핵심인 금궤를 화폭 정중앙에 위치시켰고, 금궤가 꼭짓점을 이루도록 주요 요소인 닭과 인물을 입체적인 삼각 구도로 배치했다. 붉은 벼슬의 하얀 수탉이 나무 뒤쪽에 있고, 계림(鷄林)으로 들어가 이를 발견한 호공(瓠公)과 파초선을 든 시종이 앞쪽에서 다가간다. 호공은 마치 고사인물화의 주인공인 듯하다. 왕이 어떤 그림에 대한 글을 직접 짓는 경우도, 그 글에 그림 속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지 않다. 어제 제화는 왕이 어떤 정치적 의도를 문화적 장치를 통해 드러내는가를 보여주는 행위다. 인조는 첫머리에 "신라 경순왕 김부의 시조"가 금궤 안에서 나왔다고 하며, "석(昔)씨의 뒤를 이어 신라의 임금"이 됐고, "그 후손인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했다"고 했다. '금궤도'는 김알지 탄생으로 인한 왕계 교체를 나타내고, 인조의 제화는 경순왕의 신라 멸망을 강조한다. 인조는 반정으로 즉위했다. 왕의 아들이 아니었으므로 정통성 시비가 없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부친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하는 일을 추진해오다 재위 13년 마침내 성공한다. 다음 해 봄 '금궤도'가 그려진다. 인조가 이 그림을 그리게 하고 어제를 지은 것은 자신의 정통성과 사직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이중의 포석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금계도'는 해석의 다양성이 열려 있는 역사사료인 동시에 뛰어난 작품인 한국미술사의 역사기록화다. 대구의 미술사 연구자
2026-03-18 17:52:44
류의 딸은 원하는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대도시에 있는 학교로 전학했다. 비슷한 시기에 내 아들 역시 취업과 동시에 대도시로 방을 얻어 나갔다. 류의 딸은 새 학기를 맞았고 내 아들은 첫 출근을 맞았다. 류는 본인보다 아내가 더 힘들어 한다고 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딸로 살아본 엄마는 현재의 딸이 처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이다. 남녀평등이 더 이상 의제가 될 수 없는 시대상황과는 별개로 세상 부모들에겐 여전히 아들보다 딸이 좀 더 애틋하다. 강변 산책길을 걷다 미루나무를 봤다. 내 눈길을 끈 건 새들이 떠나고 없는 빈 둥지였다. 언젠가 본 조류 생태에 관한 다큐가 생각났다. 인상 깊었던 장면은 하루에도 수십 번 먹이를 물어 주며 지극정성으로 키운 새끼를 때가 되면 어미 새가 얄짤없이 내치는 모습이었다. 이른바 이소(離巢). 그게 새가 사람보다 지능이 낮아서 보이는 행태라는 의견에 동의하지 못하겠다. 사랑은, 더욱이 자식에 대한 사랑은 지능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새들에게 집은 새끼를 낳고 키우는 장소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은 어떤가. 자식들이 떠나면 남는 게 집뿐인가. 옷걸이도 남고 칫솔도 남고 침대도 남고 책상 아래쪽에 붙여 두었던 껌도 남고 식탁의자도 남고 소소한 청구서며 메모장도 남고 손때 묻은 책들도 남는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부모가 남는다는 것이다. 부모가 남으니 미련과 추억 또한 떠나지 못한다. 부모는 거기에 걱정을 보탠다. 남은 집은 전보다 훨씬 무거워졌다. '빈 둥지 증후군'이란 말이 있다. 그럴싸한 말이지만 엄밀히 말해 반쪽짜리 개념이다. 사람에게 빈 둥지는 외로움과 힘겨움의 상징이지만 새들에겐 성장과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말의 어원을 더듬다 보면 상당수의 개념이 자의성에 기인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사람의 관점에서 이름을 짓는 게 마땅하다. 그에 반대할 생각도 없다. 다만 어원이 내재한 의미를 다층적으로 짚어 보자는 것이다. 어떤 말이건 말의 원점을 둥지로 삼는다. 둥지의 말을 키우는 건 사람의 태도이다. 제비나 황새 같은 몇몇 새를 제외하곤 둥지를 떠난 새들이 다시 돌아올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 그 또한 지능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어미 새가 인터뷰이라면 어떨까. "지금 심경요? 저 애들은 날개를 얻었어요. 제 몫의 하늘을 정할 수 있는 날개를요." 아이들이 온전한 날개를 얻기까지 류와 내가 비행한 거리를 따지는 건 부질없다. 내 바람은 소박하다. "부디 날개가 꺾이지 않기를!" 어떤가 류, 자네는?
2026-03-18 11:31:06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만나리니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대다수가 완독하지 못한 소설이 있다. 예컨대 '노인과 바다', '죄와 벌', '돈키호테', '위대한 개츠비', '코스모스' 등. 이 정도는 그래도 약과다. 애초에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그러나 내용은 익히 아는 국민소설, 새파랗게 어린 이몽룡과 성춘향이 어쩌고저쩌고, 곁다리로 방자와 향단이까지 연애질에 몰두하는(걸로 알고 있는) 그 이야기, 바로 '춘향전'이다. '춘향전'은 이본(異本)이 100여 종을 넘고 제목도 각기 다르다. 당시 유통 방식을 고려할 때 이본은 당연한 거지만, '춘향전'만큼 이본에 따른 편차가 심한 작품도 드물다. 달리 보면 그만큼 세간의 관심이 폭발적이었다는 방증이다. 완판 '열녀춘향수절가 84장본'과 '춘향전 경판 30장본'이 대표적인데 완판 84장본은 별춘향전 계열이 개작을 거듭해 19세기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진다. 남원고사와 더불어 현존하는 춘향전 중 가장 작품성이 뛰어난 이본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편 '춘향전'은 문학적 명성만큼이나 한국 영화사에 남긴 족적도 크다. 1935년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가 '춘향전'이고 1971년 문희, 신성일이 주연한 버전은 최초의 70㎜ 대형영화로 기록됐다.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건 1999년 임권택 감독과 조승우, 이효정 주연의 '춘향전'이다. 먼저 춘향전 경판 30장본은 익히 우리가 아는 춘향전 내용 그대로다. 일견 완판 84장본의 축약 버전인 듯하지만, 시대적 배경과 인물 설명(인조대왕 시기와 이 도령을 바람둥이로 묘사한다든지)에서 차이를 보인다. 열녀춘향수절가 84장본은 우리가 아는 춘향전의 큰 맥은 다르지 않으나 인물 설명과 감정과 심리 변화까지 세밀하게 그려내면서, 머릿속의 '춘향전'을 송두리째 뒤집어버린다. 이를테면 숙종대왕 시기 남원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청춘 남녀의 사랑과 정절과 계급의 이야기는 파격 그 자체다. 중학교 시절, 삼중당 문고로 읽은 박계주의 '순애보'(종교적 사랑을 그렸다고 들었다.)는 인물들의 성행위를 자세하게 묘사해놓아 나를 달뜨고 아득하게 만들었다. 같은 맥락으로 '춘향전'에선 기생의 딸이라고는 하나 열여섯 살 남녀가 혼전 성행위를(그것도 처음 만난 날 밤에)한다. 21세기에도 보편적이지 않은 일이 17세기 남원 땅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있었다니. 이게 다가 아니다. 몇 날 며칠 "즐기다가 날이 새면 몸을 숨겨 돌아오고, 어두우면 천방지축 달려가서 매일 놀고 자취 없이 다닌 지가 여러 날이" 되도록 서로를 탐하는 과정을 자세하고도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니, 그 수위만으로도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심지어 춘향의 정절을 임금이 칭찬해 정렬부인으로 봉하고 급제한 이 도령은 훗날 "이조판서 호조판서,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 다 지내고 퇴임한 후에 정렬부인으로 더불어 백년동락" 했다고 적고 있으니, 당시 평민에게 이보다 더 달콤한 판타지가 또 있으랴. 사또의 자제가 기생의 딸과 정혼을 약속한 후 정경부인까지 된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적은 이름 없는 창작자는 계급과 신분의 벽이 견고했던 당대 백성의 욕망을 읽었을 터. 영화로만 18번 이상 만들어졌다는 건 '춘향전' 서사에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 모든 이들의 보편적 욕망이 담겼음을 증명한다. 웬만해선 책 추천하는 걸 꺼리지만, '춘향전'은 꼭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것을 만날 테니까. 영화평론가 백정우
2026-03-18 10:3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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