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보완수사권 폐지에다 경찰에 '48시간 구금권'까지, 뭐 하자는 건가
법조계의 우려와 다수 국민들의 반대에도 더불어민주당이 검찰의 보완수사권 폐지(廢止)를 밀어붙이는 가운데, 민주당 지도부가 발의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에 경찰이 피의자로 추정하는 사람을 긴급 체포해 48시간 구금할 수 있는 조항이 포함돼 논란이다. 현행법은 '사법경찰관이 사형·무기 또는 장기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피의자를 긴급 체포한 경우에 즉시 검사의 승인(承認)을 얻어야 한다'(형사소송법 제200조의 3)고 규정돼 있다. 그런데 여당안은 '승인'을 '통보'로 바꿨다. 검사의 수사 지휘를 받지 않도록 하자니 그런 수를 짜냈을 것이다. 경찰이 피의자를 긴급 체포한 후 검사의 승인을 받는 대신 사후 통보만 할 경우 48시간 동안 외부 통제 없이 인신(人身)을 구속할 수 있게 된다. 일단 체포하고 보는 식의 수사가 이루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경찰이 '국민의 인권'을 48시간 동안 가둘 수 있다는 말이다. 민주당 극성 지지층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검찰 수사로 억울한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검찰 해체(解體), 검찰 보완수사권 폐지 등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민주당은 이 극성 지지층을 달래기 위해 국민 피해가 불 보듯 뻔함에도 검찰 해체를 밀어붙였고(10월 검찰청은 폐지되고 공소청과 중대범죄수사청으로 개편), 이제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친명계와 친청계 모두 검찰 보완수사권을 폐지하겠다고 한다. 민주당 내 강경파들은 보완수사권 폐지로 불거질 문제에 대해 "피해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장치를 두텁게 넣을 것"이라고 말만 할 뿐, 어떻게 억울한 피해자 발생을 막고, 범죄자가 법망(法網)을 빠져나가는 상황을 차단할 것인지 분명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 억울한 피해 예방 대책도, 부실 수사 방지책도, 경찰 통제 불능 대비책도 없고, 오직 당권과 정권 방탄 목표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이런 행태가 입법 사유화(私有化)일 것이다.
2026-07-21 05:00:00
[사설] TK신공항 사업 재정 지원 않겠다면 그렇게 선언하라
대구경북(TK)신공항 건설이 사업비가 없어 표류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과 정부·여당은 사업의 당위성을 인정하고, 지원 의사도 밝혔다. 그러나 말만 앞세웠을 뿐 해결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사업이 지지부진(遲遲不進)하면서 지역민의 절망감은 크다. 지역 정치권이 'TK신공항특별법' 추가 개정 등 대책을 모색하고 있지만, 소수 야당 의원들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TK신공항 건설은 K-2 군공항과 대구공항을 함께 이전하는 국가사업이다. 군사시설 재배치는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 그런데도 이 사업은 대구시가 군공항(군부대 포함)을 건설한 뒤, 종전 부지를 개발해 비용을 회수하는 '기부 대 양여'(寄附對讓與) 방식에 묶여 있다. 11조5천억원이 넘는 군공항 이전 비용을 지자체가 떠안으라는 것부터 무리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종전 부지 개발 수익을 장담할 수 없고, 금융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더불어민주당은 대구시장 선거 때 TK신공항 사업 지원을 위한 특단(特段)의 대책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부겸 후보의 낙선으로 그 약속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정부는 대구시의 공공자금관리기금 융자 요청마저도 회피하고 있다. 그런 정부가 광주 군공항 이전 사업에 대해선 전향적(前向的)이다. 정부는 광주 군공항 후적지를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반도체 제조 거점으로 낙점해 재원 확보의 돌파구를 마련해줬다. 누가 봐도 현격한 차별이다. TK 정치권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해법을 찾고 있다. 공공자금관리기금 우선 융자와 국가사업 전환, 국가의 손실 보전, 경북도와 공동 시행 등 다양한 방안을 담은 특별법 추가 개정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집권 여당의 지원과 협조가 없다면, 그 어떤 것도 백약 무효(百藥無效)다. 이미 제정된 특별법에도 정부의 행정·재정 지원 근거는 있지만, 정부는 후속 대책 마련엔 미온적이다. TK신공항 사업의 성패는 지역의 자구책이 아니라 정부의 결단에 달려 있다.
2026-07-21 05:00:00
[사설] "호남 반도체는 기업의 선택"이란 정부 발표는 거짓말이었나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겸 SK그룹 회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반도체) 수요가 폭발(暴發)하고 있으니 (공장을) 빨리 지어야 할 필요성이 있고 용인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한다"면서 "정부는 호남이 가장 좋다고 판단한 것이며 나는 그렇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관치(官治) 투자 논란에 대해서는,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곳을 우리도 찾지 못하고 있다. 인프라는 정부나 지자체가 만들어줘야 하는 것이고, 우리가 강제로 만들 수는 없지 않으냐. 권한을 가진 곳에서 잘 해주면 우리는 거기에 짓겠다는 심플한 얘기"라고 했다. 그동안 호남 반도체와 관련, "기업이 선택했다"던 이재명 정부의 설명은 사실과 달랐다. 이미 추진 중인 용인 클러스터의 완공 시점을 12년 앞당기기로 한 것에 대해서도, 최 회장은 "아직 후반부의 용수(用水)와 전기가 완벽하게 갖춰진 게 아니어서 그 문제도 풀어야 한다"며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주52시간제 등 각종 규제와 '영업이익 10% 성과급' 제도의 주주 및 협력사 등에 대한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도 해소(解消) 필요성을 강조했다. 전기·용수·인력·관련 산업 인프라 등 어느 것 하나 갖추지 못한 호남 반도체를 이재명 정부 임기 내 완성하겠다는 약속(約束)은 사실상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최 회장은 "(메모리 반도체의) 공급을 늘려 가격을 떨어뜨려야 한다"면서, 안 그러면 시장 위축과 신규 경쟁자 진입, 지정학적 견제라는 '3중 역풍'이 한국 반도체 산업을 덮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종합하면 호남 반도체는 조건(條件)이 충족될 경우 추진하되, 당장 반도체 공급을 대폭 늘려야 하는 만큼 진행 중이거나 착공이 가능한 공장을 빨리 짓는 것이 한국 반도체의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란 결론이 나온다. 호남 반도체를 향한 이재명 정부의 의지가 한국 반도체 산업 전반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 구미 등 시장(市場)에 따른 반도체 산업의 육성은 순조롭게 진행되어야 한다.
2026-07-21 05:00:00
[관풍루] 유재성 경찰청장 권한대행, 검찰 보완수사권 폐지론 무게 실으며 "폐지돼도 달라질 것 없다"고 발언해 논란
○…로이터 "삼전닉스 레버리지, 한국 증시 카지노 무법천지 만들었다"고 꼬집고, 블룸버그는 "증시 부양 공약 이재명 정부 정치적 위기에 처하게 해"라고 지적. '적은 혼노지(本能寺)에 있다' 이재명의 적은 김용범? ○…유재성 경찰청장 권한대행, 검찰 보완수사권 폐지론 무게 실으며 "폐지돼도 달라질 것 없다"고 발언해 논란. 보완 수사로 장윤기 사건 경찰 부정수사 밝혀냈는데도? ○…중국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문샷이 공개한 초대형 AI 모델 '키미(KIMI) K3' 쇼크에 한국 증시 급락. 이제는 미국과의 기술 격차를 단 2~3개월로 좁혔다는데…. 한국 AI 기업들은 뭐 하나?
2026-07-21 05:00:00
2026-07-20 19:08:28
[윤명철의 다시 보는 한국역사와 문화] 동아시아 패권질서를 둘러싼 국제대전―고당 전쟁
◆왜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했을까?우리는 흔히 고당 전쟁을 '안시성 전투'로 기억한다. 당 태종이 침략했고, 양만춘이 이를 막아냈으며, 결국 당나라가 패배했다는 이야기이다. 왜 당나라는 막대한 국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했을까? 왜 안시성에서 대패한 뒤에도 수년 동안 전쟁을 계속했을까? 고당 전쟁은 유라시아 동부의 국제질서를 재편하려는 신흥 패권국과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동방의 강국이 충돌한 국제대전이었다. 전쟁의 무대 역시 요동만이 아니라 동아지중해와 황해, 압록강 하구와 한반도까지 이어졌고, 간접적으로는 몽골 초원과 실크로드, 티베트 고원까지 하나의 전략 공간으로 연결되었다. 당나라는 40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국제질서 아래 편입시키려는 거대한 국가전략을 추진하였다. 당태종의 목표는 영토 확장을 넘어 범동아시아 패권 질서의 구축이었고, 그 과정에서 동방세력의 핵심국가인 고구려는 반드시 넘어야 할 마지막 관문이었다. 전쟁 직전인 644년 당 태종이 내린 조서에는 "요동은 본래 중국의 땅이다(遼東故中國地)"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군사행동을 정당화하는 논리였다. 흥미롭게도 이 논리는 오늘날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내세우는 역사인식과도 일정한 공통점을 가진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국가가 패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역사 논리는 놀랄 만큼 유사하다. ◆당나라의 동아시아 질서 재편과 고구려의 대응당태종은 수나라의 패인을 알았으므로 먼저 국제환경부터 바꾸었다. 패권국은 주변 강국을 그대로 둔 채 중심국가가 될 수 없다. 먼저 북방에서는 630년에 동돌궐을 격파하고, 단계적으로 철륵의 설연타부(薛延陀部)를 자신의 세력권 안으로 끌어들였다. 몽골 고원의 주도권을 확보함으로써 북방의 위협을 크게 줄였다. 이어 서쪽에서는 고창국(현재 투르판)을 정복하여 실크로드의 핵심 구간을 장악하였다. 이는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연결되는 국제 교역망을 확보하는 전략이었다. 남서쪽에서는 송첸감포가 통일한 토번과 대립하였다. 강력해진 토번은 토욕혼을 공격했고, 20만의 대군으로 당나라를 공격했다. 당 태종은 결국 641년에 문성공주를 토번에 시집보내는 혼인외교를 선택하였다. 이는 고구려 원정을 앞두고 서남 방면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남쪽에서는 북베트남 지역인 임읍(참파)을 수나라에 이어 다시 세력권으로 편입시키면서 강남 경제권과 해상교역을 적극 육성하여 동남아시아와 연결되는 해양 무역망을 확대하였다. 이렇게 해서 당나라는 자국을 중심으로 북방 초원, 서역, 티베트, 남중국과 해상 무역권을 차례로 정비하였다. 이제 남은 마지막 전략 공간은 고구려의 영토인 요동과 동아지중해였다. 한편 고구려 또한 이러한 국제질서의 변화를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수나라의 수군 공격을 격퇴시킨 경험이 있는 영류왕은 즉위한 후에 외교를 통해 시간을 벌려 했고,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조정하면서 전쟁을 피하려 하였다. 비효율적인 천리장성을 축조한 것도 단순한 방어시설의 증축이 아니라 요하 회랑을 중심으로 한 전략 공간을 재편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당나라가 구축하는 신국제질서 속에서 독자성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는 상황이었다. 결국 고구려 내부에서도 외교와 항전을 둘러싼 치열한 노선 갈등을 낳았고, 결국은 연개소문의 정변과 집권으로 이어졌다. ◆고당 전쟁은 왜 국제대전이 됐는가?당태종은 국제질서를 정비한 뒤, 마침내 고구려를 향해 움직였다. 644년 이세적(李世勣)에게 육군을 맡기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직접 요동으로 향했다. 동시에 장량(張亮)을 평양도 행군도총관으로 삼아 4만여 명의 수군과 500척의 전선을 산둥반도에서 출항시켰다. 이 순간부터 고당전쟁은 단순한 국경전쟁이 아니라 육군과 수군이 동시에 움직이는 해륙양면전으로 전개되었다. 당나라의 전략은 분명했다. 육군은 요하를 건너 요동의 성곽 방어선을 차례로 돌파하면서 고구려의 주력군을 묶어 두고, 수군은 요동해안을 장악한 후에 황해를 건너 압록강 하구와 대동강 방면으로 진출하여 평양성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두 전선이 연결되면 수도 평양은 전략적으로 고립되고, 고구려는 전쟁 수행 능력을 잃게 된다. 이는 오늘날 말하는 협공작전이자 입체적 전략이었다. 과거 수나라는 113만여 명의 수륙군을 한 방향으로 집중시켰다가 장거리 보급과 고구려의 기동전에 휘말려 무너졌다. 반면 당나라는 소규모의 정예병으로 해륙양면전으로 고구려의 전략적 종심을 분산시키려 하였다. 전쟁 방식 자체가 한 단계 진화한 것이다. ◆ 군사전략의 '축(povot)'인 요동 회랑 공방전고구려 역시 이러한 전략의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연개소문 정권은 성곽 하나를 지키는 데 전력을 집중하지 않았다. 요동의 여러 성을 방어 거점으로 연결하고, 적을 지연시키면서 병력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선택하였다. 실제로 요동의 성들은 각각 독립된 요새가 아니라 하나의 방어망을 이루고 있었으며, 어느 한 곳이 함락되더라도 전체 전선이 곧바로 붕괴되지 않는 시스템으로 구축됐다. 특히 요동 지역은 북방유목세력의 남진 종점이었고, 중원 세력들이 만주와 한반도로 진출하는 회랑이자 동아지중해와 연결되는 전략 공간이었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이래 안정적으로 지정학적인 요동 회랑을 장악하며 중국 왕조와 북방 세력의 진출을 견제하였다. 반대로 당나라가 이 회랑을 확보한다면, 고구려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체의 국제질서를 주도할 수 있었다. 양국 모두 요동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전쟁은 예상대로 치열하였다. 당군은 개모성에 이어 난공불락의 요동성마저 함락시키며 서쪽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당나라의 공성기술과 병력은 강력했으므로 고구려군은 성 하나의 사수보다는 시간을 벌면서 주력을 보존하는 전략을 유지하였다. 당군은 승리를 거듭했지만, 진격 속도는 처음 계획보다 훨씬 늦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은 전쟁의 승패가 성 몇 개의 점령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병력의 보존, 보급선의 유지, 전선의 지속성이 훨씬 중요하다. 고구려는 독특한 방어시스템과 공간을 활용하여 시간을 벌었고, 그 시간은 결국 당나라의 전략을 근본적으로 흔들었다. 전쟁은 단기 결전에서 장기 소모전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태종은 요동 방어선의 마지막 관문 가운데 하나였던 안시성 앞에 도착한다. ◆안시성 공방전과 당나라의 대패배안시성은 당나라가 이미 개모성과 요동성, 백암성마져 함락시키고, 주필산 전투에서 대승한 당군은 자신감을 갖고 도착했다. 당태종은 안시성을 함락하면 곧 바로 압록강 방어선까지 진격할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안시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성주의 이름은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고구려군이 치밀한 방어와 강한 항전 의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당군은 흙산을 50만 명의 병사가 60일 동안 쌓아가며 대규모 공성전을 반복했지만 끝내 성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전투 그 자체보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데 있었다. 본국에서 수천 리 떨어진 곳에서 싸우는 당나라군에게 병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급이었다. 식량과 무기, 말 사료는 모두 장거리 수송에 의존했고, 전선이 길어질수록 부담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반면 고구려는 자국 영토 안에서 싸우며 시간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성의 공방전이 지연될수록 당나라 전략은 붕괴되고 있었다. 계절도 당나라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음력 9월이 된 요동의 겨울은 중원과 전혀 달랐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강풍과 적설은 병사와 말의 전투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황은 고구려에게 유리해졌다. ◆국제환경의 변화와 당나라의 철수더 큰 문제는 내부이 정치적인 혼란과 국제정세였다. 특히 북방에서는 설연타가 움직일 가능성이 있었고, 서남에서는 토번이 강력한 세력으로 위협을 가하는 중이었다. 국제질서는 완전히 안정된 체제가 아니었으므로 황제가 오랫동안 원정지에 머무를수록 국가적인 이기가 커졌다. 바다 또한 변수였다. 당나라는 수군을 동원했지만 육군과 수군의 협공은 원활하지 못했다. 안시성 공방전이 한창일 때 요동반도 남쪽의 비사성을 점령한 장량의 수군은 먼거리가 아니었음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고구려는 요동반도 남단의 장산군도에 설치한 섬방어체제들이 역할을 담당했고, 필시 압록강 하구와 대동강 수계를 활용하여 수도권을 방어하여, 육지와 해양을 유기적인 전쟁 공간으로 운영하였을 것이다. 결국 당나라의 협공 전략은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당태종은 철수를 결정하였다. 흔히 안시성의 저항때문에 철수했다고 설명하지만, 실제 상황은 훨씬 복합적이었다. 안시성의 완강한 저항 외에 장거리 보급의 한계, 혹독한 계절, 예상보다 길어진 전쟁, 북방과 서남의 국제정세, 그리고 해륙 협공의 실패가 함께 작용한 결과였다. 당태종은 후퇴하는 도중에 한겨울로 접어든 음력 10월의 요택지대에 빠져 처절하게 고통을 받은 사실들이 삼국사기와 자치통감 등에 기록되어있다. 그는 태자인 당고종이 보낸 결사대에 의해 구원받아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채 돌아왔다. 이때 말은 10의 8, 9가 얼어죽었다. 반면에 고구려는 국가 시스템, 기술력, 무엇보다도 양만춘이라는 인물의 탁월한 지도력과 고구려인들이 지닌 자유의지가 기적같은 승리를 획득한 것이다. 안시성 전투는 당나라를 무너뜨린 결정적 승부라기보다, 당나라가 추진하던 동아시아 패권전략에 처음으로 제동을 건 사건이었다. ◆당태종의 재공격과 해군력 강화당태종은 패권전략 자체를 포기하지 않았다. 철군 직후에도 요동 방면의 군사력을 계속 유지하였고, 수군을 증강하면서 고구려 공격을 위한 새로운 준비를 시작하였다. 645년의 실패를 통해 육군만으로는 승리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후 당나라는 해군력을 대폭 증강하면서 평양을 직접 압박하는 해양전략을 강화하였다. 644년 7월에 홍주 등 강서성 일대 등에서 전선 400척을 만들어 군량을 운반했다. 큰 전선들은 800명의 병사를 수용했고, 일반 누선(樓船)도 200명의 병사를 태울 수 있었다. 또 648년 7월에도 양쯔강 상류(쓰촨)에서 전선들을 건조하고, 8월에는 홍주 등에서 1100척을 건조하게 했다. 실제로 647년 5월, 7월에는 당나라 수군이 요동반도와 압록강 하구사이의 해안지방에 상륙하여 백 여 차례나 전투를 벌였다. 또 648년에도 수군이 압록강 하구의 박작성(단동시)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황해를 건너 평양성을 목표로 직공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국경과 해양에서 모든 공격들을 격퇘했다. 이는 고당전쟁이 처음부터 해륙양면전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당태종의 공격들은 전략적으로는 요동회랑의 확보전이었지만, 장기 국제대전의 한 국면이었다. 당나라는 전략을 수정하며 다시 기회를 노렸고, 고구려는 계속되는 소모전을 감당해야 했다. 양국 모두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태종이 재 원정을 준비하다 649년에 죽으면서 전쟁은 일시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하지만 동아시아 패권을 둘러싼 국제대전은 660년 여름, 더 복잡한 양상으로 재개됐다. 우리민족의 운명과 연동된 소위 '삼국통일전쟁'이다.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
2026-07-20 14:37:10
텔레비전을 보며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가 마음을 붙잡는 한마디를 만났다. "시드니까 아름다운 거죠." 어느 꽃 도매상의 인터뷰였다. 화려하게 꽃 피웠던 시절이 지나, 저물어가는 시간을 통과하며 그 존재가 더 빛난다는 뜻이리라. 우리 존재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몸은 나이가 들수록 약해지고, 질병에 잠식돼 가는 서글픈 시간은 피할 수 없는 노년의 숙명처럼 다가온다. 영화 '황금 연못'에는 기억 상실을 앓는 80세 노인 노먼이 등장한다. 그의 아내 에델은 열세 살 의붓손자 빌리에게 남편을 이렇게 설명한다. "노먼은 지금 있는 힘을 다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 거란다. 너도 그렇지 않니?" 노화와 질병이라는 미로 속에서 헤맬지언정, 노년은 멈춰 선 존재가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온 힘을 다해 제 길을 찾아가는 엄연한 달리기다. 인생은 흔히 단거리 경주나 마라톤에 비유되지만, 더 길게 보면 바통을 이어받아 미래의 후손에게 넘겨주는 계주에 가깝다. 이 끊임없는 이어달리기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나에게 주어진 구간을 최선을 다해 뛰는 것뿐이다. 그렇게 묵묵히 달려온 삶의 궤적은, 수묵화의 화폭 위에서 저마다 온 호흡을 모아 긋는 단 하나의 선과 닮아있다. 시공간을 응축한 찰나의 점들이 모여 하나의 선을 이루듯, 매일의 순간들이 모여 삶이라는 선이 된다. 홀로 떨어져 나아가는 듯해도 우리가 그은 각자의 선들은 서로 겹치고 이어지면서 함께 삶의 공간을 채워가는 화면 속 공동체를 이룬다. 젊은 날에는 삶을 표현하는 예술이 전부인 줄 알고 목을 매고 살았다. 때로는 거대한 세상 앞에서 예술이란 참 힘없고 부질없는 짓 같아 보였다. 그럼에도 이 길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그 유약함 속에 진짜 나를 드러내는 오롯한 힘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붓을 쥐고 선을 긋는 매 순간이 그러했다. 종이 위에 먹이 번지고 마르는 과정 역시 노년의 시간과 닮아있다. 처음 화폭에 닿은 먹물이 사방으로 번져나가는 시절이 청춘이라면, 세월의 숨결이 지나간 자리마다 그윽한 결을 남기는 것은 노년의 몫이다. 붓질의 끝자리, 물기가 다해 하얀 종이가 드러나는 거칠고 마른 먹의 흔적이 바로 '비백(飛白)'이다. 그 메마른 자욱 속에서 오히려 깊은 내공이 드러나듯, 기력이 쇠해가는 황혼은 화려한 색채를 지워내고 오직 묵직한 먹빛 하나로 인생의 정수를 증명하는 시간이다. 상실의 아픔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번져가는 먹색의 깊이를 완성하는 과정인 셈이다. 우리는 매일 자신의 선을 긋는 순간들을 살아간다. 내 삶의 끝자락, 눈 밝은 어떤 이가 "죽기 전에 그린 그림이 제일 좋네"라고 한다면 작가로서 더없는 영광이겠다. 내 인생의 치열한 한줄기 선이, 화폭 위 넉넉한 여백과 어우러져 담백하고 아름답길 소망해본다.
2026-07-20 13:45:59
[사설] 청년 취업절벽, 숫자만 내세운 일자리 창출 계획으론 해결 어렵다
올해 2분기 대졸 이상 실업자는 48만1천 명으로 2021년 이후 가장 많았다. 이들 중 20·30대가 64.2%(30만9천 명)를 차지했다. 취업 경험이 전혀 없는 실업자는 7년 만에 증가세로 돌아섰고, 청년 취업자는 44개월 연속 감소했다. 20대 대졸 실업률(8.3%)도 2021년 이후 최고다. 심각한 사실은 이런 현상이 일시적인 경기 부진 탓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부는 반도체 수출 호조에 힘입어 성장률 전망을 높였지만 올해 취업자 증가 전망은 낮췄다. 성장과 고용의 괴리(乖離)를 정부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반도체 호황에도 제조업 고용은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최근 발표한 한국경제보고서에 따르면, 인공지능(AI) 노출도가 높은 산업에서 늘어난 고용의 대부분이 30세 이상에게 돌아갔고, 29세 이하 청년 고용은 오히려 줄었다. AI가 반복적이고 표준화된 업무를 대체하면서 신입 사원이 맡던 초급 업무부터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OECD는 기업들이 AI를 도입해도 청년 채용은 유지하라고 권고(勸告)했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첨단 분야 전문 인력 20만 명 양성과 2030년까지 양질의 청년 일자리 20만 개 창출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무게중심은 교육과 훈련에 쏠려 있다. 기업이 청년을 어떻게 채용하도록 만들지에 대한 설명은 빠져 있다. OECD는 AI 시대일수록 첫 일자리가 더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숙련(熟練) 인력은 대학 강의실에서 배출할 수 없다. 첫 직장에서 배우고, 시행착오를 겪고, 경험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첫 일자리가 사라지면 숙련 인력도 줄 수밖에 없다.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성장 기반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청년들은 교육 부족이 아니라 노동시장 진출 기회조차 갖지 못해 눈물짓는다. 정부가 청년 일자리의 중요성을 절감(切感)한다면 숫자를 앞세운 전문 인력 양성 계획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청년이 첫 일자리를 얻도록 만들 것인지부터 답해야 한다. '20만'이라는 숫자로 청년들을 현혹(眩惑)할 때가 아니다.
2026-07-20 05:00:00
[사설] 레버리지 ETF 졸속 도입 정책 실패, 김용범은 왜 책임지지 않나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19일 주가 급등락의 원인인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와 관련, "이미 투자자들이 투자하고 있고 상품 규모도 10조원 이상 형성돼 있다"면서 "상장폐지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졸속(拙速) 도입에 따른 부작용을 해소하려고 안간힘을 쓸 뿐, 경제정책 사령탑으로서의 책임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앞서 재정경제부와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한국은행은 시장상황점검회의를 열고, 레버리지 ETF를 거래하려면 8월 5일부터는 3천만원(현행 1천만원) 이상의 예탁금을 넣어야 가능하도록 했다. 8월 19일부터는 3천만원 전액이 현금이어야 하고, 1주 단위로 이뤄진 거래는 11월부터 20주씩만 가능하도록 했다. 새로운 레버리지 상장도 잠정 중단되고 광고도 금지(禁止)된다. '현금 없으면 투자 말라'며 문턱을 높여 거래량을 줄이려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국내 증시로 자금을 끌어들이고 다양한 투자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취지로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를 도입했지만, 과도한 투자 쏠림에 따라 전체 증시가 폭등락을 거듭하는 엄청난 부작용(副作用)을 초래했다. 도박판이 돼 버린 증시에서 수많은 투자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손실을 입고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5개월여에 불과한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도입 검토가 얼마나 졸속이었는지를 증시가 그대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정책 실패에 대한 반성(反省)과 책임(責任)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레버리지 ETF의 문턱을 높인다고 해서 한국 증시의 변동성(變動性)이 크게 줄어들 것 같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는 점이다. 상장폐지 또는 레버리지 배율 하향 등과 같은 근본적인 대책이 빠졌기 때문이다. 거래의 문턱을 높이는 미봉책을 벗어나 투자 매력 자체를 떨어뜨리는 근본적인 방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인 셈이다.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도입 자체가 한국 증시에는 시기상조(時機尙早)란 의미이다. 정책 실패에 따른 부담과 피해를 언제까지 선의의 투자자들이 감당해야 할지 정말 우려스럽다.
2026-07-20 05:00:00
[사설] 국민이 필요하다는 보완수사권, 누구를 위한 폐지인가
검찰이 경찰에 보완수사를 요구하며 돌려보낸 사건이 올 상반기만 6만5천913건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연간 기준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던 지난해 11만623건을 넘어설 추세로, 4년 새 무려 27.2%나 급증했다. 검·경 수사권 조정 첫해인 2021년 이후 경찰 초동 수사 단계에서의 법리 오인이나 증거 부족 등 부실 조치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경찰이 해결하지 못한 채 쌓아둔 미제(未濟) 사건 역시 올 상반기에만 10만 건을 넘었다. 이로 인한 고통과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국민 상당수도 검찰의 보완수사권 유지를 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한국갤럽이 전국 1천3명을 대상으로 검찰 보완수사권 존폐(存廢)에 대해 조사한 결과 '경찰 견제와 부실 수사 방지를 위해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이 61%에 달했다. 반면 '전면 폐지' 답변은 23%에 그쳤다. 형사소송법 개정을 추진 중인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에서도 유지 응답이 46%로, 폐지(39%)보다 높았다. 민주당의 텃밭인 호남에서조차 유지 의견(55%)이 폐지(28%)의 두 배에 달했다. 보완수사권은 이념이나 진영 논리의 대상이 아니다. 국민이 범죄 피해를 당했을 때 국가가 신속하고 정확하게 법을 집행하기 위해 필요한 지극히 상식적인 장치다. 이는 최근 검찰 보완수사로 경찰의 부실 수사 및 증거 인멸 정황이 밝혀진 '전남광주 장윤기 사건'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대법원·법무부·대검찰청 등 법조계와 사법기관, 여성단체, 야당, 심지어 여당 일각(一角)에서도 완전 폐지에 반대하고 있다. '경찰의 위법·부실 수사에 대한 사법적 견제 장치가 부실해져 국민 피해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형사 사법의 제1 원칙은 죄지은 자는 벌하고, 피해자는 정당한 구제(救濟)를 받도록 하는 것이다. 보완수사권마저 폐지돼 '수사 지연 고착' '부실 수사 만연'으로 국민이 피해를 보게 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국민이 필요하다는데, 민심을 거스르면서까지 추진하는 이유가 뭔가. 누구를 위한 폐지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2026-07-20 05:00:00
[관풍루] 해외 금융기관에 원화 계좌 개설 허용하고 외국인 간 원화 송금·결제를 자유화하는 '원화 국제화 로드맵' 발표
○…해외 금융기관에 원화 계좌 개설 허용하고 외국인 간 원화 송금·결제를 자유화하는 '원화 국제화 로드맵' 발표. 가뜩이나 삼전닉스 레버리지로 출렁이는 주가에 멀미 나는데 이젠 환율 롤러코스터까지 탑승할 듯. ○…대형 화재 발생한 쿠팡 인천물류센터, 노동자 안전보다는 "로켓배송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인근 물류센터로 출근하라"는 통보 했다고 노조 비난 이어져. 美 로비 비용을 안전 강화에나 썼으면. ○…국민의힘, 4대 특검 사무실 비용으로 64억원 사용한 데 대해 "민주당 당사나 청와대에 특검 사무실을 차리라"고 비판. 제대로 하는 게 없는 특검 강행한 민주당이 '방값' 물어내야 하지 않나?
2026-07-20 05:00:00
2026-07-19 18:47:32
"제가 원래 진상은 아닌데…"로 시작하는 얘기를 듣는 순간 생각했다. '아, 또 긴 이야기가 시작되겠구나.' 그렇다, 바야흐로 지금은 민원의 시대다. 블록버스터 히어로 영화를 보러 갔을 때였다. 극장 문 앞에 "본 영화에는 강한 번쩍임이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트리거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라는 경고문이 붙어있었다. 처음에는 새롭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의문도 들었다. 히어로 영화라면 악당과 맞서 싸우는 장면이 핵심일 텐데 이것까지 안내가 필요할까. 영화뿐 아니라 공연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턴가 소송 문화가 발달한 나라 미국의 제품설명서처럼 공연 안내가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해지기 시작했다. 공연 시간과 티켓 배부, 음식물 반입 여부 정도였던 안내가 이제는 공연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빼놓지 않고 꾹꾹 눌러 담는다. 주차 문제부터 입장 지연 규정, 촬영금지 등등 온갖 주의사항을 넣다 보면 안내사항이 공연 상세페이지보다 더 길어질 때도 있다. 이 깨알 같은 안내문들은 관객을 향한 친절한 배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민원'을 피하고자 기획자들이 만든 방탄조끼에 가깝다. 안내문에 미리 적어두었으니 면책받겠다는 눈물겨운 모습인 거다. 조금의 불편이나 뜻밖의 상황을 참지 않고 "왜 미리 경고하지 않았느냐"며 항의하는 시대가 만든 씁쓸한 모습이다. 물론 모든 민원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공연장 계단이 위험하다거나, 장애인을 위한 안내가 부족하다거나, 관객의 안전과 권리를 위한 목소리는 필요하다. 그런 생산적인 민원 덕분에 공연 환경이 조금씩 나아진 것도 사실이니까. 문제는 '불편'과 '불만'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경계가 흐려진 틈을 타 불편함이 정당한 권리처럼 나타나는 일이 적지 않으니, 창작자와 기획자들은 때아닌 자기검열에 들어간다.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 의무를 강요하는 관객과 상상력을 펼치기보다 민원 받지 않을 안전한 선이 어디인지를 먼저 계산하는 기획자. 기획자와 관객이 서로 눈치싸움을 하는 전쟁터 한가운데에 서서 나는 생각한다. 상대의 명백한 악의나 과실이 아님에도 매 순간 잘잘못을 가리려 든다면, 우리의 삶은 숨 막히는 법정이 될 뿐이다. 예술이란 본디 예상치 못한 감정의 일렁임을 마주하는 일이며, 낯설고 불편한 자극을 통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명백한 악의나 과실이 아니라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털어내는 느슨한 마음을 가질 순 없을까. 빽빽한 안내문 뒤로 숨지 않고도 지금의 '민원의 시대'를 버텨내게 하는 인간다운 온기를 찾고 싶다.
2026-07-19 08:26:04
[사설] 합동성 내세운 사관학교 통합, 각 군 전문성 어떻게 구축할 건가
정부가 육·해·공군 사관학교를 통합한 4년제 국군사관학교를 창설(創設)하기로 결정했다. 사관학교 통합 논리로 정부는 육사 중심의 폐쇄적 인사 구조 개선, 군종 간 통합성을 강화해 미래 전장(戰場) 환경에 대응하는 체계 구축 등을 내세운다. 국민 다수가 '각 군의 전문성과 특수성이 약화될 것'이라며 통합에 반대하고, 군에서도 우려와 반대 목소리가 많음에도 충분한 논의 없이 밀어붙이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1년 국방부는 기존의 육·해·공군 대학(사관학교가 아니라 소령급 이상이 심화 학습하는 대학)을 하나로 묶은 합동군사대학교(국방부 직할)를 창설한 바 있다. 합동성을 장교들에게 체질화하고, 중복(重複) 조직을 줄여 국방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논리였다. 당시 교육체계는 장교들이 각자 소속 군 대학(육·해·공군)에서 자군 전술만 배우다가 중령 또는 대령이 되어 국방대학교나 합동참모대학에서 본격적으로 합동성을 접하다 보니 합동·연합작전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합동군사대학교는 각 군의 전문성 약화와 학사 운영 비효율 등으로 9년 만인 2020년 각 군 본부 직할로 환원됐다. 군사 작전에서 진정한 합동성은 각 군별 전문성을 완벽히 갖춘 상태에서 결합할 때 나온다. 과거 합동군사대학에서는 이미 야전(野戰) 경험이 있는 소령급 장교들조차 전문성이 흔들려 실패했다. 하물며 군에 첫발을 내딛는 사관생도들이 통합 교육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경우 각 군 고유 전술, 교리(敎理), 무기 체계에 대한 교육이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지상전, 해양전, 공중전을 완벽히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합동성이 의미가 있나? 각 군 대학은 육·해·공군 총장이 책임지는 군별 인사, 진급, 보직 경로와 연계(連繫)되어 움직인다. 육·해·공군 교육을 합칠 경우 인사 및 교육 운영에 효율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 군 장교 양성 체계는 국가 백년대계(百年大計)다. 공청회·세미나 등을 통한 충분한 검증과 국민적 합의, 제기되는 문제에 대한 대비책 등이 먼저다.
2026-07-17 05:00:00
[사설] 한은과 정부의 통화·재정 정책 엇박자,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나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연 2.50%에서 2.75%로 0.25%포인트 인상했다. 2023년 1월 이후 3년 6개월 만에 통화 긴축 사이클로의 진입을 알린 전환점이다. 신현송 한은 총재는 "우리 경제가 견조하고 성장세가 강세를 보인다"며 경제 기초 체력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피력하면서 향후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도 열어뒀다. 그러나 같은 시각 시장이 보내 온 신호는 냉혹했다. 한은이 금리 인상을 발표한 당일 코스피는 전장보다 7% 넘게 급락하며 매도 사이드카가 발동되는 등 극심한 발작적 증세를 보였다. 물론 대외적 악재가 겹친 탓도 있겠지만 거시 지표의 온기를 자신하는 한은의 시각과, 고금리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시장의 체감온도 사이에 거대한 괴리가 존재함을 드러내는 것으로도 해석 가능한 대목이다. 수출 지표 몇 개가 호전됐다고 해서 우리 경제 전반이 안전지대에 있다고 과신할 수는 없다. 반도체 일부에 쏠려 수치만 번지르르하고 실물 경기는 얼어붙은 외화내빈(外華內貧)의 구조적 위기 상황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긴축은 피할 수 없는 글로벌 대세라고 하지만, 금융당국은 고금리 폭풍 속에 노출된 취약계층과 한계 기업을 위한 정교한 안전망을 서둘러 재정비해야 한다. 통화당국과 재정당국의 극심한 정책 엇박자도 복병이다. 한은은 치솟는 물가와 부채를 잡기 위해 힘들게 브레이크(금리 인상)를 밟기 시작했는데, 정부는 가속 페달(확장 재정)을 밟으며 찬물을 끼얹는 상황인 것이다. 이미 정부는 내년 총지출 규모를 올해보다 10% 이상 늘린 800조원 플러스 알파(+α)로 편성하고, 초과 세수를 통한 '미래대응기금' 조성 계획까지 밝힌 바 있다. 한은은 돈줄을 죄기 시작하는데, 정부는 이와 반대로 재정을 무차별적으로 살포한다면 결국 통화정책의 약발을 떨어뜨리고, 시장에 극심한 혼선만 줄 수 있다. 정부는 거시적 낙관론 뒤에 숨지 말고 당장 맞닥뜨리게 될 고물가와 고금리의 이중 덫 해결책부터 고심해야 할 것이다.
2026-07-17 05:00:00
[사설] 민주주의 흔들리는 현실, 제헌절에 헌법을 돌아본다
제헌절(制憲節)이 18년 만에 공휴일로 돌아왔다. 제헌절은 대한민국이 어떤 원칙에 따라 세워진 나라인지를 되새기는 날이다. 헌법은 국가 권력 위에 존재하는 최고 규범이다.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헌법은 대한민국의 출발점이었다. 국민(제헌의회)이 먼저 헌법을 만들고, 헌법의 틀에서 국가를 세웠다. 따라서 헌법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흔들려서는 안 될 국가의 절대적인 가치다. 현실의 정치는 헌법 정신을 훼손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거대 의석을 앞세운 더불어민주당의 독단(獨斷)이다. 민주당은 국회를 협치(協治)의 장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법안을 만드는 '법률 공장'으로 만들었다. 야당과 협의 없이 상임위원회를 운영하고, 쟁점 법안을 일방 처리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숙의와 타협은 실종됐다. 헌법 정신의 요체(要諦)인 삼권분립을 위협하는 입법은 나라의 근본을 흔들고 있다. 대법관 증원, 사실상 4심제와 법왜곡죄 도입, 검찰청 폐지, 공소(公訴) 취소 특검법 추진 등은 입법부가 사법부와 수사기관을 좌우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는 헌법의 기본 정신인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행태이기도 하다. 민주당이 주도한 정보통신망법 개정도 표현의 자유와 과잉금지 원칙을 둘러싸고 위헌(違憲) 논란을 낳고 있다. 이런 식이면 헌법이 보장한 권력분립은 유명무실해진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헌정 질서를 유린(蹂躪)한 사건이었다. 국가 최고 권력자는 헌법이 부여한 권한의 한계를 누구보다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 국민의힘의 잘못도 크다. 자유민주주의와 헌법 수호를 외치면서도 위헌 논란을 낳은 권력 행사에 대해 분명한 선을 긋지 않았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원칙이 흔들리는 모습도 보였다. 헌정사(憲政史)는 권력이 헌법에 맞설 때, 준엄한 대가를 치렀음을 보여준다. 입법권이 사법권을 침해하면 안 된다. 행정권이 헌법의 한계를 넘어서서도 안 된다. 어떤 국가기관도 국민 위에 설 수 없다는 게 헌법의 명령이다.
2026-07-17 05:00:00
[관풍루] 대구 시민단체들, 상임위 폐지안을 본회의에 직권상정 일방 처리한 국민의힘 달성군의회 의장을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
○…이재명 대통령, 청와대 업무보고에서 일부 국무위원과 공공기관장을 겨냥, "아직도 자기가 할 일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공개 경고. '대통령은 거울도 안 보시나'라고 생각하는 국민 많을 듯. ○…대구 시민단체들, 상임위 폐지안을 본회의에 직권상정 일방 처리한 국민의힘 달성군의회 의장을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 국회 더불어민주당의 나쁜 행태를 크게 잘못 배웠군. ○…경찰관 가족 연루 사건 상피제 등 경찰 자체 수사 통제 강화 방안을 추진키로. 권력 통제는 기관 간 견제와 균형이 기본인데, 왠지 고양이가 생선 가게 잘 지키겠다고 맹세하는 모양새.
2026-07-17 05:00:00
[반론보도] '[단독] 박정훈 "주말에 당선인 만났다"... 당선인 일부 "안 만났는데?" 관련
매일신문은 지난 6월9일 '[단독] 박정훈 "주말에 당선인 만났다" 당선인 "안 만났는데?"' 제목의 기사에서 박정훈 의원이 지방선거 직후 주말 동안 시·구의원 당선인을 다 만났다고 보도했고 기자가 당선인들에게 직접 전화한 결과 받은 사람 가운데 만났다는 사람이 없어 박 의원의 주장이 거짓말일 확률이 크다고 보도했습니다. 이에 대해 박정훈 의원은 "송파갑 출신 시·구의원 당선인 일부를 만났으므로 거짓 해명한 사실이 없다"고 알려 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2026-07-16 23:23:14
2026-07-16 18:43:02
[여행이 들려주는 마케팅 이야기-하태길]보이지 않는 예술을 발견하는 여정, 데시마 미술관
그림 한 점 없는 미술관을 상상해 본 적 있는가? 벽에는 캔버스도 걸려 있지 않고, 전시실에는 조각 하나 놓여 있지 않는 미술관 말이다. 만약 그런 곳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벽면을 가득 채운 화려한 미디어 아트(Media Art)쯤을 상상해 볼 수도 있겠다. 나오시마(Naoshima)에서 배를 타고 20분이면 도착하는 데시마(Deshima) 섬에 건축가 니시자와 류에(Nishizawa Ryue)와 예술가 나이토 레이(Rei Naito)가 설계한 데시마 미술관이 있다. 2010년 10월 문을 연 데시마 미술관은 빛, 바람, 물, 시간 등을 작품으로 들여놓은 파격적인 발상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정식 개관에 앞서 섬 주민들에게 먼저 공개했을 때만 해도 "미술관이라더니 그림이 하나도 없다"라는 당혹스러운 반응이 이어졌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낯섦은 자부심으로 바뀌었고, 이제 데시마 미술관은 섬을 가장 잘 대변하는 상징이 되었다. 데시마에 도착한 후 셔틀버스를 탔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자전거로 가보려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10여 분 뒤 미술관 정류소에 내리자 길은 언덕 아래로 미끄러지듯 이어졌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길은 사라지고 시야 끝에는 온통 세토내해(Seto Inland Sea)가 가득했다. 바다를 향해 천천히 내려가는 그 길 오른편으로 마치 하얀 비닐하우스처럼 보이는 건물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시골 초록에 폭 둘러싸인 그 건물이 바로 데시마 미술관이었다. 예약한 시간에 티켓을 확인하고 산책하면서 정해진 길로 따라갔다. 무성한 토끼풀 내음이 바람 사이로 날아들었다. 세토내해에 누워있는 긴 직선 구조물을 내려다보면서 예술 작품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가느다란 방파제가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흐리고 있었다. 데시마 섬은 그런 곳이었다. 우거진 숲을 빠져나오면 거대한 콘크리트 입구가 입을 벌리며 나타났다. 밖에서는 오직 입구만 보이는 방식이어서 그 크기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높이 4.3m에 기둥이 하나도 없는 두꺼비 집 모양의 콘크리트 구조로 들어서자 엄청난 고요가 밀려왔다. 천장에 뚫린 두 개의 타원형 구멍을 통해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첫 작품이었다. 그날따라 거친 바람 소리는 귀를 쫑긋하게 만들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타원형 구멍에는 가느다란 실이 신나게 그네를 타고 있었다. 두 번째 작품이었다. 실을 따라 내 눈동자가 바삐 움직일 때, 실에 부딪히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전시 관리 요원이 말했다. 뻥 뚫린 구멍을 통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둥근 하늘과 빛이 세 번째 작품이었다. 한참을 작품 속에 빠져있을 때, 양말이 축축해졌다. 미술관 바닥에 물방울이 굴러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방울은 바닥 곳곳의 아주 작은 구멍에서 샘물처럼 퐁퐁 솟아오르며 천천히 만들어졌다. 바닥의 아주 미세한 기울기와 중력, 공기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이동하는 물방울은 서로 만나 하나가 되기도 하고 다시 갈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미디어 아트처럼 같은 장면을 반복하지는 않았다. 어제를 살았고 오늘을 살며 내일 다시 살아야 할 인생의 순환과도 같았다. 그래서 그 물방울은 하나의 조형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시간처럼 보였다. 김창열(Kim Tschang-yeul) 화백이 수십 년 동안 캔버스 위에 머물게 했던 물방울이 이곳에서 중력을 따라 움직이고 서로 만나고 다시 흩어지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빛, 물, 바람, 소리를 온몸으로 경험하는 이 미술관에서 물방울은 그 경험의 중심에 있는 가장 중요한 예술 작품이었다. 천장에 뚫린 거대한 원형의 하늘 아래로 바람이 쉼 없이 드나들었다. 숲을 흔드는 나뭇잎 소리는 건물 안으로 스며들어 메아리가 되었고, 보이지 않는 세토내해의 파도마저 공간 속을 흐르는 듯했다. 천장에 매달린 가느다란 실들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바람을 따라 흔들리고 방향을 바꾸며 춤을 추었다. 마치 장난기 많은 아이들이 운동장을 뛰노는 모습 같았다. 예술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었다. 흔들리고, 스며들고, 변하면서 비로소 살아나는 것이었다. 그날 데시마 미술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었다. 바람은 하늘과 나무, 그리고 실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마케팅의 목적은 판매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데시마 미술관은 이 말을 가장 잘 증명하는 사례다. 자연과 건축이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경험을 한 방문객들은 누구의 권유도 없이 "한 번쯤 꼭 가봐야 하는 곳"이라며 자발적으로 입소문(Word of Mouth, WOM)을 낸다. 이제 마케팅은 광고를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경험을 디자인하는 일이라는 점을 데시마 미술관은 보여 준다. 화장품 브랜드 이솝(Aesop) 역시 같은 방식으로 브랜드 경험을 만들어왔다. 대부분의 브랜드가 대규모 광고와 획일적인 매장을 구축하는 동안, 이솝은 지역의 역사와 건축, 문화를 반영해 매장 하나하나를 새롭게 설계했다. 서울 매장은 서울의 문화와 건축을 담고, 도쿄 매장은 일본의 미학을, 파리 매장은 도시의 역사와 주변 건축물에서 영감을 얻었다. 매장을 복제하지 않고 지역의 맥락에 맞게 새롭게 디자인하는 것이다. 그 결과 매장은 브랜드의 철학을 체험하는 공간이 되었다. 브랜딩 전문가들이 이솝을 '공간을 디자인하는 브랜드'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솝은 제품보다 장소와 경험을 브랜드의 핵심 자산으로 삼고 있으며, 이를 통해 소비자가 브랜드를 기억하고 스스로 이야기하게 만든다. 4월 초 봄꽃이 필 무렵 군위 사유원(思惟園)을 다녀왔던 기억이 났다. 사유원 역시 건축을 통해 감각을 깨우는 공간이다. 숲길을 따라 걷다 건축을 만나게 하는 동선, 침묵과 여백 속에서 스스로 사유하게 만드는 방식은 데시마 미술관과 닮아 있었다. 특히 알바로 시자(Álvaro Siza)가 설계한 소요헌(逍遼軒)은 화려한 형태보다 빛과 침묵 그리고 시간을 경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데시마의 철학과 가장 가깝다. 승효상(Seung Hyo-sang)의 명정(瞑庭)도 있다. 좁은 통로를 지나 갑자기 열린 풍경과 마주하게 하는 공간 구성은 건축을 보는 대상이 아니라 체험하는 과정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데시마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사유원이 동양철학과 한국적 사유를 자연 속에 담아냈다면 데시마 미술관은 자연 현상 자체를 예술로 삼아 극단적으로 밀어붙였다는 데서 차이점이 있다. 나오시마로 돌아오는 배 위에서 데시마는 점점 멀어져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얻은 시선은 섬에 남지 않았다. 그 바람 덕분에 나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오후에 혼무라(Honmura) 지구의 이에 프로젝트(家 Project)를 찾아갔다. 오래된 민가를 예술로 되살린 공간들이었다. 카도야(Kadoya)에서는 집 안을 물로 채워놓았다. 물속에서 반복적으로 켜졌다가 지워지는 디지털 숫자가 시간을 눈으로 바라보게 했다. 하이샤(Haisha)에서는 폐 치과가 강렬한 색채의 예술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사람들의 삶이 예술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마을이었다. 이어 찾은 나오시마 신미술관(Naoshima New Museum of Art)은 안도 다다오(Ando Tadao)의 최근 작품으로, 그의 건축 철학이 집약된 새로운 문화 공간이다. 외관은 일본 전통 석회 회반죽 마감인 싯쿠이(漆喰)를 사용해 부드러운 흰빛을 띠며, 섬 풍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되었다. 이곳에서는 아시아 현대미술을 중심으로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역동적인 전시를 만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마주한 차이궈창(Cai Guo-Qiang)의 '정면충돌(Head On)'은 99마리의 늑대들이 거대한 곡선을 그리며 유리 벽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거침없이 달려가면서도 결국 같은 벽에 부딪히는 모습은 집단의 맹목성과 반복되는 역사를 떠올리게 했다. 서도호(Do Ho Suh)의 '허브(Hub)'는 작가가 세계 여러 도시에서 살았던 집들을 반투명 천으로 연결한 작품이었다.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어지는 기억의 통로가 되었다. 은은한 색감의 집들은 신기루처럼 겹쳐 지고 사라지며 오래도록 잔상을 남겼다. 무라카미 다카시(Takashi Murakami)는 17세기 교토를 그린 '낙중낙외도(洛中洛外圖)'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일본의 전통 회화와 대중문화, 애니메이션적 상상력이 한 화면에서 충돌하면서도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작품마다 정답은 없었다. 대신 저마다 다른 질문을 건넸고 그 질문은 미술관을 나온 뒤에도 오래도록 내 안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나오시마 여행의 마지막은 지중미술관(Chichu Art Museum)이었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이 미술관은 건물 대부분을 땅속에 숨겨 자연의 풍경을 해치지 않는다. 입장 시간 전까지 정원을 먼저 걸었다. 모네가 사랑했던 지베르니(Giverny)를 옮겨 놓은 듯한 풍경이었다. 빗방울이 연못 위에 떨어지고 수면은 흐린 하늘과 나무 그림자를 천천히 흔들었다. 선명하지 않은 색들은 오히려 더 깊은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문득 생각했다. 젊은 시절에는 선명한 것만 아름답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는 흐릿함 속에서도 색을 발견한다. 노안(老眼)으로 세상이 조금씩 부드럽게 번져 보이는 지금, 나는 비로소 모네의 그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림을 보기 전부터 이미 그의 세계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미술관 안에는 조명 없이 자연광으로만 감상하는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수련' 연작 다섯 점과, 금박을 입힌 거대한 조각으로 공간을 채운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의 작품, 그리고 빛으로 공간 자체를 작품으로 바꾸는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의 '오픈 필드(Open Field)'와 '오픈 스카이(Open Sky)'가 자리하고 있다. 작품들은 해의 위치와 날씨에 따라 매 순간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했다. 흐린 하늘은 그림을 환하게 비추지는 못했지만, 대신 빗 빛 속의 수련은 더욱 고요하고 깊어 보였다. 비와 그림은 같은 호흡으로 서로를 완성하고 있었다. 나오시마를 떠나 다카마쓰(Takamatsu)로 향하는 배 위에서 데시마 미술관을 떠올렸다. 그림 한 점 없는 미술관을 이상하게 여겼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곳을 섬의 자부심으로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예술은 벽에 걸린 그림만이 아니었다. 바람과 빛, 물방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까지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여행이 조용히 가르쳐 주었다.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경영학 박사)
2026-07-16 17: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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