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문학상은 캐나다 시인이자 고전학자인 앤 카슨에게 돌아갔다. 역시나 수상 소식 이후 그녀의 작품에 관심이 집중됐다.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대표작 '빨강의 자서전'이지만, 국내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책은 따로 있다. 오빠를 잃은 뒤 쓴 '녹스'다. 녹스는 라틴어로 '밤'이라는 뜻이다. 카슨의 오빠 마이클은 22년 동안 가족과 연락이 끊긴 채 살았다. 그러다 2000년 덴마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남은 것은 사진과 편지 몇 장이었다. 카슨은 수첩에 그 사진과 편지를 하나하나 오려 붙였는데 그게 책이 됐다. 펼치면 병풍처럼 되는 아코디언 형태의 책이다. 책 내용 옆에 2천년 전 로마의 시인 카툴루스가 죽은 형제를 위해 쓴 시를 넣었다. 시의 단어를 하나씩 뜻풀이해 나갔다. 형제를 잃은 시인의 말을 한 단어씩 붙들고, 자신의 오빠를 이해해 보려 한 것이다. 카슨은 끝내 그 시를 원하는 번역으로 옮기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오빠를 이해하는 일도 그랬을 것이다. 하나씩 짚어 가도 끝내 닿지 못한 일이다. 이 책에 한강 작가는 "밤을 들여다보는 책이 왜 이렇게 눈부신 걸까? 사무치게 진실한 것은 어둠을 꿰뚫는 빛이 되고 마는 것일까?"라는 추천사를 썼다. 그 물음은 한강 작가의 책 '흰'을 떠올리게 한다. '흰'은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언니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책이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언니를 향해, 작가는 강보와 배내옷, 소금과 눈 같은 흰 것들을 하나씩 적어 내려간다. 두 작가는 가족을 잃었다. 죽은 이를 이해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래서 두 책은 슬픔을 하나의 이야기로 매끈하게 정리하지 않았다. '녹스'는 사진과 편지의 조각으로, '흰'은 짧은 단상들로 이뤄져 있다. 끝내 다 알 수 없는 사람을 억지로 완성하지 않고, 남은 조각들을 하나씩 곁에 놓아뒀다. 두 작가에게 애도란 빈자리를 메우는 일이 아니라 빈자리를 오래 들여다보는 일인 듯하다. 어쩔 수 없이 슬픔이 다가올 때, 우린 그것이 빨리 지나가길 바란다. 슬퍼하는 사람에겐 그냥 얼른 잊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서둘러 덮은 슬픔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고여 있기 마련이다. 두 작가는 잊는 대신 들여다보고, 그 들여다봄을 기록했다. 그렇게 남긴 조각들 속에서 떠난 사람은 지워지지 않고 우리 곁에 남는다. 카슨은 왜 이 책에 '밤'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우리에게도 서둘러 지나온 밤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이번 가을에는 그 밤을 조금 오래 들여다보면 어떨까. 빛바랜 사진 한 장, 편지 한 줄에서 시작해도 좋다. 한강 작가가 말했던 그 눈부심은 어쩌면 밤을 끝까지 바라본 사람에게만 보이는 빛일지도 모른다.
2026-10-15 08:25:43
[사설] 출산율 넘어 삶의 질로, 20년 만의 인구전략 전환
인구전략위원회가 14일 출산율 제고(提高) 중심에서 삶의 질 향상과 사회의 지속가능성 확보로 정책의 무게중심을 옮기는 '제1차 국가인구전략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2005년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 제정과 이듬해 첫 기본계획 시행 이후 20년 만에 국가 인구전략의 틀이 바뀌는 것이다. 인구 변화 속도를 늦추는 '완화', 인구 감소와 고령화에 대비하는 '적응', 기술혁신으로 성장동력을 확보하는 '도약' 등 3대 전략을 제시했다. 2030년까지 삶의 만족도를 6.6점에서 7.0점으로, 경제활동참가율은 71.8%에서 74.0%로 높인다는 목표다. 출산·양육 지원 확대와 공공주택 공급, 비혼 출생아 차별 개선 등 117개 기본과제를 담고, 부처별 인구 관련 예산 사전협의제도 도입한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0.80명으로 반등(反騰)했지만 생산연령인구 감소와 고령화는 불가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생산연령층 100명당 고령자는 2025년 31명에서 2050년 80명으로 늘어난다. 출산율이 회복돼도 이들이 노동시장에 진입하려면 20년 넘게 걸린다. 출산율 회복과 인구 감소 적응을 병행해야 하는 이유다. 주목할 것은 인구 증가 수단으로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게 아니라 삶의 질 자체를 정책 목표로 삼았다는 점이다. 안정적 일자리와 주거, 일·가정 양립, 건강한 노후는 출산 여부와 관계없이 보장돼야 할 삶의 조건이다. 정책 방향이 바뀌었다고 출산과 양육을 가로막는 고용 불안, 주거·교육비 부담, 경력단절 문제에 소홀해선 안 된다. 정부가 인구 관련 사업의 지방우대 적용을 확대하기로 한 만큼 재정투자도 지자체 간 인구 유치 경쟁보다 인구 감소 지역의 의료·돌봄·교통서비스 유지와 정주(定住) 여건 개선에 기여하도록 바꿔야 한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예산 사전협의제가 형식적 절차에 머물지 않도록 부처별 사업의 중복과 성과를 평가하고, 효과가 검증된 사업에 재원을 집중해야 한다. 20년 만에 국가 인구전략의 틀을 바꾼 만큼 예산과 제도, 정책의 우선순위까지 바꿔야 한다.
2026-10-15 05:00:00
[사설] 지방의회 의정비 줄줄이 인상, '재정난' 민생고'는 생각 않나
지방의회가 재정난(財政難)과 민생고(民生苦)를 외면한 채 자신들의 지갑부터 챙기고 있다. 지방세 감소가 3년째 이어지고 고물가와 경기 침체로 서민의 시름이 깊은데도 내년도 지방의원 의정비(의정활동비·월정수당·여비)를 큰 폭으로 올리려는 움직임이 잇따른다. 대구시 의정비심의위는 시의회 의원 월정수당을 3.5%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수성구의회를 제외한 대구의 8개 구·군 의회의 월정수당도 오를 전망이다. 공무원 보수 인상률 3.5%를 크게 웃돈 곳도 여럿이다. 군위군의회 18%, 달성군의회 15%, 북구의회 13%, 달서구의회 12.3% 등이다. 의정비가 다른 지역보다 낮다거나 의정활동 부담이 크다는 것이 이유다. 지방의원은 주민을 위해 일하는 선출직(選出職)이지, 생계형 직업인이 아니다. 의정비 인상에 앞서 윤리성과 의정 활동 성과부터 돌아봐야 한다. 달서구의회는 구·군정 질문이 의원 1인당 평균 0.08건으로 대구에서 가장 적었고, 의원발의 조례 실적도 하위권이다. 그런데도 인구와 재정자립도가 비슷한 다른 지역과 금액을 맞춘다는 이유로 인상을 추진하고 있다. 수당을 더 받을 궁리보다 궁색한 의정활동을 반성하는 게 먼저다. 중구의회는 과거 수의계약 논란과 의원직 상실, 소송 등으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부터 올리겠다는 것은 파렴치한 행태다. 의정비 인상 관련 주민 의견을 듣도록 한 절차가 요식행위(要式行爲)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많다. 중구의회 공청회가 그렇다. 30~40분 만에 끝난 공청회에서 발표자 3명은 모두 의정비심의위원이었고, 주민의 반대 의견은 공개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다. 의정비 인상은 의정 성과나 재정 여건을 검토한 뒤 결정돼야 한다. 공무원 보수 인상률을 관행적(慣行的)으로 적용하는 방식은 옳지 않다. 지자체와 지방의회는 의정비 산정 기준과 공청회 참석자 구성, 여론조사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시민단체가 제안한 통합 의정활동 평가지표, 공약 이행 현황 등을 의정비 심의 때 반영하는 것도 방법이다.
2026-10-15 05:00:00
[사설] 정치검사 공방에 묻힌 중수청장의 '능력 검증'
14일 중수청장 청문회에서 주목받은 장면 중 하나는 '정치검사 1호'를 묻는 문답(問答)이었다. 김지용 후보자는 윤석열 전 대통령을 첫손에 꼽았고, 한동훈 의원도 포함되느냐는 질문엔 '부정하긴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검찰이 개혁 대상이라는 데에도 동의했다. 한때 '검수완박'에 반대했지만 지명 이후 밝혀 온 개혁 동의 입장을 확인한 셈이다. 그러나 이 문답이 확인한 것은 후보자의 정치적 좌표(座標)지 능력이 아니다. 수사기관장 후보에게 특정 정치인의 이름을 대며 정치검사 여부를 묻는 것 자체가 자질 검증과는 거리가 멀다. 답변도 아쉽다. 수사의 정치화 청산을 내세운 후보자라면 특정 인물에 대한 언급에 더 신중해야 했다. 공정성 시비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 실질적 검증이 없진 않았다. 일부 여당 의원은 정진웅 검사 독직폭행 기소 과정에서 '비겁한 선택'이 드러났다고 몰아세웠고, 후보자는 기소에 반대했다면서도 의견을 관철(貫徹)하지 못해 안타깝다고 했다. 김학의 전 차관 불법 출국금지 사건에서는 기소에 반대하는 이의제기서를 내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조직의 결정이 소신과 다를 때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독립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공방의 상당 부분은 후보자의 과거 행적과 자료 제출 문제에 쏠렸고, 조직 운영 관련은 상대적으로 덜 부각됐다. 검증 근거도 부족했다. 박정현 의원은 중수청에 운영 매뉴얼과 미제 사건 이관 기준 자료를 요청했으나 구체적 답이 없었다며 '검찰청 시즌2'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박주민 의원은 후보자가 소상히 밝히겠다고 약속했지만 제출된 자료는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앞서 대통령은 후보자의 수사 전문성과 조직관리 경험을 적임 사유로 들었고, 후보자도 독립성 확보 방안 등을 소상히 밝히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청문회는 그 전문성·경험의 입증 여부와 약속한 소명 이행 여부를 가리는 자리여야 한다. 청문회가 후보자가 누구 편인지를 확인하는 데 그친다면 그 대가는 갓 출범한 중수청과 국민이 치르게 된다.
2026-10-15 05:00:00
[관풍루] 돈 받고 시의원 공천 혐의 강선우 의원에 징역 2년 6개월 선고
○…이재명 대통령 국정운영 지지율 호남 제외한 전국에서 부정 평가 압도적 여론조사(한국사회여론연구소 12~13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1명 대상.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 ± 3.1%포인트) 나와. 전남 또는 전북도지사했으면 지지율 걱정 안 해도 될걸. ○…돈 받고 시의원 공천 혐의 강선우 의원에 징역 2년 6개월 선고. 돈으로 공천 주고받은 자는 법으로 처벌하는데, 아첨·편리로 공천·자리 주고받은 자들은 어떻게 처벌하나. ○…8·17 전당대회 신천지 교인들 대거 당원 가입한 정황 놓고 더불어민주당 친청-친명 서로 비난. 민주주의 훼손 사건인데 경찰은 수사 않고 기다렸다가 이기는 계파 편들 생각?
2026-10-15 05:00:00
2026-10-14 18:57:48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366>겸재 정선의 필(筆)법이 무르녹은 최만년의 명작 '통천문암'
강원도 통천군 해안에 문기둥 같은 바위 사이로 길이 있어 이 바위를 문암이라고 했다. 관동팔경에 꼽힐 정도의 명소는 아니었으나 서울 출신인 겸재(謙齋) 정선에게는 넘실대는 바닷물이 바로 옆에서 덮쳐올 듯한 이곳을 지나간 경험이 특별했던 듯하다. 문암 사이에서 파도를 쳐다보는 지팡이 짚은 인물에게 그런 감동을 담은 듯. 정선의 호쾌한 필(筆)법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통천문암'은 지금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전시 중이고, 박진감 넘치는 묵(墨)법의 '인왕제색도'는 지금 런던 영국박물관에 걸려있다. '인왕제색도'는 76세에 그렸고, '통천문암'은 최만년의 명작이다. 두 작품은 '만익공묘(晩益工妙)', 나이 들수록 필치가 더욱 오묘하다고 한 진정한 대기만성의 대가가 정선임을 확인시켜 준다. 정선은 30대부터 금강산과 강원도의 바닷가 명소를 답사하고 그림으로 그렸지만 금수강산의 결정체인 금강산과 동해바다의 감동을 회화로 온전히 완성한 것은 70대 이후이다. 40여 년 걸렸다. 우리 산천을 그리는 전통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회화와 화론은 한자문화권의 중심국이자 사대(事大)의 대상인 중국의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수용하며 공유재산으로 인정하는 입장이었고, 화가들의 교과서인 화보(畵譜)도 중국적이어서 조선의 자연과 경치가 회화미의 대상이 되기는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정선은 우리강산 고유의 국토미를 자신만의 주제 의식과 화풍으로 실천한 진경산수를 개척하고 완성해낸 위대한 업적을 이뤘다. 정선과 이웃사촌이었던 문인화가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은 "우리나라의 산수를 그리는 것은 정선으로부터 비로소 개벽됐다"라고 선언하며 그 이유로 우리 산을 직접 마주해 사생한 점, 조선 곳곳의 산과 물의 형태를 직접 파악한 현장 체험이 많은 점, 사용한 붓이 무덤을 이룰 정도로 공력을 쌓은 점을 들었다. 붓 다루는 솜씨를 수련하는 일을 필총(筆塚), '붓 무덤'으로 은유한다. 종이나 비단을 스칠 뿐인 붓을 붓털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쓰고 버린 것이 수북하게 쌓일 만큼의 각고면려가 있었기에 정선은 눈으로 보며 가슴으로 느낀 감동을 자신의 손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 정선은 진경산수로 산수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정선이 화종(畵宗), 화성(畵聖)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대구의 미술사연구자
2026-10-14 09:30:11
[사설] 중국 군함 우리 해역 진입 횟수 공개 못하나, 안 하나
국회가 '중·러의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 진입 횟수'와 '중국 군함의 우리 관할 해역 진입 횟수' 등을 알려 달라고 요구했으나 군 당국이 거부해 여러 의문과 불안감을 갖게 한다. 합참과 공군본부는 "우리 군의 감시 능력 노출 방지 및 작전 활동 보호 등을 고려해 제출이 제한된다"고 답했다고 한다. 일견 일리 있으나 국민 알권리를 외면하고 불안을 키우는 처사(處事)라고 본다. 작년 한 해 동안 중국 군함의 우리 관할 해역 진입은 항공모함 8회를 포함해 350여 회였다. 이는 2020년 이래 가장 많은 횟수였다. 그러니 올해 중국 군함의 우리 관할 해역 진입 횟수를 밝히지 않는 것은 그 횟수가 크게 늘어 공개할 경우 파장(波長)이 크고, 이재명 정부의 영토 수호(守護) 의지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질 것을 우려하기 때문 아니냐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군 당국은 중국 또는 러시아의 진입 횟수를 공개했고, 통상 국정감사에서도 국회에 자료를 제출해왔으니 말이다. 만약 진입 횟수가 급증해 공개하지 못한다면 '자주국방'이 무색하고, 정부가 북·중·러 친화적으로 흐르니 군 역시 북·중·러 눈치를 본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한기호 국민의힘 의원은 "미국의 정보 공유 중단으로 북·중·러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자료 제출이 어려운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미국은 '북한 구성 우라늄 농축 시설' 소재지(所在地) 공개 논란 이후 대북 정보 공유를 제한하고 있다. 대북 정보 공유 제한을 넘어 중국의 서해 진출 정보까지 제한하고 있다면 안보 위협은 더욱 심각하다. 중국은 남중국해 교두보화 및 우리 서해 '내해화(內海化)' 전략을 꾀하고 있다. 서해는 우리에게 단순한 연안(沿岸) 바다가 아니라 수도 방어 전진 기지·산업 물류 핵심·남북 군사 접점·미중 전략 공간이 겹치는 곳이다. 중국 군함과 군용기가 서해와 서해 상공을 마음대로 들락거린다면 우리 안보에는 치명적이다. 이를 모르거나, 알고도 막지 못한다면 '영토 상실'이나 다름없다.
2026-10-14 05:00:00
[사설] 광주 군공항 '반도체' 앞세워 이전 특혜 속도전, TK엔 "알아서 하라"
광주 군공항 이전에는 팔을 걷어붙이고, 대구 군공항 이전에는 '나 몰라라' 하는 게 국민주권정부인가. 정부가 호남 반도체 국가산업단지를 명분으로 광주 군공항 이전에 전례 없는 특혜를 주고 속도전을 펼치고 있다. 기부 대 양여 방식으로 추진되는 같은 군공항 이전 사업인데도 광주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사업'이고, 대구는 '지자체가 요구하는 사업'이란 정부의 편파적(偏頗的) 이중 잣대가 낳은 결과다. 강대식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광주 군공항 종전부지가 국가산단 후보지로 지정된 지 닷새 만에 LH 설계용역이 발주됐다. 군공항 이전 사업비와 종전부지 가치의 차액 3조6천700억원에 대한 국가 지원이 추진된다. 광주 군공항 전력(戰力)을 경북 예천 등 3개 기지로 분산하는 데도 6천600억원이 책정됐다. 특정 지역의 사업을 위해 국가 재정과 공공기관의 역량이 총동원되고 있다. 대구 군공항 이전 사업은 딴판이다. 대구시는 정부의 사업계획 승인까지 받았지만 재원 조달과 종전부지 개발·분양 부담을 모두 떠안고 있다. 이 때문에 이전 부지 선정 6년이 지났는데도 착공을 못 하고 있다. 이 와중에 정부가 밝힌 "광주는 국가 필요 사업, 대구는 지자체 요구 사업"이란 설명은 대구경북민들의 분노(憤怒)를 키우고 있다. 대구 군공항 이전 역시 군공항 이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추진되고, 국방부가 사업 시행자를 지정하고 사업계획을 승인한 국가적 과제다. 정부가 광주보다 훨씬 앞서 절차를 밟아 온 사업을 이제 와서 지자체의 요구로만 치부한다면 정부 스스로의 결정마저 부정하는 꼴이다. 호남 반도체 산단 조성과 광주 군공항 이전을 신속하게 추진하는 것을 탓할 생각은 없다. 문제는 그런 지원을 TK에는 왜 적용(適用)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국가균형발전은 특정 지역에 대한 집중 지원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청와대와 정부는 대구 군공항 이전 사업에도 재원 조달과 종전부지 개발을 위한 실질적 지원책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 '모두의 대통령'이며 '국민주권정부'라는 말을 쓸 수 있지 않겠나.
2026-10-14 05:00:00
[사설] '반도체'에 착시된 한국 경제, 2030년 역성장 경고 직시해야
최근 반도체 산업이 초호황을 누리며 수출과 기업 실적 지표를 견인하고 있지만, 이를 제외한 한국 경제의 허약한 실상이 드러나며 엄중한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지난 12일 한국개발연구원(KDI)과 산업연구원 등이 참석한 경제포럼에서 전문가들은 30년째 이어진 장기 성장률 하락 추세를 반전시키지 못한다면 2030년부터 한국 경제가 '역성장(마이너스 성장)' 국면에 진입할 수 있다는 암울한 진단을 내놨다. 반도체 착시(錯視)로 가려진 산업 전반의 경쟁력 약화와 구조적 부진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한국 경제의 미래는 없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한국의 제조업 현실은 심각하다. 올해 들어 반도체 수출이 세 자릿수 급증세를 보이는 사이, 반도체와 자동차를 제외한 석유화학·철강·배터리 등 주력 제조업은 글로벌 수요 둔화와 중국발 과잉 공급 공세 밀려 15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가동률이 급락했다. 삼성닉스를 제외하면 제조업 전체 영업이익률이 3분의 1 수준으로 토막나는 현상은, 한국 경제가 사실상 반도체라는 단 하나의 버팀목에 위태롭게 의존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장기 성장률 하락의 근본 원인은 생산성 증가세 둔화와 저출생·고령화에 따른 노동 공급 축소다. 여기에 규제 타성(惰性)에 젖은 정부 정책, 일관성 없는 정권별 경제 정책, 창의성을 꺾는 입시 위주의 교육 체계가 성장 동력을 지속해서 갉아먹었다. 정치권과 관료 체제가 과도하게 경제 정책에 개입하며 자율적 혁신을 가로막는 사이, 우리 산업은 체질 개선의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다. 앞으로 다가올 성장 정체와 역성장의 충격을 막으려면 지금 당장 경제 체질 개혁에 나서야 한다. 정부는 자본과 인력이 신산업으로 유연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개선하고 과감한 규제 완화를 단행해야 한다. 또한 여성과 고령층의 경제활동 참여를 확대하고, 인공지능(AI) 시대에 걸맞은 창의적 인재를 양성할 수 있도록 대학 입시와 교육 제도를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할 것이다.
2026-10-14 05:00:00
[관풍루] 강경화 주미한국대사 "美와 고위급 협의, 백악관 접촉 쉽지 않다, 정보공유 제한도 풀기 어려운 현안"이라고 토로
○…강경화 주미한국대사 12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주미대사관 국정감사에서 "美와 고위급 협의, 백악관 접촉 쉽지 않다, 정보공유 제한도 풀기 어려운 현안"이라고 토로. 청와대는 현안마다 협의는 잘 되고 있다고 했는데. ○…靑, '한미정상 골프회동' 대비 TF 구성한 것으로 알려져. G20서 '골프외교' 가능성 염두에 두고 의전비서관 및 외교부·안보실 참여키로. 떡줄 사람한테 연락은 해봤나? ○…법무부가 13일 전자발찌 찬 50대의 인천 흉기 난동과 관련해 사과문 발표. 난동자가 전자발찌 찬 법무부의 관리대상이지만 현장 치안을 책임지는 경찰은 책임없나?
2026-10-14 05:00:00
2026-10-13 19:04:36
[사설] 정동영 장관의 대북 및 동맹 인식이 정부의 입장인가?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한미동맹 균열'과 자신을 향한 '경질 요구'에 대해 "정작 퇴출돼야 할 것은 편향(偏向)된 동맹관과 시대착오적인 색깔론"이라며 "한미동맹이 흔들리거나 훼손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상대인 미국은 "정보 및 방첩 관련 사안과 관련해 한국이 수십 년 이어져 온 동맹의 기준을 준수하길 기대한다"며 불신하는데 정 장관 본인은 '아무 문제 없고, 이 상황을 위태롭게 보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미국은 한국과 기밀(機密)을 공유하기 힘들다며 불신을 표출하고, 미국에서 열린 '제5차 북한 사이버 위협 대응 한·미·일 외교 당국 실무회의'에 우리 국정원을 배제했다. 한·미 간 정보 협력에 문제가 없고, 정 장관의 북한 지뢰 발언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 정부 입장이라면 앞으로도 지금처럼 미국의 불신이 있어도 괜찮고, 미국과 대북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의 불신 표출(表出)이 비단 정 장관 한 사람의 언행 때문은 아닐 것이다. 우리 국정원에 대한 보안 불신, 한·미 간 투자와 통상 갈등, 중국과 실용적 균형 외교를 추구하려는 한국 정부 노선(미국 입장에서는 친중적 노선), 대북 정책 등이 얽혀 있다고 본다. 6·25전쟁 이후 우리가 70년 이상 사회적 안정을 이루고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굳건한 한미동맹이 있다. 만약 미군이 철수(撤收)하거나 한미동맹이 해체될 경우 우리가 북한·중국·러시아라는 군사 대국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을까. 미국은 지리적으로 멀어 한국을 정치적·영토적으로 복속(服屬)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북·중·러는 다르다. 정치적·영토적 복속을 노릴 우려가 크다. 1992년 필리핀 의회의 반대와 반미 여론으로 미군의 주요 기지가 철수한 이후 필리핀 영해에 대한 중국의 잦은 침범(侵犯)과 남중국해에 대한 거센 영유권 주장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이 미국과 신뢰를 흔들고, 정보와 전략을 공유하지 않고, 같이 훈련하지 않고, 한편이 되어 싸우지 않고, 북·중·러에 다가갈수록 평화와 안보는 멀어지고 굴종(屈從)과 침공 위험이 더 커질 것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이재명 정부 등 이른바 좌파 정부는 9·19 남북 합의로 스스로 손발을 묶고, 군 복무 기간을 단축하고, 국정원 대공수사권을 폐지하고, 국군방첩사령부를 해체했다. 그럼에도 한미동맹은 흔들림이 없고, 국가 안보는 빈틈없이 튼튼한가? 작금(昨今)의 한미동맹 및 안보 문제는 미국이 아니라 우리 국민이 먼저 "이래서는 안 된다"고 따져야 한다. '북한·중국·러시아 쪽으로 기울 경우 우리가 맞닥뜨릴 미래'와 '한미동맹을 축(軸)으로 친서방 노선을 굳건히 할 때 우리가 맞이할 미래'의 차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2026-10-13 05:00:00
[사설] 성행하는 노인 대상 판매 행사장, 안전 문제 방치할 건가
지난 9일 대구 북구에서 발생한 상가 천장 마감재 붕괴(崩壞) 사고는 노인을 대상으로 한 판매 행사장의 안전관리 실태를 돌아보게 한다. 생활용품 판매 행사에 참석한 66명 가운데 38명이 다쳤다. 노인들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마감재를 피해 황급히 대피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사고가 난 판매 행사는 구청에 신고되지 않았다. 행사를 주최한 업체는 무료 물품을 내세워 어르신들을 모았고, 이달부터 행사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영업은 대구뿐 아니라 전국에서 성행(盛行)하고 있다. 행사는 단기간에 열렸다가 장소를 옮기는 경우가 많아 지자체의 관리·감독이 쉽지 않다. 문제는 이런 행사가 임대료가 싼 노후 건물이나 장기간 비어 있던 공간에서 열린다는 점이다. 사고가 난 건물도 1994년 준공됐으며, 해당 공간은 오랫동안 공실(空室)이었다가 행사장으로 사용됐다. 더구나 연면적이 892㎡여서 법정 정기 안전 점검 의무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낡은 건물에서 많은 노인들이 모이는 행사가 열리는데도, 행정 당국의 사전 파악과 안전 점검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이런 곳이 안전 사각지대다. 고령자는 사고가 나면 신속 대피가 어렵다. 좁은 출입구에 사람이 몰릴 경우 압박과 넘어짐으로 인해 피해가 커질 수 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밀집(密集)한 공간에서 붕괴나 화재가 발생한다면 인명 피해는 걷잡을 수 없다. 전반적인 안전 점검이 필요하다. 정부와 지자체는 노인 대상 단기 판매 행사의 신고·관리 체계를 점검하고, 개최 장소와 수용 인원은 물론 비상구·소방시설·천장 등 구조물의 안전 여부를 확인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2026-10-13 05:00:00
[사설] EU·미·일, 中 전기차 빗장 거는데 손 놓고 있는 한국 정부
유럽연합(EU)이 역내 자동차 산업과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중국산 하이브리드 자동차 수입을 4년간 절반 이하로 줄이기로 중국과 합의했다. 이미 미국은 중국산 전기차에 최대 127.5%의 관세를 부과하고 커넥티드카 수입까지 규제하고 있으며, 일본은 보조금과 세제 혜택으로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있다. 전 세계 주요국이 자국 제조업 보호를 위해 빗장을 거는 동안, 한국만 무방비(無防備) 상태로 노출돼 있는 것이다. 세계 각국의 규제로 갈 곳을 잃은 중국 자동차의 화력은 한국 시장으로 쏠리고 있다. 중국 내수 판매 부진과 해외 규제 강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다. 이미 테슬라가 중국 상하이 공장 물량을 저가로 국내에 밀어내며 시장을 흔든 바 있으며, 최근에는 BYD 등 중국 주요 브랜드들이 파격적인 가격을 앞세워 진입 중이다. 유럽 판매가보다 수천만원 저렴한 가격 공세는 현대차·기아를 비롯한 국내 완성차 업계의 주력 차종 수익성까지 위협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대응은 안일하기 짝이 없다. 중국산 자동차에 부과하는 관세는 기본 8%에 불과하며, 전기차 보조금 제도는 중국산 저가 공세를 막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세제 개편안에서도 국내 자동차 업계가 절실히 요구했던 전기차 관련 세액공제 혜택은 누락됐다. 자동차 산업은 국내 제조업 생태계의 뿌리이자 고용과 수출을 떠받치는 핵심축이다. 정부는 주요국의 자국 산업 보호 기조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중국의 무분별한 저가 공세로부터 국내 시장을 보호할 통상·보조금 장벽을 정비하고 생산 지원책을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
2026-10-13 05:00:00
[관풍루]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한미동맹 관련, "가치는 공유하지만 이해관계는 상충할 때도 있다"고 위기설 일축
○…더불어민주당 박선원 최고위원은 12일 '대구 상가 천장 붕괴 사고' 당일 이재명 대통령의 황제 골프 논란에 대해 "태릉 체력단련장(골프장)은 (대통령의) 근무처"라고 주장. 이재명 왈(曰), "골프 굿~ 샷~ 중 이상 무".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한미동맹 관련, "가치는 공유하지만 이해관계는 상충할 때도 있다"고 위기설 일축. 친북종중(親北從中) 가치를 미국과 공유한다는 황당한 주장 나올라.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힘 이진숙 의원을 향해 "정치의 탈을 쓴 패륜" "파묘 정치"라고 공격. 그럼 경자유전 농지에 불법 묘소 만든 이재명 대통령은 법 위의 존재라는 말씀?
2026-10-13 05:00:00
2026-10-12 18:51:26
교정을 거닐다 나무에서 떨어진 모과를 주워 연구실에 두려고 몸을 숙였다. 들풀 사이 개미와 벌레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또 다른 세상이다. 문득 다큐멘터리에서 본 쇠똥구리 영상이 뇌리를 스쳤다. 이 작은 생명체는 제 몸무게의 천 배나 되는 거대한 똥구슬을 굴리는데 머리를 땅으로 처박고 오직 뒷발로만 밀어낸다. 그렇기에 정작 나아갈 앞은 보지 못한다. 거꾸로 매달려 맹목적으로 전진하는 고독한 뒷모습에서,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한 치 앞의 미래를 모른 채 걸어가는 우리 인간의 숙명이 겹쳐 보였다. 여정은 결코 매끄럽지 않다. 가파른 오르막에서 미끄러지고, 거친 풀숲에 막혀 돌아서야 한다. 이 지독한 짐을 지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쇠똥구리의 길은, 저마다의 상처와 수고를 지닌 인간의 삶이자 고독한 구도(求道)의 길과 다름없다. 이 미물의 걸음이 경외감을 주는 순간은 역설적으로 길을 완전히 잃었을 때이다. 앞을 보지 못해 방향을 잃으면, 쇠똥구리는 구슬 위로 훌쩍 올라선다. 그리고 제자리를 돌며 오직 하늘을 우러러본다. 낮에는 태양의 각도로, 밤에는 은하수의 미세한 별빛 띠를 나침반 삼아 목적지를 찾아낸다. 가장 낮은 진흙탕에서 오물을 굴리지만, 삶의 방향만큼은 가장 높은 곳의 빛에서 구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고난의 한복판에서 땅 위의 집착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삶의 근원적인 이정표를 구하는 성찰이자 영성의 발현이다. 화가의 눈으로 바라보는 쇠똥구리의 섭리는 또 다른 생명의 신비로 이어진다. 수묵화의 먹은 불에 타고 남은 '재'를 모아 만든 것이다. 시커멓게 탄 재는 인간이 지은 허물과 상처일지 모른다. 쇠똥구리가 배설물을 뭉쳐 새 생명을 키워낼 요람을 빚듯, 화가는 불에 탄 재를 별빛에 갈아내듯 먹을 갈아 화폭 위에 뜻을 담은 붓질을 한다. 소멸했던 재가 화가의 손길을 거쳐 생명으로 부활하는 예술적 구원의 순간이다. 게다가 땅속 깊이 묻힌 이 구슬은 숲의 뿌리인 균사체를 키워내며 대자연을 푸르게 이어주는 상생의 시작점이 된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무거운 짐을 굴리며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존재들이다. 여정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은 목적지를 바로 앞에 둔 마지막 순간이다. 둥지로 짐을 밀어 넣기 직전의 그 가파르고 고독한 마지막 순간은 온 힘을 쥐어짜내야 하는 가장 어려운 고비다. 삶의 깊은 고난의 끝에서 마주하는 마지막 숨결처럼 말이다. 세상의 무게에 짓눌려 주저앉고 싶을 때 잠시 삶의 짐 위에 올라서서 밤하늘의 은하수와 태양을 바라보자. 가장 낮은 곳에서도 가장 높은 빛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이 있다면, 우리는 그 힘겨운 마지막 순간의 고개마저 넘어서게 된다. 고통의 재를 담아내어 저마다의 붓질로 생명의 궤적을 그려가는 삶의 주인이 되기를 축원해 본다.
2026-10-12 18:31:17
[윤명철의 다시 보는 한국역사와 문화] 유라시아로 흩어진 한민족 디아스포라
국가가 멸망해도 그 땅에서 살던 사람들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포로로 끌려가고, 복국을 꿈꾸며 탈출하고, 바다와 초원을 건너 낯선 곳에 정착한다. 7세기 동아시아 국제대전 이후 고구려·백제 유민들은 요동과 만주를 넘어 황하의 서쪽 변경, 몽골초원, 티베트고원 부근과 일본열도까지 흩어졌다. 우리는 오랫동안 삼국의 멸망과 신라의 통일을 전쟁의 승패, 왕조와 영토의 변화로 설명했다. 하지만 전쟁의 결과는 국경선에만 남지 않는다. 흩어진 사람들은 어디로 갔으며, 어떻게 살아남았고, 정착한 사회에 무엇을 남겼는가. 필자가 전근대 한국사에 디아스포라라는 관점을 적용해 온 까닭이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이산과 난민 뿐 아니라 정착과 재결집, 새로운 관계망의 형성까지 살피는 개념이다. 각각의 이동 동기는 구분해야 하지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국가가 사라진 뒤에도 주민의 경험과 기술,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고,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역할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설명했다. 660년 백제의 멸망, 663년 백강(백촌강)전투에서 백제·왜 연합군의 패배, 668년 고구려의 멸망에 이어 신라는 당과 7년 동안 '나당전쟁'을 벌였다. 당이 백제·고구려를 무너뜨렸다고 동부 유라시아가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서쪽에서는 '토번국(티베트)'이 청해와 서역(중국 신장지역)의드)의 교통로(실크로드)를 두고 당과 충돌했고, 670년에는 대비천에서 당군을 대패시켰다. 북쪽에서는 682년 무렵 제2돌궐 카간국이 부흥했으며, 요서에서는 '거란'과 '해'가 활동했다. 만주에는 여러 말갈 집단과 고구려 유민들이 다수 남아 있었다. 전쟁의 종결은 또 다른 세력 경쟁과 주민 이동의 시작이기도 했다. 당은 정복한 땅의 주민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고 일부를 군사조직에 편입시켰다. 반대로 변경의 유목세력과 지역집단은 당의 지배력에 도전했다. 한쪽에서는 주민의 강제 이산이, 다른 쪽에서는 새로운 정치적 결합이 진행됐다. ◆ 중국 오지로 끌려가는 고구려 유민들고구려인의 강제 이주는 멸망 전부터 시작됐다. 645년 당 태종이 침공했을 때 요동성 등에서 포로가 발생했다. 668년 평양성 함락 뒤에는 보장왕과 왕족·귀족, 장수와 관리들이 장안으로 압송됐다. 이듬해 당은 대규모의 주민을 강제 이주시켰다. 《구당서》는 2만 8200호, 《자치통감》은 3만8천200호, 《삼국사기》는 3만8천300호로 기록한다. 《신당서》의 3만이라는 수치와도 차이가 있다. 호수와 인원 단위가 다르므로 정확한 총인구를 단정할 수 없지만, 수많은 가족이 고향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들은 회하와 양자강 사이인 강회(江淮)·호북성과 사천성의 중경 일대인 산남(山南)·산서성의 태원 일대인 병주(幷州)와 감숙성의 무위 일대인 량주(涼州)의 서쪽 등 오지로 옮겨졌다. 고구려의 복국시도들을 막는 한편 노동력과 변경을 방어하는 인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677년에 당은 보장왕을 요동도독·조선왕으로 임명해 고구려유민들의 저항을 무마하려 했었다. 그러나 보장왕이 말갈과 연계해 재건을 모색하자 다시 사천성 청두 근처의 공주(邛州)로 유배했다. 주민의 일부도 하남(하남성)과 지금의 감숙성과 청해성 동부에 걸친 광대한 변경인 농우(隴右)로 옮겼다. 당의 서북 변경에는 고려병(高麗兵)이 활동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산동과 황토고원, 티베트고원 인근까지 고구려인의 발자취가 이어졌던 것이다. 우리가 찾아야 할 고구려의 역사와 조상들의 공간이 얼마나 넓은지 새삼 깨닫게 한다. 우리는 감숙과 청해를 실크로드의 역사 공간으로, 사천은 유비와 제갈공명의 촉나라의 옛 땅으로만 기억한다. 사슬과 밧줄에 묶인 그들은 가족들의 생사조차 모른 채 황토고원의 거센 바람을 맞고, 수많은 산과 강을 건넜을 것이다. ◆또 다른 운명을 개척한 고구려 유민들이주민들의 운명은 서로 달랐다. 어떤 이는 포로와 노비가 됐고, 어떤 이는 황무지를 개척하거나 당의 변경군에 편입됐다. 8세기 중엽 고구려계 군인 고선지는 천산산맥과 파미르고원, 힌두쿠시산맥을 넘나들며 당의 서역전쟁을 지휘했다. 또한 안사의 난 이후 산동에서는 고구려계 이정기 일가가 강력한 군사·정치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이납은 782년 제왕(齊王)을 칭했다. 이들은 고구려를 복국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의 정치·군사 질서 속에서 독자적인 역사를 만든 인물들이었다. 몽골초원의 돌궐로 향한 사람들도 있었다. 고구려계 고문간은 제2돌궐의 묵철가한의 사위가 되어 '고려왕 막리지'라 불렸다. 고공의 등도 유민집단을 이끌었다. 715년 이들이 돌궐에서 당으로 귀부한 사실은 고구려계 세력이 초원정치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제2돌궐의 성장에 미친 영향은 연구할 문제이지만, 건국에 직접 참여했다는 주장까지 확정된 것은 아니다. 고구려인의 활동 무대를 만주에 가둘 수 없는 까닭이다. 고향과 그 주변에 남은 이들은 적극적으로 복국을 시도했다. 670년에 검모잠은 남쪽에서 고안승을 왕으로 추대해 저항했고, 보장왕도 요동에서 옛 주민을 규합했다. 그런데 696년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조양 일대)'에서 당나라와 전쟁을 시작하자 걸걸중상과 말갈계인 걸사비우는 유민들을 모아 전투를 벌였고, 이어 대조영은 이들을 결합해 당나라와 전투를 벌이면서 동쪽으로 이동했다. 고구려 유민들은 이렇게 이산과 저항을 하면서 동아시의 질서재편에 역할을 하는 한편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토대와 힘을 갖춰갔다.(《고구려 해양사연구》) ◆신흥 일본국 건설에 참여한 백제 유민들백제인들에게도 멸망은 대규모 이산과 망명, 난민이라는 상황을 만들었다. 660년 음력 9월 의자왕과 왕족·신료·군인·백성들이 당나라로 끌려갔다. 《삼국유사》는 압송된 사람을 1만2천807명으로 전한다. 복신·도침·부여풍 등이 부흥전쟁을 벌여 한때 당군과 신라군에 맞섰지만, 663년 음력 8월말에 벌어진 백강(백촌강) 전투와 주류성 전투에서 패배했다. 유민의 일부는 퇴각하는 왜의 배에 올라 대한해협을 건넜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이름이 끊어지고 조상들의 무덤을 다시 찾지 못하게 됐다는 기록이 실렸다. 또 665년에 백제인 400여 명, 669년에는 700여 명이 오미(시가현 비파호 부근)에 정착했다는 기록도 있다. 백제와 왜는 4세기 후반부터 왕실과 귀족, 승려와 기술자들을 통해 긴밀하게 교류했다. 백제 유민은 이 인적 기반을 활용해 새 사회에 정착했다. 배를 타고 건넌 사람들 가운데는 군인과 관리, 승려뿐 아니라 생활 기술을 가진 장인과 가족들도 있었다. 그들은 일본 조정이 필요로 하던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단순한 피난민이나 개척민에 머무르지 않았다. 왜국은 당·신라의 공격에 대비하여 규슈와 세토내해의 방어체계를 강화했다. 이 때 다자이후의 수성(水城)과 조선식 산성들을 건설하는 일을 주도한 백제계 귀족인 여러 달솔들과 기술자들은 축성술과 군사조직·행정 경험 등을 전했을 것이다. 일본이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에 걸쳐 '일본국'이라는 국호와 율령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확립하는 데에도 한반도계 주민들의 경험은 중요한 자산이었다. 물론 이 변화는 일본 내부의 개혁과 당의 제도 수용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다. 그들의 기여는 문화에서 더욱 뚜렷했다. 백제가 전한 불교·건축·조각·공예는 이미 아스카 문화의 형성에 깊이 참여했다. 나라시대에는 이러한 기반 위에서 불교미술과 학문이 크게 발전했다. 일본 고대문화의 르네상스라 할 만하다. 백제계인 승려 행기(行基)는 민중에게 불교를 전하고 다리와 저수지 건설에 참여했으며, 도다이지 대불 조성을 돕고 대승정에 올랐다. 승려 양변(良弁)은 도다이지의 성립과 발전에 힘썼고, 기술자 가문 출신인 국중공마려(國中公麻呂)는 대불의 주조를 맡았다. 왕족 출신인 경복(敬福)은 749년 무쓰국에서 생산된 황금 900냥을 바쳐 대불의 도금에 기여했다. 신흥 일본의 국책사업인 동대사와 대불의 완성은 백제계 후손들의 지식과 기술이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결과물이다. ◆일본국과 모국인 고구려(발해)를 이어준 고구려유민들고구려계 주민도 일본에 정착해 새로운 역할을 맡았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716년 일본 조정은 흩어져 살던 고구려계 주민 1천799명을 무사시국에 모아 고려군(高麗郡)을 설치했다. 지금의 사이타마현 히다카에는 약광(若光)을 기리는 '고마(高麗)신사'가 남아 있다. 고구려계 소나씨의 후손들은 고려조신(高麗朝臣)이라는 성을 받았으며, '고려조신대산'은 761년, '고려조신전계'는 777년에 일본의 발해 외교에 참여했다. 일본에 정착한 고구려계 가문이발해와 일본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구체적인 사례다. 일본의 미술에도 고구려와 이어지는 흔적이 많다. 나라현 아스카의 다카마쓰총(高松塚)·기토라(キトラ) 고분에 그려진 사신도·인물도와 천문 표현은 무덤 구조와 함께 고구려 고분과 매우 연관이 깊다. 이미 6세기 말부터 7세기 초에 걸쳐 고구려계 승려 혜자·혜관·담징 등의 활동과 호류지(법륭사) 등 초기 불교미술의 전개를 함께 살펴보면, 일본 문화가 한반도와 대륙을 잇는 인적·문화적 교류 속에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동아지중해와 고대일본》). 신라인의 이동은 망국의 유민과 달랐다. 나라가 존속한 가운데 사신과 승려, 유학생·상인·선원들이 당과 일본에 진출했다. 산둥과 대운하 주변의 신라인 공동체는 통역과 교역, 운송과 종교활동을 통해 고향과 이주지를 연결했다. 9세기 장보고는 이런 인적 기반을 조직하여 신라·당·일본 사이의 해상 무역망을 발전시켰다. 이렇게 동아지중해 국제개전의 결과는 한민족을 강제 이산에서 자발적 이동, 시대와 조건에 따라 다른 형태로 동부 유라시아 세계로 확대됐다. ◆디아스포라로 보는 역사국가 중심의 역사에는 국경 밖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행로를 추적하면 전쟁의 결과가 달리 보인다. 당의 변경군과 노예로 편입된 고구려인, 돌궐 정치에 참여한 유민, 일본국의 성곽들과 대불을 만든 백제계 인물, 발해와 일본을 왕래한 고구려계 사신, 바다를 누빈 신라인들은 새 국제질서에 참여했다. 그들은 몸과 함께 조국이 오래 축적해 온 지식과 기술, 신앙과 기억, 인적 관계까지 이동했다. 고구려와 백제는 멸망했지만 그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부는 다른 나라에서 새 역사를 만들었고, 일부는 옛 국가의 회복을 꿈꾸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옛 영역에서는 698년 훗날 발해로 이름을 바꾼 또 하나의 고구려가 탄생했다. 그 건국은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라 이산·탈출·재결집을 거쳐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부활시키는 과정이었다. 옛 땅을 회복한다는 '다물'의 역사적 지향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역사는 오늘의 세계와도 연결된다. 현재 약 800만 명에 달하는 재외동포들이 세계 곳곳에서 살아간다. 중국·일본·중앙아시아와 미주를 비롯해 그들이 정착한 지역도, 떠난 이유와 시기도 서로 다르다. 고대의 강제 이주와 현대의 이민을 같은 현상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낯선 사회에 적응하면서 고향과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고, 서로 다른 문화를 연결한다는 점은 함께 생각할 가치가 있다. 재외동포는 한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수단이 아니라 거주국의 구성원이자 독자적 삶의 주체이다.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연구하는 일은 상실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국경을 넘어 이동한 한민족들이 어떻게 새 공동체를 만들었는지 이해하고, 오늘의 공존과 협력, 미래의 유라시아 연결 가능성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
2026-10-12 13:43:57
[사설] 정년 연장 논의, 세대 간 충돌 피하려면 '일본식 재고용' 참고해야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11일 일본의 고령자 고용 정책 분석 보고서를 통해, 일률적인 법정 정년 연장보다는 '퇴직 후 재고용' 중심의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제언(提言)했다.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고령자 고용 확대는 피할 수 없는 과제지만, 임금체계 개편이나 노동유연성 확보 없이 법정 정년만 무작정 늘릴 경우 기업의 인건비 부담과 청년 일자리 위축이라는 거센 부작용을 피하기 어렵다. 사회적 파장을 최소화하면서 고령자 고용 제도를 안착시킨 일본의 지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일본은 2000년대 초반 고령자 고용 확대를 추진하면서 법정 정년을 60세로 고정한 채 '재고용·정년 연장·정년 폐지' 중 하나를 기업이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대다수 기업은 재고용 제도를 택했고, 노사는 경영 환경을 감안해 선별 기준을 도입하는 등 타협안을 모색(摸索)했다. 근로자는 임금 삭감을 일부 수용하고, 기업은 65세까지의 단계적 고용을 보장하며, 정부는 임금 감소분을 일부 보전하는 등 노사정이 고통을 분담했다. 2000년 노력 의무화로 시작해 2025년 희망자 전원 재고용 적용에 이르렀다. 반면 우리의 노동 시장은 여전히 경직된 고용 구조가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법정 정년을 65세로 일률 연장한다면, 기업의 신규 채용 여력은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 사회는 청년층 구직 장기화와 '쉬었음' 인구 급증이라는 심각한 청년 취업난을 겪고 있다. 노동 시장의 체질 개선 없는 무리한 정년 연장은 고령층과 청년층 간의 '일자리 제로섬 게임'을 부추기고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한층 심화시킬 위험이 크다. 고령 인력을 유연하게 활용하면서도 청년 일자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일본처럼 재고용 중심의 유연한 고용 체계 구축이 시급하다. 노동계 역시 일률적인 정년 연장만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고용 유지와 직무·임금체계 유연화를 주고받는 현실적인 타협에 나서야 한다. 노사정이 자율성과 유연성을 바탕으로 상생(相生)의 지혜를 모을 때다.
2026-10-12 05:00:00
댓글 많은 뉴스
청도반시축제·세계코미디아트페스티벌 16일 개막
민주당 전대 흔든 '신천지 개입설'…집단 입당 정황 드러났다
李대통령 "국익지키는 외교 해야…굴종·사대적 태도 지양"
광주 軍공항 이전 '특혜 속도전'…TK는 '대놓고 차별'
이진숙, 방미통위 국감서 제척…국힘 불참 속 범여권 12표로 의결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