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륙도를 돌아오는 유람선을 탄 적이 있다. 배가 출발하기 무섭게 사방에서 갈매기들이 몰려들었다. 어떻게 보면 갈매기들의 옹위를 받는 모양새였다. 갈매기들은 속도를 내기 시작한 배를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갈매기와 배의 각별한 인연을 예시하는 풍경이면 좋겠지만 주지하다시피 갈매기들이 노리는 건 새우깡이다. 난간에 바짝 붙은 승객들이 새우깡을 쥐고 흔들면 순식간에 낚아채 갔다. 새우깡을 공중으로 던지는 이들도 있었는데 갈매기들은 그때마다 묘기를 부리듯 재바른 동작으로 받아 삼켰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더러 바다에 떨어진 새우깡은 눈치 빠른 갈매기의 몫이었다. 내게는 그 모든 게 갈매기의 본성을 지우는 놀이로 비쳤다. 꽤 오래 지악스럽게 맴돌던 갈매기들은 과자가 바닥난 것을 알았는지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때 떠오른 것이 리처드 바커의 '갈매기의 꿈'이었다. 책 속의 주인공 조나단은 단순히 먹이를 목적으로 하는 이동 혹은 관성에 젖은 일상의 비행을 뛰어넘고자 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참된 자유와 정체성을 찾는 것이었다. 초절정의 비행술을 연마하는 과정에서 동료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심지어 아버지에게서조차 외면받지만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목숨을 건 비행을 통해 조나단이 알게된 건 무엇이었을까. 정신은 시류를 좇고 육체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자신만의 가치를 구현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견인하는 건 타력(他力)이 아니라 자력(自力)이라는 것. 그런 게 아니었을까. TV 드라마에서 인기를 끈 액세서리가 불티나게 팔리고, 아이돌 스타가 먹은 음료가 품절이 되고, 잘된다고 입소문이 난 음식점을 모방한 음식점이 우후죽순 생기는 걸 볼 때면 버릇처럼 갈매기족을 떠올린다. 일상이라고 다를까. 출퇴근 시간에 버스 정류장이나 전철역에 가면 수많은 갈매기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의 복장은 엇비슷하다. 손에 들고 있는 것도 고만고만하다. 모든 게 규격화 자동화되면서 출근 시간도 근무 시간도 심지어 여가시간도 비슷한 색을 띤다. 귀가해 TV를 켜면 기다렸다는 듯 수많은 갈매기들이 잘 짜여진 각본에 맞춰 날갯짓한다. 시청하는 갈매기들은 화면 속 갈매기들이 날아가는 방향과 그들이 거기에서 본 것, 먹은 것들을 메모해 둔다. 문학판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도서관에 나가 새로 나온 시집들을 살펴보곤 하는데 형식과 내용이 비슷하다 싶을 때가 있다. 갈매기들이 한 방향으로 일사불란하게 날아간다는 느낌. 문학강좌에서 수강생들의 시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거칠더라도 개성이 뚜렷한 시를 읽고 싶다. 유사한 시들을 읽을 때면 귓가에서 바삭, 새우깡 깨무는 소리가 들린다.
2026-06-17 14:22:44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351>전문성을 갖추면 하찮은 주제, 험한 일은 없다
'어미닭과 병아리'는 화재(和齋) 변상벽의 영모화다. 다산 정약용은 66세 때인 1827년 어느 가을날 변상벽의 닭그림을 감상하고 '제변상벽모계령자도(題卞尙璧母鷄領子圖)'를 지었다. 이 작품과 비슷했을 듯하다. 첫 구에 "변이변묘칭(卞以卞貓稱)", 변상벽이 '변묘'로 불린다고 했다. 변상벽의 또 다른 별명이 '변계(卞鷄)'다. 고양이, 닭을 잘 그려 20세 무렵부터 매일 백 명이나 집으로 찾아왔고 종실과 귀인들도 그의 그림을 구했다. 변고양이, 변닭이라고 할 정도로 영모화에 집중한 것은 전략적 선택이었다. 그도 당연히 산수화를 잘 그리고 싶었으나 "지금의 화가를 압도해 그 위로 올라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사물을 골라 연습했다"고 했다. '지금의 화가'는 겸재 정선일 듯하다. 정선은 84세(1759년)까지 장수하며 나이 들어 더욱 필치가 오묘해 "만익공묘(晩益工妙)"라고 했다. 1759년이면 변상벽이 30세 무렵이므로 한창 그림 공부를 할 때 정선은 '넘사벽'이었을 듯. 그래서 변상벽은 "정일물이성명(精一物以成名)", 한 가지에 몰입해 명성을 얻기로 결심하고 고양이, 닭에 집중했다. '어미닭과 병아리'는 벌 한 마리를 부리에 문 어미가 새끼에게 먹이는 장면이다. 암탉은 듬직한 몸집의 굴곡을 따라 깃털을 하나하나 공들여 그려 윤기가 흐르고, 병아리의 보송보송한 솜털도 만져질 듯 촉각적이다. 옹기종기 어미를 둘러싼 새끼들은 제각각 분주하다. 먹이를 받아먹으려는 아이, 뒤늦게 달려오는 아이, 어미의 다리 사이로 급히 나오는 아이, 졸고 있는 아이, 먹이 하나를 같이 물고 다투는 두 아이, 깨진 사발 위에서 물 한 모금 하늘 한번 중인 두 아이. 정약용의 제화시는 강진에 유배 중이던 22년 전(1805년) 둘째 아들 학유가 닭을 기른다는 소식을 듣고 보낸 편지를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양계를 하되 격조 있게 하고 깨끗하게 하면서 다른 집 닭 보다 더 살찌고 알을 잘 낳을 수 있도록 기를 것이며, 생계를 도모하는데 그치지 말고 닭의 모습을 관찰해 시를 짓고, 여러 책에서 닭 기르는 법에 관한 이론을 뽑아내 '계경(鷄經)' 같은 책을 만들어 보라고 한다. 품위를 잃지 않고 전문성을 갖추면 하찮은 주제, 험한 일은 없다. 대구의 미술사 연구자
2026-06-17 14:15:07
뒷고기와 내장육을 연결하는 고기가 있다. 바로 '막곱창'이다. 막곱창을 중심으로 상당한 파생육이 연결된다. 소의 위에서 나오는 양·벌집·천엽, 소의 동맥으로 불리는 '오드레기'와 소의 속껍질층인 '소구레' 등이 별미군을 형성한다. 대구와 부산이 주도적으로 전국화시킨 막곱창은 일본으로 넘어가 '호루몬야키'를 파생시킨다. 물론 막곱창이 순대 재료가 되기도 하지만 대구 주당급 토박이들은 이구동성으로 구이에 엄지척. 부산 자갈치시장 곰장어골목 옆에 '양곱창골목'이 있다. 언뜻 대구 안지랑시장 양념곱창골목과 오버랩되는데 막창과 곱창, 거기에 소양 부산물을 코스식으로 먹을 수 있게 했다. 여러 주인이 한꺼번에 스탠드바식으로 운영하는 '백화양곱창'이 아직 관광객한테는 가장 핫하다. 하지만 골목 내 모든 업소가 저마다 찐 단골을 확보해놓았다. 현재로선 안지랑골목과 함께 한국 막곱창구이의 양대 산맥이랄 수 있다. 대구 양곱창은 봉희가든·부산양곱창·소백산양대창, 후발주자인 양곱화 등이 유명하다. ◆안지랑곱창골목남구 대명동 안지랑네거리. '안지랑시장 안지랑양념곱창골목'. 이 거리는 두 존으로 갈라진다. 12m 폭의 도로가 213m 뻗어있는 윗동네, 8m 폭의 도로가 270m 뻗은 아랫동네로 나눠진다. 안지랑오거리에서 남쪽 룸비니유치원 근처까지 60여 업소가 밀집해 있다. 여기는 '양념곱창 특구'라 할 수 있다. 별명은 '한 바가지 곱창골목'. 대구도시철도 1호선 안지랑역 3번 출구 앞에 있는 안지랑시장. 1970년대 앞산 안지랑 계곡을 복개하면서 생긴다. 원조는 1979년 '충북집'으로 출발한 충북막창. 김순옥 할매는 1966년 대구로 시집을 왔다. 원래 곱창보다 아나고 대가리 구이집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재료 구하기가 어려워 포기했다. 복어 불고기처럼 곱창에 마늘·고춧가루 등 갖은 양념을 넣어 연탄불에 구워냈는데 이게 어필된 것. 초창기에는 연탄불을 사용했는데 민원, 위생문제 등 때문에 지금은 가스로 대체됐다. 2010년을 넘어서면서 젊은세대를 겨냥한 알록달록한 '치즈곱창시대'가 열린다. ◆막곱창 1세대 대구 내장구이 역사는 도축장 중심으로 확산된다. 1969년 4월 18일, 현재 성당못 옆 두류수영장 자리에서 도축 전문법인 '신흥산업'이 오픈한다. 1970년 시립도축장으로 발돋움하면서 막곱창 구이 시대가 열린다. 도축장은 1981년 중리동 현재 퀸스로드 자리에 있다가 2004년 북구 검단동 유통단지 내로 이전한다. 대구막창 1번지는 남구 대명동 영남이공대 정문 맞은편에 있는 황금막창. 김연순 할매는 1970년대 초 옛 미도극장 근처에서 남산초등학교로 넘어가는 일명 '합승도로'변에서 막창요리를 선보인다. 처음엔 곱창전골 비슷한 '막창국'을 끓여냈다. 주당의 반응은 별로였다. 술안주로 1% 부족. 다른 요리법을 찾는다. 끓인 게 맛이 없다면 그럼 구워보자. 곧바로 연탄불 위에 석쇠를 얹고 막창을 올려놓았다. 대박이 나자 향촌동 뭉티기와 함께 1순위 안주로 단번에 등극한다. 이후 도축장 주변을 막창거리로 탈바꿈시킨다. 1980년대 초 영남이공대 근처로 이전한다. 대구 막곱창계에 지존급 두 할매가 있다. 막창은 황금막창의 김씨 할매, 곱창은 충북식당의 김순옥 할매가 리더. 이후 원조 황금막창은 물러나고 숱한 동명 막창 가게를 파생시킨다. 그 기운은 달서구 두류동 7호광장 근처의 '서울막창', 뒤를 이어 1986년쯤 상동성당 근처에서 '상동소막창'이 들어선다. 1987년 범어시장 내에서 생겨난 '동봉막창'. 삶지 않은 소막창 시대를 연다. 지금은 범어점과 팔공산점이 있다. 막창 대중화의 선두주자는 달구지막창과 연동된 〈주〉달구지 푸드. 1993년 달서구 백조아파트 근처 '대동막창'을 모태로 2002년 전국 150개 가맹점을 확보하는 등 비약적 발전을 했다. 훈제 막창은 물론 진공포장용 막창도 유통했다. 동구 반야월에서 태어난 '대구반야월막창'은 지역 막창 체인 중 가장 파워풀하게 성장했다. 반야월은 먹기 좋은 '초벌막창시대'를 열었다. 그 뒤를 소시지 등을 곁들인 '우야지막창'이 맹렬한 기세로 추격했다. 황금네거리 근처에서 태어난 '부자막창'은 수정불판 시대를 연다. 이밖에 대구호텔 근처 '삼일막창', 황금네거리 근처 '제일막창', 두산동 '아리조나막창', 성서 '부원막창', 청구네거리 '대구막창', 북구 산격동 '딱조아막창', 두산동 '마루' 등이 자기 세를 유지하고 있다. KBS2 '인간극장'에 소개된 세쌍둥이(선영·경은·정원) 자매가 차린 '장미와 곱창'도 화제. 크리스탈호텔 바로 옆 '신흥막창'도 90년대까지만 해도 핫플이었다. 직접 중리동 도축장에 가서 막창을 가져왔다. 문을 연 건 1987년. 당시 내장 판매권을 상이군경회와 일반인들이 반씩 나눠가졌다. 신흥이 생기자 뒤이어 포장마차를 하던 똘이가 가세하고 삼미, 진해, 대원 등 6개 업소가 생겨났다. ◆새로운 문파들안지랑곱창과 쌍벽을 이루는 곱창골목은 서구 '중리동 곱창골목'. 중리동은 평리동과 상리동(일명 가르뱅이) 중간에 있어 생긴 지명이다. 1981년 중리동 도축장이 생기자 인근 중리못을 중심으로 33개의 포장마차가 일시에 곱창촌으로 변한다. 반고개, 구번식당, 정원, 뽀식이, 천상 등이 초창기를 주름잡는다. 무허가 시설이라서 구청 단속자들과 숱한 갈등을 빚었다. 결국 중리못을 매립해 식당가를 신축한다. 1984년 1월 30여개 업소가 '합법적으로' 영업을 개시. 지난 대구국제마라톤대회 거리응원전 때 '곱동이'란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후 수성못권, 서부정류장권, 경대북문권에 이어 2010년을 넘어서면 대구시 전역이 막곱창권으로 확산된다. 부산 돼지국밥 전수조사가 힘들 듯 대구 막곱창 가게도 그 육곽을 다 파악하기 힘들다. 현재 막곱창 마니아 사이에서 가장 핫한 반응을 보이는 건 크게 걸리버막창, 찬앤찬, 구공탄, 효목골, 막창도둑, 올해는 '연잎숙성막창시대'를 연 '연막창'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곱창전골 이야기곱창전골로 유명한 두 식당이 있다. '버들식당'과 '선산곱창'. 달서구 성당1동 이월드 남쪽 끄트머리 바로 옆 골목 안에 있는 지역 곱창전골의 리더인 '버들식당'. 선산 출신인 박옥자가 1967년 현재 자리에서 영업을 시작한다. 당시 성당못은 둘레가 수성못 반 정도 되었다. 그래도 둘레가 1㎞ 남짓. 못주변에 20여 그루의 버드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식당업은 상호도 불분명하고 영업신고 개념도 없었다. 앞산 안지랑 닭도리탕촌처럼 다들 무허가였다. 제대로 된 건물도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 버들집은 영업한 지 얼마 안 돼 신축된다. 식당에서 살림까지 할 요량으로 규모있게 지었다. 못 주변에는 봄날 알르레기의 주범으로 악명이 높았던 버드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 나무를 보고 '버들집'이라 영업신고한다. 지금 주차장에 있던 버드나무는 꽃가루 때문에 베어져 버렸다. 예전에는 불고기용 놋쇠 불판을 사용했는데 이젠 돌판을 쓴다. 15년 전부터는 젊은 커플이 많이 찾는다. 무조건 곱창만 고집할 수가 없었다. 달라진 세상의 흐름을 메뉴에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돌판도 2인, 3인, 4인, 5인, 7인분용 짜리를 구비해 놓았다. 20년 전부터 메뉴 구성에 변화를 줬다. '환상의 맛전골' 시리즈를 냈다. 곱창·대창·불고기를 통영의 우짜(우동과 짜장면의 합작품)처럼 하나로 합쳤다. 2대 사장이 된 유희옥이 그렇게 결정했다. 단골들이 수시로 '각기 떨어져 있는 별도 음식을 한꺼번에 먹고 싶다'며 섞어 달라 했다. 지역에서 처음으로 '삼합전골'을 개발하게 된 것. 밥을 다 먹고나면 꼭 남은 국물에 밥을 볶아먹게 한다. 이 '곱창볶음밥'이 이 집의 별미로 정착했다. 예전 성당못 도축장으로 가던 동서방향 도로는 두류공원로에 의해 두 동강으로 끊겨 버렸다. 전성기 때는 버들, 송강, 해성, 아담 등 20여 업소가 밀집해 있었다. 가업은 이제 3대 사장인 손자 채병두한테로 이어졌다. 선상곱창에도 오밀조밀한 탄생비화가 묻어 있다. 1967년쯤, 선산읍 동부리 축협 앞에 훗날 '곱창할매'로 불리는 강선희가 나타난다. 처음에는 '대한식당'. 그런데 단골 때문에 '대한곱창'으로 상호가 바뀐다. 90년대 후반 새로운 라이벌이 나타난다. 김태주 선산곱창이다. 이후 이동근, 이인영, 신상철, 정하용, 최영덕 등 숱한 전골 전사가 자기 이름 옆에 선산곱창을 붙였다. 2005~2010년 라이벌의 곱창춘추전국시대가 열린다. 곱창할매는 71세로 고단한 삶을 마감한다. 아들(이성구)은 간판에 모친의 얼굴을 붙였다. 세 딸도 모두 가업을 잇는다. 대구에 수성점을 내면서 가맹사업을 시작한다. 선산곱창에는 묵은지가 첨부되는 게 특징이다. ※막창이란 막창은 많은 오해를 부른다. 소의 위(胃)와 장(腸) 명칭을 혼동한 탓. 소의 위는 모두 4개가 연결돼 있다. 1번 위가 가장 큰데 일명 곰양·혹위 등으로 불린다. 용적은 90여ℓ. 코끼리 정수리 부위처럼 생긴 부분은 '양깃머리'(일명 특양)로 불린다. '양곱창' '소양'이란 명칭도 사실 1번 위 때문에 생긴다. 2번 위는 벌집 모양의 벌집·거물위. 일명 '절창'으로도 불린다. 3번 위는 '천엽(千葉)'으로 지역 뭉티기 전문점 인기 반찬. 마지막 위는 붉은빛이 감돌아 홍창 혹은 막창으로 불린다. '창'자가 오해를 초래했다. 막창과 대창이 헷갈린다. 막창은 창자가 아니고 소의 마지막 위. 대창은 소장(일명 곱창) 다음으로 연결되는 대장.
2026-06-17 13:54:43
2026 FIFA 북중미 월드컵이 전 세계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대한민국은 조별 예선 1차전에서 체코에 승리함으로써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재현을 기대하게 되었다. 스포츠는 강대국 여부를 떠나 공평한 룰(rule)에 입각해서 신사답게 승부를 겨룰 것을 요구받는다. 그래서 힘을 뽐내고 싶은 각국은 금지된 힘의 사용 대신 스포츠 경기에서 각축(角逐)을 벌임으로써 대리 만족을 느끼곤 한다. '소리 없는 전쟁'인 셈이다. 1954년 대한민국의 축구팀은 스위스 월드컵 본선에 처음으로 참가했다. 당시 대표 팀은 제대로 된 축구화조차 갖추지 못했고, 항공권을 구할 돈이 없어 무려 60시간이나 걸려 스위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록 조별 예선에서 2연패를 했지만, 끝까지 분투했던 당시 대표 팀의 기개(氣槪)가 오늘과 같은 대한민국 축구팀을 만든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국민의 열정적 응원과 함께 훌륭한 선수 양성, 훈련과 전술 프로그램의 과학적 운용, 재정적 뒷받침 등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축구는 큰 도약을 거듭하고 있다. 그렇지만 월드컵에서의 승리가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월드컵에서는 유독 탈진하는 선수가 많다고 한다. 승리에는 공짜가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한국전쟁의 총성이 멎은 지도 73년이 되었다. 한국전쟁 동안 전 국토는 폐허화되었고, 500만~600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러한 희생에는 동양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외국 군인도 많았다. 예컨대 한국전쟁에 자신의 아들을 참전시킨 미군 장성은 142명이었고, 그중 35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한다. 워커(Walker), 클라크(Clark) 사령관, 아이젠하워(Eisenhower) 대통령 등 익숙한 이름의 아들이 모두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제임스 벤 플리트(James Van Fleet) 미8군 사령관의 외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폭격기 조종사로 단독 출격에 나섰다가 실종됐다. 구조를 위한 수색대가 꾸려졌고, 이틀째 되던 날 벤 플리트 사령관은 수색 중단을 명령했다. 내 아들을 찾고자 다른 부모의 아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없다는 논리였다. 숭고(崇高)하지만 가슴 아픈 결정이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에 전투원을 파병한 16개국의 인적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자유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 자유는 공짜가 아니라, 자유를 위해 흘린 피와 애잔한 사연의 대가였던 것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이란-미국 전쟁 등을 통해 전쟁이란 '지옥과 같은 삶'임을 생생하게 기억하게 되었다. 76년 전의 한국전쟁의 참상이 그러했던 것처럼……. 73년 동안 대한민국은 평화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우려스럽게도 한 면에서 평화를 너무나 당연시 여기는 경향도 보인다. 그러나 평화는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는 유리병과 같은 존재임을 명심해야 한다. 멀리서 들려오는 빈번한 총성이 한반도에서 다시 울릴 수도 있다. 따라서 전쟁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던 스스로의 이중적 의식을 본질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더 이상 전쟁에 대해 침묵하지 않아야 한다. 인간성을 파괴하고 나아가 인류를 공멸케 하는 전쟁, "전쟁은 더 이상 안 된다"라고 크게 외칠 수 있는 행동이 필요한 때이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탈진할 만큼 사전에 대비해야 한다. 그래야만 평화를 지킬 수 있다. 왜냐하면 평화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026-06-17 05:00:00
[사설] 특검·재선거 요구와 거부 중 어느 쪽이 음모론을 키우나
국민의힘이 6·3 지방선거에서 투표용지 부족과 개표 오류가 발생한 6개 지역(서울·인천·경기·부산·전남광주·울산)의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기초의원, 광역·기초비례 선거를 대상으로 선거 소청(選擧訴請)을 내기로 했다. 이에 대해 한병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음모론을 무한 반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 원내대표를 비롯해 친민주당 성향의 논객들과 유튜버들, 장동혁 지도부를 무너뜨리려는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과 일부 정치인들이 올림픽공원에 모인 시민들과 국민의힘 지도부의 재선거 요구를 '부정선거 음모론' '주술'로 몰아가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투표용지 부족에 대해 "부실 선거이지 부정선거는 아니다"고 하고, 인천 송도 1·2동 및 광주·전남 사전투표에서 나타난 쌍둥이 득표에 대해서도 "통계학적으로 나올 수 있는 우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재명 대통령도 "(투표지 부족과 관련한) 참정권 침해에 대한 문제 제기를 수용한다"면서도 이번 사태를 '부정선거'와 연결 짓는 움직임이 있다며 "반사회적 행태"라고 비판했다. 부실일 뿐 부정은 아니라는 사람들은 수사해 보지 않고도 척 보면 아는가? 궁예의 관심법(觀心法)도 울고 가겠다. 개인 간 발생한 사소한 사건도 수사 없이 '고의는 아니고 실수였다'고 판명하지 않는다. 걸핏하면 '부정선거'라는 주장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짓이지만, 실체적 의혹에도 '부정선거는 아니다'는 것도 민주주의를 위협하기는 마찬가지다. 권위 있는 통계학자의 주장대로 쌍둥이 득표는 우연히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 우연(전국 12곳)을 수긍(首肯)할 수 없다면 검증하는 것이 선거 투명성과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다. 발생한 의혹을 특검을 통해 검증하자는 쪽이 부정선거 음모론을 키우는 쪽인가, 발생한 의혹을 단순 실수이자 우연이라며 특검과 재선거에 반대하는 쪽이 음모론을 키우는 쪽인가. 야당 주도 특검으로 간단히 검증할 수 있음에도 거부하는 쪽이 '음모론'을 키운다고 본다.
2026-06-17 05:00:00
[사설] 중동전쟁 종결, 우리 경제 호전 여부는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달려
106일 동안 세계 경제를 짓눌렀던 중동전쟁이 종전(終戰) 국면에 접어들었다. 국제유가는 배럴당 80달러 초반대로 내려왔고, 뉴욕증시와 코스피는 일제히 상승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우려는 에너지 수급뿐 아니라 물가와 환율, 물류망 전반을 위협했다. 유가(油價) 안정은 기업의 부담을 낮추고 수입물가 상승 압력을 완화한다. 가계와 기업 모두 한숨 돌릴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하지만 종전의 가장 큰 경제적 의미는 유가 하락 자체보다 인플레이션 압력 감소에 있다. 전쟁이 장기화됐다면 중앙은행들은 에너지 가격 상승에 대응해 금리 인상을 통한 긴축(緊縮) 기조를 택했을 것이고, 기업의 투자 위축으로 이어질 공산이 컸다. 그럼에도 여전히 변수는 금리와 관세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이번 주 케빈 워시 의장 체제의 첫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연다. 시장은 기준금리 동결을 기정사실로 보지만, 더 큰 관심은 향후 통화정책 방향에 쏠려 있다. 견조(堅調)한 고용시장과 높은 물가를 감안할 때 금리 인상은 불가피해 보인다. 일본은행은 16일 기준금리를 1.0%로 인상했다. 31년 만의 최고 수준이다. 지난해 마이너스 금리 시대를 끝낸 데 이어 본격적인 통화정책 정상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세계 금융시장을 움직인 일본의 초저금리 자금이 본국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은 더 커졌다. 무역법 301조를 앞세운 미국의 통상정책도 변수다. 관세 장벽은 더 공고해질 태세다. 하반기 한국 경제는 중동 정세보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투자 지속 여부, 주요국 통화정책, 글로벌 자금 흐름에 더 크게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미국의 통상(通商) 압력과 글로벌 자금 이동에 대응할 금융·통상·통화 전략을 서둘러 정비해야 한다. 시장은 종전 소식에 환호하지만 경제는 결코 안도감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종전이 한국 경제에 준 가장 큰 선물은 유가 하락이 아니라 준비할 시간이다. 시간을 허비한다면 다음 충격은 호르무즈 해협이 아니라 워싱턴과 도쿄에서 닥쳐올 수 있다.
2026-06-17 05:00:00
[사설] 대구시 산하 기관 인사·조직 개편 최우선 원칙은 '시민의 편익'
민선 9기 출범을 맞아 대구시 산하 공기업과 출자·출연기관의 인사와 조직 개편이 예고되고 있다. 공석(空席)인 기관장이 적지 않고, 민선 8기 때 추진된 공공기관 통폐합에 대한 재평가도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추경호 대구시장 당선인의 시정(市政) 철학에 따라 인사를 하고, 조직을 정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인사와 조직 개편은 시민의 편익과 행정 효율성에 방점을 둬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홍준표 시장 재임 시절 대구시는 공공기관 효율화와 예산 절감을 목표로 대규모 통폐합을 했다. 대구교통공사, 대구공공시설관리공단, 대구문화예술진흥원, 대구행복진흥사회서비스원 등이 결과물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통폐합의 부작용이 불거졌다. 비대(肥大)해진 조직은 의사결정이 느려졌고, 내부 갈등도 벌어졌다. 성격이 다른 기관들이 한데 묶이면서 전문성(專門性)이 약화됐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문화예술, 관광, 복지, 청소년 등 분야별 특수성이 정책에 반영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시행착오(試行錯誤)를 겪은 만큼 통폐합에 대한 냉철한 평가와 대안 모색이 이뤄져야 한다. 통합이 효율적이라면 유지하면 되고, 분리가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다면 과감하게 재조정하면 된다. 그 판단 기준은 '시민에게 더 나은 서비스 제공'에 둬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조직 개편 논의가 특정 인물이나 특정 세력의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기관장 인사의 핵심은 '전문성'이다. 선거에서 공(功)을 세웠다는 이유만으로 비(非)전문가를 앉히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문화예술 기관장은 문화 행정과 현장을 잘 아는 사람에게, 복지 분야는 사회서비스 분야의 경험과 전문성을 갖춘 인물에게 맡겨야 한다. 공기업과 출자·출연기관은 정치적 보은(報恩)의 자리가 아니라, 시민의 삶과 직결된 공공서비스를 책임지는 조직이다. 기관장의 역량은 시민의 편익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낙하산 인사' '논공행상'(論功行賞)이란 말이 나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2026-06-17 05:00:00
[관풍루] 국민의힘 정점식 원내대표 취임하자마자 '투톱' 갈등. 지선 두고 장동혁은 "전면 재선거가 목표", 정점식은 "뒤통수친 것"
○…국민의힘 정점식 원내대표 취임하자마자 '투톱' 갈등. 지선 두고 장동혁은 "전면 재선거가 목표", 정점식은 "뒤통수친 것". 민주당 덕에 국힘 지지도 좀 올라가나 했더니 반납하게 될 판. ○…투표용지 부족 사태 관련, '인쇄·검수·보관 어려워 용지 인쇄 축소 필요하다'는 결론의 연구용역 보고서 존재 확인. 이게 사실이라면 '선거관리'가 주 업무인 선관위의 존재 이유는? ○…한국·일본·호주·카타르·사우디·이란 등 아시아축구연맹 소속 국가들, 유럽 팀 상대 2승2무 포함 이번 월드컵서 2승4무로 무패 행진. '축구 변방 아시아'의 돌풍, 결승까지 가자!
2026-06-17 05:00:00
2026-06-16 18:46:52
올해 10월 공소청 출범을 앞두고 형사소송법 개정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보완수사권 논의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형사소송법에 검사의 보완수사권을 남겨 두면 검찰개혁은 실패한 것이라는 주장에 공감하는 분들도 많지만, 다른 한편 형사소송법에서 검사의 수사권을 완전히 배제할 경우 발생할 부작용을 우려하는 분들도 많다. 보완수사권 논의를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바라봐야 할까. '보완수사권'과 '수사보완권'은 같은 뜻일까. 새롭게 시행될 공소청법 제4조에서는 검사를 '공익의 대표자'로 규정하면서 8가지 직무를 부여하고 있는데, 공소청 검사로서 가장 중요한 직무는 '공소제기 여부 결정 및 유지'와 '법원에 대한 법령의 정당한 적용 청구'일 것이다. 그런데 검사가 1차 수사기관의 결과만으로 공소제기 여부나 정확한 죄명을 판단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보완수사권 논의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1차 수사기관의 수사 결과에 의문이 있다면, 의문을 가진 검사가 직접 사건 관계자의 진술을 듣거나 추가 증거를 수집하는 게 가장 효율적일 것이다. 특히 시간적 제약이 있는 구속사건이나 공소시효가 임박한 사건이라면 한가하게 1차 수사기관에 보완수사를 요구하고 그 결과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 더욱이 기소에 충분하다고 판단한 1차 수사기관으로서는 보완수사 요구를 받아도 기존의 확증 편향으로 형식적 보완수사를 실시할 가능성이 있고, 이는 결국 재보완수사 요구 등 '사건 핑퐁'으로 연결될 우려가 크다. 그렇다면 답은 명확해진다. 100% 완벽할 수 없는 1차 수사기관의 과오나 수사 미진을 시정해야 한다면, 수사 미진 상태라도 사건을 송치받은 검사로서 공소제기 여부를 결정하고 법원에 대해 정당한 법령의 적용을 청구해야 한다면, 그 검사가 직접 '수사보완'을 할 수 있도록 책임과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검사에게 보완수사권을 남겨 두면 직접수사개시권이 남용될 경우의 폐해가 고스란히 재연될 것이라는 우려는 무분별한 별건 수사를 원천 차단할 수 있도록 보완수사가 가능한 범위를 법제화하거나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사건심의위원회 설치 등 내외부적 통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검사의 보완수사권은 고등검찰청 단계에서 불기소 처분에 불복한 항고인이나 범죄 피해자의 권리구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고소인 또는 고발인은 검사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항고하여 그 처분의 적법성을 다툴 수 있고, 향후 시행될 공소청법에서도 항고 제도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만약 검찰의 보완수사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고등검찰청에서 항고가 이유 있다고 인정하여 직접 경정(更正)을 하려면 기존의 불기소 처분을 번복할 만한 추가 수사가 필요한데 검찰의 보완수사권이 없다면 고등검찰청 검사는 수사 미진에도 불구하고 처분만을 바꾸거나 아니면 추가 수사를 위해 사건을 1차 수사기관에 이송해야 하므로 결국 공소청법상 규정된 '직접 경정'이 아닌 '보완수사요구'만 하게 되는 이상한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보완수사권이 없다면 공소청법상 항고 제도는 유지될 수 없다. '보완수사권'은 '권한'의 문제가 아니라 수사기관의 '책임' 문제다. 범죄를 당한 피해자가 고통 속에서 하세월을 보내게 하지 않도록, 자신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항고 제도가 유명무실화되지 않도록 검사는 최선을 다해 '수사보완'을 해야 할 책임이 있고, 그것이 법치국가의 책무라 할 것이다.
2026-06-16 15:04:22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대구지역회의(부의장 신철범) 여성위원회(위원장 김혜경)는 13일 '여성자문위원과 북한이탈주민이 함께하는 멘토-멘티 캠프'를 개최했다. 60여 명의 자문위원과 북한이탈주민이 참여한 이번 행사는 멘토-멘티가 캠프를 통해 상호 소통 및 유대 관계를 강화하고, 멘토-멘티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 진행됐다. 김혜경 여성위원장은 "오늘 이 캠프가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며 "여성위원회는 늘 곁에서 응원하고 함께 하겠다"고 했다. 신철범 대구부의장은 "문화체험을 통한 이번 캠프가 멘토와 멘티가 함께 성장하며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는 뜻깊은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격려했다.
2026-06-16 13:24:40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밤길을 걷곤 했다. 개울가를 지나 달빛 내린 소로를 걷다 보면 아버지는 가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야백은 수다." 밤에 보이는 흰색은 물이니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캄캄한 들판과 산자락은 하나의 어둠으로 잠겨 있었지만, 달빛을 받은 물길만은 유난히 희게 떠올랐다. 지금도 밤길을 걷다 보면 가끔 그 말씀이 떠오른다. 사진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빛에 마음이 갔다. 좋은 빛을 만나면 셔터 누르기 바빴다. 그땐 세상이 달리 보였다. 사람들은 대개 밝은 곳에 시선을 둔다. 빛은 사물을 드러내고 흰색은 형태를 선명하게 만든다. 백(白)은 비움과 여백의 미학으로 이야기된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게 하는 감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흑(黑)은 무엇일까. 흔히 검은색은 어둠과 부재의 색으로 여겨진다. 빛이 닿지 못한 자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사진을 하며 만난 흑은 조금 달랐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태어난 그 색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 아니다.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고,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림자를 오래 바라보곤 했다. 길 위에 드리운 그림자, 벽에 비친 그림자, 창가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 시선은 밝은 곳보다 어두운 곳에 더 오래 머물렀다. 내가 사진을 하며 만난 검은색은 비어 있지 않았다. 어두운 부분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이 머문다. 기억이 스며 있고,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밝은 면이 사물의 형태를 드러낸다면, 어두운 곳은 사물의 깊이와 밀도를 품는다. 그림자 역시 그렇다. 그림자는 빛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생긴다. 그림자는 빛이 남긴 흔적이며 존재의 또 다른 얼굴이다. 진광불휘(眞光不輝), 진정한 빛은 스스로 빛나려 하지 않는다. 좋은 빛은 눈을 현혹하지 않는다. 조용히 사물을 드러낼 뿐이다. 좋은 사진도 마찬가지다. 과장하지 않고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오래 바라보게 만든다. 생각해 보면 사람도 그렇다. 누구나 밝은 면을 드러내며 살아가지만, 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쉽게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다. 지나온 시간과 상처, 기억과 침묵 같은 것들 말이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밤에는 물이 맨 먼저 눈에 띈다. 그러나 그 물을 보이게 하는 것은 달빛만이 아니다. 물을 둘러싼 깊은 어둠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그 흰빛도 드러난다. 빛은 세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림자는 그 세상을 이해하게 만든다. 검은색은 비어 있지 않다.
2026-06-16 11:26:31
[사설] 지표 착시 속 퇴보 경북 2대 경제 축, 자립형 산업 생태계 구축 절실
경북 경제를 견인하는 양대(兩大) 축인 포항과 구미의 경제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한때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경제 도시로 손꼽혔지만, 철강과 전자라는 과거의 영광에만 안주한 이들 도시의 실상은 참담(慘澹)하다. 지표의 착시를 걷어 낸 이들 두 도시는 이미 산업 생태계와 골목 상권이 붕괴되고, 청년 유출이 심화하면서 '지역 소멸' 위기를 걱정해야 할 수준이다. 구미국가산업단지는 지난해 생산액이 전성기의 99.7% 수준을 회복하고 방위산업과 반도체 분야를 중심으로 16조1천42억원의 대규모 투자를 유치했다고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2만 명(21.3%)이 넘는 근로자가 증발한 '고용 없는 성장'일 뿐이다. 구미는 과거 대기업들이 핵심 연구개발(R&D)과 기획 기능은 수도권에 둔 채 조립·생산 라인으로만 활용했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대기업이 떠나자마자 2천여 개에 달하는 50인 미만 영세 소기업들의 가동률이 반 토막 나며 하청 생태계가 사실상 붕괴됐다. 지난 3월 말 기준 구미산단의 전체 가동률 역시 64.3%로 전국 34개 국가산단 중 33위로 꼴찌 수준이다. 포항 역시 반세기 넘게 포스코에만 의지해 온 경제구조에서 벗어나 에코프로와 포스코퓨처엠을 필두로 11조원이 넘는 2차전지 투자를 끌어내는 등 분투했으나, 글로벌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 한파와 포스코의 실적 악화가 맞물리며 지역 경기가 좀처럼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법인 지방소득세가 3년 사이 62%나 급감하며 골목 경제가 얼어붙은 것이다. 더구나 포항이 본사 이전을 둘러싼 소모적인 갈등과 수소환원제철 부지 인허가 지연 등 행정 공백(空白)이 겹친 사이에 포스코의 수조원대 미래 핵심 투자가 전남 광양으로 대거 쏠리는 치명적인 결과를 맞닥뜨렸다. 양질의 일자리가 메마르자 구미의 청년 고용률은 34.5%로 주저앉았고, 포항은 지난 10년간 유출 인구의 90%가 청년층에 집중되며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산업단지의 위기가 노동자들의 지갑을 닫게 만들고, 이것이 곧바로 인근 식당과 소매점 등 골목상권의 숨통을 조이는 악순환의 고리가 됐다. 그나마 최근 구미는 방산과 반도체, 포항은 수소환원제철 분야와 신규 원전 유치 가능성이 제기되는 등 회생의 불씨가 보이는 것은 천만다행이지만, 이 역시 핵심 설계와 R&D 기능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언제든 짐을 싸서 떠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제 당국의 정책 패러다임은 '얼마를 유치했는가'에서 '지역에 무엇을 남겼는가'라는 질적 지표로 전환돼야 한다. 본사 기능과 핵심 연구 조직이 지역에 단단히 고정되는 '앵커 기업' 중심의 자립형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급선무다. 기업과 인재가 지역을 떠날 수 없게 만드는 '정착(定着)의 구조'를 만드는 데 사활을 걸어야 할 것이다.
2026-06-16 05:00:00
[사설] 6·3 선거 의문 제기·특검 요구를 왜 '음모론'으로 몰아가나
6·3 지방선거에서 투표지 부족, 쌍둥이 득표, 후보 간 득표수 바꿔 입력, 선거인 명부(名簿) 누락 등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음에도 정치권은 이를 민주주의 위기로 인식하지 않는 것 같다. 이재명 대통령은 "참으로 황당하다. 국정조사와 검경 수사로 진상을 밝혀야 한다"면서도 야당이 요구하는 특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국민의힘 내부는 당권 싸움에 집중하느라 6·3 지방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는 안중(眼中)에 없는 듯하다. 11일 우재준 최고위원이 지도부 총사퇴를 제안한 데 이어, 15일 양향자 최고위원도 지도부를 '좀비'에 비유하며 총사퇴를 제안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최고위원이 당 지도부를 흔드는 엉뚱한 짓으로 시간을 소비할 때는 아니라고 본다. 두 최고위원이 선거 결과에 책임을 느낀다면 본인들이 사퇴하면 될 일이다. 양향자 최고위원은 6·3 지방선거에 국민의힘 경기도지사 후보로 출마하면서도 당 최고위원직을 내려놓지 않아 비판받지 않았나. 김용태 국민의힘 의원은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를 겨냥해 "공당의 대표가 극우 유튜버 등이 만들어 낸 부정선거 음모론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한다"고 주장했다. 친한동훈 성향의 논객 조갑제는 "장동혁 같은 부정선거론자는 일체의 공직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투표지 부족, 쌍둥이 득표, 후보 간 득표수 바꿔 입력, 선거인 명부 누락 등을 비판하고, 특검과 재선거를 주장하는 것이 부정선거 음모론인가? 김용태 의원과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의 주장이야말로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국민의 정당한 의문을 '음모론'으로 몰아감으로써 6·3 지방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의 본질을 가리는 것 아닌가. 두 사람이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 체제에 반대한다고 해서, 6·3 지방선거 논란까지 이런 입장을 취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인천 송도 등 일부 지역의 쌍둥이 득표에 대해 통계적 의혹을 제기하자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계산이 아니라 주술"이라고 비판했다. 각각 다른 선거동에서 쌍둥이 득표는 나올 수 있는 우연인데, 그걸 장 대표가 과장했다는 것이다. 각 통계학자들 주장대로 100분의 1이든, 5억분의 1이든, 5조분의 1이든 쌍둥이 득표가 우연히 나올 수는 있다. 그러나 확률상 나올 수 있음이 곧 "투개표가 공정하고 투명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투개표 과정에 납득하기 힘든 의문이 있으면 검증해야 민주주의에 부합한다. 지금 재선거를 외치는 청년들, 6·3 지방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지적하는 논객들은 밑도 끝도 없는 괴담(怪談)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이번에 불거진 문제들을 검증하고 바로잡자는 것이다. 그것은 주권자의 정당한 권리이다.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했음에도 그저 '부주의' '우연'이라는 선관위 설명을 그대로 믿는다면 오히려 '주술'일 것이다. 걸핏하면 '부정선거'라는 주장도 반사회적이만, 실체적 의혹에 대한 문제 제기를 '부정선거 음모론'이라며 입을 막는 것도 반사회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지금은 정파적(政派的) 유불리가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 수호라는 대의(大義)에 집중해야 한다. 여야 정치인들과 언론들은 6·3 지방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의혹에 대한 특검법 국회 통과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야당 주도 특검으로 의혹을 낱낱이 해소하는 것만이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5천만원 상당의 돈을 묶었던 관봉권 띠지가 사라진 것을 놓고 90일간 특검(안권섭 특검)을 했다. 하물며 이번 의혹은 선거 문제다.
2026-06-16 05:00:00
[관풍루]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 대통령 두고 '월드 클래스 지도자로 자리매김'이라며 추켜세워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 대통령 두고 '월드 클래스 지도자로 자리매김'이라며 추켜세워. '정권은 짧다' 했다가 '이재명 보유국'에 이어 '자랑스러운 세계적 지도자'까지. 속마음 뱉었다가 주워 담으려니 바쁘다 바빠. ○…국힘 지지도 민주당에 오차범위 밖 우세 여론조사 결과 나와. 국힘, 지선 전 20%대서 40%대로 급등. 양당 모두 수준 이하인 건 맞지만 당 지지도까지 이렇게 널뛰기하는 건…. ○…미국-이란 종전 양해각서 합의. 고유가·고환율·고물가 '3중고' 감내해야 했던 국민과 경제엔 다행. 다만 또 어떤 기상천외한 트럼프발(發) 전후 청구서 날아들지가 걱정.
2026-06-16 05:00:00
2026-06-15 18:58:48
[김명옥의 동아시아 신화에서 역사로] 중원의 동이족 국가들 (1) 서국과 서언왕
◆중원의 두 동이국가 북홍산·남양저중국은 지금 홍산문화를 북방의 대표 문화로, 양저문화를 남방의 대표 문화로 높이면서 북홍산(北紅山) 남양저(南良渚)라고 부른다. 홍산문화와 양저문화는 이미 국가 수준의 사회 조직을 갖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중국은 현재 자신들을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통일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홍산과 양저문화를 현대 중국의 기원 또는 모태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홍산문화는 동이족의 한 갈래인 배달족의 문화이며, 양저문화 또한 장강 유역 동이족의 문화이다. 홍산문화를 이룩한 배달족의 후손들이 서기전 2333년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홍익인간)"는 이념으로 고조선을 건국했을 때 황하 중상류 지역은 오제(五帝) 중 네 번째인 요(堯)임금 시대였다. 요임금 또한 동이족으로 알려져 있다. 고조선이 중국 동북지역을 다스리는 동안 황하 중상류에서는 요임금과 역시 동이족인 순임금이 뒤를 이었다가 구주(九州)를 개척한 우(禹)임금에게 선양했다. 우임금은 공자가 삼대(三代)라고 크게 높였던 하·은·주(夏殷周)의 첫 머리인 하(夏)나라를 건국했다. 현재 중국은 우임금의 개척한 구주(九州)가 마치 중원 전체였던 것처럼 묘사하지만 이는 뒤로 갈수록 과거의 강역을 크게 그리는 중국 역사학의 특징을 말해주는 것이고, 실제 구주는 황하 중상류를 벗어나지 못하였다.(지도) 이 하나라는 한족(漢族) 국가일까? 아닐까? 현재 중국학자들은 한족의 기원에 대해 밝히지 못하고 있다. ◆하나라 임금을 쫓아낸 동이족 예(羿)고조선 건국 이후 황하 중상류와 중하류에 거주하던 동이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은 해당 지역들을 차지하고 하나라와 경쟁하였다. 하나라는 동이족 국가임이 분명한 은(殷)에게 멸망하는데 은(殷)이 최초의 동이족 국가는 아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서문」에는 은나라 이전의 동이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 「서문」은 동이족에 관한 체계적인 글이지만 축약과 춘추필법이 심해 행간을 잘 읽어야 한다. 이 「서문」에서는 하나라 3대 임금인 태강(太康)이 덕(德)을 잃자 "이인(夷人)들이 처음으로 배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인들이란 물론 동이족이다. 이 구절에 대해 당나라 장회태자 이현(李賢)은 태강이 놀이와 사냥에만 빠져 백성들의 '먹사니즘'을 외면했기 때문에 예(羿)가 태강을 쫓아냈다고 주석을 달았다. 태강을 쫓아낸 인물이 유궁씨(有窮氏) 후예(后羿)라는 기록들이 다수 전해지고 있다. 이 예는 『산해경』에도 등장한다. 동이족의 인문지리서이자 신화집인 『산해경』은 동이족 천자인 제준이 예에게 붉은활과 흰 깃털이 달린 화살을 주면서 하계(下界)를 돕게 했고, 예는 하계의 온갖 어려움을 없애거나 구해준다. 중국 신화학자 원가(袁珂)는 이 기록에 주석을 달아 『산해경』에 나오는 예는 하나라 태강을 쫓아낸 유궁씨(有窮氏) 후예(后羿)와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태강 때 이인들이 배반했다는 「동이열전 서문」에 대한 이현의 주석은 태강을 쫓아낸 예(유궁씨 부락의 후예)가 동이족임을 말해준다. 후예(后羿)는 이예(夷羿)라고도 불리는데, 이(夷)는 물론 동이를 뜻한다. 후(后)는 선양(禪讓)으로 즉위한 하(夏)나라 왕을 뜻하는 존호로서 후예는 유궁씨의 수령이다. 「동이열전 서문」의 이인들의 수령인 후예와 『산해경』의 예가 서로 동일인물일 가능성을 크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은나라를 건국한 동이족 탕왕「동이열전 서문」의 후예는 은나라 이전에 존재했던 동이족 정치 세력의 실체를 알려준다. 즉 동이는 하나라 임금 태강이 무도하다는 이유로 쫓아낼 만큼 하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더 힘 있는 정치 세력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후에도 하나라 걸(桀)왕이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동이족인 탕(湯)이 걸왕을 쫓아내고 은(殷)나라를 세웠다. 후예와 탕왕의 사례는 동이족이 하나라 시기 내내 중원에 강력한 정치세력으로서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주나라 시대 동이족 국가, 서국그렇다면 대표적인 동이족 국가였던 은(殷)을 주(周)가 멸망시킨 이후에도 동이족 국가들이 존속했을까? 주나라 때 대표적인 동이족 국가는 서국(徐國)이고, 그 대표적 군주가 서언왕(徐偃王)이다. 서국은 회수(淮水) 유역을 중심으로 수백 년 동안 존속한 동이족 국가이다. 서국의 중심지는 오늘날의 강소성(江蘇省)과 안휘성(安徽省) 일대로 비정된다. 『죽서기년(竹書紀年)』과 『좌전(左傳)』에는 서국과 주왕실 및 주변 제후국들의 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예기(禮記)』 「단궁하(檀弓下)」에는 서구왕(徐駒王)이 황하에 이르렀다는 기사가 보이며, 『좌전』에는 서국이 노(魯)·초(楚)·오(吳) 등과 교류한 기록이 전한다. 또한 서주 시대 청동기 명문에는 서(徐)와 관련된 정벌과 회유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서국이 단순한 부족 집단이 아니라 주나라와 경쟁할 정도의 정치세력이었음을 보여준다.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周)나라는 중원의 영토를 다 차지하지 못했다. 〈서주제후국분포도〉를 보면 회수(淮水) 유역 및 그 아래 장강 유역에는 주나라의 힘이 미치지 못했다. 그 지역은 서언왕이 다스렸던 서국(徐國)이었다. 『사기』에 따르면 서언왕은 주나라 5대 목왕(穆王)과 동시대 사람이었다. 중국의 신화학자 원가(袁珂)는 "서(徐)라는 성은 본래 영(贏)에서 나왔는데 이는 중국 고대 동이 민족의 한 갈래이다."라고 했다. 서언왕은 고구려의 주몽처럼 난생신화의 주인공이다. 원가와 장광직(張光直)은 난생신화를 동이족의 신화라고 말한다. ◆난생신화의 주인공, 서언왕장화(張華)가 엮은 『박물지(博物志)』에는 서언왕의 이야기가 나온다. 서국의 궁녀가 임신하여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물가에 버렸다. 그곳에 사는 과부에게는 곡창이라는 개가 있는데, 곡창이 물가에서 버려진 알을 물고 오자, 과부가 그 알을 따뜻하게 덮어주었더니 마침내 알에서 아이가 나왔다. 순자(荀子)는 이에 대해 어릴 때부터 마음대로 "누웠다 일어났다[偃仰:언앙]"해서 이름을 언(偃)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서국왕이 언을 궁궐로 데려와서 아들로 삼고, 장성하자 왕위를 물려줬다고 한다. 『박물지』에는 다른 이야기도 전하는데, 서언왕이 상국(上國)으로 가는 길을 내려고 주나라의 제후국인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이에 운하를 파다가 붉은활과 화살을 얻었는데,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고 여겨 스스로 왕으로 칭했다는 것이다. ◆인의로 36개국을 이끈 서언왕서언왕이 다스리던 서국의 강역은 500리였는데, 인의(仁義)를 행해서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유역의 36개국의 제후들이 육로로 와서 조공을 바쳤다고 한다. 마침내 서언왕은 구이(九夷)를 거느리고 주나라를 쳐서 서쪽으로 황하의 상류까지 이르렀다. 주 목왕(穆王)은 그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하여 동방 제후들을 분리해서 서언왕에게 다스리게 했다. 이후 목왕은 서쪽으로 순수(巡狩)했는데, 이때 서왕모(西王母)를 만나 즐거움에 빠져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목왕은 서언왕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조보(造父)에게 천리마인 적기(赤驥)와 녹이(騄耳)를 주어 초나라 왕에게 서언왕을 정벌하라고 명했다. 조보는 하루 만에 초나라에 도착하여 목왕의 명령을 전했다. ◆전쟁을 피한 서언왕이때 『박물지』와 『후한서』 「동이열전」에서는 서언왕이 인자하여 백성들이 전쟁으로 피해를 입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으로 후퇴했는데, 서언왕을 따라간 백성이 1만 명이나 되었다고 했다. 『한비자』 「오대편(五蠹篇)」에는 서언왕과 서국의 멸망에 대해 단순히 서언왕이 36개국의 제후들에게 땅을 나눠주자, 초나라 문왕이 이를 두려워해서 서국을 정벌한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서언왕이 인의를 실천하였다는 점은 동일하게 나타난다. 『후한서』, 『박물지』, 『한비자』 등 여러 문헌이 공통적으로 서언왕을 인의로운 군주로 기억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동이족이 추구한 정치 이념이 단순한 무력과 정복이 아니라 백성과 덕을 중시하는 가치였음을 보여준다. ◆동이족이 추구한 인의의 정치『예기(禮記)』 중의 한 편인 「왕제(王制)」에서는 이(夷)를 만물의 뿌리로 보며, 생명을 가진 존재를 아끼는 풍속이 있다고 하였다. 『설문해자』에서도 동이를 '동방의 사람들'로 풀이하고, 그 풍속이 어진데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고 설명하였다. 이 때문에 동방에는 군자국(君子國), 불사국(不死國), 장수국(長壽國)과 같은 나라가 있다고 전해졌다. 이는 고대부터 동이가 덕과 생명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준다. 모든 민족에는 본래의 문화와 후대에 변질된 문화가 공존한다. 우리 동이족은 하늘을 경외하며 생명을 중시하는 것을 본래의 문화로 삼아 왔다. 후예가 폭군 태강을 몰아냈고, 탕왕은 걸왕을 무너뜨렸으며, 서언왕은 인의로 36개국의 존경을 받았다. 중국의 여러 문헌이 공통적으로 기억하는 서언왕의 모습 또한 인의(仁義)를 실천한 군주였다. 후예와 탕왕, 그리고 서언왕의 기록은 동이족이 단순한 변방의 부족이 아니라 독자적인 정치세력과 문화를 가진 민족집단이었음을 보여준다. 서국과 서언왕은 고조선의 홍익인간처럼 동이족이 추구한 인의와 생명 존중의 정신을 보여주는 사례이자 보편적 동이 문명을 보여주고 있다. 동방문화대학원 교수
2026-06-15 13:59:35
[사설] 학생은 급감하는데 늘기만 하는 교육교부금, 이대로 둘 수 없다
지방교육재정교부금(교육교부금) 개편 논의가 다시 불붙고 있다. 올해 반도체 호황에 따른 대규모 초과 세수(稅收)가 예상되면서 교육교부금도 대폭 늘어날 전망이다. 2016년 43조원이던 교육교부금은 올해 76조원을 넘어섰고, 초과 세수까지 반영되면 80조원을 넘길 수 있다. 내국세의 일정 비율을 자동 배분하는 방식의 교육교부금은 1972년 도입된 이후 안정적 교육재정 확보에 기여했다. 하지만 학령인구는 1972년 1천73만 명에서 올해 492만 명으로 감소했다. 물론 학생 수에 비례해 학교와 학급을 줄일 수 없고, 돌봄과 특수교육 수요는 늘어나며, 안전관리와 시설 유지 비용도 증가한다는 교육계의 우려도 타당한 측면이 있다. 한때 20조원을 웃돌던 교육청 적립 기금도 크게 감소했다고 주장한다. 교육재정이 결코 남아돌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육재정의 자동 증가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현장에서는 현금성 복지 확대와 디지털 사업을 둘러싼 효율성 논란들이 반복된다. 국가 교육체계의 재원(財源) 배분 불균형은 더 큰 문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초·중등 학생 1인당 공교육비는 OECD 평균을 웃돌지만 대학 단계 공교육비는 OECD 평균에 크게 못 미친다. 정부는 인공지능(AI)과 반도체를 국가 미래 성장동력으로 육성하겠다고 한다. 산업계는 반도체 전문 인력 부족을 호소하고, 지방대학들은 재정난 속에 생존을 걱정한다. 그런데 교육교부금은 초·중·고교에만 쓸 수 있다. 교육교부금 개편은 무작정 교육재정을 줄이자는 게 아니다. 시대 변화에 맞게 배분 구조를 손질하자는 논의다. 초·중등 교육의 안정적 재원을 유지하면서도 학령인구 변화와 국가 전략 수요를 함께 반영해야 한다. 특히 대학 경쟁력 강화와 AI·반도체 인재 양성에 필요한 투자 여력(餘力)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학생 수가 반으로 줄어든 시대에도 교육재정만 자동으로 늘어나는 제도를 언제까지 유지할 것인가. 교육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재정 구조의 전면적 손질은 불가피하다.
2026-06-15 05:00:00
[사설] 민주당 '법사위 못 내주겠다', 끝까지 '입법 독재' 하겠다는 선언
22대 국회 후반기 원(院) 구성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법제사법위원장 자리를 둘러싼 여야의 충돌이 격화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국회의장은 제1당, 법사위원장은 제2당이 맡아온 오랜 관례를 복원(復元)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법사위원장은 절대 넘겨줄 수 없고, 재정경제기획위원회·정무위원회 위원장도 여당이 맡아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견제를 거부하고 권력을 독점하려는 전횡(專橫)이 아닐 수 없다. 법사위는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한 법안을 최종 심사하는 관문으로, 입법 과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국회는 여야 간 견제와 균형을 위해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을 서로 다른 정당이 맡는 관행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이는 입법 권한의 독점을 막고 다수당의 일방적인 폭주(暴走)를 견제하기 위한 안전장치였다. 민주당은 전반기에 이어 후반기에도 법사위원장을 맡겠다고 고집하고 있다. 민주당이 내세운 명분(名分)은 민생 법안과 개혁 입법의 신속한 처리다. 그러나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국민들이 얼마나 될까. 국민의힘은 법사위원장을 계속 움켜쥐려는 민주당을 겨냥해 "정권 연장과 이 대통령 공소취소 특검법 등 정치적 목적의 입법 강행을 위해 국회를 일방적으로 운영하겠다는 선전포고"라고 비판했다. 여당이 국회의장에 이어 법사위원장까지 차지한다면 입법 과정에 대한 견제 장치는 무력화(無力化)될 수밖에 없다. 국민들은 전반기 국회에서 그런 상황을 지켜봤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의 3고(高) 위기가 나라 경제를 강타하고 있다. 국제 경제·안보 질서는 급변하고 있다. 국회가 소모적인 정쟁으로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 민주당은 다수 의석의 힘만 앞세워 법사위를 독점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법사위원장 배분(配分) 관례를 존중하고 야당과 협의에 나서는 것이 국민이 바라는 성숙한 여당의 모습이다. 민주당은 6·3 지방선거 때 서울시장과 주요 지역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패배한 이유를 돌이켜봐야 한다.
2026-06-15 05:00:00
[사설] '묻지마' 낙관론에 기댄 '빚투' 급증, '영원한 상승'은 없음을 알아야
국내 증시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치고 있다. 하루 만에 수백 포인트가 급락하며 서킷브레이커와 매도 사이드카가 발동되는가 하면, 이튿날에는 역대 최대 폭으로 폭등하며 매수 사이드카가 울리는 전례 없는 급등·급락 장세가 지속되는 중이다. 지난주 코스피지수가 7천400선까지 추락했다가 다시 8천100선으로 급반등하는 이 기괴한 변동성의 배후에는 개인 투자자들의 과도한 '빚투'와 금융권이 경쟁적으로 쏟아낸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가 자리 잡고 있다. 합리적인 기업 가치 평가가 작동하는 투자 시장이 아니라, 하락이 하락을 부르고 상승이 상승을 부르는 거대한 투기판으로 변질된 형국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대목은 시장의 체력을 고갈시키는 '반대매매의 악순환'이다. 38조원에 육박하는 신용공여잔고와 1조6천억원을 웃도는 위탁매매 미수금(未收金)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마찬가지다. 최근 한 달간 시장에 출회된 반대매매 규모만 이미 1조2천억원을 넘어섰고, 미수금 대비 반대매매 비중은 평시(平時)를 한참 웃도는 10.5%까지 치솟았다. 일각에서는 중동 지정학적 리스크 완화와 미국·이란 종전 협상 타결 기대감, 그리고 24거래일 연속 매도세를 이어가던 외국인의 뒤늦은 순매수 전환을 들어 증시의 안착을 낙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주 18일에 예정된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의 금리 동결 여부와 스페이스X 나스닥 상장에 따른 글로벌 단기 자금 이동 등 대외적 변수들은 여전히 지뢰밭이다. 증권가 일각에서조차 이번 주 코스피 하단을 7천 선까지 열어두며 극심한 주도주 과열 해소 과정을 경고하는 상황에서, 대외 호재에만 기대어 무작정 낙관론에 편승하는 것은 극히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투자자들은 무리한 레버리지 투자가 아니라 냉정하게 빚을 줄여나가야 한다. 당국과 업계 역시 시장 안정성을 해치는 수급 왜곡 요인을 면밀히 점검하고 제도적 보완책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2026-06-15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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