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당공천으로 제헌의회 선거에서 낙선한 이원만은 4.19이후 윤보선의 추천으로 초대 참의원선거에 다시 출마, 금배지를 달게 된다. 경상북도에 출마한이원만은 이효상.백남억.송관수.최희송.권동철.김장섭.최달희와 함께 당선됐다.참의원선거에 출마한 이원만의 선거구호는 {원만하다 이원만 마음놓고 찍어주자}였다. 일본서의 신문배달원 경험을 살려 지은 구호다. 아직 혁명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데다 곳곳에서 선동적인 구호가 범람하고 있었기에 쉽고 우스운 구호를 착안했다고 한다. 이원만은 자신의 구호가 조무래기 아이들의 입에서 유행어처럼 불려지는 것을 보고 당선을 확신했다며 이 구호에 만족했다.참의원이 된 이원만은 한민당 당시와 마찬가지로 민주당의 자금줄이었다. 단골이던 인사동의 모요정에는 김도연.유진산.소선규.백남억등도 자주 찾아와이원만과 어울렸다. 대구 종로의 청수장도 국회의원 이원만의 아지트였다. 술은 잘 마시지 못했지만 재담이 좋은 덕택에 누구하고나 쉽게 어울렸다.이원만은 사석에서는 물론 국회 발언을 할때도 경상도 사투리를 고치지 않았다. 그통에 동료의원들로부터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그럴때면 [경상도 말은신라시대 서라벌의 표준말]이라고 강변, 상대를 머쓱하게 만들곤 했다. 참의원당시 프로판가스라는 별호를 얻은것도 사투리 덕이었다. 나무를 때던 시절듣도보도 못한 프로판가스를 주장한것도 관심을 끌었지만 사투리가 심한 이원만이 {뿌로빵가수}라고 했기에 얻은 별명이었다.
이원만은 5.16을 일본에서 맞는다. 박정희가 주도하는 혁명세력이 기성정치세력을 몰아내고 부정축재자를 잡아넣는 가운데 불안한 마음으로 이원만은 귀국 비행기를 탄다.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이원만은 혁명정부에 연행돼 곧바로 자택연금 신세가 된다. 그러나 혁명정부는 이원만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준다.
최고회의가 주최한 경제인 간담회에서 공업입국을 주장, 박정희의 눈에 든이원만은 이후 공화당원이 된다.
박정희와의 관계는 각별했다. 청와대사람들은 이원만에게 대통령의 심기를누그러뜨려 주도록 부탁할 정도였고 대통령 앞에서도 못할 이야기가 없었다.한국나일론 대구공장을 비롯 새로 공장을 지을때면 대통령 박정희는 언제나잊지않고 찾아와 축사를 했으며 그의 환갑잔치때는 친필 글을 보내기도 했다.박정희가 [경주 나들이때면 잘자리가 마땅찮다]며 호텔건립을 권유하자 이원만은 코오롱호텔을 지어 대통령 전용방을 만든다. 코오롱호텔은 상당기간적자를 면치 못해 코오롱그룹의 애물단지가 되기도 했다. 두사람의 친분은 박정희가 대구에서 현역생활을 할때부터 였다고 한다.
한국나일론공장이 위치한 대구동구에서 6대 국회의원선거에 뛰어든 이원만은동대구역유치를 공약으로 내걸어 임문석을 누르고 당선된다. 그러나 동대구역 유치공약은 주변으로부터 세찬 야유를 받게된다. 임문석은 이원만의 호가오운임을 들어 꿈같은 소리를 한다고 꼬집었으며 선거참모들조차 실현가능성을 의심할 정도였다.
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공약으로 내걸었던 동대구역 유치는 7대에 가서야 비로소 실현된다. 당시 장기영경제기획원장관을 대구로 불러들여 새 역사를 주장한 이원만은 스스로 부지물색에 나섰다. 이원만이 얼마전 타계하기까지 30여년을 곁에서 일해온 이영호씨는 동대구역 부지를 물색하기위해 둘이서 새벽마다 동구일대의 논밭과 야산을 누볐다고 회상한다.
당시 공화당의 상징이 황소인 점을 내세워 [파리는 말꼬리에 붙어 천리를 가지만 나는 황소꼬리에 붙어 서울로간다]며 국회로 들어간 이원만은 한일협정조인에 누구보다 앞장을 선다. 일본에 당한 설움과 한이 원통하지만 그렇다고일본과 언제까지나 등을 돌리고 살수는 없다는게 그의 지론이었다. 한일협정이 국회에서 비준을 받는날 민중당의 감덕용의원과 멱살잡이를 해 도하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기도 했다.
국회의원 이원만의 최대 가십거리는 산아제한의 반대였다. [산아제한을 계속할 경우 식모구하기도 어려워진다]고 했다가 돈많은 사업가의 사치스런 걱정이라는 비난을 받기도했고 유세장에서는 [딸을 많이 낳아 한국나일론공장에보내라]고해 구설수에 오르기도한다. 산아제한을 계속할 경우 후일 심각한 인력난을 겪을수밖에 없다는게 그의 생각이었다. 산아제한을 하기보단 일자리를만들어 인력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7대의원에 나선 이원만에게 야당후보는 맹렬한 공격을 해왔다. 동대구역을유치한다고 해놓고선 고작 말뚝정도만 박아놓았을 뿐이며 대구에서 엄청난 돈을 벌고서도 지역을 위해 제대로 쓴것이 없다는 비난이었다. 어느 야당후보는이렇게까지 그를 공격했다. [이원만씨가 국회의원 4년간 120억원을 벌었는데그 돈을 동구지역 3만가구로 나누면 가구당 40만원이 돌아간다. 그러니 이원만이 가구당 40만원씩을 주면 표를 찍어주고 39만원을 주거든 찍어주지 말라]김종필은 찬조연설로 이원만을 돕고 후일 그와 사돈을 맺는다. 김종필의 장녀 예리와 이원만의 차남 동보가 백년가약을 맺은 것이다. 대구남구를 선거구로 한 이효상과도 이원만은 사돈이 된다. 손녀인 이동찬의 딸 경숙이 이효상의 아들 문조의 아내가 된다.
7대국회의원으로 국정감사차 경북도를 찾았을때 이원만은 신문의 호된 질책을 받는다. 농촌수익 증대사업이 주의제로 등장하자 이원만은 {우나기돈부리}즉 뱀장어덮밥을 예로들면서 뱀장어양식사업을 소개했다. 다음날 신문들은{국정감사장에 일본말 남발}이라며 일제히 이원만을 비난했다. 일본말을 한데 대해 기자들이 지적하자 [좀 쓰면 어때]라고 대답, 기자들로부터 집중타를맞은 것이다.
구미공단 조성에 있어서도 이원만은 선봉이었다. 세인의 이목을 우려, 고향땅에 공장 유치하기를 꺼리던 박정희에게, 이원만은 동생을 장관에까지 발탁한 케네디대통령의 예를들어 설득한다. 그리고는 낙동강변 벌판에 폴리에스터공장을 세운다. 구미공단 조성은 당시 지사이던 양탁식의 지원을 받아 가능하게 된다.
동대구역 유치라는 공약을 실천하고서도 8대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원만은 낙선한다. 공화당정권의 부정부패에 혐오감을 느낀 대구 주민들이 이효상등 공화당의원 상당수를 떨어뜨린 것이다. 변호사 출신의 김정두가 이원만을 대신하여 금배지를 달았다. 낙선 의원 상당수는 당장 할일이 마땅찮았지만 이원만에게는 돌아갈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 동찬이 키워온 코오롱 명예회장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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