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성씨는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재직시 물가를 잡은 대통령밑의 주무책임자로서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다."정권출범때 43%로 천정부지로 뛰던 물가가 22%로 떨어졌고 내가 부총리로재직하던 시절 비로소 한자리수인 9%로 낮춰졌으며 이로인해 고질적인 무역수지적자도 잡혔다"며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는 전두환전대통령의 강력한의지때문이었다고 덧붙였다.
이때 전전대통령은 김부총리를 개인술동무로 삼아 수시로 불러 마음을 터놓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김씨는 전전대통령이 백담사하산뒤 대구초행때 안내를주도하기도 했다.
또 실명제실시를 놓고 여권내에서 논란이 심할때 '시기상조론'을 피력, 주목을 받았다.
부총리재직시 세인의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발탁된지 3개월만에 터져 곤욕을 치르게한 '물방울 다이아'사건이다. 82년 4월 김부총리는 대도조세형에 의해 귀금속등(2.2캐럿짜리 다이아반지포함) 7백34만원어치외에도 집문서, 유가증권 5억원어치가 도난당한 것으로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던 것이다. 김부총리는 공직자신분이어서 사면초가에 몰렸었는데 언론의 연일 계속된 공격에 넋을잃을 지경이었다. 언론과의 일문일답중 한토막.
"5억원이나 되는 유가증권은 어떻게 모았나" "공장을 경영했고 은행장퇴직금그리고 대구사일동 4백여평대지에 20개점포가 있는 상가발딩에서 나오는 임대료수입만도 연간 3천5백만원정도 된다" 공직취임전에 모은 정당한 재산이라고 해명하는데 진을 뺐다.
지금에 와서 그는 "마누라에게 평생 다이아패물을 사준 적이 없었다"면서"사실무근이며 그 다이아반지는 모병원장소유"라고 해명했다.결국 그는 장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년 6개월만에 퇴임한게 천우신조였다는 호사가도 있다. 그해 버마에서 아웅산폭발사건이 발생해 서석준부총리가참변을 당했던 것.
부총리가 물러난뒤 각종 인터뷰기사를 보면 당시 대도사건이 그에게 커다란좌절이며 전기였던 것 같다. 모신문에서 그는 이렇게 토로했다. "연일 대거특필되고 그래서 내가 노략질이라도 한 것처럼 비칠때-취임3개월만에 부정을했으면 얼마나 했겠어요. 도둑 때문에 몇번 사의를 표명했다가 결국 정부에서 물러나 63세에 내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니 착잡한 생각이듭디다. 내가 다 부덕해서 그렇지 뭐"
그 이후 지역신흥업체인 광명의 부도에 그가 관련되어 있다는 루머 때문에또 고통을 당한다. 게다가 수천억원의 갑부며 심지어 금호호텔사주라는 음해성 소문이 퍼졌던 것이다.
그당시 김씨의 심정은 매우 괴로웠다고 장남인 상철씨가 전했다. "오죽했으면 부친께서 재산을 정리하고 대구를 떠났으면 하는 의중을 비쳤겠어요"라며섭섭함을 표했다.
김준성씨는 광명부도에 대해서는 "당시 광명단자회사와 거래를 중단한 제일투금의 모이사가 내밑에 있던 사람이어서 괜한 오해가 생긴것 같다"고 추측했다.
상철씨는 "여러가지 낭설로 인해 행정당국에서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동성플라자설립에 미적미적해 설계허가 5년만인 지난88년 완성되는 고난을 당했다"고 털어놨다.
현재 재산은 서울 논현동소재빌딩과 동성플라자가 전부로 수천억원 재산은낭성이라고 일축했다. 이 건물들은 아들들에게 상속되었고 물론 시가로 수백억원이 넘기는 하다.
김씨도 인생에 있어 유일한 공백이 있었다. 공직을 나오고 한 1년쯤 된다.아들사무실에서 소일했지만 천성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어서 따분하고 지루한나날이었던 것같다.
그러던중 84년 전국은행연합회회장자리를 맡게되고 그뒤 87년 이병철씨와의친분으로 삼성전자 회장이 된다. 이회장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방송출연을하지 않던 이회장이 85년 KBS일요방담 첫코너의 요청을 받고 나와 함께라면응하겠다고 할 정도였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삼성에 몸담은지 얼마되지 않아대우그룹의 김우중회장과 사돈을 맺으면서 88년 라이벌회사인 대우(주) 회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때 삼성쪽에서 3개월동안 사직서를 받아주지 않아 곤란이 많았단다.
김씨는 "제일은행장시절 대우가 지배주주로 참여하고 있어 양가가 자연히 접촉할 기회가 많았는데 자신의 막내아들과 김회장의 맏딸이 교제를 한 것 같다"고 짐작했다.
한편 김준성씨의 삶의 궤적에 대해 그 밑에 있었던 사람들은 절대적인 추앙을 보내고 있는데 비해 정치권등 외부쪽 일부는 그의 능력과 인격을 평가하면서도 너무 민첩한 정치적 센서에 발빠른 행보를 연상, '가벼운 편'이라는 지적도 한다.
당시 정치권에 있던 모인사는 "그는 계산적인 측면도 많은 사람이었다"면서"지역업자들 사이에서도 호, 부호가 뚜렷했다는 말도 들었다"고 전했다.그는 "그렇다고 해서 개인영달을 위해 정.관계에 돈을 뿌리는 그런 인사는아니었고 오히려 행원복지등 집안에 돈을 쓰고 외부에는 소문과 달리 매우 짰다"고 돌아봤다.
그러나 정치권과 근접하면서도 휘말리지 않는 엄격한 공사구분과 돈취급에있어서의 신중함은 대구은행의 건실한 발전에 기여한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전형적인 은행경영인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도 과거 "은행은 공익못지 않게 장사"라고 주창한 바 있다.
돈에 있어서도 깨끗했던 것 같다. 나응찬신한은행장은 "뇌물성 돈과 선물은꼭 자신을 시켜 되돌려주었고 간혹 써도 되는 돈은 모아두도록 지시, 사원단합대회에 쓰도록 했다"고 말했다.
한편 그는 특이한 이력이 있는데 바로 사업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설가다.지금까지 '들리는 빛' '돈 그리기' '먼 시간속의 실종' '사랑이 앞서가는시간'등 중장편소설들을 쏟아냈는데 공직을 떠난뒤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매달렸다. 50년 '인간상실'이란 단편으로 김동리선생에 의해 현대문학지로 부터추천을 받았는데 이제는 어엿한 중견작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아호는 소인,아마추어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문인이란 뜻이다.
한때는 매일신문사에 경제평론가, 영남일보사에 논설위원으로 필명을 날리기도 했으며 책은 그의 일부분으로 대단한 학구파다. 비서출신인 강경헌 영남투김사장은 "차시트에는 경제학과 영어책이 항상 놓여있었고 바깥을 멍하게 쳐다본적이 없었다"며 향학렬을 흠모했다.
김준성씨는 "건강의 비결은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열심히 글을 쓰는 것"이라면서 "죽을때까지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열심히 사는 것이 나의 화두"라고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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