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에 크게 유행했던 춘화는 단순한 도색물이 아니라 당시의 성풍속과성의식, 사회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자 회화성을 갖춘 미술품으로서그 미술사적 의의를 재조명해야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미술전문지 {월간미술} 7월호는 이례적으로 조선시대 춘화에 관한 특집을 싣고 오랫동안 음란물로만 취급돼 미술사연구에서 제외된 춘화가 실제로는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등 당대 유명화가들에 의한 것이 적지않으며 특유의회화성과 풍자, 해학 등을 담은 풍속화인 만큼 이를 미술사연구에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기원전 2세기 한대의 재상 진평에 의해 향락용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춘화는당대에는 창가의 머리병풍용으로 그려졌고 본격적인 유행은 호색문화가 풍미했던 명대 후반부터였다. 우리나라는 조선후기에 명대 후반의 춘화첩 및 판화집들이 유입되면서 당시 풍속화의 유행과 맞물려 양식적으로는 풍속화의영향을 강하게 드러냈다. 중국춘화가 주로 궁중취향에 귀족을 등장시킨 춘궁화이고, 일본춘화는 인물의 표정이 무시무시하고 과장됐으며 색채등이 화려한데 비해 조선의 춘화는 서민적이며 성풍속을 솔직하고 익살스럽게 표현한 것이 차이점이다.
조선후기의 춘화는 짙은 리얼리즘의 반영과 솔직담백한 표현으로 외설로 빠지지 않았는데 단원,혜원을 비롯 김득신 유숙 김양기 유운홍 이한철 백은배등 유명화가들이 더러 춘화성향의 풍속화를 그린데서 연유된 것으로 보인다.기생과 한량,처녀와 총각,주인과 하녀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 조선의 춘화는 성희장면과 함께 당시의 사회상, 타락한 양반들의 속물근성, 부도덕함등을 꼬집으며 배경묘사에 상당한 배려를 했다.
조선후기의 춘화는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일본 부세회 춘화 등의 영향으로급속도로 퇴폐적인 양상으로 치달아 결국 골방 깊숙이 갇히는 처지가 되고말았다. 현재 이들 조선후기의 춘화들은 후대로 전승되지 못한채 파손된 예가많고 상당수가 낙관이 없으며 대부분은 개인소장품으로서 감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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