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좀 깨우고 올께]작은오빠가 현관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지만 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만사가귀찮아져 옴쭉달싹하기가 싫었고 모든 것이 시뜻하게만 느껴졌다. 그토록 내가슴을 우울히 저몄던 바나나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되었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그것은 너무 큰 충격이었을까. 아니면 그 충격으로 나의 여린 신경세포들이 다 타버렸을까. 마음은 오히려 더 담담해지고 있었다.[씻지 않을래?]
언니가 내의를 들고 화장실로 가고 있었다. 문이 야무지게 닫히자 나는 마치나만이 깊은 동굴 속에 외따로 떨어져 버린 것 같은 기묘한 절망감에 휩싸였다.나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물상들이 이물스럽게 느껴졌다. 수족관의 물고기들도,가끔 어머니가 탈지면으로 닦아 주던 화분대 위의 고무나무도 나의 피아노도,그 위의 앙증스러운 곰인형도 나를 감시하고 조종하는 음모의 덫으로 비쳤다.나는 일순 진저리를 쳤다.
[기어이 네가 일을 저지를 모양이구나]
기막힌 거실의 고요를 뒤집고 아버지의 눅눅한 목소리가 안방에서 흘러나왔다.나는 흠칫 놀라 머리를 들었다. 꼭 환청을 들은 것 같았다. 그것은 이미 나의기억에서조차 희미해진 아버지의 건강한 목소리였다.
나는 아버지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그 말씀을 하실 때의 아버지의 모습이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어쩌면 아버지가 우리의 음모를 죄 듣지 않았을까 하는예감이 불길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버지, 용기를 가지십시오]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벌레가 기어가듯 느릿느릿한 큰오빠의 목소리가 얼마간의 사이를 두고 이어졌다. 그리곤 그만이었다. 더 이상 안방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았다.
[음]
얼핏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신음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 그것도 곧 화장실에서 암팡지게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내가 반짝 꿈을 꾸었던가. 나는 꿈에서 깨어나듯 분연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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