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쓰다가 내가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책상 위에는 일기장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고 나의 손에는 여전히 만년필이 꼭 쥐어져 있었다. 나는멍멍한 기분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아주 오래 잔 듯한 느낌인데 실상은 잠깐이었다. 방안은 아직 충분히 깊은 새벽이었고, 침대 위의 언니는 한잠이들어 있었다.나는 허망한 가슴으로 멀뚱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생시인들 그렇게 또렷할 수 있을까. 아직도 어머니의 목소리가 귀청에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는 꿈 깬 아쉬움을 달래며 아스라이 어머니의 환상을 쫓고 있었다.
그때 나는 기묘한 소리를 들었다. 마치 수돗물이 또록또록 떨어지는 듯한 미세한 소리가 고요 속을 비집고 환청처럼 들려 왔다. 나는 처음 그 소리를 무시해 버렸으나 그럴수록 더욱 명징하게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 언니가 설겆이를 하고 수도꼭지를 덜 잠갔나. 나는 방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집안은여전히 그림처럼 고즈넉이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그 소리의 방향을 따라 귀를 가져갔다.뜻밖에도 화장실이었다. 아닌게아니라 화장실은 빤히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 노크를 했다.그래도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나는 예감이 이상해 살며시 문을 밀어보았다.
무엇에 걸린 것처럼 뻑뻑하게 열리는 그 속에 섬뜩한 광경이 담겨 있었다.발가벗은 아버지가 욕조 속에 반듯이 누워 계셨고, 아버지의 가슴께까지 덮은 욕조물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아, 나는 비명을 지르며 화장실 문턱을 넘다가 바리케이트처럼 쳐진 무엇에걸려 넘어졌다. 어느 순간 번쩍 의식이 열렸으나 아버지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 내 몸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흐릿한 눈망울 속으로 욕조 벽에 붙은무엇을 본 것 같았으나 기억할 수 없었다. 욕조에서 흘러나온 붉은 물이 내귓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일순, 나는 한없는 평온함을 느꼈다. 나는 그 평온함 속에서 언젠가 은유와 함께 본 황홀한 태양처럼 눈부신 빛깔의 날개를펴고 비상하는 도도의 환상을 보고 있었다.
문 앞으로 달려드는 작은오빠, 큰오빠, 언니의 모습이 젖은 눈망울에 박히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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