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공기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삶의 체취를 고스란히 품어안는다. 살아 움직이는 말은 쉼없이 변화하고, 그러기에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광복 50년이 흐르면서 우리의 언어도 엄청난 변화상을 보여왔다. 일제때 중국으로 건너갔던 동포들이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때 흔히 "외국말인지 한국말인지 도통 못 알아듣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더라도 우리 말의 변질정도를 실감케 된다.
1900년대말부터 들어와 일제강점이후 우리생활속에 뿌리깊이 박혀있는 일본어와 해방이후 봇물처럼 밀려든 영어가 지난 광복이후 반세기,아니 지금까지도 이 땅의 언어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은 국적없는 얼치기외래어를 양산하고 전통언어를 파괴했으며, 우리 삶의 양식까지 뒤바꿔놓았다. 특히 속속들이 스며든 일본어의 해독은 쉬 치유가 되지 않을 것 같다.물론 일제시대의 일본어는 점차 사용이 줄어들고 있지만 60년대 이후 문물교류와 함께 밀려들어온 일본어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45년 미군주둔과 함께 시작된 영어물결 역시 오늘의 우리 삶 전체를 뒤덮다시피하고 있다. 아동문학가 이오덕씨는 "우리말의 오염원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분별한 외국어사용"이라고 강도높게 지적하고 있다. 경북대 사범대김종택교수(국어교육과)는 "해방이후 북한의 언어가 물론 공산이데올로기에의해 조작된 것도 있으나 상당부분 어휘차원에서 정리되고 우리말의 순수성을 지켜온데 비해 남한에서는 경제개발에 치우쳐 우리말을 내팽개치다시피방치했다"고 지적, 우리말 정리가 시급함을 강조했다.
*얼치기 외래어 봇물*
또한 정치격변과 급속한 산업화,도시화의 과정에서 명멸한 유행어는 시대별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전 38선이 그어지고 북쪽서 넘어온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세칭 '38따라지'라는 말이 등장했고, 혼란했던 그 시절 '빽'과 '사바사바' '와이로'는 출세와 돈벌이의 지름길로 인식됐다. 이른바 양공주들이 '유엔사모님'으로까지 격상된 것은 구호물자에 의존했던 가난했던 그 시대를잘 드러내주는 예이다.
4.19, 3선개헌 등의 어두움을 지닌 60년대엔 '아더메치유'(아니꼽고 더럽고메스껍고 치사하고 유치한) 등 숱한 정치유행어들이 탄생됐고,월남파병에 따라 '베트콩'(얼굴 검은 사람) 등 월남관련 말들이 유행했다. 70년대엔 부동산,골동품 치맛바람을 일으킨 '복부인', '골부인'과 함께 '마담뚜'니 '제비족'이란 낯선 말들도 나타났다. 애인,남편을 지칭하는 '자기'가 급속도로 퍼져 일상언어화됐으며, 오랜 군사정권의 영향으로 '초전박살' '지시' '하달'등의 군대용어가 생활속에 파급됐다. 또 10.26사건은 '한다면 합니다','버러지같은 놈','그때 그사람' 등의 유행어를 탄생시켰다.
*정치·군대용어 확산*
8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언어의 창조와 파괴를 통한 욕구해소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특히 대학생사회에서 현실풍자 및 인생의 희화적 측면과 자조적인 면을 담은 넌센스 퀴즈 시리즈가 크게 유행했다. '참새' '생쥐' '식인종' '바보''최불암시리즈' 등 30여가지의 시리즈가 마른짚단에 불붙듯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경희대 서정범교수는 이같은 속어시리즈의 유행에 대해 "말의 유희적 측면을 강하게 드러내는 반면 욕구불만을 해소하는 청량제로서의 구실도 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80년대엔 특히 냉소적,자기비하적인 말들이 잇따라 생겨났다. '싹쓸이'가 정치판뿐 아니라 화투판에까지 휩쓸었으며, 88년의 미결수 집단탈주사건으로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신조어가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TV의 영향력이 커지지면서 코미디언 등 연예인들의 말투가 일시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말끝마다 '~걸랑 ~걸랑'을 달거나 '왕~','웬~' 등의 이상스런 접두어를 붙인말, '웃기는 짬뽕' '띠용' '아, 응애예요' '롱다리 숏다리'식의 국적없는 개그언어가 판을 쳤다. 또한 '있잖아요','~같은데요','~하는거 있지' 등의 줏대없고 불분명한 어투, 남편에 대한 '아빠'호칭 등 이치에맞지않는 어거지식 말들이 양산됐다. TV드라마의 영향으로 '잘났어 정말'이니 '띨띨하긴' '골때리네' 등의 상대방을 비하시키는 말투를 비롯 김동길씨의 어투를 흉내낸 '이게 뭡니까?'도 한때 크게 유행했다.
*저속 개그언어 판쳐*
90년대에 들어서는 독특한 행동양식의 신세대들을 지칭하는 언어가 쏟아졌다. 'X세대', 'Y세대','Z세대' 등과 함께 '~족(족)'이란 신조어가 생겨났다.'오렌지족'( 부자 부모의 덕으로 돈을 펑펑 쓰고 다니는 청소년들), '탱자족'(오렌지족보다 씀씀이가 작은 부류), '자몽족'(오렌지족출신의 젊은 주부),'야타족'(자가용으로 여자를 유혹하는 부류), '타소족'(야타족을 흉내내는아저씨,아줌마), '미시족'(미세스이면서 차림새 등을 미스처럼 보이게 하는부류), '딩크(Double Income No Kid)족'(자식을 낳지 않는 고소득 맞벌이부부), '체크족'(자기 인생을 스스로 관리하고 타인의 간섭을 거부하는), '유미(Young Upwardly Mobile Mummy)족'(자식교육을 최우선시하면서도 자신을위한 시간도 멋지게 가꾸는 현대판 신사임당), '둥지족'(가족제일주의 가치관을 지닌) 등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신세대 신조어 양산*
지난 50년간 생활언어의 변화는 눈이 핑글거릴만큼 빠르고 혼란스럽기조차하다. 언어의 세대차가 현격해지고 있다. 얼마간만 TV를 보지 않으면 대화속의 말들을 따라가지 못하는 '형광등'이 돼버리기 십상이다. 광복 50년을 맞아 우리가 풀어가야할 과제의 하나는 외래어의 남용과 국적없는 얼치기말의난무, 무분별한 유행어의 틈새에서 희미해져가는 우리말의 순수성을 되찾고정리하는 일일 것이다.
〈전경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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