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실학-교산허균 상-만민평등사상 주창 이상사회 시도

교산 허균(1569~1618)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소설 '홍길동전'을 쓴 사람으로는 잘 알려져 있으나 실학자로서의 면모는 별로 소개되지 않고 있다.그러나 허균은 중세 봉건체제 해체기에 해당하는 이조후기의 변혁기에 근대적 민본주의 입장에서 만민평등사상을 주창하고, 이를 실천하려 했다는 점에서 최근들어 실학정신에 어느 누구보다 투철했던 선각자 개혁가 이상주의자로 재평가 받고 있다.특히 그의 서얼(서자)금고와 노비제도, 여자개가금지 철폐주장과, 당시로선이단시 됐던 불교 양명학 도교를 두루 수용한 개방적 학문 자세는 후배실학자들 보다 앞섰다는 평가다.

선조2년 서울건천동서 부재학 경상감사를 지낸 양천허씨의 9대손 허엽의 셋째아들로 태어난 허균이 살았던 세대는 조선조 최악의 난세였다.7년간의 임진왜란으로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 국토에서 먹을 것을 찾아 나서는 유랑농민과 도적떼가 늘어나고, 질서 또한 극도로 문란해 탐관오리의 학정이 백성들의 삶을 벼랑끝으로 몰았다.

또 선조에 뒤이은 광해군시대에는 폭정과 당파싸움으로 집권층은 정사(정사)는 뒷전인채 매관매직으로 치부에만 열을 올렸으며, 인목대비·영창대군등폐모살제(폐모살제)에 이르러서는 강상윤리(강상윤리)의 인륜마저 내팽개친양상이었다.

당시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백성들 사이에선 이런 노래가 유행했다.'금이냐 은이냐 옥이냐 비단이냐/관이냐 비단이냐 산삼이냐 미녀이냐/얼씨구나 절씨구나 흥청망청 놀아난다/어느놈은 굶어죽고 어느놈은 배터진다/천지개벽 되기전에 못살겠다 일어나라'

이같은 민중들의 불만에도 불구, 집권층은 조선개국초부터 국가지도 이념이었던 성리학의 예학(예학)적 측면을 더욱 강조, 까다로운 예의 실천을 강요하는가하면 일체의 다른 이론이나 사상은 사문난적(사문란적)으로 몰아 백성을 옭아맴으로써 민중의 지지를 잃어갔다.

어렸을때부터 문재(문재)가 뛰어나 해동천재란 소리를 들었으며 아버지 허엽과 둘째형 허봉이 명나라, 큰형 허성이 황윤길, 김성일과 함께 서장관자격으로 일본에 다녀오는등 외국문물에 밝은 집안에서 자유롭게 자란 허균은 이같은 집권층의 위선과 무능에 대한 민중의 반발을 누구보다 먼저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자신 또한 26세 첫벼슬길에 나선이래 세번이나 중국 사신을맞는 접반사로 활약하고 세번이나 중국사행을 다녀와 외국문물에 견문이 넓었다.

천성적으로 다혈질이고 자유분망한 허균은 위민(위민)의 근본뜻은 내팽겨친채 지배층의 백성억압 논리로 전락한 당시의 성리학은 더이상 나라와 백성의지도이념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집권사대부들을 위선자로 매도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허균은 그의 저술 학론(학론)에서 '저 고관대작들은 관복을 늘어뜨리고 옥이나 차고서 우리남편, 우리아버지 높은벼슬 하시네 하는 따위로 부녀자들이나 기쁘게하는 일만하고 있다'고 집권층의 무능과 직부유기를 나무랐다.

또 호민론(호민론)에서는 민중을 정치성향에 따라 호민(호민) 원민(원민) 항민(항민)으로 구분하고 '천하에 가장 두려운 것은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은불이나 물 호랑이보다 더 두려운 것이다. 그런데도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은백성을 업수이 여기고 모질게 부린다. 장차 백성중에 가장 무서운 호민이 몽둥이를 들고 일어난다면 어쩔 것인가'고 질탄했다.

이어 유재론(유재론)에서는 '하늘이 인재를 낼때 귀한집자식이라고 풍부하게주고 천한집 자식이라고 인색하게 주지 않는다'며 서얼·천민계급 철폐의 내정개혁을 주창했다.

허균의 신분계급 철폐는 제도하에서의 개혁을 주장한 후기 실학자들과는 달리 완전한 계급철폐여서 색다르다.허균의 이같은 사상은 오늘의 시점에서 볼땐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이)의 절대우위성을 사회지도 원리로 삼아, 반상(반상)의 구별이 절대적이었던 당시로선 엄청난 개혁사상이었으며보수집권층에 대한 도전과 반역이 아닐 수 없었다.

이같은 허균의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사상은 자연 집권사대부들의 눈총을 받아, 그의 집안이 동인(동인)과 남인(남인)의 우두머리였음에도 그의 벼슬길은 등용과 파직의 연속이었다.

25세에 승문원(승문원)사관을 시작으로 예문관검열 세자시강원 설서 병조좌랑을 거쳐 31세에 황해도사(황해도사)가 되었으나 7개월만에 파직됐다. 허균이 서울의 기생들을 관가에 끌어들여 도민의 비웃음을 샀다는 탄핵 때문이었다.

36세에는 수안군수로 부임하였으나 부정한 짓을 한 지방토호에게 곤장을 치게했다가 그중 한명이 죽게되자 그 아들이 원한을 품고 허균이 불교를 숭상한다고 탄핵하는 바람에 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2년후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종사관으로 천거돼, 명나라 3대문사의 하나인주지번을 만나고 그에게 최치원의 시를 비롯 조선의 시 8백여수를 보여줘 조선의 문장을 자랑하는 한편 스승 이달의 시와 그의 누이 난설헌의 시도 소개했다. 주지번은 허균의 글재주에 감탄했다하며 이 시들을 중국에 널리 소개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허균은 삼척부사로 승진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석달이못돼 관아 별실에 불상을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예불한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됐다.

벼슬길에 들어선지 10년쯤만에 쫓겨나자 시속선비들의 위선적인 태도를 비웃기라도 한듯 '이미 청운의 꿈 떨어져 나간줄 아오니 어찌 탄핵을 근심하리.인생은 제 분수대로 사는 것 돌아갈 꿈은 상기도 절간이로세' 시 한수를 읊으며 불교에 심취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후에도 허균은 공주목사 형조참의등 등용과 파직을 거듭하다 41세때 과거전시관이 되었다가 사위와 조카를 부정으로 뽑았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로 유배됐다. 그는 2년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그의 사상과 주장이 담긴문집 성소복부고(성소복부고와 사명대사 비문을 지었다.

허균은 벼슬길에서 물러났을때 주로 서얼·천인 출신의 친구들과 어울렸다.이들은 탁월한 인재들이었지만 낮은 신분때문에 세상에서 빛을 보지못한 불우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들과 어울려 잘못된 세상을 한탄하며 세월을 보내다가 서류들의 역모에 가담하게 되고 '홍길동전'을 쓰는등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됐다.

그러던중 이들 서류 일부의 역모가 발각되자 위험을 느낀 허균은 당시의 실세인 이이첨 대북파에 가담, 병조판서의 지위에 까지 올랐으나 이이첨의 흉계에 말려 거사직전 역모죄로 참수됐다. 1618년 8월 26일 이었다.허균의 사후 그에 대한 평가는 대체적으로 근대이전 유학시대에는 '인륜도덕을 어지럽힌 모든 악을 구비한 천지간의 괴물' (명문록)로 묘사되고, 잘해야글재주가 뛰어 났다는 것 뿐이었으나 근대이후에는 솔직하고 민중을 위하여권력에 대항한 개혁가, 혁명가, 이상주의자로 평가하는 경향이다.역사학자 이이화씨는 "서구의 르네상스시대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허균의 사상과 행동은 존재가치를 잃은 절대권위에 대항, 자유와 개성존중을 위해 몸으로 싸웠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흐름에 동참한 선각자 였다"고 평가했다.오늘날 허균이 되살아나 우리의 사회지도층이나 정치가를 본다면 어떠할까?'서툰 짓을 보면 비위가 뒤틀렸다'는 그의 말대로 구토를 할까 아니면 박수를 칠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허균같은 인재가 버림받아 역적이 되지않고 잘쓰일수있는 세상이 바람직한 사회라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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