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향토체육의 맥(137)-육상(17)

1962년에는 제43회 전국체전이 처음으로 대구에서 열렸다. 전국체전의 대구유치는 지역체육, 특히 육상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국체전 유치결정이후 지역에서는 먼저 쇠퇴일로에 있던 육상에 관심과 투자가 새롭게 일기 시작했다.또 전년도대회까지 남녀부만 구분돼 있던 육상이 43회대회부터는 남녀부를중·고·일반으로 세분하면서 많은 변화가 뒤따랐다.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선수들이 대회에 참가했고 일반부 틈에서 제기량을발휘하지 못하던 학생들은 각부문에서 입상해 자질을 인정받을수 있었다. 최고의 전략종목인 육상선수발굴을위해 시도마다 학교육상에 쏟는 열기가 다시 뜨거워졌다.

경북은 과거의 저력을 바탕으로 선수층을 넓혀갔고 전국최고수준의 일반부선수들이 학생들을 지도, 학생부에서도 전국제패를 노리게 됐다.힘겹게 회생한 경북육상은 점차 전국무대에서 과거의 명성을 회복해갔고참가하는 대회마다 서울과 종합선두를 다투었다.

전국체전 유치와 함께 경북육상발전의가장 큰 계기가 된 것은 종합운동장을 확보한 것이었다.

당시 시민운동장 주경기장은 미군에 징발당해 군수기지로 사용되고 있어육상경기는 야구장에서 치러졌다.

경기때마다 야구장에 3백m트랙을 석회가루로 그려 사용해야 하는 실정. 경북체육회는 전국체전을 앞두고 미군측으로부터 주경기장을 반환받아 스탠드를 만들고 트랙을 새로 설치하는 등 시설보수에 들어갔다.

주경기장의 회수는 전국체전행사 외에도 전국최초의 도민체전 창설, 선수들의 연습장확보, 스포츠학원 개원 등 여러가지 부수적인 효과를 불러왔다.

도민체전의 창설은 경북체육이 양적, 질적인 면에서 한단계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넓은 주경기장을 확보한 경북체육회는 전국체전을 끝낸뒤 전국최초로 도민체전을 구상, 1963년 첫 대회를 성대하게 치러냈다.

도민체전에 참가하는 각 시군의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면서 시군마다 체육종목에 대한 지원이 활발해졌다.

특히 안동 성주 등지에서는 학교간 경쟁도 뜨거워져 안동사범 성주여고 등육상명문교가 생겨나고 탁월한 선수들이 대거 배출됐다.종합운동장의 확보는또 연습장이 없어 애를 먹던 육상선수들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그때까지는 학교운동장조차 제대로 정비돼 있지 않아 동촌방둑을 찾는게 고작이었고 장거리선수들은 도로를 달려야했다.

마음놓고 연습할수 있는 좋은 시설의 경기장은 선수역량강화 뿐만 아니라저변확대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스포츠학원 개원도 종합운동장이 생기며 일궈낸 수확. 1963년 4월부터 주경기장을 무대로 문을 연 스포츠학원은 모든 종목의 선수들에게 무료로 개방됐다.

육상뿐만 아니라 축구 럭비 핸드볼 등 운동장을 이용하는 종목을 한데모아 경북체육회에서 종목별로 코치를 선정,선수들을 지도한 것.육상에서는 윤경호(단거리) 이경철(중장거리) 이이재(도약) 송희원(투척)등 왕년의 스타들이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는데 땀을 쏟았다.당시 스포츠학원 학감이었던 박만태씨는 "스포츠학원이 열리자 각학교의선수들이 대거 몰려들어 매일오후 5시가 되면 운동장이 빽빽할 정도로 학원은 대인기를 누렸습니다. 좋은 시설과 경험많은지도자 아래서 선수들의기량은 눈에 띄게 발전해 갔습니다"고 설명했다.

1962년 10월24일 제43회 전국체전이 6일간의 일정으로 화려하게 개막됐다.최인호 경북체육회 부회장이 성화최종주자로 선정돼 주경기장 성화로에 불을 밝혔고 단거리스타 엄팔룡이 선수선서를 했다.

엄팔룡은 당시 은퇴한 상태였으나 종목세분으로 인한 선수부족과 취약한경북육상의 현실을 고려, 전국체전에 다시 참가하게 된 것. 엄팔룡 외에도이이재 이달식 권대진 신학교 등 현역에서 물러나있던 육상강자들이 경북육상의 부활을 위해 뜻을 모아 함께 대회에 출전했다.

이들의 눈부신 활약 덕분에 전년도대회때 육상5위에 그쳤던 경북은 3위로뛰어올랐다. 이때 일어난 웃지못할 얘기 한도막. 6일동안 대회는 종합운동장을 비롯한 21개경기장에서 지방대회로는 기대이상으로 무난히 치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육상경기장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여자고등부 2백m경기서 출발원의실수로 1백90m만 달린 것.결승전을 끝내고 기록을 보니 한국기록과 거의 비슷해 이를 이상히 여긴 심판과 임원들은 코스를 다시 점검했다.그 결과 출발지점이 원래 예정된 4백m계주 바통터치 시작라인이 아닌 10m전방의 오버라인에 잘못 그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재경기를 하자는 측과 그대로 순위만 정하자는 측이 옥신각신 논쟁을 벌인 끝에 43회 전국체전 여고부 2백m경기는 결국 순위만 결정되고 기록은 없는 희안한 경기로 처리됐다.〈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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