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경북 항일운동-일잔혹탄압 학생 불굴저항

1919년 3월1일.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시달리던 2천만 한민족이 분연히 일어섰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대구·경북에서는 3월8일부터 5월7일까지 만세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대구에서 가장 먼저 시위가 일어났으며 마지막 시위는 청도군 매전면 구촌(구촌)에서 있었다.이 기간동안 85곳에서 모두 1백8회의 시위가 벌어졌고 26명이 숨지고 69명이 부상을 당했다. 또 많은 사람들이 투옥됐다. 가장 희생자가 많았던 시위는 1919년 3월23일밤,안동에서였다. 일제 기록에 따르면 13명이 현장에서 죽고 20명이 부상당했다. 이밖에도 대구 의성 영해 성주지방에서 만세시위가격렬했다.

3월8일 낮 대구 달성군청 부근(지금의대구백화점 위치)에서 만세시위를하던 아버지 김태련이 일본경찰에 구타당하는 것을 본 아들 김용해(김용해-당시 계성학교 학생)는 일경에 덤벼들다 무차별 폭행을 당해 숨졌다. 2년반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아버지는 감옥에서 일해 모은 3원50전으로 아들의 묘비를 세웠다. 묘비엔 '기미년 3월이여흘러 넘친 의로운 피아비의 아픈 품삯으로아침 해 바라보며 이 돌을 세운다'고 적었다.

3·1운동 직후 경남 거창의 곽종석(곽종석)선생,성주의 장석영(장석영) 송준필(송준필) 김창숙(김창숙)선생등이 중심이 돼 영남유생 1백37명을 규합,독립청원서를 작성했다. 파리에 있던 김규식(김규식)선생을 통해 세상에 알려져 '파리장서'라고도 불리는 이 독립청원서엔 경북지역 인사 53명이 서명을 했다.

'항일독립운동사-대구 경북편'을 저술한 정휘창씨는 1920년부터 해방까지의 항일운동을 크게 세갈래로 나눴다. 즉 1920년대 전반기엔 의열단(의열단)을 비롯 수많은 애국단체들이 국내와 만주(만주)등을 무대로 활동했다. 특히만주에서는 이상룡(이상룡-안동)선생과 남자현(남자현-영양)여사등 대구·경북출신 인사들이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본지에 연재중인 '항일운동 현장을가다'참조). 1920년대 후반기엔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운동이 주류를 이뤘는데 진우연맹(진우연맹) 대구학생들의 비밀서클사건등이 대표적 항일투쟁이었다. 1930년대 이후에는 대구사범 대구상업 안동농림 학생들이 순수한 애족정신으로 일제에 항거했다는 것이다.

1919년 11월 10일 만주 길림성 파호문(파호문)에서 조직된 의열단(단장 김원봉)은 일제가가장 두려워 하던 항일단체였다. 투쟁방법은 일본요인등을상대로 한 테러였다. 의열단은 대구·경북출신이 가장 많이 가담했던 단체였다. 부단장 이종암(이종암)선생,김지섭(김지섭)의사등 일제가 밝혀낸 인사만도 30여명이나 됐다.

이시기의 의열투쟁으로는 1920년 9월 박재혁(박재혁)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파사건,김지섭의사(안동)의 1924년 1월3일 일본 이중교(이중교)폭파사건,1926년 12월나석주(나석주)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투척사건,1927년 10월 장진홍(장진홍-칠곡)의사의 조선은행(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등이 대표적이다.

1927년 2월15일 비타협적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신간회(신간회)가 설립된 후 같은해 6월 대구·경북에서는 김천지회가 처음으로 설립됐고 1929년7월까지 21개 지회가 세워져 3천4백여명의 회원이 가입,전국에서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학생들의 항일 비밀결사 운동은 1927년부터 싹텄다. 1928년 11월6일 대구고등보통학교 대구상업학교 대구농림학교교남학교학생 등이 민족의 독립정신을 키우려다 일본경찰에 발각돼 1백5명이 무더기 구속됐다.1930년 3월31일에는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연구회가 탄로나 37명이 구속됐고 1933년 12월 2일엔 대구농림학교의 적색학생 돌격대 결성이 발각돼 27명이 구속됐다.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7기생들은 1939년 7월21일 일인교사를 응징,학생 18명이 퇴학 또는 무기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7기및 8기생의 재학생과 졸업생이 중심이 된 이른바 '반딧불'회지 사건(대구사범 항일학생사건)으로 학생 학부형 졸업생등 3백여명이 검거돼 34명이 실형을 선고받아 복역중 5명이 옥사했다.

1943년 3월엔경북 울진군에서 일어난 비밀결사 창유계(창유계)사건으로모두 1백2명이 검거됐다. 경찰에서 조사 중 고문으로 6명,예심중 7명,복역중3명이 옥사하는 독립운동사상 찾아보기 힘든 참혹한 옥사로 기록됐다.1943년 5월 대구상업학교 학생들의 태극단사건으로 26명이 구속됐고 6명이실형선고를 받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2월 안동농림학교 학생 64명이 조선회복연구단과 명성회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이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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