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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B와 나, 전부의장 보보코프 회고록(2)-'스메르쉬' 첩보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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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는 비극이라고 할 만한 어떤 날이 있는 법이다. 그 날이 나에게도닥쳤다.44년 7월 13일 아침 5시경이다. 나는 볼쇼야 그리브나 마을 근처에서 아버지 부대를 만났다. 우리 연대는 전방에서 철수하기 위해 행군종대로 제2군용열차를 타러가고 있었고 아버지는 이웃 사단에서 연대 참모부 사령관의 참모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때는 내조국전쟁(히틀러 소련침공 전쟁)의 거의 막바지였고 붉은 군대가승기를 잡아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리브나 마을은 태양이 막 떠오르면서 뿜는 여명이 무척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6시쯤 되자 햇살은 주위의 모든 물체를 밝혀 주었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면 이곳에서 살아야겠어!"라며 이곳의 자연에 흡족해 하셨다.그러나 아버지는 결코 흔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꿈속에서 보았던 불길한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고 나는 아버지의 기분을 좋게 해드리기 위해 화제를 다른데로 돌렸다. 그리고 중대의 선두인 내 자리로 돌아갔다.2시간 뒤 우리연대는 독일군 복병과 부닥쳤다. 총격전이 시작됐고 행군은멈췄다. 정찰병으로 연대의 선두에 있던 나는 아버지가 걱정돼 그에게로 갔다. 거의 2백m를 갔을때쯤 숲에서부터 메소르슈미트전차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참모부 마차를 둘러보았는데그 옆에 아버지가 서 계셨다. 아버지는 나에게 손을 흔들면서 "조심해, 지금 우리 쪽으로 공격할거야"라고 소리쳤다.그리고 실제로 포진하더니 참모본부쪽으로 포를 발사했다. 하늘로 검은 연기가 치솟고 귀를 멀게하는 폭발음이 들리더니 파편이 튀었다. 나는 방금 아버지가 계시던 곳으로 뛰어갔고 뒤덮인 연기속에서 푹 팬 폭탄자리와 피를토하며 널브러진 말을 보았다. 아버지는 참호 도랑에서 비스듬히 누워계셨다. 아직 의식은 있었다. 아버지는 거의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내 다리가어떤지 좀 봐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다리쪽으로 눈을 돌렸다.대퇴부에 크게 벌어진 상처와 그곳에 박혀있는 커다란 파편조각을 보았다. 아직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힘들게힘들게 중얼거리며 "발이 온통…"

그런데 아버지는 고통으로 이를 악물면서 "깃발은 어디있니?"라고 물었다.그의 임무는 연대 깃발을 지키는것이었다. 나는 멀지 않은 곳에 찢어진 채로 장대끝에 매달려 땅에 박혀 있는 깃발을 찾아냈다.

그는 깃발을 짚고 일어나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곧 위생병이 달려왔고 아버지를 응급조치했다. 우리는 아버지를 의무대대로 옮겼으며 나는거기서 그들과 함께 아버지를 간호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연대를 따라가!"라고 작별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어나지 못하고 이튿날 사망했다.

복받친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 힘들었던 기근과 가난,약탈속에서도꿋꿋하던 아버지였다. 나는 온통굳은살이 박힌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오랫동안 울부짖었다. 다행인 것은 전화속에서도 아버지의 임종을 지킬수 있었다는것이다.

나는 그후 거의 1년을더 싸워야 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승전의 날을나는 만 19세 반의 나이에 쿠틀탄지야 근위대에서 맞았다. 나는 내조국전쟁에서 용맹 훈장 두개와 명예 3급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40여개의 파편이 몸둥아리를 벌집으로 만들고 늑막을 관통한 중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조국을 침략한 광폭한 나치를 물리쳤다는 자긍심이 무엇보다 크게 다가왔다.어제의 병사였던 우리 모두는 평상 생활로 돌아가야 했으며 직업도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나의 경우 직업을 선택할 필요가 없었다.

젊은 공산주의자였고 게다가 '전쟁 경험이 있는' 병사였던 나는 차후 국가안전기구에서 일하게 될'스메르쉬'학교에 보내졌다. 그래도 선택의 여지는있었던게 모스크바 학교냐, 레닌그라드학교냐 였다.

나는 레닌그라드를 선택했다. 모스크바에는 이미 가본 적이 있고 거기 병원에 입원한 경험이 있으며, 사실 조금이기는 하지만 도시를 구경한 바 있었지만, 레닌그라드에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45년 6월9일 나는 첩보특수기관의 레닌그라드 학교 '스메르쉬' 문턱을 넘게 됐다.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내가 학교 정원으로 들어 섰을때 개기일식이 시작됐고 주위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이것이 나에게 좋은 징조일까.우리 각자가 맡고 있던 일들은 매우 다양했으며, 종종 문학적인 기분을 느끼는 낭만적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수업이 시작되자 전혀 다른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완강하고 쉬지 않는 일상적인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 일은 총력, 주로 신중한 지적능력을 동원해야만 됐다.그 당시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이 기이한 약어 '스메르쉬'(SMERSH)가 무슨 의미인지를 궁금해했다. 그것을 풀어 쓰면 '스파이에게 죽음을'이란 의미가 되고 바로 스탈린 자신이 그 이름을 고안했다는 것이다. 젊은 우리에게이 단어는 낭만적인 어떤것을 연상시켜 주는 것처럼 보였다.우리는 이곳의 일들이 외부에는 전혀 모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외부에나갈때는 군복을 입었다. 가끔은 많은 학생들이 다양한 군복들, 공군,탱크병,보병들의 각종 제복을 입고 일렬 종대로 시내를 행군하기도 했다. 그러면"스파이들이 나가신다. 스파이들이 나가신다"면서 레닌그라드 꼬마들이 뒤따르면서 외쳤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에서의 수업 부담은 매우 컸지만 우리는 부지런히 공부했고 전쟁 중의첩보활동과 서류를 광범위하게 이용하면서 실습과 이론을 겸한 수업을 받았다.

특히 소련 후방에서 암약했던 파시스트 스파이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다.독일 스파이전문가들이 이들을 어떤 방법으로 우리 안방에 파견하게 됐는지,독일군에 의해 만들어진첩보학교와 수색 및 첩보기관에서 어떤일들이 이뤄졌는지를 자세히 검토했다. 물론 이와 더불어 독일의 스파이 전문기관이나유격학교, 군 참모부로 파견된 우리측의 첩보 작전도 연구했다. 여러해에 걸쳐 축적된 이 경험을 모두 소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 느낀 것이 첩보업무는 정말 신중하고 전문적인 준비를 요하는 일이라는 것이다.내가 처음으로 당의 결정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 사건이 터졌다. 당시 우리모두는 잡지 '레닌그라드'에 실린 알렉산드르 하짐의 시에 열중했었다. 또미하일 조쉔코의 기발한 경구와 안나 아흐마토바의 경탄할 만한 시구를 소리내어 외기도 했다. 그런데 1945년 8월 갑자기 이들 작가들의 작품이 게재되고 있던 '즈베즈다'와 '레닌그라드'의 비평란을 없앤다는 당 중앙위원회의결정사항이 발표된 것이다. 당시 나는 작가 인텔리 부류의 환영을 받으며 교분도 많이 쌓았었다. 나를 비롯해 우리 모두는 이것이 불공정한 처사라고 느꼈으나 아무도 표명할 수 없었다.

아마 이것이 내 생애에 있어 당의 공식적인 입장에 심각한 회의를 갖고 스스로가 해명할 수 없었던 최초의 경우로 기억된다. 그와 더불어 독자적으로사실을 평가하고 일어난사건들의 온갖 복잡함을 충분히 연구하도록 노력하고 독자적인 입장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처음으로 깨닫게 됐다.1946년 10월 나는 소위계급장을 달고 처음으로 모스크바 크렘린궁 인근에위치한 노란건물에 들어섰다. 이곳이 바로 내가 1991년 육군 장성의 호칭으로 퇴직하기까지 수많은 낮시간, 종종 밤까지 새웠던 숙명의 장소, 혁명의빛나는 칼이 번득이는 루비앙카(KGB 본부건물)였다.

드디어 스파이전선의 최일선에 투입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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