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개혁이끈 선조들의 슬기 실학(29)-연암 박지원(중)

연암 박지원이 활약한 18세기 후반은 격동의 19세기를 잉태하고 있었다.연암이 중국을 여행했던1780년은 청나라 건륭치세의 말엽이자 청조의 최전성기였다. 특히 청 고종건륭황제가 통치하던 18세기 중국은 당시 '세계 최대의 문화국가'였다. 그의 치세중에 중국은 대외적으로는 10차에 걸친 정복전쟁을 통해 사상 최대의 영토확장에 성공했다. 대내적으로는 상공업의 발달과 재정수입 증대에 힘입어 문화사업을 추진, 학문과 예술 각 방면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고 있었다. 이웃 일본도 쇄국정책을 펴면서도 포르투갈에이어 네덜란드를 통해 '난학'을 배우면서 명치유신의 기틀을 마련하고있었다.왜란과 호란을 거친 뒤 이처럼 동북아정세는 상대적 안정기에 접어들고있었다. 그러나 이 안정기는 잠시였고 광폭한 제국주의 시대를 준비하는 태풍전야였다. 그러면 당시 조선의 사정은 어떠했는가. 왜란과 호란을 거친 뒤영·정조치세하에서 문예가 부흥하는 등 국운은 일시 상승했다. 전란으로 황폐화되었던 경지가 개발되면서 감소되었던 인구도 증가했다. 농민및 수공업자들의 생산품이 상품으로 전화돼 화폐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상인자본 세력이점차 영향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양반세력은 전란 후유증으로 생긴 지도력의 공백을 메우지 못한채 퇴색한 지도이념인 '북벌론'과 '존주론'에 매달려 새로운 시대적 전망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연암과 담헌 홍대용,박제가·이덕무·유득공·이서구(북학 4대가) 등 이른바 '북학파'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실각한 남인 실학파인 성호학파와 달리 당시 집권실세인 노론 세력이었다. 북학파들은 서울에서 벼슬을살고있던 노론 집권층 자제들로 서울에서 출생·성장한 사람들이었다. 이 때문에 자연 관심의 대상도 도시 서민층과 소시민적 생활양식,상공업,화폐유통등에 집중되었다. 농업사회에서 상공업 사회로 이행하는 사회변동이 도시에서 보다 첨예하게 감촉되었던 탓이다.

한신대의 유봉학 교수는 "주자학과 명분론에 입각한 사회질서가 동요하면서 집권층 내부에서 주자주의적 의리지학을 반성하는 새로운 학문적 지향으로 북학론이 등장했다"며 북학사상 형성배경을 밝히고 있다. 덕성여대 김명호교수는 "북학운동은 연암의 '열하일기'가 기폭제가 됐으며 그의 제자인 초정 박제가의 '북학의' 등에 의해 세밀한 방법론이 제시되고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북학운동의 기폭제가 된 열하일기는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을까.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조선 사회의 낙후성을 타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은 벽돌 사용론. 그는 일반 주택뿐 아니라 성곽·난방시설 등에 이르기까지 중국처럼 벽돌을 널리 활용해 시설비용을 절감하고 능률적이며 영구적인 효과를도모하자고 주장하고 있다.('도강록') 연암은 또 열하일기중 '차제설'에서 수레통용론을 역설하고있다. 그는 당시 조선의산업발전을 저해하는 주요인을 상품 유통의 부진으로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수레를 전국적으로 통용하도록 하는 일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연암은 쇄국정책에 따른 종래의 극히 제한된 무역방식이 밀무역과 중간 상인의 폭리를 조장할 따름임을 지적하고 중국에 대한 적극 통상론을 펴고있다. 고려때나 당시의 일본처럼 중국과 적극적으로 통상한다면 국내산업을 촉진할 뿐 아니라 문명 수준의 향상과 국제 정세의 파악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다.('도강록' '성경잡지' '일신수필' '구외이문' '동란섭필') 이밖에도 연암은 우리측의 변경수비가 허술한 점과 사신들의 소극적인외교자세 때문에 청의 국정을 제대로 탐지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비판하고개선을 촉구하고 있다.('행재잡록' '구외이문' '동란섭필')열하일기중 연암의 북학사상이 집약적으로 표현된 것은 '허생전'이란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옥갑야화'편이다. '옥갑야화'는 당시 역관들의 밀무역에 의한 축재 등 중국무역에 관한 일화들로 이뤄진 서두부,허생이란 일개유생이 매점매석으로 번 거금으로 이상촌을 건설해 빈민을 구제한 이야기,그리고 어영대장 이완을 만난 허생이 북벌을 추진하던 당시 집권층의 무위무능을 추궁한 결말부로 구성돼있다.이 결말부가 연암 사상을 집약적으로 표출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특히 열하일기중 '동란섭필' '옥갑야화' '금료소초'등에 당시 일본에 대한내용이 소개돼있어 주목된다. '동란섭필'에는 일본이 중국 강남지방과 통상을 해 명나라 말기의 서화·서적·약재가 나가사키(장기)지방에 폭주하고 목홍공이란 한 일본 상인이 3만권의 책을 가지고 중국 명사들과 교류한다고 적고있다. '옥갑야화'는 허생이 무인도에 도적들을 모아 농사를 지어 남은 곡식을 큰 흉년이 든 나가사키에서 팔아 은 1백만량을 거둔 것으로 기록하고있다. 모두 통상장려를 주장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대해 강원대의 강동엽교수는 "청나라 여행체험을 쓴 글에 일본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것은 그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며 "단순한 국제무역항으로서 나가사키를 의식한 것이 아니라 그 힘의 결과도 예측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이상과 같이 제시한 연암의 북학론은 청조문물의 적극적 수용을 근간으로한 부국강병론이었다. 이와 관련 덕성여대 김명호교수는 "연암의 북학론은종래의 북벌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것"이라면서 "연암의 북학론에는 일정한한계와 진보성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조선의 낙후성을 사대부의책임으로 돌리고 사회개혁의 주체도 사대부로 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연암은 중국과의 적극적인 통상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 추진할 경우 반드시 요청되는 상인 계층이나 역관들의 능동적 역할을 거의 배려하지않고 위로부터의 개혁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사회제도나 관습상의모순도 간과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수레가 제대로 통용되려면 신분이 높은자와 마주쳐도 말에서 내리거나 도피하지 않아도 되도록 신분차별제도부터개혁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연암의 북학론은 청조 중국에 대한 탁월한 통찰과 실감나는 참신한 묘사에 의해 뒷받침돼 다른 북학론자의 주장보다 훨씬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다. 〈조영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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