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중국서적 약2천종 수집, 고종 '광무개혁'밑거름 활용

서울대 이태진교수(전 규장각관장)는 고종이 국왕의 개인 집무실겸 서재인'집옥재'를 정사의 중심지로 삼으면서 수집한 약2천종의 중국서적들을 '광무개혁'의 밑거름으로 활용했다고 주장했다.이교수는 규장각 집옥재 도서를 분석한 결과, 1876년 2월 조일수호조규 조인 이후 개화정책 수행이 불가피해진 상황에서 고종은 정보수집의 방편으로중국을 통한 서양 관련 신서적 구입에 열의를 쏟았고 이는 개항기 파란에 처했던 19세기 후반 한국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아울러이교수는 고종에 대한 종래의 부정적인 평가 대신 '동도서기'의 개화주의자로 재평가했다.

왕립도서관이었던 규장각내 중국도서(6천75종)중 장서인이 찍힌 3천4백44종이고 이중 집옥재도서는 1천9백24종으로 전체의 30%에 이른다. 이는 집옥재도서가 규장각도서중국본의 중심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고종이 서양관련 중국서적들을모으기 시작한 것은 집권 10년째인 1873년친정에 나서고,1881년 일본 중국에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등의 시찰단을 파견, 개화를 위한 정보수집에 들어가면서부터이다.

달라진 국제질서에 어떻게 조선을 편입시키느냐 고민하던 고종은 1875년 5월 운양호 사건이 일어나고 이듬해 2월에 일본과의 수호통상조규를 맺으면서'무관세'라는 불평등조약을 맺어버렸다. 이를 만회할 기회를 엿보던 고종은은밀히 자료를 수집,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동아시아에서는최초로 평등한 국제조약을 체결하는 성과를 올렸지만 내정은 임오군란, 갑신정변, 명성왕후시해등 위기로 이어졌다.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도고종은 경운궁을 심장부로 한 새로운 도시설계, 전기와 전차의 도입, 무기공장의 설립등 자주국가 유지를 위한 부국책에 박차를 가하면서 한편으로 집옥재를 중심으로 모은 서적들을 정리, 광무개혁의 밑거름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집옥재 도서는 고종의 정치사상과 정책의 기본자료로 중요성이 부각된다"는 이교수는 이 도서들을 분류하면 고종의 개화정책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열어줄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최미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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