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덕-8년만에 자립 성공한 김진대씨

도시에서 농촌으로 돌아와 억척같은 의지로 8년만에 자활보호자에서 부농의 꿈을 일군 40대가 있다.그 주인공은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에서 연간 5천7백여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는 김진대씨(46).

영덕군 지품면 도계리 산촌에서 가난한 농촌의 5남매중 셋째로 태어난 김씨의 삶은 말 그대로 역경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고향서 중학교를 마친 김씨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진학을 못하자, 부산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당시 18세이던 김씨는 술집심부름꾼, 버스차장을 하다 조금 모은 돈으로자갈치 시장에서 생선및 의류좌판을 하며 야간고교를 졸업한 다음 군에 입대했다.

제대후 고향서 한지공장에 손을 댔으나 실패했다. 김씨는 우연히 자연산송이를 채취하는 산을 임대, 풍족하게 돈을 만져보았지만 산주가 재계약을해주지 않아 이 꿈도 수포로 돌아갔다.

서울 형님집서 다시 도시생활을 시작한 김씨는 안테나공장서 일하던중 의지하던 형님이 사망하자, 부동산중개업에 뛰어들었다. 84년1월 37세에 고향아가씨인 최순복씨(40)와 결혼도 했다.

5평짜리 가게 한쪽에 칸막이를 해놓고 신혼생활을 한 김씨는 오락실, 다방운영, 버스회사배차직원등을 해보았으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지난 87년대도시 영세민 농촌이주계획이 나왔다. 김씨는 이때 자립융자금등 4백만원을쥐고 고향에 내려왔다.

그러나 천수답에 시작한 논농사를 냉해로 망치고 정부양곡을 받아먹어야했다. 김씨는 다음해 생활안정자금으로 한 양봉이 성공, 1천만원이란 큰 돈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후 89년 논 1천평과송이산 12㏊를 구입했으나 91년 밭 3천평에 재배한수박이 태풍 글래디스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시련을 겪었다.그러나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을 이기고 92년3월 영해면 연평리 농막으로이주, 과수원과 밭을 빌려 밤낮으로 일한 결과, 사과, 복숭아와 시설채소 작황이 좋아 3천만원의 소득을 올렸다. 하지만 이마저 부인 최씨의 신장수술을받는데 써버렸다.

93년 첫 담배농사가 대풍작을 거두고 비닐하우스에서 가꾼 시설채소가 비싸게 팔리면서 김씨는 94년 30평대지에 꿈에 그리던 내집을 지었다.김씨는 이제 논 6천평, 밭 4천4백평, 임야 2만6천평과 45마력트랙터까지갖춘 부농이 됐다.

〈영덕·정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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