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의 측근이 지도자에게 얼마나 강한 영향을 미쳤는지 누가 국가를 통치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심지어 스탈린에게조차도 그의측근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스탈린의 의지를 열성적으로 실행했던 지휘부는 항상 스탈린과함께 하는 측근들이었다.그들은 인민들의 생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던 일인숭배 창조에 적지 않은역할을 했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으며 또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1968년 KGB는일인숭배와 그 심각한 결과를 연구하기 위해 전권위원회를만들자고 제안했고 이 위원회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에서 설립됐다.이미 충분히 알려져 있는 스탈린의 죄악을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인숭배,독재와 그 결과로 나타난 폭정의 속성을 분석하는 것이었다.이때 이 위원회가 조사한 것 중에 아주 '진기한' 것이 있다.지하운동의 노혁명가이고 나중에 당기관의 거물급 인사가 된 AD 쮸루빠가얼마나 검소하고 결백했는가는 유명하다. 쮸루빠가 식량공급 인민위원으로재직하면서 나라의 모든 식량 배급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을때 정작 자신은기아에 허덕였다는 사실은 지금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강직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는지에 대한 것을 아는사람은 드물다. 그때 이즈베스티야지에서 일하던 쮸루빠의 아들 프세볼로드가 보여준 사본의 일부가 나에게 남아 있다.
"나는 마르크스-엥겔스 원칙에 따라 대외무역의 전권, 즉 유일한 통치권을수행하지만(그가 실질적으로 권한을 가졌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서기장스탈린은 끊임없이 나의 업무를 간섭하고 자기 노선을 강요한다. 따라서 그의 간섭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줄 것을 요청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나는 모든직위를 사임하겠다"
이 서류는 스탈린이 이미 충분한 세력을 결집한 1925년에 작성됐다. 당시스탈린의 독재성향을 감안할 때 그의 용기는 사실 죽음을 담보한 것이었으며정치국에 제출한 최후통첩이었다.
그러나 알려져 있는대로 쮸루빠는 자신의 직위중 어느 자리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1928년사망했다. 따라서 그의 요구가 충족됐다고 결론 내릴수 있다.
만일 이같이 스탈린의측근에서 쮸루빠와 같이 단호하고 원칙적인 입장을견지한 사람이 있었다면?
최초의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인 P·P·뽀스뜨이쉐프가 노볼쉐비키들의 체포와 대중 탄압에 저항하여 단호하게 맞섰다. 하지만 스탈린측근들은 그를 지지하지 않았고 침묵만 지켰다. 심지어 뽀스뜨이쉐프를 처벌해야 한다는 약삭빠른 아첨꾼까지 활개쳤다.
어떤 사람들이 지도자의 측근에 있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이 사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결정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같은 사실에 대한 정확한 분석은 드물었고 측근들의 횡포도 더욱 심해졌다.
스탈린 사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의 일인숭배를 폭로한 동시에 또다른 자신의 일인숭배를 형성해 갔다. 도대체 누가 그를 만들어 주었는가. 역시 측근들이다.'새로운 시대' 흐루시초프에게도 '권력구조의 보초자'들이 나타났다. 우크라이나에서부터도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 속속 모스크바로 모여 들었다. '영광스런 10년'의 팡파르가 울렸다.
그러는 사이 식량을 구입하기 위해 나라의 금이 유출되고 육류값이 폭등했다. '정체'의 기초가 쌓여간 것이다.
이때 지방 인사에 대한 불가침 규정이 정착되기 시작됐다. 지방 공산당과주 공산당, 그리고 공화국 중앙위원회 서기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위치를 강화시키고 지방의 영주처럼 수십년간 그 자리에 머물렀다.우리는 가능한 한 이들과 싸웠으나 지방 당국과 맞서서 성공한 사례는 드물었다. '손아귀에 놀아나던' 국가안전기구 국장은 체면이 땅에 떨어진 그때조차도 중앙에 보고하는 것을 주저했다.
유감스럽게도 '측근'이란 개념은 '전우'라는 포괄적인 말로 거의 포장됐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우란 무슨 말이라도 할 권리가 있는 전장의 동등한 구성원이다. 그는 지도자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상호견해가 독립성을 보존할 때 진정한 우정이 성립된다.오랜 전우관계가 지도자가 권좌에 오른 후 끝나버린다는데 비극이 있다.최고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전우관계가 측근으로 변했던 것이다.나는 브레즈네프 시대도 측근들의 횡포가 많았다고 확신한다.젊은 시절에 브레즈네프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브레즈네프가 공명심이 많기는 하지만 원칙적이며 사무적이며 공정한 사람이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브레즈네프가 당의 수뇌에 오른 초창기에도 지도자로서의 매력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사람에게 무슨일이 일어났겠는가. 물론 근본적으로 그의 공명심이 그를 망치게 했다.
한 일화가 있다. 브레즈네프 생일을 맞아 그에게 소연방 영웅칭호를 부여하자는 의견이 정치국에서 제기됐다. 전례가 없는 경우라 당연히 그의 거부가 예상됐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눈썹을 찌푸리고 책상을 주시한채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머리를 들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평생을 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복종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행동할것이다. 정치국이 결정한 그대로 행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명심은 서기장의 사리사욕에 찬 측근들이 부추긴 것이다.브레즈네프 자신은 천성적으로잔인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다. 측근들이 그의 잔인성을 형성해 갔다.
이러한 경향은 안드로뽀프에 대한 태도에 까지도 영향력을 미쳤다.나는 개인 숭배가 생겨날 수 있는 한 단면에 대해 언급했다. 문제는 생기는데 왜 새로운 지도자는 원인을 연구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개선코자 했던사람을 구습의 병폐속으로 몰아넣는가. 왜 무의식중에 생기는 모반의식을 모른채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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