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KGB와 나-대대적 조직개편 새체제 창출

1958년 KGB의장 세로프는 전격적으로 직위 해제돼 소비에트군의 중앙첩보국장에 임명됐다가 나중에 볼가강 유역의 전투지구 지휘부 참모로 발령받았다. 그는 육군대장이 된지 불과 2년만에 소장으로 강등됐다.이 사건의 기저에는 사리사욕에 찬 어두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 음모는 육군소장 미로노프가 교묘하게 꾸민 것이다. 미로노프는 전시에 육군으로 근무하다가 그후 브레즈네프시절 드네쁘르 뻬뜨롭스끄에서 일했다. 이그나찌예프가 KGB를 맡아 국가안전기구에 당 관료들이 대거 영입됐을때 헤르손주위원회 서기인 미로노프도 그 속에 끼어있었다. 그는 대령이란 직분으로군첩보부의 부국장으로 임명됐다. 미로노프는 자신의 외관에 매우 신경을 쓰면서 장군이 될 꿈을 키워나갔으며 세로프를 축출할 의도로 이미 당시부터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에서 얼마간 근무한후 그는 레닌그라드의 국장자리로 이동했고곧 소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행정국장으로 전보돼이미 모든 KGB를 그의 손아귀에 넣었다고 말할수 있었다.나는 중앙기구 업무관계로 미로노프가 레닌그라드에서 일할 때와 나중에중앙위원회로 옮겼을때 그와 많이 충돌했다. 모든 정황을 보건대 그는 결코권력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했으며 이는 그에 대한 불신을 불러일으켰다.미로노프는 과거의 탄압에 대해 세로프를 비난했는데 물론 이는 정당한 것이었지만 그가 이를 이기적 목적에 사용할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수 없었다.만일 미로노프가 일찍죽지 않았다면(그는 1964년 10월 유고슬라비아에서비행기 참사로 사망했다) 그는 KGB뿐만 아니라 당 조직내에서도 높은 자리를차지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세로프가 경질된후 KGB의장에 A·N·쉘레삔이 부임했다. 나는 이미 꼼소몰때부터 그를 알고 있었는데 그는 꼼소몰지도자로서 자신의 역량을 상당히잘 발휘하고 있었다. 그는 지적이고 유능했으며 당시 유명했던 역사 철학 문학 대학을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이 사람에게 제20차 당대회의결정에 따라 KGB업무를 재편하는 과업이 부과됐다.

그러나 쉘레삔의 심각한 실수는 그가 부임한 초기부터 국가안전기구의 간부들, 뭔가 비난받아야할 사람뿐만 아니라 예외없이 모두에게 보인 불신감이었다. 이는 곧 조직원들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쉘레삔은 신념있고 노련한 요원들을 제거하기에 급급했고 그 자리에 젊은 꼼소몰 출신 청년들을 불러들였다. 이들에게는 세상 경험도, 진지한 직업적 예비지식도 없었으며 어떤 사람은 그저 출세주의자로 치부될 정도였다. 나는 차후에 진정한 직업가가 된 몇명만을 거론할수 있다. 이들은레닌그라드 국장 B·T·슈빌로프,KGB 우크라이나 부의장 V·S·슬리렌꼬, 끼에프 국장 O·M·슈람꼬 등이다.쉘레삔의 두번째 오산은 그가 의장에 부임한 첫날부터 국가안전기구의 재편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때그는 매우 단호하고 정확하게 업무를 추진했다. 그는 어떤 학문적 권위나 노련한 직업주의에 의지하지 않고 마치 스스로가 모든 것을알고 있는 것처럼 확신에 차있었다. 그는 정열적으로 인사이동작업과 KGB 구조 개편에 착수했다.

나는 KGB 구조가 이상적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KGB 개편은보다 신중하게 시도될 필요가 있었다. 쉘레삔은 결국 KGB의 새로운 체제를만들었다. 세부적으로 경제, 이데올로기, 운송 등에 종사하던 하부조직이 모두 폐지되고 하나의 방첩 총국이 형성됐다. 이런 개편 자체는 합리적이었지만 충분한 사전준비없이 이뤄졌기 때문에 업무 수행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쉘레삔이 KGB 의장을 맡고 난뒤 모든 명령을 '위로부터' 수행하려 했던 점(최소한 활동초기에는 그러했다)은 그의 단점으로 지적할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아랫사람들에게 단호하고 원칙적이었지만 '권력의 상충부'와 관련된 일이라면 모든게 그 반대로 적용됐던 것이다. 쉘레삔도 개인적으로 꽤 복잡하고 모순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쉘레삔에 의해 수행된KGB 개편작업이후 나는 중앙방첩국의 부장이 됐다.나는 이 업무가 마음에 들었는데 끊임없이 사건의 중심부에서 정치활동을 감시하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의 맥박뛰는 소리를 실제로 느낄수 있었다.나는 자주 외국 언론인들과 만나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충분히 검토할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들로부터 정치 정보를 제공받았다.1961년4월12일 유리 알렉세예비치 가가린의 우주 비행이 있었다. 온 세계가 이 뉴스로 들끓었으며 모스크바에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환호의 열기에 젖어있었다. 사람이 지구 주위를 날아 우주에 가다니, 당연히 가가린이누구인지 궁금증이 더해갔다. 외국 특파원들은 가가린에 대한 정보를 얻기위해 외무부 등 소련 기관들을 들락거렸으나 별다른 도움을 얻지 못했다. 타스통신을 통해 전해진 가가린의 간단한 약력밖에 준비돼있는게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위험 부담을 떠안기로 하고 당시 군 방첩국장인 구시꼬프장군에게 갔다. 상황을 설명하니 그는 즉시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가가린의 증명사진을 내게 줬다. "그것을 이용할 수는 있지만 만일 당국에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주지 않은 것으로 하시오. 가가린은 소령으로 승진되었고 소령 계급의 사진만 내주라는 명령이 내려와있소"

몇시간뒤 가가린 대위의 사진은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그 사진이 어떻게 외국 특파원들의 손에 들어갔는지의 문제만 풀리지 않은채 남게 됐다. 어느 누구도 내가 외국 기자들에게 사진을 건네주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1961년 쉘레삔은 내게 중앙첩보국 부국장 자리를 제의했다. 당시 중앙첩보국은 O·M·그리바노프가 맡고 있었는데 그는 확고부동한 직업가였고 근면하며 게으름뱅이를 용서치 않는 사람이었다.

방첩 지도부에 있으면서 나는 많은 것을 경험했다. 방첩국에서의 업무는나의 시야를 현저하게 넓혀줬고 외국 대표들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나라의 정책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

때마침 이때 외국대사관의 '엄호 아래' 관광객으로 가장하고 우리나라의기밀을 탐지하던 외국 스파이들을 검거했다. 벤꼼스키 사건은 영국과 미국의첩보활동중에서 상당히 높은 직위에 있던 자들이 적발된 최초의 경우였다.벤꼼스키 대령은 소련군의 중앙첩보국 요원으로서 과학 및 기술분야의 국가위원회에서 요직을 맡아 일하고 있었다. 그는 군의 고위급 인사들과 좋은관계를 맺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그의 천부적 출세 심리를 이용해 그를 끌어들였다. 벤꼼스키는 자신의 업무에 대한 불만을 감추지 않았고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을 천재로 여기는 보통사람들에게 흔히 있는모습이었다. 조국에 대한 배신행위를 통해 그는 자신의 불만을 악으로 보상했던 것이다.

1961년10월 쉘레삔은 소련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가 됐고 곧 겸직으로소련방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거대한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고 이는 브레즈네프의 측근들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누구는 브레즈네프를 지지하고, 또 누구는 쉘레삔 편을 든다는 말들이 나왔다. 쉘레삔의 부정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력과 박식은 조국에 상당한 이익을 가져올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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